레드선 이후의 숲과 크라임신디케이트가 있는 지구의 어린 브루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둘이 만난다면의 이야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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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건물들로 빼곡한 도시 거리를 키 작은 아이가 저보다 한참은 커다란 어른의 손을 잡아끌며 걸어가고 있다. 칼은 난감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자신의 중절모를 뒤집어쓴 브루스의 작은 뒤통수를 보았다. 아이의 머리통의 전부가 칼의 모자 안에 폭 들어가 있었다. 저래서야, 투시력이라곤 없는 평범한 지구인인 브루스의 시야는 잴 것도 없이 새까말 게 뻔했다. 그런데도 브루스는 제법 단단한 힘으로 칼의 손을 잡고-아이의 작은 손으로는 칼의 손을 다 잡기에 버거웠는지 세 손가락만 모아 쥐고 있었지만- 앞장서서 사람들로 붐비는 길거리를 성큼성큼 걸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자신이 살던 도시라는 걸까. 속으로 작게 웃으면서 칼은 소용없을 줄을 알면서도 작은 등에 대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브루스.”
“안 말해줄 거야!”
도시의 소음이 가득한 거리 속에서도 브루스의 대답이 또렷하게 칼의 귀로 들어왔다. 고담으로 가자고 말한 후로 브루스는 줄곧 그 까닭에 대해서 함구하는 상태였다. 칼은 브루스가 자신이 난처해하는 것을 꽤나 즐거워한다는 걸 차츰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에 한숨을 쉬면서도 칼은 아이의 보잘 것 없는 힘에 순순히 이끌려주었다. 그러다 가끔씩 위험이 발생할 것 같을 때만 브루스를 자신의 쪽으로 조용히 끌어들일 뿐이었다.
브루스는 잡은 손을 타고 전해지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칼의 부름에 깜깜한 모자 아래서 히죽 웃었다. 요 며칠간 칼을 옆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칼은 사람과 마주하는 일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았다. 딱히 사람이 싫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억지로 아귀에 맞지 않는 일을 하듯 불편해보였다. 브루스가 칼에게 고담으로 가자 말한 데에는 네 가지 정도의 목적이 있었는데 그중하나는 칼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못해도 한 가지는 성공한 셈이었다.
가끔씩은 브루스의 의지대로 향하던 두 사람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칼이 브루스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단호하지만 아프지 않은 정도의 힘이었다. 그럴 때면 조금 전 브루스가 서있던 자리를 아슬아슬 하게 자전거 한 대가 달려지나가거나 손에 짐들을 잔뜩 들고 있는 행인이 바쁘게 “비켜요!”를 외치며 지나가던가 했다. 위험한 일이 사라지고 나면 칼은 다시 브루스가 자신을 이끌 게 내버려두었다. 브루스는 그럴 때마다 가슴 속이 이상하게 콕콕 찔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칼이 나빴어! 브루스가 속으로 단단하게 제 자신을 북돋았다. 그깟 초록색에 동그랗고 조그마한 음식에 영양이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다고 굳이, 기어코 자기에게 콩을 먹이려 드느냔 말이다. 브루스는 일부러 심술 맞은 표정을 짓고 툴툴거리면서 붙잡은 칼의 손가락을 더 꼭 쥐었다. 그러면 칼도 엄지손가락으로 브루스의 손을 좀 더 단단하게 마주 잡아주었다.
서로 마주앉은 자세로 칼과 브루스는 눈씨름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칼은 그저 브루스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볼 뿐이었고, 브루스만이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칼을 노려보고 있는 상태였다. 칼의 손에는 방금 전 브루스가 먹은 샐러드가 담겼던 플라스틱용기가 들려있었다. 그릇의 한구석에는 녹빛 콩알들이 옹기종기 숨어있었다. 얼마간의 대치상황 끝에 브루스가 시선을 픽 돌렸다.
“잘 먹었습니다.”
평소 잘 하지도 않는 인사말을 브루스가 큰 소리로 또박또박 외쳤다. 하지만 칼의 눈빛은 여전히 단호했다.
“브루스, 콩.”
“잘, 먹었습니다!”
브루스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만치로 달려 나가려 했다. 3일 전, 칼과 콩을 남긴 브루스는 이 좁은 선내에서 때 아닌 술래잡기를 한 일이 있었다. 빙글빙글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몇 번 뜀박질을 한 결과 칼은 이번만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니 이번에도 대충 칼과 몇 번 정도 우주선 안을 빙빙 돌고나면 칼이 포기해줄 거라고 브루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브루스의 몸이 튕겨져 나가기 무섭게 칼은 브루스를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브루스가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브루스는 칼이 이 일련의 동작을 한 팔로 하고 있다는 데 조금 약이 올랐다.
“밥 먹고 바로 뛰면 안 되지. 거기다 브루스, 아직 다 안 먹었잖니.”
“이상하다아- 칼. 내가 무슨 인사 하지 않았어?”
브루스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갸웃 움직였다. 칼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브루스. 저번에 네가 뭐라고 했었지?”
“몰라.”
“다음번에는 남기지 않고 다 먹겠다고 ‘약속’했지?”
칼이 굳이 ‘약속’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넣으며 고개를 픽픽 돌리는 브루스에게 말했다. 브루스는 순간 울컥 억울해져서 눈썹을 처량하게 휘면서 부당함을 호소했다.
“칼... 고작 콩 몇 개 안 먹는다고 안 죽는단 말이야.”
“브루스.”
하지만 칼은 그런 브루스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았다. 칼이 포크 위에 콩들을 싹싹 긁어 얹어 놓고서 브루스에게로 내밀었다. 파란 눈동자가 굳건하게 브루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다. 마치 안경너머에 있는 눈동자에 포획되는 것만 같아서 브루스는 눈알을 도륵도륵 굴렸다. 브루스는 억지를 쓸 때면 되도록 칼의 눈동자는 보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눈동자의 모습이란 색소의 색깔이나, 그 옅고 짙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일 텐데도 이상하게 칼의 눈동자는 투명하고 깊었다. 꼭 바다처럼. 글쎄, 아마 그가 외계인이기 때문에 그러리라 브루스는 생각했다. 브루스는 꾹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싫어, 콩 맛없단 말이야. “브루스.” 다시 한 번 더 채근하듯 칼이 브루스를 불렀다. 브루스는 마지못해 칼이 내민 포크를 입에 물었다. 동글동글한 콩알이 입안에 도르르 굴러들어왔다. 눈을 꾹 감은 채 한두 번 씹는 행세를 하곤 그대로 알갱이들을 꼴깍 삼켜버렸다.
“다음에는 더 꼭꼭 씹어 삼키렴. 그러다 체할라.”
브루스의 머리를 칼이 가볍게 퐁퐁 쓰다듬어주었다. 브루스는 우웩이라 말하는 표정으로 혀를 내밀어보였다.
“착하다.”
“언제는 못됐다면서.”
브루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후 하고 칼이 웃었다.
“가고 싶은 데 있니? 이제 브루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자꾸나.”
칼이 상냥하게 제안했다. 아하, 그러니까 ‘상’이란 말이지? 어차피 칼은 브루스가 요구하는 일은 거의 빠짐없이 들어주었으므로 대단한 특혜는 아니었다. 코흘리개 애를 어르는 듯한 얄팍한 구슬림에 브루스가 발로 자신 앞에 앉은 칼의 무릎을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어차피 꿈쩍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브루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칼의 손을 떼어놓을 만큼의 효과는 있었다.
“고담.”
칼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브루스가 말했다.
“고담으로 가.”
칼은 잠깐 놀란 듯 안경 너머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다정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로 가려진 시야에 도시의 풍경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브루스는 자신이 살고 있던 동네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심하게 북적이는 인파나 길거리의 냄새, 곳곳에 산재한 소음들, 잘 다듬어진 길과 그 길로 이어진 후미진 골목, 방금 지나간 잘 닦인 구둣발, 아래로 한정된 시야에 들어오는 길바닥 위에 누운 사람 이 모두가 브루스의 감각에 익은 풍경이었다. 새삼 확인 차 모자를 들어 시야를 넓히면 마천루의 외벽을 장식하는 음침한 가고일상이 보였다. 지금 막 신문과 간단한 스낵을 파는 가판대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브루스는 앞에 1면을 내보이며 진열된 신문들을 곁눈으로 훑어보았다. 앞으로 치러질 시장선거에 대한 이야기, 아니면 톱모델과 풋볼선수의 스캔들 따위가 새삼스럽지도 않게 장식되어 있었다. 도시는 이곳에 있었다. 그대로 무엇 하나 변한 것 없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브루스는 방금 지나친 건물을 기억하며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으면 목적지에 도착할지를 생각했다.
어느새 모자가 다시 브루스의 시야를 뒤덮었지만 브루스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다시 브루스를 칼이 잡아당겼다. 칼이 마주잡지 않은 손으로 브루스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빵빵 날카로운 경적소리와 함께 세찬 바람이 팽 하니 브루스를 훑고 지났다. 눈을 가리는 모자를 들어 올려 브루스는 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칼은 아무 말 없이 브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가 ‘괜찮니?’하고 묻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 브루스는 보통 대부분의 시간을 토마스와 지냈다. 토마스는 그 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브루스가 가장 믿고 있는 존재였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으며 몰래 동경하고 있는 손위형제였다. 그런 토마스였지만 브루스는 항상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또렷하게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머리가 기민하며 가끔은 엉뚱하고 또 또래보다 그리고 자신보다는 훨씬-가끔씩은 부모님보다도- 어른스럽다는 것만 알았다. 그는 제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아이가 아니었다. 브루스는 토마스가 크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 물린 듯 귀찮아하거나 그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될 때 정도 그 당연함을 거만하게 기꺼워하는 게 브루스가 본 토마스의 표현의 거의 전부였다.
브루스는 어느 날의 일을 떠올렸다. 브루스가 보다 어렸을 때 저택 뒤에 있는 정원에서 장난감 비행기를 가지고 놀다 묘목을 심기 위해 파두었던 구덩이에 발이 빠져 호되게 넘어졌던 일이 있었다. 브루스의 손에 들렸던 비행기는 선단의 프로펠러가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옷에 흙먼지가 잔뜩 묻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브루스의 무릎은 까져서 독하게 쓰라렸다. 브루스는 당황했고 아끼던 장난감은 망가져버렸으며 무릎은 아팠다. 브루스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몇 발치 떨어진 곳에서 토마스는 책을 읽고 있었다. 보통 토마스는 브루스의 요구에 잘 어울려주지 않았지만 브루스가 같이 놀자고 조른 끝에 브루스는 얌전히 놀고 자신은 그 옆에서 책을 읽겠노라며 타협한 결과였다. 탁,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하 하고 한숨소리가 들렸다. 브루스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고 토마스가 그 끝에 팔짱을 낀 채 브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음 좀 내지 마.”
토마스는 눈물이 도르르 떨어져 내리는 브루스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브루스의 울음을 ‘소음’이라고 토마스가 말하고 있었다. 브루스가 킁 하고 코를 삼켰다.
“약속 어겼으니까 나 들어간다.”
그리고 토마스는 미련 없이 저택으로 걸음을 옮겨버렸다. 얼마간 굵은 눈물을 툭툭 흘리던 브루스는 몸을 일으키고 절뚝절뚝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새로 깔아놓은 카펫에 흙먼지를 묻혔다며 화를 냈고 엄마는 기껏 사 입힌 옷이 그게 무슨 꼴이 나며 짜증을 냈다. 양말의 목이 젖을 정도로 피가 난 무릎을 치료받을 때는 알프레드의 차가운 눈초리를 견뎌야했다.
굳이 그 날만 아니더라도 토마스는 우는 일에 대해 쓸데없는 일이라 표현했다. 물론 그는 세상 남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에 대해서 쓸데없는 일이라 평했지만 특히 눈물과 같이 감정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더더욱 가차가 없었다. 브루스는 제 감정이 주저 없이 드러나는 아이였으므로 토마스가 그런 말을 할 때면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또 조금은 욱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토마스에게 반박을 했다.
“하지만 내가 울면, 엄마가 매를 조금 덜 아프게 때린단 말이야.”
“그건 네가 엄마보다 약해서 그렇지.”
토마스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강하면 그딴 걸로 호소할 필요도 없어.”
도대체 엄마보다 강하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나저나 엄마는 엄마일 텐데. 브루스는 그 날도 토마스가 참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브루스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그 밤에 보았던 토마스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날 본 토마스의 얼굴이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브루스가 간과했던 사실임을 알았다.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은 착각이 아니며 실제로 발생한 일이었고 또 꽤나 예견되었던 것임도 인정해야했다. 그리고 브루스 자신도 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했다. 단지 브루스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경찰서로 달려간다? 겨우 살아난 목숨이 다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브루스가 실천하기에는 가장 쉬운 선택지였으나 그게 브루스에게 좋은 일일지는 알 수 없었다. 고담 내에 있는 고아원 시설에 제 발로 걸어간다? 쉬이 상상이 가는 범위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브루스가 맞이할 미래에 고정적으로 자리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칼.
브루스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칼의 얼굴을 보다 다시 좌우를 대충 살핀 뒤 목적한 곳으로 걸어갔다. 사실 브루스가 생각하는 가장 최상의 선택지는 지금 브루스가 제 손에 붙잡고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가 과거를 뒤바꾸거나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미래를 보장해주기엔 더없이 제격이었다. 진짜로? 브루스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브루스는 칼을 100% 믿고만 있을 수 없었다. 브루스는 아직 그 골목길에서 들었던 칼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낯선 이의, 힘을 가진 이의 목소리였다. 다만 그럴 때면 곧이어 자기 앞에 앉아서 폴폴 눈물을 흘리던 칼의 얼굴이 따라와서 브루스는 혼란스러웠다.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토마스에게서 본 적도 없는 감정의 발로를 생판 남인 남자에게서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령 그게 연기라 해도 그럼 그는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무일푼의 성가신 꼬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진실의 단편을 보인 칼에 대해 브루스의 태도는 유해질 수밖에 없었다.
단지 그렇다고 그에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릴 만큼 브루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외계인이다. 그는 자신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어느 곳에 머무르는 이가 아니라고 했다. “태어난 곳은? 칼도 일단... 지금 여기 있으니까 태어난 거잖아. 그럼 거기는?” 브루스가 물었고 칼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칼은 브루스의 일은 예외로 하고 세상의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세상을 부유하는 칼이 과연 브루스를 위해 이 지구 위에 붙들려 줄까? 브루스는 종종 자신과 토마스의 양육비에 대해 투덜거리는 아빠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따금 무언가를 요구하는 저를 귀찮아하는 엄마를 보았다. 제 자식을 키우는 일도 그렇게 두 사람의 성인 어른-그것도 웨인의 재력을 가지고 있는-에게 골치 아픈 일이라면 칼과 같이 물질에 대해, 관여하는 것에 대해 어딘가 저어하는 인물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부담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의 성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칼은 자신을 잘 돌보아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브루스는 지금 이것이 단순히 일회성이기에 가능한 선행이지 한 인간의 평생, 아니 못해도 브루스가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한심하게도 브루스는 이제 칼이 좋아져버렸지만 그만큼 대비해야했다. 결국, 칼은 브루스의 곁을 떠날 테니까.
브루스는 칼을 이끌고 화려한 회전문을 지나 으리으리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브루스는 백화점 안내도를 확인한 뒤 다시 칼을 끌고 4층으로 향했다. 3층에서 4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디디는 브루스를 멈춰 세우며 칼이 말했다.
“브루스. 네 옷은 이쪽에-”
“나 아니야.”
브루스가 칼의 손을 이끌며 위로 올라가는 층계를 밟았다.
“칼이 입을 걸 살 거야.”
“뭐? 브루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자며.”
4층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기척이 보다 뜸해졌다. 브루스는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던 모자를 벗어 칼의 코트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칼은 보다 더 곤란해 하는 기색이 짙어져있었고 브루스는 그만큼 더 즐거워졌다.
“맞춤으로 하고 싶지만 지금 우리가 그런 가게에 들어갔다간 쫓겨날 거야.”
브루스가 양팔을 벌려 후드 티에 청바지 차림인 자신을 칼에게 선보이며 말했다. 브루스는 매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저긴 너무 촌스러워. 저긴 너무 튀고. 저긴, 오 세상에 지금 저거 세로줄 넣은 거야? 저 색에?! 저긴... 칼한텐 유치해. 아, 저기. 브루스의 눈에 꼭 들어오는 디자인의 옷들이 있는 매장이 보였다. 브루스는 주저 없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체구 좋은 손님이 가게 부스 쪽으로 향해오자 반색하던 직원의 표정은 이내 브루스와 칼의 행색을 보고 흐려졌다. 어딜 봐도 벌이가 될 법한 손님은 아니라고 점원은 판단한 모양이었다.
“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무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마치 일이 없으면 바로 돌아가 달라는 투로 점원이 둘을 훑어보며 인사했다. 직원의 등장에 당황한 듯 브루스가 붙잡고 있는 칼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브루스는 자신의 후드 앞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직원에게 팁으로 내밀었다. 제법 버젓한 금은방에서 다이아를 거래한 덕에 브루스가 내미는 지폐는 어디 흠 없이 깔끔했고 꽤 뻣뻣했다.
“천천히 구경하세요.”
점원이 금세 웃는 얼굴이 되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할 일 없는 떠돌이들에게 잠깐 장소를 빌려주겠다는 듯 한껏 인자한 얼굴이었다. 점원이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자 브루스가 진열된 상품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브루스, 너...”
칼이 나직이 브루스를 불렀다.
“설마 칼 내가 지갑 가져간 거 몰랐어?”
눈앞에 보이는 재킷과 칼을 대조해보면서 브루스가 물었다. 음, 저기 마네킹이 입고 있는 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근데 좀 더 차분한 거. 브루스가 다음 상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혀 몰랐단다.”
그런 브루스를 보며 폭 한숨을 쉬듯 칼이 답했다. 이리저리 말끔하게 진열된 옷가지들을 뒤적이던 브루스가 움직임을 뚝 멈추고 칼을 올려다보았다.
“전혀?”
“전혀.”
“정말?”
브루스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 있었다.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칼은 브루스가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알지 못해 당황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답해주었다.
“그래.”
브루스는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그 얼굴에 순간 칼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브루스는 대단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남의 물건을 가져간 일에 이렇게 즐거워하면 안 될 텐데. 칼은 뒤늦게 책망하듯 브루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헝클었다. 키득키득 브루스가 결국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난 칼은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어.”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것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되지.”
물론 브루스가 자기 지갑을 가져간 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칼은 일반론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려 칼의 말을 외면하는 시늉을 했다. 보통 칼은 주변에서 오는 위협이나 브루스의 행동에 대해 가볍게 저지하고는 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늘을 날고 주먹을 쥐어 석탄을 보석으로 바꿀 수 있고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고 시력과 청력이 뛰어난 칼 몰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브루스는 어쩔 수 없이 즐거웠다.
생각 외로 진지하게 물건을 살 생각인 듯한 둘의 모습에 점원이 다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브루스가 또 지폐 한 장을 건네자 점원은 브루스의 말에 따라 칼의 몸에 맞는 사이즈의 옷을 손수 찾아주었다. 그렇게 몇 번 매장 안을 왔다 갔다 하던 브루스가 칼의 코트를 뺏고 골라낸 옷들을 건네며 칼을 탈의실로 떠밀었다. 옷가지들을 안아든 칼이 우왕좌왕하는 얼굴로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브루스, 정말 꼭...”
“어차피 사두면 칼이니까 몇 년 입을 거 아니야. 다 입고 나와. 봐줄게.”
브루스가 칼을 탈의실에 밀어 넣었다. 끝까지 버티던 칼이 결국 어기적어기적 탈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기 전 브루스를 보며 칼이 단단히 말했다.
“어디 함부로 가면 안 된다.”
“알았으니까! 빨리!”
겨우야 문 뒤로 사라진 칼을 보며 브루스가 칼의 코트를 끌어안은 채 손을 털었다. 브루스는 이제 말쑥한 차림을 한 칼을 볼 수 있겠거니 싶어 뿌듯해졌다. 칼은 몸도 다부지고 키도 크니까, 잘하면 전에 영화에서 봤던 탐정처럼... 아니 잘하면 그보다 더 멋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담으로 온 목적 두 번째가 달성되는 셈이다.
우주선 안이나 브루스와 단 둘이 있을 때 칼은 필요한 경우 자기 힘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 외의 이런 세상 보통 일들에 대해서는 일반 사람들의 기준에 될 수 있는 데로 맞춰가려하는 편이기 때문에 칼의 몸집에 비해 조금 비좁은 듯도 보이는 탈의실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아까 매장 구석에 놓여있는 간의 의자와 그 위에 놓여있던 신문을 떠올리며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한 열 발짝 움직인 정도이니 이정도면 ‘함부로’ 어디 간 축에는 들지 않을 것 같았다. 브루스의 기억대로 의자 위에는 신문이 놓여있었다. 브루스가 신문을 잡고 자리에 앉으며 칼의 코트를 둥글게 말아 무릎위에 놓았다. 신문을 펼치면 잉크냄새가 폭 퍼져서 브루스는 코를 씰룩였다.
길에서 1면만 훑어본 신문들처럼 별 특이한 일은 보이지 않았다. 브루스는 팔랑 얇은 신문지를 넘기면서 이걸로 칼이 조금은 자신이 만들어낸 돈을 쓰는 데 익숙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그래서, 칼이 돈이 나가는 데 덜 거부감을 느끼게 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익숙해지게 되면 어쩌면... 어쩌면, 조금은 더 오래 칼과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따위를 덧붙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키지 않지만 목적 세 번째였다. 브루스는 문득 제 상반신을 거의 가리고 있는 신문이나 칼의 커다란 코트, 그리고 신문지를 잡고 있는 자기 손을 보았다. 자신은 한 없이 작다. 만약 브루스가 더 똑똑하거나 아니면 더 나이가 있었다면, 이렇게 무턱대고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브루스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가 없다. 온갖 가정을 떠올려봐야 소용이 없었고 주어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 마저도 변변치 않은 것들뿐이라 문제였지만. 그나마 브루스에게는 운이 좋게도 칼은 좋은 사람, 아니 좋은 외계인이었고 그게 브루스의 앞일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사고실험으로 시간을 낭비할 여유를 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기사의 제목들을 살피며 장을 넘기던 브루스는-지나간 장 구석에 크라임앨리의 가스관이 드디어 복구가 완료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손을 멈추었다. ‘웨인 엔터프라이즈, 아울즈 크로(Owl's Claws)의 경영진에 참가하다’ 아울즈 크로, 브루스는 낯익은 이름에 한 번 입 속으로 단어를 읊어보았다. 아울즈 크로는 고담 항구 쪽에 커다랗게 위치한 카지노의 이름이었다. 워낙 TV에서도 심심치 않게 커머셜이나 관련 뉴스들이 나왔기 때문에 어린 브루스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빠가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그 카지노의 프리미엄 입장권을 알아봐줄 수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던 게 기억났다.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어도 아빠가 쩔쩔매면서 이야기하던 곳이니 분명 어마어마한 곳이겠거니 브루스는 짐작했다. 지금 그곳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웨인 엔터프라이즈가 인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신문에서는 아울즈 크로를 고담에서 제일가는 도박장이라 소개하고 있었다. 불경기 속에서도 해가 저물지 않는 환락장이라고. 소년 CEO를 둔 기업이 보일 행보로는 가히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얘기하는 한편 이게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가에 대한 공허한 질문을 기자는 서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브루스의 관심은 토마스가 카지노를 사들였건 말았건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브루스는 전에 정말 드물게도 토마스가 직접 읽어준 동요를 떠올렸다. 마치 마더구스의 노래처럼 잠자리를 지키는 동요라기에는 오싹한 시를 토마스가 좀처럼 없는 기쁜 얼굴로 브루스에게 가르쳐주었다. 내용은 고담을 부엉이 법정이 지켜보고 있고, 그들의 말을 발설한 자는 탈론이 그 머리를 취하러 온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생각해?” 토마스가 상기된 얼굴로 브루스에게 물었었다. 브루스는 거의 처음 토마스가 제 또래처럼 흥분한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서 “멋진 거 같아.”하고 답해주었다.
지금 이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브루스는 탈론(Talon)과 아울즈 크로 두 단어를 나란히 놓아보았다. 그때 브루스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칼?”
신문에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면 칼보다 한참 왜소한 하지만 자세만은 그 못지않게 꼿꼿한 남자가 브루스 앞에 서있었다. 브루스는 잠시 숨 쉬는 것도 잊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브루스가 익히 알고 있는 집사가 언제고 깔끔한 차림으로 뻣뻣하게 서서 자리했다. 브루스는 불현듯 뒷짐을 지고 있는 알프레드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을까를 생각했다.
“토마스 주인님께서 걱정하십니다.”
여상한 말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브루스는 의식적으로 천천히 막힌 숨을 뱉어야했다. 머릿속에 차갑게 굳어들면서 귓가에 세 발의 총성이 메아리 쳤다. 탕! 탕! 탕! 네 형의 말을 들었어야지, 브루스. 싸늘하게 몸이 굳은 브루스는 자신을 향해 총을 쏜 집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런 브루스를 어디선가 불어온 따뜻한 바람이 재빠르게 감싸서 밖으로 데려나갔다.
브루스는 원래의 차림새가 된 칼과 백화점 라운지에 와있었다. 땅에 발을 디딘 브루스가 살짝 비틀거리자 칼이 조심스럽게 브루스를 벤치에 앉히며 시선을 맞춰왔다. 브루스가 품에 안긴 코트를 더 꼭 끌어안았다.
“브루스?”
두근, 쿵! 두근, 쿵! 아이의 심장이 매섭게 뛰었다. 브루스는 잠시 제 발끝만 보았다. 어린 아이의 작은 발이 보였다. 브루스는 앞으로 제게 있을 일 중 가장 실천하기 쉬운 길에 대해 생각했다. 설마 ‘집’에서 브루스에게 접촉해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애초에 지금까지의 일들이 이상한 거 아니었어? 언제까지 칼과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쨌거나 고담으로 굳이 온 네 번째의 목적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해졌다.
“칼.”
꽉 쥔 손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집에 가야 해.”
브루스의 귀가 제 말소리에 먹먹하게 막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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