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의 철봉을 꼭 쥔 채 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삑-, 이번 정류소는-… 누군가 안내방송보다 빠르게 버저를 눌렀다. 힐끔 눈을 들어 어두운 창밖을 보니 정이 내려야하는 곳이다. 정은 가방을 고쳐 메며 뒷문으로 향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걸음걸이는 폭이 좁고 신중해진다. 얼마 후, 덜커덩 소리를 내며 지친 듯 달리던 버스가 멈추고 문을 열어 사람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정은 그 기세에 거의 휩쓸리듯 뱉어져 나온다. 누군가가 정의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다. 버스는 금방 저 만치로 떠나버린다. 눅눅한 밤공기를 마시다 폐가 뜨거워서 어제도, 그제도 내쉬었던 한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땀띠가 나려는 뒷목이 따갑다. 정이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걸었다.
말끔하게 포장된 신기할 것 없는 땅바닥을 보며 걸으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정은 뒤로 밀려나는 땅을 지켜보면서 마치 자신이 거대한 쳇바퀴를 굴리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뭐, 기왕 굴리는 거면 행성 급의 쳇바퀴인 게 굴릴 보람도 있겠지 싶어 정은 땅을 보고 웃었다. 그러다 발끝에 환한 불빛이 닿았다. 편의점이었다. 정은 뻔히 알면서도 편의점의 간판을 재차 확인했다.
딸랑, 방울 소리가 나고 조금 늦게 “어서 오세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아르바이트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정이 혼잣말처럼 답했다. 편의점의 한 벽면을 투명하게 속을 내보인 냉장고들이 채우고 있다. 정은 그 냉장고 하나씩 하나씩에 들어있는 상품들을 모두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이중 거의 대부분은 정은 입에 대본 일도 없는 것들이고, 앞으로도 구매할 의사가 없는 것들이다. 몇몇 상품들에는 기간이 정해진 1+1 따위의 이벤트가 붙어있다. 늘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사본 적 없는 음료도 보았다. 정은 그 옆, 옆, 옆에 있는 본래 사기로 마음에 먹었던 도수 3.5%짜리 술 한 캔을 겨우야 꺼낸다.
차가운 술 캔을 조심스럽게 계산대 위에 올려두면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바이트가 잠깐 정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내 그는 별 말 없이 바코드를 찍고, 기계 모니터에 표시된 가격을 친절하게 육성으로 읊어준다. 정이 그 만큼의 돈을 치르고, 봉투는 사양한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참으로 올바른 인사들이 오간다. 정은 편의점을 나오는 길에 자신이 무의식중 기계적으로 미소 짓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게 괜히 대견스럽다. 다시 종소리가 나고, 정은 빛에서 나와 다시 후덥한 길 위에 섰다. 그래도 손에 쥔 찬 술 캔 덕에 적잖이 마음이 찬다.
가방에 캔을 들여놓고 정은 다시 지구를 굴렸다. 사람들이 한가득 사는 동네인데도 이상하게 길이 영 밝지 않다. 고개를 들면 칙칙한 밤하늘도 고만고만하게 어둡다. 그러기를 얼마간, 어디선가 조금은 신선한 초록빛 바람이 불었다. 이 동네와 저 동네를 이어주는 산책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건강한 나뭇잎을 쓸고 지나며 밤보다도 어두운 산책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보통은 으스스하지만 요즘 같은 날씨에는 반갑다. 여기부터는 다른 동네라며 으르듯, 으스대듯 걸어진 간판도 오늘은 조금 관대한 마음으로 보았다. 주홍빛 가로등 하나가 입구 근방 한 귀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영토를 유일하게 밝히고 있었다. 아이들이 거의 놀지 않는 초라한 놀이터가 그 아래에 있다. 그네가 두 개, 별 기교 없는 미끄럼틀이 하나, 키 다른 철봉이 셋. 딱 이 뿐이었다. 어쩌면 내년쯤에는 운동기구들로 대체될지도 모르는 곳이다. 정은 불빛에 이끌리는 여름벌레처럼 바르게 가던 발걸음을 틀었다.
놀이터의 땅은 온통 잔디로 되어있었다. 이제 흙장난은 하지 않나? 정은 괜히 발끝으로 머리 짧은 풀들을 헝클었다. 잔디는 그만 좀 괴롭히라며 흥흥 풋내를 뱉었다. 정은 어색하게 낮은 그네에 앉았다. 불편했다. 정은 그네 아래로 뻗어진 자기 다리를 보았다. 이래서야 제대로 그네를 타려면 배 근육에 힘을 주고 다리를 들어서 타야할 판이다. 서서 타는 건, 아직도 조금 무섭고… 한참 엉덩이를 붙였다 뗐다, 무릎을 폈다 꺾었다 하던 정이 간신히 그럭저럭 불편함을 감수할만한 자세를 찾았다. 자라난다는 것은 이렇게 세상의 사물이 불편해지는 거였나? 하지만 그렇게 까지 자라지는 못했다며 정은 손을 들어 제 키를 가늠해보았다.
애먼 딴 짓은 이제 그만하자. 정이 다시 숨을 길게 뱉는다. 정은 아침에 눈을 뜨고부터 끈질기게 괴롭히던 사실 하나와 마주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정이 허벅지 위에 올려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몸체 옆 단추를 누르면 잠금 화면 위로 오늘의 날짜와 지금의 시각이 보인다. 이제 두 시간 정도 후면 내일이 된다. 언어의 분절성 덕분에 두 시간 뒤의 지금과 지금의 지금은 영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의미와 그와 이어진 다른 의미들이 가슴 위로 돌덩이처럼 내려앉아 심장이 이거 무겁다며 쿵, 쿵, 뛰었다. 정은 입술을 오므려 잘근잘근 씹어 물었다. 더운 공기 때문인지 손에 땀이 났다. 다시 뒷목이 가렵다. 정은 꺼진 잠금 화면을 다시 키고, 벌써 1분이 지난 시계를 보았다, 휴대폰의 잠금을 풀었다. 후우, 정은 또 한숨을 쉰다. 뻣뻣한 엄지가 전화 버튼을 누르고, 정은 눈을 질끈 감는다, 휴대폰이 처음 생긴 날부터 정해져있던 단축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단조로운 신호음이 매미소리처럼 어둑한 사위 속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정은 마른 침을 삼키며 빈손으로 주먹을 쥐락펴락하면서 귀 아픈 침묵 속을 기다렸다. 그리고,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또박또박 안내음성이 이어졌다. 정은 바로 전화를 내려놓으며 파하! 하고 숨을 위로 터뜨린다. 사진조차 없는 연결화면에 00:00하고 통화시간이 떠올랐지만 정은 그것을 보지 않고 꺼버렸다. 등에서 기분 나쁜 땀이 배어나왔다. 하지만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 아마 이 사이에도 성실한 시간은 바지런히 움직여서, 보다 내일에 가까워졌을 테다.
그럼, 이제 엄마는 몇 살이 된 거지? 정은 칙칙한 주황색 빛이 먼지처럼 떠있는 공중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잡히는 숫자가 또렷하지 못해서 정은 곧 제 나이로 셈을 바꾸었다. 열 살짜리 초가 두 개, 그리고 낱개로 몇몇 더. 흔히들 이야기하는 통계상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 늘어났다는 잘난 수명과 비교하자면 터무니없이 새파랬다. 새파란데, 정은 또 또 한숨을 쉰다, 이상하게 살아온 날이 아득하다. 앞으로의 삶을 꼽아보는 것이 조금 무서울 정도다. 엄마를 보며 방긋 웃던 아이가, 그 아이가 영영 사라진 뒤 정의 시간은 가차 없이 매섭다. 주인 잃은 시간은 정에게 너무 데면 해서 홀연하게 정을 놓고 떠났고 정은 그것을 붙잡겠답시고 정과 연이 없는 도시로 건너왔다. 그게 자란다는 거야, 끼걱- 정이 앉아있는 그네가 울었다. 성장통은 진즉에 낫은 다리가 불편했다.
오늘로 두 번째, 엄마의 생일에 축하를 하지 못했다. 아니, 정은 정정한다, 못한 게 한 삼분의 일(이분의 일) 안한 게 그 나머지쯤이라고 해야 옳겠다. 고작 2년도 안 되는 시간, 그 지독한 2년 남짓, 엄마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저 한두 다리 건너에서 들은 말들로 엄마가 잘 살고 있다는 사실만 안다. 이어지지 못한 신호음이 끝난 뒤면 정의 가슴에 사르르한 복통과도 같이 불안과 죄책감이 찾아들었다. 그럼에도 정은 조금 기쁘기까지 했다.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엄마는 화를 내고 있다고, 이제 와서 뭘 비틀고 틀어보아도 바뀌지 않을 어쩔 수 없는 것에 화를 내고 있다고 아직까지도 제 마음대로 생각할 수가 있었다. 정은 그렇게 멋대로 엄마와 잘못을 나눠가졌다. 그리고 그것이 드디어 정과 자신의 엄마가 서로 다른 사람으로서 유리되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정은 위액 같은 침을 삼킨다.
속이 쓰리다. 정은 가방 안에서 술을 꺼냈다. 아파서 뜨거운 속에는 이게 제일이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캔이 벌써 조금 미지근해진 것 같다.
“흐어엉.”
응? 물방울 맺힌 캔을 보던 정이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웬 아무개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비비며 코를 훌쩍이며 이쪽으로 걸어오던 아무개는 정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세 번 정도, 정과 아무개는 서로 눈만 껌뻑인다. 아무개는 반사적으로 살짝 뒤로 발을 뺀다. 아무개의 앞에는 밤보다도 어두컴컴한 산책로가 있고, 뒤에는 빼곡하게 들어선 주택가가 있다. 뒤는 숨이 막히고, 앞은 좀 무섭다. 아무개는 다시 코를 삼키며, 흐흠!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그는 도도도 빠른 걸음으로 미끄럼틀 아래의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일단 잘 걷는 모양새가 어디 다치거나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흑흑. 미끄럼틀 아래로 숨어든 아무개는 다시 멈춘 울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느린 바람을 타고 축축하고 짠 울음이 들려온다. 정은 아무개가 저에게 울음을 알리고 싶은 건지, 감추고 싶은 건지, 혹은 정이 떠나기를 바라는 것인지를 생각하다 그만 두었다. 대신에 딸칵, 정은 캔의 입구를 땄다. 토독, 토독. 술에 든 탄산이 파닥파닥 튀었다. 흐윽, 헝. 울음소리 또 하나. 정이 그에 따라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아주 천천히. 목구멍으로 오돌토돌 기포를 품은 액체가 미끄러진다.
그 날, 엄마의 울음도 이렇게 귀담아 듣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정은 한 때 엄마의 신(神)이었던 자신이 생각나 곤죽처럼 웃었다. 우리 정이는 바르고, 따뜻한 아이야. 엄마는 정이가 있어서- 허어엉, 흑. 엄마는 어떻게 울었더라. 바르지도 따뜻하지도 못한 평범한, 아니 실은 좀 많이 못난 속물로 큰 정을 보면서 엄마는 화를 냈었고 결국에는 울어버렸다. 왜 그러느냐고. 이름도 모르는 울음소리는 그냥 슬픔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엄마의 울음소리는 정의 죄명이었고, 목숨 값이었으며, 앞으로의 삶 그 자체라 무섭기 짝이 없었다. 저 눈물을 부정하면 엄마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될까, 저 눈물을 받아들이면 정은 정이 아닐 수 있을까? 엄마의 울음은 어른인 정에게 너무 아파서, 억울해서, 어찌할 도리를 몰라서 생판 모르는 남의 것보다도 쉽게 정의 삶에서 구석으로 내몰렸다. 정은 바쁘게 도망치던 그 때의 숨 가쁨을 생각하며 다시 술을 마신다. 왜 좀 더 빨리 울지 않았어요.(왜 좀 더 빨리 울리지 못했을까.) 정은 그 집의 작은 문을 닫고 나오며 귀를 틀어막은 채 외쳤다. 사람이 어떻게 신이 되느냐고.(엄마의 신이고 싶었어요.) 왜 엄마의 삶과 내 삶이 분리 되어 있지 못하느냐고.(그게 행복인줄 알았어요.) 그리고, 지금 정은 아무개의 울음을 듣고 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정은 바르르 입꼬리를 떨어 웃으며 술을 마셨다. 익명의 슬픔을 정은 덤덤하게, 오랫동안 들었다. 저 울음소리는 듣고 있어도 정을 치환하지 않는다. 슬픔을 슬픔이라 말할 수 있다,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고도. 서럽게, 간간히 욕도 섞인 울음을 들으며 정은 차오르는 기억, 마음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접어 원래의 깊은 자리에 담아둔다. 그리고 히끅히끅 이어지던 제 사연을 담은 울음도 끝을 찾고 점점 잦아들어간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만 났다. 정도 얼마 남지 않았던 술의 마지막 모금을 죄 마셔버렸다. 으흠흠.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났다. 정은 비좁은 그네에서 일어났다. 땅을 디딘 발이 아주 살짝 정의 마음과는 어긋나있어서 웃겼다. 정은 가방을 다시 메고, 빈 캔을 가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텅, 하고.
다 비운 캔이 밑바닥 어딘가로 내몰리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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