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ll의 동명의 노래에서 시작된 글
민우가 막 자신의 방이 있는 층에 다다랐을 때의 일이었다. 한 방의 현관문이 급히 열리며 소란스런 언성이 터져 나왔다.
“—못 참아! 이제 끝내!”
“제발, 부탁이야! 가지마!”
“지긋지긋하다고! 이거 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쩡하니 뱉어져 나온 실랑이 속에는 섬세한 얼굴을 한 남자와 어여쁜 생김새의 한 여자가 있었다. 둘은 어느 동화 삽화에 그려졌을 듯한 미모였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영 아니었다. 여자는 분으로 얼굴이 새빨개져서 자신을 끈질기게 붙잡으려드는 남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가지마라와 놓아 달라는 싸움이 이어지다 기어코 여자는 남자를 떼어놓았다. 매몰차게 남자에게서 벗어난 여자는 신고 온 구두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한 손에 쥔 채 계단으로 걸어왔다. 그 광경을 본의 아니게 지켜본 민우는 그런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친구 분이었죠?”
여자는 아직까지 독기 서린 눈을 하고 민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굳어있던 민우는 조금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다 마치 채 못한 인사를 하듯 꾸벅 상체를 숙였다. 하지만 여자는 민우가 고개를 들기 전에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전해줘요.”
얼결에 내민 민우의 손 위로 떨어진 것은 반지였다. 민우는 어, 하고 실없는 소리를 뱉었다. 이걸로 엿 바꿔 먹으라는 건 아닐 테고… 민우는 갑자기 손 안에 놓인 귀금속이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민우가 당황하든 말든 여자는 그 길로 미련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 중간에 콩, 콩하고 여자가 자신의 구두를 바닥에 떨어트리는 소리가 났고 그 후 여자의 구두 굽 소리는 황급하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민우는 잠시 여자가 떠나간 뒤를 바라보다 천천히 남은 계단을 올랐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하혁의 얼굴은 눈물로 형편없이 지저분해져있었다. 하혁은 히끅히끅 콧물을 삼키며 여전히 굵은 눈물을 툭툭 떨어트리고 있었다. 민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볼일 없다 싶은 광경이었는데… 민우는 한쪽 어깨에 멘 크로스백의 끈을 정돈하며 하혁에게 다가갔다.
“야.”
민우는 무뚝뚝한 어조로 하혁을 불렀다. 울음으로 충혈 된 하혁의 눈이 민우를 올려다보았다. 민우는 그런 하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룸이 방음이 되면 얼마나 된다고 이 난리냐? 얼른 일어나.”
하혁은 잠시 내밀어진 민우의 손을 바라보다 마치 그에 매달리듯 내밀어진 민우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팔에 가해진 하혁의 무게에 민우의 몸이 기울었지만 민우는 다시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팔에 힘을 줘 자신보다 좀 더 키가 큰 하혁의 몸을 일으켰다. 민우의 팔에 달라붙어오는 하혁의 몸은 오한이라도 난 사람마냥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꽤 길게 잘 가고 있었잖아. 좀 더 신경써보지 그랬냐.”
이 이상 복도를 소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민우는 하혁에게 붙들린 채 할 수 없이 하혁의 방 안으로 같이 들어왔다. 뒤에서 띠로롱하고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했어!! 나도 많이 신경 썼다고!!”
하혁이 여전히 우는 얼굴로 소리 질렀다. 그 와중에도 하혁은 떨리는 손으로 민우의 팔을 계속 붙는 채였다. 민우는 하혁의 그런 행동이 발작과도 같은 것임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혁은 자신의 곁에 있던 사람이 없어진 것에 대한 불안을 근처의 누군가를 붙잡고 있는 걸로 달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민우는 지금 이런 하혁의 상태가 그나마도 양호한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왜 항상 나만 조심해야해? 사귀는 사이면 옆에 같이 있어달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넌 그 정도가 지나치잖아.”
“나도 알아! 그래서 조심 했어… 너도 알잖아. 나도 많이 노력했다고…”
하혁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와 동시에 힘이 빠진 듯 하혁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민우는 한숨을 목 안으로 삼켰다.
“…밥은 먹었냐?”
하혁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민우가 물었다. 하혁은 이제 민우의 오른쪽 다리에 엉겨 붙듯 매달려있었다. 하혁의 머리가 힘없이 도리질 쳤다. 민우가 몸을 숙여 하혁을 떼어 놓으려 하혁의 어깨에 손을 대자 하혁이 반사적으로 그런 민우의 손을 막았다.
“형님이 밥해주마. 좀 놔라.”
머리 위로 떨어진 민우의 말에 하혁이 고개를 들고 멀뚱히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의 말이 진짜인지 판단하듯 하혁은 민우의 눈동자를 한참 들여다보다 후에야 천천히 민우에게서 떨어졌다. 비록 그 뒤에도 하혁은 어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오리 마냥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끈질기게 민우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민우는 움직임에 제약이 없는 것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밥을 한 끼 먹고 나니 그래도 진정이 됐는지 하혁은 설거지를 했다. 물론 바로 옆에 민우가 하혁이 다 씻은 그릇을 받아 닦으면서 계속 이야기를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민우는 이것도 하혁의 큰 발전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 까지만 해도 불안증세가 시작된 하혁은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누군가에게 달라붙을 줄 밖에 모르는 갓난아기처럼 조금이라도 떨어지려하면 울다 발작을 하고는 했었으니까.
“냉장고에 있던 김치, 집에서 보내주신 거야?”
하혁이 건네는 밥그릇을 마른 행주로 닦으며 민우가 물었다. 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께서 담그신 거야?”
“응.”
“이야, 우리 엄만 요즘 김장하기 귀찮다고 사먹는데… 이러다 너네 아버지 새장가 드시는 거 아니야?”
민우가 마지막 그릇을 씻는 하혁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하혁은 대답 없이 씻은 그릇을 물로 헹구어 민우에게 건넸다. 민우가 그릇을 받아들어 닦고 있을 때 하혁이 한숨처럼 답했다.
“…하자 있는 다 큰 아들이 옆에 있는데 그런 50대 아저씨를 누가 데려가.”
민우는 하혁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민우는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그릇을 닦은 후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손이 비자마자 민우는 하혁의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이미 다 큰 아들인데 뭔 상관이야.”
하혁이 조금 불퉁해진 얼굴로 민우를 내려 보았다. 민우는 아직도 젖은 손을 닦지 않고 있는 하혁에게 싱크대 아래에 걸린 수건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옛날보다 많이 나아 졌어, 인마.”
하혁은 민우가 건넨 수건을 받아 지나치게 천천히 손을 닦았다. 그리고 약간 오물거리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야, 네가 있잖아.”
마치 혼잣말인 듯 던진 하혁의 말에 민우가 살짝 몸을 굳혔다. 그런 민우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혁은 민우에게로 다시 수건을 건넸다. 그래봤자 니놈 앞에 있던 건데 너가 걸면 안 되냐? 민우의 머릿속에 투덜거림이 떠올랐지만 어쩐지 민우는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어 빼앗듯 내밀어진 수건을 받아 다시 원래 있던 곳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하혁의 등을 때렸다.
“징그러, 새꺄.”
*** ***
평일 오전 10시. 카페는 그럭저럭 한산하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근처 대학교가 방학 중인 탓에도 그랬다. 이도 졸업식 시즌이 되면 정신없이 바쁘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평온한 상태다. 애먼 주방 도구들만 정리 하던 민우가 저도 모르게 소리 없이 큰 하품을 했다.
“오빠 피곤하세요?”
“어?”
막 민우가 입을 다물 때 옆에 있던 민지가 조르르 와 말을 걸었다. 아담한 키에 혈색 좋은 볼을 가진 그녀는 사근사근한 생김새처럼 붙임성이 좋았다.
“그냥, 어제 잠자리가 영 안 좋아서 설쳤다.”
“맞아! 그럴 때 있어요. 왜 팔을 어디다 두면 좀 더 편할까 같은 걸로 30분 고민하고요.”
“베개를 어따 두면 더 목이 편할까 난리피고?”
손뼉 치며 맞장구치는 민지에게 민우가 빙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에 민지는 고개까지 크게 끄덕이며 좋아라고 무어라 무어라 더 이야기했다. 잠이 든다는 건 알고 보면 참 신기한 거라는 둥, 왜 진짜 피곤한데 정작 잠은 불편해서 못 자냐는 둥 재잘거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민우는 즐겁게 대꾸했다. 원래 일이나 공부 중에 떠는 수다가 재밌는 건 언제고 같은 거 같았다.
민우가 선뜻 잠에 들지 못했던 건 잠자리가 불편했다거나 지나치게 피곤해서라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민우도 자신이 왜 잠을 설쳤는지 뚜렷하게 알 수 없어 그저 민지가 하는 말에 동의해주었다. 그러다 민우는 불현듯 아직 자신의 외투 주머니 안에 있는 하혁의 여자친구, 아니 전여자친구의 반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불안 증세가 시작된 하혁을 달래느라 반지를 건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음, 그거 때문이었나. 민우는 새삼 자신이 그렇게 섬세한 인간이었나 하고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던 중 딸랑하고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민우와 민지가 동시에 기계적으로 어서오세요하고 인사말을 던졌다. 상대적으로 계산대에 가까이 있던 민우가 주문을 받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러다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잠시 습하니 숨을 들이켰다.
“안녕하세요…”
“…안녕.”
다시금 인사를 건네는 민우에게 들어온 손님은 느릿하게 답했다. 겉옷에 겨울의 찬바람을 잔뜩 두른 채 나타난 손님은 단아하게 생긴 중년의 여성이었다. 같은 세대 사람들에 비해 늘씬하게 키가 큰 그녀는 조금 어색하게 민우와 눈을 마주했다.
“아, 저… 주문하시겠어요?”
“…카푸치노.”
“드시고 가실 건가요?”
“가지고 갈 거란다.”
조근조근한 말씨로 주문하는 그녀의 말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가격을 치렀다. 주문은 민지에게 맡기고 민우는 그저 멀뚱히 그녀 앞에 서 있었다. 한 몇 초간은 자신이 굳이 이 어색함을 견디며 그녀 앞에 서 있을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곧 그녀가 머뭇머뭇 입을 떼기 시작했다.
“하혁이 아빠한테 들었단다. 네가 여기서 일 한다고…”
“아, 그러셨어요? 외국에서는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한 일주일 전…”
여자는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고르는 듯 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둘의 침묵 사이로 기계에서 우유 거품을 만드는 소리가 차올랐다. 그러다 한 번 입술을 꾸욱 깨물었던 여자가 마침내 결심한 듯 이야기 했다.
“…하혁이는, 잘 지내니?”
여자는 민우와 얼굴을 마주할 때면 줄곧 물어온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민우에게 묻는 이야기는 언제나 한결 같았지만 그때마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도 역시 변한 게 없었다. 민우는 자신의 외투 주머니 안에 있는 반지를 잠시 떠올렸다. 사실, 민우 역시도 그런 하혁의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몇 되지 않았다.
“네. 잘 지내요.”
민우가 천천히 웃으며 답했다. 민우는 하혁의 엄마 앞에서 웃음 지을 때면 늘 자신의 얼굴 어딘가가 어색해지는 느낌이었다. 여자는 그런 민우의 말을 잠잠히 듣고 결국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민우의 말에 수긍한 건지 아니면 하혁이 괜찮다는 말을 자신에게도 되새기는 건지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주문하신 카푸치노 나왔습니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은 둘의 사이로 민지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민지는 웃으면서 여자에게 카푸치노가 담긴 컵을 내밀었고 여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잠시 컵홀더와 컵 사이의 금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녀는 문 쪽으로 자세를 틀며 느릿하게 민우에게 고갯짓을 했다.
“…늘, 고맙다. 건강히 지내고.”
“아뇨, 제가 뭘… 아주머니야말로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여자는 피슥 웃어 보인 후 단정한 걸음으로 가게 밖을 나갔다. 민우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굳어져 있던 어깨가 풀리는 것을 느끼고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는 분이셨어요?”
“아, 응. 예전에 이웃에 살던 분이셔.”
“우와. 엄청 우아한 분이라 놀랐어요! 키도 크시고… 혹시 모델이신 거예요?”
민지는 눈을 반짝이며 흥분한 듯 이야기 했다. 같은 여자인 눈에도 막 나간 여자는 고와보였는지 민지의 두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민우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부럽다. 저 분 자녀분들은 되게 예쁠 거 같아요.”
민지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오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런 민지의 말을 들으면서 민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민우는 하혁의 엄마가 나간 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하긴, 녀석도 얼굴하나는 말끔하니 잘 생겨먹었다. 민우는 다시 나오려는 한숨을 집어 삼켰다.
하혁과 민우가 초등학생이던 때 어느 오후의 일이었다. 민우는 학교에 돌아와 혼자 거실을 차지하며 할 일 없이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알림장에 써 놓은 숙제는 아직 하고 싶지 않았다. 민우는 길게 하품을 했다. 잠이 들려는지 머리가 무거워졌고 민우는 소파 위에 너부러졌다.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숙제를 해둬야 하는데… 그런 마음에도 없는 생각 따위를 했던 거 같다.
“—마!! 엄마!!”
잠깐 선잠이 들었던 민우를 깨운 것은 현관문 너머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한 아이의 찢어질 듯한 외침이었다. 민우는 멍한 얼굴로 누워있던 소파에서 고개를 들어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계속 아이의 절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겨우 잠에서 깬 민우는 간신히 그 목소리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혁의 목소리였다.
하혁의 목소리는 복도를 급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민우도 얼결에 몸을 일으켜 현관문 쪽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이지? 민우는 현관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현관문을 열어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밖을 보았다.
하혁은 어느덧 복도 끝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가있었다. 그리고 그런 하혁이 절박하게 달려가는 끝에는 이미 엘리베이터를 탄 하혁의 엄마가 보였다. 하혁의 엄마는 민우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주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있었다. 민우는 잠시 동안 자신이 어떤 광경을 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혁은 계속 엄마를 외치며 이미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다가 하혁은 자신의 발에 발이 걸려 꽝 소리가 나게 넘어지고 말았다. 그에 놀라 민우의 몸이 현관문 뒤에서 밖으로 나왔다. 계속 하혁의 비명소리로 시끄럽던 복도가 조용해졌다. 민우는 떠듬떠듬 뛰어 하혁이 넘어진 곳으로 다가갔다. 부축. 부축을 해야 할 거 같았다.
“…—야, 괜, 괜찮아?”
민우가 조심스럽게 넘어진 하혁에게로 몸을 숙이며 물었다. 하혁은 더러운 복도 바닥위에 몸을 동그랗게 한 채 엎어져 있었다. 하혁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하혁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갔던 민우는 왜인지 선뜻 그런 하혁의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민우는 계속 이렇게 서 있어야할지 아니면 몸을 낮춰야할지 조차 정하지 못해 한동안 하혁의 근처만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하혁에게서 끄윽끄윽하고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 엄마. 끅. 가, 지마. 엄마. 허엉, 엄마아—”
민우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하혁을 바라보며 이럴게 아니라 아저씨께 말씀드려야하는 건 아닌가 싶어져 복도 끝에 있는 하혁의 현관문과 하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하혁의 엄마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민우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선택지에서 제했다. 아, 잠깐. 지금 아저씨 집에 계실까? 민우가 머뭇머뭇 생각했다.
하혁의 입에서 더 이상 제대로 된 단어가 나오지 못하고 그저 비명 같은 울음소리만 뱉어져 나왔다. 민우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계실지 어떨지 몰라도 우선 아저씨를 불러오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민우가 발을 돌릴 때였다.
몸을 웅크려 울던 하혁이 갑자기 제대로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며 컥컥 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웩웩하고 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서럽던 울음소리는 마치 숨이 끊어지는 소리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민우는 놀라 하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혁의 얼굴은 토해낸 위액과 눈물, 콧물로 엉망이었다. 하혁은 계속 웩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민우가 그런 하혁의 등을 쓸었지만 하혁은 계속 끅끅 거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아주 갑자기 였다. 하혁의 몸이 마치 모든 끈이 끊어진 듯 푹 고꾸라졌다. 하혁은 더 이상 비명도 신음도 하지 않았고 복도는 무서울 만치 조용해졌다. 민우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창백한 얼굴로 쓰러진 하혁에게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간신히 민우가 자신의 입을 벌려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아저씨!! 아저씨!!”
자신이 낸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민우가 무릎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나 달음박질 했다. 제대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다. 그저 창백하게 식은 하혁의 얼굴에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하혁의 집 앞으로 달려간 민우는 초인종을 누를 정신도 없이 철로 된 현관문을 마구 두들겼다.
다행히 하혁의 아빠는 집에 있었다. 민우는 제대로 설명도 하지 못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잠시 뻗대다가 복도 끝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아들을 보곤 경악하며 달려갔다. 민우는 그 길로 힘이 빠져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렸고 그 후의 일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가슴이 계속 기분 나쁘게 쿵쾅거렸다.
*** ***
젠장, 정말 엿이라도 바꿔 먹었어야 했던 걸까? 민우는 간신히 눈을 뜨며 머리를 헝클었다. 민우의 머리 한켠에는 울다 쓰러진 어린 시절의 하혁의 얼굴이 마치 곤죽처럼 떠올랐다. 민우는 이상하게 속이 메스꺼운 듯 답답해졌다. 잘 피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던 담배를 주어 불을 붙여 한 모금 들이켜 보았지만 그 답답함이 이제 울렁거림으로 바뀌어 되레 기분이 더 나빠졌다. 민우는 바로 담배를 꺾어버렸다. 으. 민우는 신음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그 반지를 전해 달라 내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우는 뭔가 불합리하다 생각했다. 말마따나 민우는 그녀가 하혁의 여자친구라는 정도만 알았을 뿐 그녀의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남이었다. 그런 자신이 이 둘의 연애사정에 끝자락에나마 원치 않게 발을 담근 것만 같아 기분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반지를 하혁에게 내밀자니 그래도 극복해 보겠다고 다시 상담사를 찾아가기 시작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일을 알아보는 하혁의 모습이 안쓰러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자고 버리자니, 이게 과연 버려도 좋을 물건인지 민우는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아, 시벌. 알게 뭐야. 민우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어차피 하혁이 그걸 돌려받는다고 그가 그걸로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도 끽해야 엿이나 바꿔먹으면 잘 한 거겠지. 요 근래 잠자리가 뒤숭숭한 탓에 기분이 엿 같아서였을까? 민우는 유독 엿이라는 단어가 많이 생각난다고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길.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공공쓰레기통에 반지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던 민우는 결국 그 몹쓸 것을 버리지 못하고 버스에 오르고 말았다. 얼결에 다시 반지와 함께 카페에 출근한 민우는 카페 쓰레기통에다가 반지를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곧 마음을 접었다.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나온 쓰레기에 이 반지가 섞여 있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찝찝했다. 돌아가는 길. 돌아가는 길에는 꼭 버려야지. 민우는 혼자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다짐했다.
오늘따라 하루는 이상할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다. 마치 이번 겨울의 모든 시간들이 오늘 하루에 몰려든 것 같았다. 민우는 오늘 두 번 음료를 잘못 만들 뻔했고 세 번 쯤은 잘 씻어둔 컵을 다시 씻었으며 몇 번인가 엉뚱한 테이블을 닦았다. 다행히 신경이 한 곳에 쏠려 있어 멍한 민우의 상태를 빠르게 알아차린 민지가 그런 민우를 몇 번이고 지적해준 덕에 그럭저럭 무사히 하루를 넘길 수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어 사장이 가게에 출근하여 오늘 하루 일과가 끝난 민우는 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니폼으로 입은 앞치마를 물품 창고 한 귀퉁이에 있는 캐비닛 속에 잘 걸어두고 가방을 챙겨 사장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가게 밖을 나왔다. 가게 밖에는 약속처럼 그런 민우를 기다린 듯한 민지가 서 있었다. 민우가 습관처럼 가방끈을 다시 고쳐 매며 민지에게 다가갔다.
“기다린 거야?”
“어차피 둘 다 버스 타야 되잖아요.”
민지가 히히 웃어 보이며 답했다. 어지간히 붙임성 좋은 애라고 생각하며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음?”
다시 한 번 더 돌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반지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에 민지가 말을 걸어와 민우가 느리게 반응하며 되물었다.
“멍해 보여서요. 전에부터 잠도 잘 못 자신 거 같고…”
“아… 별로. 괜찮아. 오늘은 여러모로 고맙다.”
신경 쓰는 게 그렇게 티가 났었나? 민우가 뒷목을 살짝 긁으며 겸연쩍게 대꾸했다. 민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괜찮으시면 다행이구요하고 이야기 했다. 잠시 정신없이 찰랑이던 민지의 머리카락을 보다가 민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같은 여자면 뭔가 다른 해답이라도 있는가 싶어서였다.
“있잖냐, 그… 어떤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말이다.”
이야길 하면서도 민우는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단순히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한 민지에게 꺼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머뭇거렸다. 하지만 민지는 그런 민우를 올려다보며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 사람이 친구랑 헤어지게 됐는데 반지를 주면서 친구에게 돌려주라고 하면 도대체 그 반지를 어떻게 하면 되냐?”
어째 좀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어 민우는 다시 뒷목을 긁적였다.
“엑?! 친구 여자친구가 오빨 불러내서 반지 전해달라고 그런 거예요?!”
민지가 드물게 인상을 쓰며 민우에게 소리쳤다. 민우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불러낸 건 아니고… 어쩌다 둘이 헤어질 때 마주쳤거든.”
“헐. 그래도 그렇죠! 아니 뭔 생각으로 그걸 오빠한테 줬대요? 완전 민폐다.”
자신의 일 인양 얼굴까지 발개지며 민지는 성을 냈다. 역시 성별이 어쩌고 이전에 같은 사람인데 느끼는 건 다 같구나… 민우는 어쩐지 가뿐한 기분이었다. 아마 그쪽도 정신없는 중에 화는 나고, 반지는 버리고 싶고 하다가 마주치게 된 자신에게 떠넘기듯 버리고 간 것이리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좀 더 마음이 편해졌다.
“하하. 너 말 듣고 보니 그 쪽도 열 뻗쳐서 실수했나보다.”
“실수할게 따로 있지! 자기네 연애사로 남한테 그러는 게 어딨어요. 그 반지 버려요. 어차피 지들은 신경도 안 쓸걸요.”
“그래… 그래야겠다.”
민우가 피슥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민우를 보며 민지는 계속 분이 나는지 마구 꽁시랑 거렸다. 어째서였을까. 단지 누군가가 홧김에 저질렀을 일에 왜 그리도 못내 마음에 걸려했는지 민우는 자기 스스로가 의아했다. 어쩌면 자신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예민한 성격인걸지도 몰랐다.
“이제 한 달 좀 더 있으면 3월이네요.”
민지가 이야깃거리를 바꾸듯 누그러진 어조로 다시 말을 걸었다. 민우는 언뜻 이 추위도 곧 끝나는가 생각하며 그러게, 하고 말끝을 흐렸다.
“오빠는 알바 언제까지 해요?”
“음… 이제 슬슬 복학해서 남은 학기 채워야지 싶다. 너도 이번 방학만 생각하고 일하는 거야?”
곧 수강신청 기간이 오는 것을 떠올리며 민우가 물었다.
“…그, 네에…”
거진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만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게 스스로도 멋쩍었는지 민지가 목을 움츠리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방학 때만 일하는 사람 많으니까. 그만두기 전에 사장님께 미리 말씀 잘 드려놓으면 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민우가 길에 편의점을 보았다. 잠시 발이 멈춘 민우를 따라 민지도 멈추어 섰다. 민우가 민지를 보며 물었다.
“잠깐 들러도 괜찮아?”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요 며칠 이상한 답답함에 시달린 자신과 더불어 그래도 이별을 극복하려고 고군분투 중인 친구 놈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한 일이 없었던 거 같았다. 생각해보니 것도 큰 발전이군. 민우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둘이 만난 후 처음으로 자신과 반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등교 첫날부터 울음을 터뜨렸던 하혁을 떠올렸다.
하혁의 엄마가 집을 나온 후로 하혁은 오랜 상담기간을 거쳤고 그 덕에 남은 가족인 아빠가 같이 없다 해서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는 없어졌다. 하지만 그저 이웃에 사는 친구이던 민우는 그런 하혁의 분리 불안 증세 대상에 자신에 포함되는지는 알지 못한 터라 하혁을 남겨두고 당연히 자신의 반이 있는 3층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자신의 뒤에서 터진 커다란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어찌어찌 첫 학기부터 조퇴를 하게 된 뒤 겨우 진정한 하혁에게서 들은 울음을 터뜨렸던 이유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생각해보면 하혁이 실신을 했던 날 이후 민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줄기차게 하혁의 집을 찾아갔었다. 아마 어린 마음에 자신의 또래인 그가 죽음의 문턱을 밟고 왔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서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행인지 불행인지 하혁과 민우는 남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 같은 반이어서 둘은 어쩔 때는 가족보다도 서로와 같이 지내는 일이 많았다. 하혁의 아빠도 그런 하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우가 학원에 가게 되면 하혁도 같은 학원에 보내곤 했으니 말이다.
민우는 편의점 냉장 진열대에 있는 푸딩을 집었다. 어라, 이런 맛도 있었나? 뭔 차이지? 그러다 옆에 포장지가 다른 푸딩이 눈에 들어와 그도 집었다. 지난해 푸딩이 나왔다 했을 때 사먹고 좋아라 난리부르스를 추던 녀석이니 분명 좋아하겠지. 민우는 그 멀대같은 키로 자기 손바닥만 한 푸딩에 헤벌쭉 얼굴값 못하고 웃을 하혁이 떠올라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민지, 너 단거 좋아해?”
“예? 네? 네! 좋아해요…”
계속 민우 옆에 있던 민지가 갑자기 민우와 눈이 마주친 탓에 놀랐는지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했다. 음, 초콜릿 같은 게 무난하겠지?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몇 걸음 떨어진 진열대에서 세련된 포장의 초콜릿을 집었다. 그리고 계산을 한 뒤 밖을 나왔다. 확 하니 찬바람이 코끝을 때렸다.
“이거.”
맨 가방에 하혁에게 줄 푸딩을 쑤셔 넣은 뒤 민우가 민지에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민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도리질 했다.
“괘, 괜찮아요! 그냥 가는 길에 같이 들른 거뿐인데…”
“오늘 너 덕에 나 사고 안쳤잖아. 그거 보답으로 산거야.”
민우가 씩 하니 웃어보였다. 민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깜박이다 조심스레 두 손으로 초콜릿을 받았다. 추위 때문인지 귀 끝마저 발갛게 물든 민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고맙습니다아…”
“뭘. 내가 고마워서 산 건데.”
어느덧 정류장이었다. 카페 근처에도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정류장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그곳보다 좀 떨어진 쪽의 정류장에 오는 버스가 보다 돌아가지 않고 민우가 살고 있는 원룸 가까운 곳에 내려주었다. 무엇보다 그쪽 버스가 더 한적했다.
“민지 너 1학년이랬나? 이제 2학년 되고?”
사람은 결국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어떤 이유에서든 말을 더 하게 되는 걸까? 민우가 실없는 질문을 던졌다.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학년 더 올라가기 전에 여행도 가고 그러지. 방학 내내 알바는 좀 허무하지 않아?”
뭐, 요즘 우리 세대한테는 꿈같은 이야기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굳이 꿈같은 이야기를 주어삼기자면 조금이라도 어릴 때가 좋은 것이 분명했다. 민우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하지만 민지는 뭔가 말을 고르는지 조금 후에야 답을 했다.
“괜찮아요. 학교 홈페이지에서 알바 구하는 거 보고 바로 신청했거든요.”
“그래? 하긴. 나도 알바 구하려고 하면 그냥 후딱 구해버리는 게 마음은 편하더라.”
어딘가 좀 어긋난 답을 들을 것 같지만 민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는 방학을 기회로 돈을 모아두는 게 1순위 목표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 그게 아니라요…”
민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민지의 얼굴의 홍조가 점점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민우는 그제야 무언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저번 학기 때요… 친구랑 가게 갔다가 오빠를 봤어요.”
민지가 잠깐 민우와 눈을 마주했다가 무어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뒤에도 몇 번 찾아갔었는데… 그러니까…”
항상 발랄하던 민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자꾸 땅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민지의 상황을 봐줄 만큼 민우는 썩 괜찮은 상태가 되지 못했다. 가슴이 쾅쾅 북을 쳤다. 아담한 여자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길 보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녀의 온기에 마음이 저려 와서? 아니었다. 민우의 손끝이 더 이상 없을 정도로 차갑게 얼어버렸다. 이명이 들릴 정도로 머릿속이 멍하니 비어버렸다. 민우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숨을 잠깐 쉬지 않고 있었다.
결심을 한 듯 민지가 고개를 들어 올려 민우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민지도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 겨울보다도 차가운 침묵이 그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죄, 죄송해요.”
그런 둘 사이에 간신히 그 두꺼운 벽을 깬 것은 민지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민우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민지가 사과의 말을 간신히 내놓았다.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가 물속에서 정신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결국 민지는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죄송하다니, 뭐가? 왜? 민우의 머릿속에 감정 없는 의문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왜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지, 자신은 왜 그런 게 아니라 변명조차 꺼낼 수 없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 앞에서 이제 가늘게 떨기 시작하는 민지를 보니 민우는 그저 참을 수 없이 무서워졌다. 그만해. 그러지마…
민우는 간신히 침을 한 번 삼켰다. 목이, 너무 아팠다.
“…미안.”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말에 언제부터 가시가 생겼을까? 민우는 목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아파오기 시작해 이젠 말 한마디 뱉는 것 자체도 두려워졌다. 다만. 머릿속에 여전히 그나마 제대로 돌아가는 의식하나가 그녀가 이렇게 사과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했기에 민우는 겨우겨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좀, 그렇다.”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뱉은 말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도 민지는 계속 목을 숙인 채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우는 걸까? 민우의 머릿속에 물음이 떠올랐지만 민우는 곧 매몰차게 그 물음을 외면해버렸다. 그 질문에 답을 알았다간 자신이야 말로 정말 울어버릴 것 같았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다져진 길바닥이 유난히도 무르게 느껴졌다.
다시 침묵이 무섭게 내려오는 그들 사이로 다행히 버스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몸을 수그린 민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민우가 그것을 발견했다. 멀리서 보이는 버스의 번호가 민지가 타고 가던 버스와 같다는 것을 알고 민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리가 얼어버리지만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저 먼 곳으로 도망쳐버리고 심정이었던 차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작별을 고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민우는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속이 울렁거려 공원 화장실에서 몇 번인가 헛구역질을 뱉어내기도 했다. 손끝도, 발끝도, 머릿속도, 모든 것이 다 텅비어버린 것처럼 무감각했다. 그저 기분 나쁘게 펄떡이는 심장 하나가 선명했다.
외투 주머니에서는 휴대전화의 메시지 알림이 연이어 울리고 있었다. 민우는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게 하혁임을 알았다. 둘이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날이면 하혁은 꼬박꼬박 민우에게 연락을 취하곤 했으니까. 벌써 한참 전에 아르바이트가 끝났을 자신이 여태껏 단 한 단어도 답하지 않아서 계속 메시지를 날려대는 걸 테지.
민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꾹 감았다. 그만했으면 싶었다. 알림이 고막을 두드릴 때마다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한구석에 자리 잡던 무언가가 점점 선명해지며 두려움으로 떠올랐다. 욕지기가 나왔다. 민우는 외투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배터리를 빼버렸다. 이런 식으로 하혁의 연락을 무시하는 건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자신에게 보낸 문장을 보았다간 자신이 외면했던 어떤 일체를 바로 그 자리에서 마주해야만 할 것 같았다. 민우는 갑자기 가슴을 차고 올라오는 감정을 너무나 힘겹게 삼켜냈다.
그 후로도 더 오랫동안 민우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가슴마저 찬 공기에 얼어붙어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공원의 저 멀리서부터 어떤 익숙한 실루엣이 불안정한 움직임으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게 눈 끝에 걸려왔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이래서 좋지 않았다. 민우는 욕을 했다. 그리고 그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 민우는 빠르게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희미한 외침은 무시한 채로.
자신의 이름을 닮은 비명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달리던 민우는 공원 정문에서 바로 이어진 집을 빙 돌아서 가게 되었다. 하혁과 어차피 사는 곳이 같아 결국은 마주치게 될 인물이었지만 민우는 그저 지금 당장이 중요했다. 그러다가 원룸 입구의 턱에 걸터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늘 누군가의 뒤를 울며 쫓아가던 하혁의 모습만을 봐와서 그랬을까? 머리를 썼다 이야기하기에도 뭐한 일이지만 자신을 뒤쫓는 대신 먼저 집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하혁의 모습에 민우가 처음 생각한건 ‘새끼, 존나 약았어.’였다. 민우가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 어느새 하혁은 민우를 발견했는지 벌써 민우의 한쪽 팔을 잡고 있었다. 전에 몇 없이 온힘을 다해 뜀박질을 했던 게 의미가 바래버렸지만 민우는 그런 가타부타를 따지기 전에 자신의 팔을 잡는 하혁의 손을 떨쳐냈다.
“내가 빚졌냐? 그만 좀 잡지?”
“…무슨 일 있었어?”
민우는 억지로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만들어내며 하혁을 밀어냈지만 하혁은 오히려 그런 민우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물어왔다. 지금 누가 누구를 달랜다고? 민우는 자기 스스로에게 기가차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민우는 가방을 다시 단디 매며 빠른 걸음으로 원룸 입구로 걸어갔다. 하혁도 그런 민우의 걸음을 성큼성큼 따라잡았다. 숨이 막혔다.
빠르게 원룸 입구의 비밀번호를 누른 뒤 급하게 계단을 올랐다. 하혁은 그나마 한번 떨쳐진 민우에게 다시 손을 뻗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끈질기게 그의 뒤를 따르며 민우의 이름을 불러댔다. 민우가 혀를 찼다.
“아. 그래, 씨발. 이거 니꺼니까 니 멋대로 해.”
그러다 문득 민우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반지를 꺼내 불쑥 하혁의 코앞에 내밀었다. 그 와중에도 민우의 눈은 하혁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하혁과 헤어진 여자친구가 민우에게 반지를 떠넘겼던 바로 그 자리에서 민우는 자신보다 두 계단 아래에 있는 하혁에게 그 반지를 건넸다.
하혁은 자신의 눈앞에 주먹 쥐듯 내민 민우의 손에 들린 반지를 받아들고 잠시 이게 뭐지 하고 의아해하다 겨우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하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반지를 건넨 민우는 바로 자신의 방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잠깐… 야, 이민우. 민우야…”
자신의 손바닥 위에 반지를 멀뚱히 보다 하혁이 급하게 민우를 따라갔다. 그리고 머뭇머뭇 민우의 외투 소매를 잡았다. 별로 큰 힘도 아니었고 그저 조금 옷 섬유가 당겨지고 있구나 싶은 정도였다. 하지만 그 별거 아닌 힘이 지금 민우에게는 마치 자신을 옥죄어오는 듯 집요하게만 느껴졌다. 민우가 몸을 팩하니 돌려 하혁을 노려보았다.
“꺼져!! 나한테 들러붙지 말라고!!”
이제껏 살면서 민우는 처음으로 하혁에게 소리를 질렀다. 자신을 붙들려고 하는 하혁이 끔찍하게 느껴져서 내팽겨지듯 외쳤지만 그 순간 민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상하게도 기절한 어린 하혁의 얼굴이었다. 민우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은 후 소리 죽인 어투로 매우 천천히 다시 말을 했다.
“…나 좀 냅둬라. 부탁이다.”
마지막 말은 마치 한숨처럼 뱉으면서 민우가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띠로롱.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살면서 보고들은 세상의 이야기에는 사랑이니 우정이니 하는 주제들이 가득했다. 민우는 책을, 텔레비전을, 스크린을 보며 늘 가슴 한 구석에서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중요해진다는 게 정말 좋은 걸까? 그때 민우는 그런 자신을 자기 또래에 유행하는 중2병 뭐 그런 건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방바닥 위에 엎어진 민우는 나이 깨나먹고 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많은 생각들이 떠돌았지만 그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오늘이 금요일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일 아르바이트를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민우가 끄응 하고 짓씹은 한숨을 뱉었다.
불을 키지 않은 방 안은 까맣게 고요했다. 천장을 보고 누운 민우는 팔을 들어 어둡던 시야 위를 검게 덮어버렸다. 자신은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에게 미움 받고 싶거나 받아도 괜찮은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되도록 좋은 인상으로 평범하게 뒤탈 없이 웃고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인 게 좋았다. 그냥 두루두루 원만하게,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민우는 머리가 크기 시작하면서부터 몇 번이고 하혁에게서도 도망가고 싶던 자신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은 오랜 친구로서 지금까지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민우는 하혁과 자신이 친구로 지내올 수 있던 게 결국 자신이 그를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 사귀기에 까다로운 성정과 보통보다도 한참 심한 애착을 싫든 좋든 그 배경부터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이 남을 수 있었을까? 왜?
젠장. 알게 뭐야. 민우는 눈을 꾹 감아버렸다. 눈꺼풀 뒤로 작은 빛들이 떠다녔다. 그 빛들이 몇몇 얼굴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민우가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민우는 자신의 눈이, 아니 머리가? 아니면 가슴이 만들어내는 그 얼굴들이 누군지, 또 어떤 표정인지 알았다. 제발 그러지마. …울지 마.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이야.
코끝이 징 울리면서 눈을 가린 손등이 뜨겁다 차가워졌다. 민우는 아무소리도 내지 않으려 숨을 꾹꾹 삼켰다. 문득 방바닥에 내팽겨진 가방 안에 있을 하혁에게 주려 사왔던 푸딩이 깨졌을까하는 엉뚱한 질문이 떠올랐다. 그게, 깨지는 음식인가?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들었던 거 같다.
눈을 뜨니 용케 이 한겨울에 차가운 방바닥 위에서 잠이 들었었구나 싶었다. 외투하나 벗지 않았기 망정이지 아주 골로 갈 작정인가. 민우가 끙끙거리며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주변은 어두워 밤중인 듯했다.
시간. 휴대폰… 민우가 외투에서 휴대전화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자신이 배터리를 빼버렸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어둠에 눈이 익어 어느 정도 명암의 차로 구분되는 손끝으로 민우는 다시 배터리를 끼웠다. 로딩 화면이 지나가고 대기화면이 뜨자 민우는 화면 위에 커다랗게 떠오른 시간보다도 그 위에 뜬 메시지 표시와 부재중 전화표시에 먼저 눈이 갔다. 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녀석 얼굴은 해가 밝은 후에 보는 걸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얼결에 화풀이 하는 꼴이 되어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다시 주에 한 번 상담을 받기 시작한 하혁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아직 자정을 넘기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뭐 목이라도 축이게 사와야겠다 싶어 민우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는 길에 우선 방 안의 불을 켰다. 챙챙 소리를 내며 형광등이 깜빡이다 하얗게 방안을 밝혀왔다. 잠시 눈이 부셔 민우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현관문의 도어락을 해제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이 무언가에 부딪혀 민우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
“……”
뭔가 싶은 마음에 반사적으로 닫은 문을 다시 여니 이번에는 좀 더 문을 큰 폭으로 열 수 있었다. 그 틈새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자신의 방 문 앞 복도에 쪼그려 앉아있는 하혁과 눈이 마주쳤다. 민우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친 새끼.”
사실은 금방이라도 문을 닫고 걸어 잠그고 싶었지만 민우는 다리에 힘을 주고 그런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현관의 자동불이 꺼지고 민우의 등 뒤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방 불로 하혁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민우가 신경질적으로 자기 머리를 헝클었다.
“신고 안 당한 게 용하다. 퍼뜩 들어와, 궁상떨지 말고.”
형광등 빛 아래 본 하혁의 얼굴은 아니나 다를까 가관이었다. 민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비록 하혁은 혼이 난 아이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민우보다 큰 키로는 고개를 숙여봐야 언뜻이라도 얼굴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방바닥에 놓인 가방을 들어 안에 든 편의점 봉투를 꺼내 하혁에게 퉁명스레 내밀었다.
“푸딩이다.”
민우가 딱딱한 어조로 설명했다. 하혁은 멀뚱히 그런 민우의 손끝만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봉투를 받아들었다. 하혁이 봉투를 받아들자 그 길로 민우는 선 자리에 바로 털썩 주저앉았다. 잠잠히 민우를 바라보던 하혁이 따라서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드리웠다. 민우가 몇 번 목을 가다듬은 후 이야기했다.
“숟가락 봉투 안에 있다.”
하혁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 안 든 푸딩 두 개를 꺼내보았다. 하혁이 종류가 다른 두 개를 바라보다 그 중 하나와 일회용 스푼 하나를 민우에게 주었다. 평소라면 됐다고 했을 민우는 말없이 그걸 보다 손을 뻗어 푸딩을 받아들었다.
“…그게 좀 더 맛있어.”
살짝 수줍은 듯 하혁이 말을 붙였다. 민우는 인상을 쓰며 툴툴대듯 대꾸했다.
“내가 샀잖아.”
“그래…”
하혁은 숟가락질을 하면서도 몇 번이고 자기 앞에 앉은 민우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민우는 생의 원수를 만난 마냥 전투적으로 말캉한 푸딩을 떠먹었다. 그렇게 다 큰 남자 둘이 방바닥에 주저앉아 한 2분간 자신들 손바닥만 한 푸딩을 퍼먹었다.
“…있잖아.”
다시 이야기를 꺼낸 건 하혁이었다. 다 먹은 푸딩을 치우며 생각보다 괜찮은데 되게 쬐끄맣네 따위를 생각하던 민우가 살짝 움찔하고 하혁을 바라보았다.
“혹시… 누가 너 좋대?”
민우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 얼굴은 어떻게 알았냐 묻는 것도 같았고 혹은 잊고 싶은 사실이 되새겨져 곤혹스러운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은 그런 적 없다는 듯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민우가 답했다.
“좋다고 한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런 뜻으로 너한테 이야기 한 거잖아.”
너가 그걸 봤어? 민우는 괜히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시 민지의 얼굴이 어물어물 떠오르려해 민우는 잠깐 이를 악 물었다.
“난 있잖아…”
신중한 얼굴로 민우를 살펴보던 하혁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나만 세상에서 제일 겁쟁인 줄 알았었어. 아버지랑 같이 병원에 다니면서 나아지기는 했지만 혼자가 되면 어쩌나하고 계속 무서웠어.”
민우는 하혁의 아빠가 출장을 떠났던 때 자신과 같이 한 방에서 지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밤에 잠이 들기 전에 하혁이 이야기 했었다. 너랑 한 가족이면 좋겠다… 민우는 그 말을 듣고 얼어붙어서 결국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자는 척만 했던 자신도 같이 기억했다. 하혁이 잠들고 꽤 오랫동안 잠들 수 없어 잠을 설쳤지만 결국 자신도 잘 잤던 것처럼 꾸몄던 그 때가 갑자기 너무나도 생생히 떠올랐다.
“마음은 치료 한다고 낫는 게 아니라 괜찮아지는 거라고 그때 선생님이 말씀해주셔서 난 겁쟁이여도 하루하루 괜찮아지는 겁쟁이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었어.”
민우는 그에게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근데. 아, 너도 기억하지? 우리 중학교 첫 날에 조퇴했던 거.”
“응.”
“그땐… 너랑 영영 헤어질까봐 무서운 것도 있지만 슬프기도 했어. 괜찮다 생각했던 마음이 그렇게 간단히 움츠러들지는 몰랐으니까. 무섭고 슬퍼서 울었어.”
엉엉— 어린 시절 기억 한 구석에 깊이 박힌 듯 새겨진 울음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하혁의 것이었다. 민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때 네가 날 돌아보는 거야.”
하혁은 영원히 사라질 것 같던 작은 뒷모습이 다시 자신을 바라보던 것을 기억했다. 눈물로 시야는 엉망이었는데 이상하게 조금 큰 교복을 입은 민우의 얼굴이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왜였을까. 하혁은 그게 자신이 너무나 익숙하게 겪은 감정이라 더 쉽게 이해했던 것임을 알았다.
“…겁에 질려서.”
너가 왜 나 때문에 울어? 민우는 그 날의 자신이 제일 처음 떠올렸던 의문을 마주했다. 하혁이 자신과 떨어지게 된 탓에 울음을 터뜨린 건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때 민우는 애써 그 이유를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면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꼭 자신의 사소한 말, 행동 하나로 하혁을 죽인 범인이 될 것만 같았다.
“근데 그때는 내가 어려서… 다시 너한테 말해버린 거야. 너랑 떨어지기 싫어서 울었다고.”
민우는 그날 하혁과 챙피하게 손까지 잡아서 조퇴를 했다. 하혁을 우선 집에 바래다주고 자신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어서 집으로 가려는데 그런 자신을 하혁이 잡아챘다. 그리고 다시 울면서 자신에게 가지 말아 달라 애원하는 하혁을 보며 민우는 자신의 눈과 귀를 닫아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한 한 시간? 하혁은 울고 민우는 굳어져 있던 기괴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하혁이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민우는 초등학교 때의 하혁이 떠올라 그길로 하혁이 죽거나 할까봐 무서워 그런 하혁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왜 그리 울음이 나오던지…
“그럼…”
민우가 아픈 목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넌 알았어? 내가…”
자신은 어디가 잘못된 걸까? 나쁜 사람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민우는 뒤의 말을 찾지 못해 말끝을 흐리다 결국 말을 삼켜버렸다.
“…난 그래서 너 때문에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하혁은 조금 어긋난, 하지만 확실한 대답을 담은 대답을 던졌다. 민우는 이마를 손으로 집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날, 그 때, 그 일. 민우의 머릿속에 하나하나 자신에 대한 단서들이 떠올랐다.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미뤄두고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의 상처 하나 하나를.
“왜.”
민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왜, 말해주지 않았어?”
“알려주고 싶지 않았어.”
하혁이 두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손을 꾹 쥐었다.
“넌 평소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아픈 부분은 있는 거고… 그리고.”
하혁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아니, 나 때문이라서 말할 수 없었어.”
시간이 굳은 듯. 창백한 형광등만이 방안에 소란스러웠다. 민우는 가슴이 답답해서 한가득 숨을 들이마셔 보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하혁이 개어둔 이불 옆에 있는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민우에게 주었지만 민우는 받지 않았다. 민우가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럼 난 이제 뭘 어쩌면 되냐.”
하혁이 부러 밝은 어투로 이야기 했다.
“별거 없어. 그냥, 아 이렇구나하고 인정해주면 돼.”
민우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신음했다. 머뭇머뭇 하혁이 그런 민우에게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뭐가?”
“그냥, 다. 걱정 마.”
하혁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웃음이 조금 어색했지만 그래도 민우는 하혁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다해 웃어 보이고 있음을 알았다. 민우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푹 꺼트렸다. 다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자신의 아픔도, 누군가의 마음도 전부 다. 하지만 민우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민우가 대꾸했다.
“징그러, 새꺄.”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 2017.04.29 |
---|---|
사랑과 용기가 없어도 (0) | 2016.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