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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선 숲과 크라임신디케이트 있는 지구 쪽 브루스 이야기
행성의 대기를 그으며 별똥별이 떨어진다. 밤이 찾아온 행성의 면에 위치한 대륙에 착륙한 우주선을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렇게 남자는 조용히 지구를 찾아온다. 그리고 처음부터 없었던 양 사라질 것이다.
오랜 시간 남자가 살아온 곳에서 점잖은 코트와 흔해빠진 양복, 촌스러운 안경 뒤에 잘 다듬어진 육신을 감춘 남자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세상은 남자에게 멋대로 죽음을 부여했고 그것이 그나마 영예로운 길이었다 평가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원색의 독재자만이 낙인처럼 남았고 남자는 저를 부를 이름을 잃었다. 소중한 장난감을 다루듯 남자의 손아래서 완벽을 꿈꾸던 세계가 자유를 찾고 제 색깔로 형형색색 빛이 났다. 남자는 그것을 퍽 순순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짧은 고개 인사로 남자를 잊은 세계에 작별을 고한 뒤 남자는 중력을 딛고 하늘 너머에 펼쳐진 우주로 부유했다. 그가 직접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그의 가족이 남겨준 지식이 이 지도 없는 여정을 위한 우주선을 주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남자가 이렇게 자기기만도 없이 온전하게 스스로만을 위해 무엇을 만든 것은 처음이었다. 기름때가 묻은 손을 보며 남자는 자신이 차라리 평범한 정비공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실력은 꽤 괜찮아서 적어도 배를 곯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암흑 물질의 인력을 끊고 별의 부스러기와 쪼개지고 다시 붙는 원자들의 흐름 사이를 오가며 남자는 존재하는 만큼이나 무의미해졌다. 무한에 맞닿은 우주 속에서 상하좌우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로 남자는 유배했다. 그리고 남자는 0과 1 사이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가능성의 틈바구니에 존재하는 노란 태양의 지구를 찾았다. 우주의 차원에 걸쳐 산재한 무한의 지구들을. 역시 기왕 돌아보려면 그나마 익숙한 것이 가늠하기에도 편했다.
지구는 다양하고 가지각각이었지만 그러는 동시에 많이도 닮아있었다. 예컨대 어디 하나 조용한 곳이 없다는 점이 그랬다. 남자는 무엇 하나 제 것이 없는 세계들을 상공에서 발끝 아래로 말없이 지켜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아래로 흘러가는 희와 비, 호와 오, 심지어 생과 사마저도 별스럽지 않았다. 그저 케케묵은 책에 쓰인 텍스트의 나열과도 같았다. 어떠한 판단도 책임도 없이 바라만 보는 세상에 대해 남자가 과오를 범할 일은 없었다. 그것으로 전부 괜찮다고 남자는 납득했고 홀연히 다음으로 떠나갔다.
극장이 있는 휘황찬란한 거리를 벗어나면 금방 음침한 사잇길이 나왔다. 남자의 망막에는 아직도 누추한 시골 농장을 집어삼킨 붉은 불길의 잔상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목재의 타는 냄새가 싸늘하게 식은 골목에서마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남자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은 온도를 띤 불꽃은 이미 농장주민 두 사람을 휩쓴 상태였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재의 잔상을 잊고자 남자는 어둠 속에서 몇 번 눈을 껌뻑였다.
얼마간의 여정을 통해 익숙해진 어느 도시의 골목으로 남자는 흘러들어왔다. 그것이 좋은가 나쁜가는 둘째로 다양한 지구들 속에서도 고담은 비교적 일관성이 있는 도시였다. 지구라는 행성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것이 남자의 여정에 있는 유일한 이정표였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 독특한 도시를 꼭 한 번은 눈여겨보는 것이 그가 다른 지구에 찾아든 또 다른 자신을 찾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그가 있던 곳에서 미치광이, 망령쯤으로 치부하던 이의 도시에 왜 이런 지대한 관심이 생겼는지는 이렇다 할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자신을 벌건 공간 안에서 두들겨 패던 그를 비웃고 싶었을 수도 있고, 지금에 와서는 그를 측은하게 생각하게 된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쨌건 남자는 그저 흘러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번 역시 그러했다.
차차 어둠 속에 시야가 잠잠해지더니 이번에는 진득한 피의 냄새가 남자의 주된 신경을 이끌었다. 남자는 지상의 약 2피트 떨어진 지점까지 내려왔다. 어둠에 적응한 남자의 눈에는 퍽 익숙한 레퍼토리가 펼쳐졌다. 지저분한 골목 위에 두 남녀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이제 흐름을 멈추고 웅덩이가 된 채로 고여서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여러 번 귀동냥으로 전해들은 적 있던 이야기 속 광경이 이번 지구에서는 생생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을 끈 것은 이미 숨이 멎은 부부가 아니었다. 남자의 감각이 틀리지 않다면 이번 지구에는 이 세상만의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두근, 두근. 미약하지만 분명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가느다란 호흡이 아직까지도 어린 신체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끈질기게 이어져갔다. 남자는 이제 땅에서 불과 0.5피트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토, 미?”
가물가물 이어지는 숨소리가 고유명사를 빚어냈다. 그것은 남자의 이름이 아니었다. 남자는 말없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후우(Who), 후우 하고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이제사 한창 싹을 틔우고 있을 아이의 생명은 퍽 질긴 모양인지 저 출혈량 속에서도 용케 명줄을 부여잡고 있었다.
인기척에 반응했던 소년은 간신히 눈을 굴린 후에야 남자가 자신이 찾는 이가 아님을 알았다. 힉 하고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아이의 작은 흉강 안이 흐릿하게나마 소란을 부리기 시작한 것을 들었다. 맥없이 땅 위에 놓여있던 아이의 하얀 손끝이 움찔하고 떨리다가 아주 약간 그 위치를 틀었다. 남자가 유추하건데 아이는 그나마 남자 쪽과 가깝게 뻗어진 손을 제 품으로 끌어당기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런 단순한 움직임조차 끝마칠 힘이 남아 있지 않아 미세한 진동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마저도 지금의 움직임으로 팔 근육으로 향하는 혈류량이 늘어난 탓에 어깻죽지 아래에 난 총상에서 울컥하니 피가 뱉어져 나오고 말았다. 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깎아가면서까지 아이는 낯선 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남자가 머릿속으로 계산하기를 지금 아이의 목숨을 가장 높은 확률로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정처 없는 이방인뿐이었다. 아이가 한껏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남자야말로 아이가 살 수 있는 유일하며, 현실적인 희망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찾는 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남자는 시력 좋은 눈으로 점차 그 빛이 명멸하는 아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오래된 전구에서 빛이 가시듯 아이의 목숨 또한 그러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목숨은 곧잘 별과 비유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아이의 목숨은 떠오르는가, 저무는가.
남자는 입 꼬리만 올려 웃었다.
“살고 싶지 않니?”
지나치게 친절한 목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반경이 커져가는 핏물 위에 내려앉았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아이의 시린 눈이 허공을 헤매듯 남자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삶.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아이의 손이 다시 움찔하고 떨렸다.
“살, 고...”
끝내지 못한 말이 바닥으로 퍼졌다. 아이의 가슴이 느리게 공기를 잃으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갔다. 아이의 눈동자에서 투명한 구체가 남자의 귀에만 닿을 마찰음을 내며 파랗게 질린 작은 뺨을 기어 내려갔다. 아이는 곧 의식을 잃는다. 남자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익명으로 남겨진 남자는 줄곧 허공을 맴돌았다. 세계의 어느 힘에도 매이지 않은 남자의 무게는 어디에서건 0으로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살아 있다. 그러니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지내온 세월에서 얼마 되지 않는 방랑이었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흐르듯 무수히 많은 별들을 지나쳐왔다. 문득 그것의 무게가 궁금해졌다.
그 날 남자는 아주 오랜만이 중력을 따라 발을 땅 위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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