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장면이 있습니다. dceu에 엔드게임 뒷이야기를 엉성하게 섞어보았습니다. 기본 알피뱃에 숲뱃 등의 제 뱃른 성향이 묻어있습니다. ...아마도요?
먼지 낀 고요함이 가득한 작은 사각형 공간에서 짐은 남자와 마주하고 있다. 고담시경의 청장인 짐 고든은 직급 상 그가 직접 용의자 취조에 나서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보통 짐은 업무 수행에 마땅한 인원을 배치하여 전체적인 수사를 지휘하고 관련된 사안의 결재와 총책임을 맡고 있으며 덧붙여 배트맨과의 연락을 도맡고 있다. 이번 일에는 무려 자신이 범인이라며 스스로 나선 용의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이 그와 대면하여 조사를 진행하는 까닭은 이 사건에 물증은 물론 심증도 없을 뿐더러 허리를 곧게 펴서 반듯한 자세로 저를 마주하고 있는 자칭 용의자, 알프레드 페니워스가 너무나도 지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랬다. 벌써 2시간 가까이 좁은 취조실에서 처음에 나눴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단정한 모습을 한 웨인의 집사는 과연이라 해야 할지 청량한 향수 냄새가 묻은 질 좋은 양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짐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배인 땀내나 담뱃재에 찌든 냄새, 탄내와 흡사한 커피의 냄새가 묘하게 두드러지는 것만 같아 코를 씰룩이며 한숨을 삼켰다.
"시신도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보통의 수사는 사건에 대해 의심 가는 정황을 포착한 경찰이 용의자를 지목하고 그를 조사하여 진상을 파악하는 순서로 진행되지만 이번에는 역으로 용의자라는 인물이 먼저 경찰 쪽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한 의심을 덥석 물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그 다음에야 그에 맞는 증거가 있는지를 따져보는 식이었다. 경찰서 내로 오자마자 불쑥 "고든 청장님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를 꺼낸 알프레드는 무슨 일인지 의아해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짐에게 다짜고짜 이야기했다.
"제가 살해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짐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괜히 자신의 와이셔츠 주머니를 더듬었다. 담배 생각이 날 때면 저도 모르게 옷에 달린 주머니들을 두드려보는 습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규정 상 취조실 내에서는 금연이다. 쓰게 마른 입술을 축이며 짐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가 몇 장 들지 않아 얄팍한 파일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들면서 다시 말했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으면 뭔가 그럴싸한 근거를 말하세요."
"제가 웨인 주인님을 죽였습니다."
피곤이 묻어난 짐의 목소리와 달리 알프레드는 지치지도 않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차라리 여타의 범죄자들과 같았더라면 징계를 감수하고 멱살을 잡아 을러서라도 다른 이야기를 뽑아볼 법도 했지만 짐 본인조차도 어째서 자신이 이런 취조를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어쩌면 고담에 또 하나의 사이코패스가 탄생한 걸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서 미친놈이 하나둘 정도 늘어나는 거야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 차분하게 생긴 집사의 이면에 제 주인을 살해하고 그 사실을 통보한 뒤에 그와 관련된 증거를 찾지 못한 경찰이 사법체계에 따라 저를 놓아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을 보면서 즐기는 섬뜩한 광기가 돋아난 걸지도 모른다. 실제로 브루스 웨인이 실종된 지금 상황에서 그의 대리인인 알프레드를 기소하는 일은 분명 증거가 확보된다 해도 이래저래 잡음이 발생할 것임은 분명했다. 짐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했을 것이다. 그가 알프레드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짐은 골치가 아팠다.
짐이 아주 오래 전 고담시경에 들어온 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 출동했던 사건들 중에서 고담시민이라면 거의 모두가 안타까워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웨인부부가 누군가에 의해 총격을 당해 사망한 크라임 앨리에서의 사건이었다. 부부와 같이 있던 외아들, 브루스는 부모님의 죽음을 그야말로 코앞에서 목격하고 마치 끈이 떨어져버린 인형처럼 넋을 놓은 채 현장을 찾아온 경찰에게 제대로 말도 하지 않으며 그저 망연하게 부모님이 쓰러져 있던 자리만 보고 있었다. 그때 그런 그에게 달려온 것이 바로 알프레드였다. 알프레드를 보자 마음 붙일 곳이 생긴 건지 비로소 움직임을 보인 브루스는 자신을 찾은 창백한 얼굴이 된 집사를 한참 보다가 그의 품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 후로 줄곧 알프레드는 브루스 웨인을 그의 주인으로서, 피후견인으로서 돌보며 살아왔다. 그런 그가 브루스를 살해한다고?
한 달 하고 며칠 전 고담에서는 도시 전체를 타깃으로 한 조커의 대대적인 테러가 벌어졌었다. 섬뜩한 방송이 흘러가는 것으로 시작된 테러는 도시 내 전력 공급의 마비로도 모자라 조커를 따르는 갱들에 의한 온갖 반달리즘과 고담 이곳저곳에서 카운트다운을 세는 폭탄 등으로 깨지 않는 끔찍한 악몽과 같았다. 어디 한쪽에서 소동이 났다 싶어 달려가면 또 다른 한쪽에 있는 고담 주요 시설에서 폭탄이 터지는 일이 일어났다. 배트맨은 물론 최근에 결성된 저스티스 리그의 다른 히어로나 심지어 고담에 터를 잡은 뿌리 깊은 빌런들까지 나서서 사태를 수습에 참여했지만 사건이 끝나 며칠이 흐른 지금까지 고담의 기반시설은 전부 복구되지 못했고 사상자들의 집계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경찰서로는 쉼 없이 크고 작은 사건에 대한 도움 요청이 쏟아졌지만 복구 작업에 상당 인력이 투입된 터라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중에 모습을 감춘 것으로 알려진 브루스 웨인의 후견인이 자신이 그를 죽였다며 나타난 것이다. 겉보기야 반듯하니 정정하다고는 하나 웨인의 비극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험한 고담의 사건사고를 보고 겪으며 지내온 그도 젊지 않은 나이에 속에 아무런 고름이 없을 리 없었다. 짐은 경찰병원, 그리고 아캄에서 근무하는 정신과의에게 연락하여 알프레드의 상태를 자문했다. 결론은 정말 믿어지지 않았지만 알프레드가 기억에도, 사고에도 어떠한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페니워스 씨. 저는 도무지 당신이 웨인 씨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신 청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의아합니다.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곳은 고담입니다만..."
짐은 말을 끌며 힐끗 알프레드를 보았다. 집사는 중후한 디자인의 테가 둘러진 안경알 너머에서 동요하는 기색 없이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면서 짐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한 가지 답밖에는 도출할 수 없었다.
"브루스가 어떤 사건에 휘말린 겁니까?"
알프레드는 미동 없이 그저 눈만 깜빡였다.
"페니워스 씨,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말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겁니까? 주저하지 말고 말씀을 하세요. 협력이라면 얼마든지―"
"고든 청장님."
"네."
짐의 말을 끊으며 알프레드가 입을 열자 짐은 이번에야 말로라는 기대를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브루스 웨인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다시 집사의 입에서 고집스럽게 나온 말은 이전과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이야기였다. 짐은 무거운 숨을 끌면서 불편한 의자의 등받이에 푹 몸을 기대어 자신의 콧잔등을 주물렀다.
목적으로 했던 고담의 외곽에 위치한 보육원을 겸해서 청소년 쉼터로 운영되고 있는 시설에 도착한 알프레드는 차를 세웠다. 알프레드는 뒷좌석에서 잔뜩 사온 식료품들을 꺼내들다가 습관적으로 가지고온 신문의 1면 위에 난 기사 제목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고담의 대부호 실종, 범인은 집사?] 꼭 무슨 추리 소설의 제목과도 같은 문장이었다. 결국 어떠한 증거도, 심지어 혐의점조차도 찾아내지 못한 검사는 알프레드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경찰 측에서도 이렇다 할 증거가 없어 검사에게 파일을 보내는 것조차 주저했었지만 그만 말이 세어나가 언론에서 입방아를 찧는 바람에 벌어진 형식적인 절차와 같은 것이었다. 요 근래 고담에서는 정신없는 사건사고들이 가득했지만 거기다가 브루스 웨인의 실종에 이런 흥미로운 에피소드까지 딸려오자 고담의 언론사들은 거의 명절 분위기였다. 물론 사안이 사안인지라 어디서 일이 넘친다며 자랑은 못하고 다닐 테지만, 어떤 사건을 추적하고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지 크게 고민하지 않고도 기사를 쓸 수 있는 나날에 그들이 나름의 호재를 맞이한 것은 분명했다. 비록 불기소가 되었지만 언론들은 그들이 가진 온갖 상상력과 배경지식을 동원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당장 웨인의 대리를 맡은 인물이 브루스의 후견인인 알프레드밖에 없어서 여러 파장들을 고려하여 검사는 물론이고 '그' 짐 고든마저도 이번 사건에서 한발 물러난 것 아니냐는 의심 어린 눈초리를 세우는 정석적인 추론도 빼놓지 않았다. 한 가지 알프레드에게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그가 군복무 시절부터 비롯해서 웨인, 나아가 브루스와 배트맨의 집사로 일하기까지의 경험들이 그를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게 만들어서 알프레드가 언론들과 직접 마주하는 일은 전무했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들쑤신 벌집에서 튀어나온 벌떼처럼 소란스럽지만 웨인 기업은 지금 고담 복구사업에 자금을 융통하고 있으며, 제대로 매뉴얼을 갖춘 기업이라면 CEO가 한 사람 사라진 것 정도야 당장 주가에 타격은 있을지언정 상황이 안정된 후에는 분명 타개해나갈 수 있을 테니 시간만 지나면 곧 잠잠해질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이런 소동이 길게 가지 않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보다도 알프레드는 자백만으로는 기소조차 되지 않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탁, 차 문을 닫고 품에 한 아름 짐을 안아 올린 알프레드는 담장에 난 정문을 몸으로 힘겹게 열며 뜰 안으로 들어서려했다. 철로 된 문에서 덜커덕 거리는 소리가 나자 텃밭을 가꾸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루시우스!"
안으로 들어오려는 알프레드를 발견한 남자는 급하게 문을 열어주면서 알프레드로부터 짐을 하나 받아냈다. 부숭부숭하게 자란 수염이나 정돈하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덥수룩했지만 그런 모양새가 포근하고 자연스러워서 어딘가 청초해 보이는 남자는 알프레드에게 반가움을 표하듯 놀라움에 커졌던 눈을 휘어 티 없는 웃음을 그렸다. 알프레드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맞이한 그는 알프레드를 '루시우스 폭스'라고 알고 있다.
"오랜만이에요. 많이 바빴어요?"
"예, 조금... 지금은 괜찮습니다."
알프레드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남자에게 알프레드는 빙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알프레드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그럼에도 잠시 알프레드를 말없이 보고 있다가 조금 걱정스럽게 말했다.
"피곤한데 무리해서 온 거 아니에요?"
그저 한동안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뿐인데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걸까. 남자에게 말을 들은 후에 알프레드는 문득 피로감에 뻑뻑한 자신의 눈동자를 인식했다. 시큰한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알프레드는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남자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당신이 걱정 되는데요. 그동안 밥은 제대로 해 드셨습니까?"
"이제 밥 정도는 차려 먹을 수 있어요!"
코흘리개 아이가 아니니까요! 귓바퀴를 발갛게 물들이며 남자는 비명처럼 항변한다. 일전에 채소는 잘 씻어 드시라는 알프레드의 말에 식기세제로 양상추를 씻는 남자를 보고나서 알프레드는 남자에게 요리에 대한 기초적인 사항들을 손수 수첩에 적어 건네주었다. 그 후에도 몇 번씩 알프레드는 생각이 날 때마다 어린 아이에게 물어보듯 또 세제로 음식을 씻은 거 아니지요, 흰자는 다 팬에 붙여놓고 탄 계란프라이에서 노른자만 떼어 드신 것은 아니지요 하고 물었고 그런 알프레드에게 남자는 조금 약이 올라 있었다. 알프레드가 흐음 하고 되묻듯 코를 울리자 남자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이야기했다.
"도라도 이제 내가 밥을 한다고 해서 다짜고짜 시리얼을 찾지 않는단 말이에요. 샘도 먹을 만하다고 했고요."
"그럼 제가 저녁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알프레드의 말에 남자는 윽 하고 입술을 질근 씹었다. 물론 샘은 먹을 만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다만 젖살이 통통한 아이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감정이 쏙 빠져 있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는 게 문제지. 남자는 고개를 휙 돌리면서 입안에서 굴리듯이 꿍얼꿍얼 대꾸했다.
"...저녁 만드는 거 도와주세요."
"그렇게 하죠."
실상으로는 자신이 주된 요리를 만들고 남자가 거드는 모양새겠지만 알프레드는 적절한 정도에서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 안까지 걸어 들어가 짐을 내려놓은 뒤 한들한들 웃는 얼굴로 돌아온 남자는 알프레드와 함께 식료품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루시우스도 같이 먹을 거죠?"
"네."
알프레드의 대답에 남자는 다시 생긋 웃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꾸 웃어서 그런 건지 남자의 머리카락에 섞여있는 흰머리가 그의 나이를 짐작해주고 있었지만 남자는 어딘가 어려 보였다. 어쩌면 알프레드가 남자보다 나이가 더 많아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뿐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렇다기에 남자는 알프레드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어리게 느껴졌다. 알프레드는 찬장에 통조림을 진열하고 있는 남자를 문득 불렀다.
"매치스 씨."
"네?"
"...아닙니다."
남자를 알프레드는 '매치스 말론'이라고 부른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저스티스 리그라고 부르는 일종의 히어로 집단이 생긴 후로 브루스의 정서는 그 전에 비하자면 눈에 띌 정도로 안정되었다. 더구나 슈퍼맨이 살아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 다음부터는 더더욱 브루스는 그 나름으로 보다 건실한 자경활동을 하게 되었다. 가끔씩 배트맨의 의중을 알지 못하는 어린 히어로가 하나나 둘, 셋 정도 알프레드에게 찾아와 넌지시 브루스의 속마음을 묻기도 했지만 한 가지 사실을 알프레드는 분명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브루스는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고 있었다. 백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알프레드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만족할 만큼 브루스는 괜찮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모인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종종 이전의 배트맨이 겪지 못했던 규모의 사건과 대면하기는 했지만 그건 배트맨이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료와 함께 해쳐나가는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그가 오래전에 어린 파트너를 잃었을 적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슈퍼맨의 죽음에 그가 어떤 식으로 감정을 삭이는지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친구'라 불리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그만한 감정적 리스크를 지니는 이벤트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브루스 웨인으로인해 오롯이 골머리를 앓는 일이 알프레드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가 배트맨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이 도련님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걱정이라는 것을 거두어갈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테다.
그런 식으로 한동안 방심을 했던 것 같다. 그간에 비해 심리적으로 부담이 덜한 상황에 있다 보니 알프레드는 배트맨과 관계된 일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사건은 고담에 흘러나오는 방송이 하나의 수신국 채널로 전환되면서 시작되었다.
"요즘 우리 마을 박쥐가 자꾸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거 같아서 말이지."
마치 B급 영화 같은 탁한 화질의 카메라 영상이 군데군데 노이즈를 머금고 흘러가고 있었다. 꼭 배트맨의 카울을 흉내 낸 것 같은 조잡한 검은 헝겊을 뒤집어쓴 사람의 목에 조커는 기괴하게 웃으면서 자꾸 손에 든 면도칼을 대었다가 떼었다가를 반복했다. 흐윽, 흐으윽. 달달 몸을 떠는 인질의 흐느낌을 배경으로 조커가 어딘가 노래하는 톤으로 외쳤다.
"박쥐의 친구는 날짐승일까, 들짐승일까! 자꾸 친한 친구를 버리고 애먼 놈들이랑 붙어먹으면 이 충성스러운 제스터의 마음이 어떻겠어? 응? 자기가 한 번 말해봐. 아빠가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 살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땡!"
땡! 땡! 땡! 하하하하하하! 마치 엄청난 쇼라도 본 것처럼 인질의 등을 때리며 커다랗게 웃던 조커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목을 그어버렸다. 비명과 신음, 흐느낌이 뒤섞인 울부짖음이 화면을 메우고 검게 보이는 피가 튀어 분을 칠한 광대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자 립스틱 바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조커는 말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우리 둘만의 왈츠를 춰볼까? 응? 뱃시―"
그리고 방송이 끊어지며 도시는 정전되었다. 방송이 수신된 위치를 추적하면서 브루스는 망설임 없이 배트모빌을 몰아 고담으로 향해갔다.
"끝을 낼 때가 온 것 같아요."
한동안 배트케이브에서 얻은 자료를 요구하거나 작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던 브루스가 무섭게 내려앉았던 침묵을 깨며 알프레드에게 이상하게 가벼운 어투로 건넨 말이었다. 정전과 동시에 시청 앞에 설치된 시계탑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갑자기 유일하게 불이 들어온 도심 한복판에 있던 전광판에 떠오른 카운트다운 표시가 째깍째깍 움직였다. 그것은 조커가 설치해둔 폭탄의 시간제한을 나타냈다. 폭탄은 화약이 들었거나 혹은 독가스가 들어있었고 도시에 있는 커다란 건물이나 주요 시설, 아니면 하수구나 지하도를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를 해제했다 싶으면 다음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의 반복이었다. 그 외에도 그의 부하들이 멋대로 설치한 듯한 자잘한 폭탄들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조커의 단서를 찾는 동시에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참가했던 배트맨은 곧 코앞에 닥친 문제들에 달려들기보다 조커 본인에게 주력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트케이브에서 이루어진 수색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위치를 알아낸 폭탄 중에 원격으로 조작하는 것 외에 해제방식이 없는 폭탄이 원자력 발전소에 부착되어 있었다. 배트맨은 더 늦기 전에 직접 조커를 찾아내야만 했다. 찾아서 직접 끝을 보아야 했다. 이것은 그런 게임이었다. 배트맨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입을 열어 그의 이름조차도 부르기 전에 마지막 전언을 했다.
"친구를 보러 갈게요."
치직― 그리고 브루스와 연결되었던 모든 통신이 끊어졌다. 그 이후 브루스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사태가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되는 날이 벌써 일주일 정도가 흘러가고 있었다. 복구가 한창인 구역에서는 물론 다른 어디에서도 배트맨과 브루스는 나타나지 않았고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마지막 행선지로 좌표가 찍힌 지점에서 시작해 수색을 진행했지만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알프레드는 이런 정신없는 중에 미안한 일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힘을 빌리기 위해 슈퍼맨을 불러 브루스의 신호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하지만 한동안 눈을 감고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슈퍼맨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미안해요, 알프레드. ...배트맨, 브루스를 찾을 수가 없어요."하고 말을 하는 본인조차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경악과 당혹스러움으로 굳어진 표정은 세간에서 쉽게 '신'으로 비유되는 인물의 얼굴에서 보기에는 드문 것이었지만 알프레드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현실적으로 새하얗게 표백이 된 알프레드의 머릿속에는 아이의 시신이라도 찾아야한다는 것 단 하나만이 시끄럽게 메아리쳤다. 이유라면 알프레드가 그의 후견인이기 때문이든가 배트맨의 시신이 괜한 불한당의 손에 넘어갔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사태들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그보다도 알프레드가 슈퍼맨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시신을 눈으로 보기까지, 브루스는 죽은 게 아니니까. 어쩌면 슈퍼맨의 감각조차 회피할 수 있는 곳에서 브루스는 몸을 숨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슈퍼맨은 이전에 조커의 위치를 특정 하는 것을 실패하기도 했으니까, 조커에게 가능한 일이라면 배트맨에게 불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 아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니 알프레드는 빨리 브루스를 찾아내야만 했다. 찾아서, 빨리 찾아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알프레드가 그렇게 소득 없는 수색을 계속 하고 있을 때였다. 직접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브루스를 찾는 알프레드를 대신해 고담 시에 있는 모든 병원들의 기록을 살피던 루시우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고담 시의 외곽에 있는 한 작은 병원에 신원불명의 남성이 발견되어 입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락을 받고 알프레드는 곧장 그곳으로 향해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멍하니 침대머리에 기대어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는, 환자복을 입고는 있지만 의아할 정도로 별다른 부상 없이 깔끔한 몸을 하고 있는 브루스를.
"브루스?"
"...저를, 부르신 거예요?"
브루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알프레드를 보았다. 알프레드가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브루스는 자신이 착각한 건가 싶었는지 주변을 기웃기웃 둘러보다가 알프레드가 말을 건 게 분명 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진 다음에 다시 물어보았다.
"누구세요? 저를 아시나요?"
한참만에야 찾아낸 브루스는 너무나도 말간 눈을 하고 있었다.
"브루... 매치스 씨. 이거 한 번 드셔보시겠습니까?"
계란의 껍데기를 까던 브루스는 불쑥 끼어든 알프레드의 부름에 금방 응하며 그가 손에 잡고 내미는 카나페를 망설임 없이 받아먹었다. 얇은 크래커에 무염 치즈와 알프레드가 만든 키위소스가 얹어진 한입 크기의 카나페를 입에 담은 브루스는 얇은 입술을 우물우물 움직여서 바지런히 씹은 뒤 삼켰다. 브루스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맛있어요!"
"다행이군요."
예전에 브루스가 좋아하던 방식으로 달게 만든 소스가 기억을 잃은 지금에도 그의 입맛에는 맞았는지 브루스는 꼭 어릴 적에 알프레드가 만든 쿠키를 처음 먹었을 때처럼 방긋방긋 웃었다. 별스럽지 않게 반응했지만 알프레드는 희미한 미소를 짓은 채로 만들어둔 소스에서 적당량을 덜고 남는 것을 소독된 병 안에 담았다. 커피 정도야 그런대로 끓일 수 있지만(그건 거의 대부분의 과정을 기계가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전반적으로 요리에 있어서 젬병인 브루스라도 샐러드에 드레싱을 뿌리거나 준비된 재료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 정도야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알프레드는 병의 뚜껑을 꼭 닫았다. 브루스 말고도 요리를 먹을 인원은 있기 때문에 아마 이정도 분량이면 아주 길어야 5일 정도면 다 먹고 없어질 것이다.
다시 까고 있던 계란 껍데기를 벗기면서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닭고기가 익고, 스튜가 끓는 중에 카나페를 만드는 것을 잠깐씩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렇게 닮아 보여요?"
"네?"
"브루스... 라는 사람이요. 루시우스, 처음 봤을 때도 날 브루스라고 불렀었죠?"
불현듯 알프레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온화하던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진 듯한 변화에 브루스도 몸을 움찔하고 굳히자 알프레드는 금방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브루스에게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아뇨, 아니... 탓하는 게 아니었는데..."
브루스는 커다란 몸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손과 머리를 내저었다. 조커와 있었던 사건 이후 잠깐 행방을 감추었던 브루스를 찾아낸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그간에 억눌렀던 불안이 더불어서 작용하는 바람에 자신의 행동이 조심스럽지 못하다는 자각이 있었지만 그게 브루스에게 드러날 정도라는 건 문제가 있었다. 거기다가 오늘의 자신은 혹시라도 자신이 브루스 웨인에 대한 살인죄로 기소가 된다면 한동안은 이 시설 아이들의 상담을 위해 찾아오는(동시에 알프레드의 부탁으로 브루스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레슬리나 진짜 루시우스(알프레드가 자신의 이름을 빌린 것을 알고 루시우스는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한숨 한 번으로 넘어가 주었다.)를 통해서나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브루스와 직접 만날 수 있게 돼서 어딘가 들떠있다. 민간인이 다 되었군, 페니워스. 알프레드는 속으로 몰래 혀를 찼다.
알프레드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조차 누구인지 모르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차분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브루스가 살아만 있다면야 다른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그 다음의 일일뿐이었다. 우선 알프레드는 예전에 그와 자신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보이며 낯선 이의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하고 있을 그를 안심시키려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건네는 사진과 알프레드의 얼굴을 몇 번 번갈아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음, 이건 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중, 최근에 이 도시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연락이 닿지 않게 된 가족이나 지인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병원으로 달려온 이들이 얼마나 애끓는 울음을 토해냈던가를 지켜보았던 남자는 난감하기보다 오히려 미안한 얼굴로 알프레드를 올려다보았다. 알프레드가 건네준 사진을 조심스럽게 되돌리는 브루스의 손끝을 보면서 알프레드는 눈을 깜빡였다. 물론 지금 브루스의 분위기는 이전의 그가 두르던 것과는 너무 다른 유의 것이라서 그가 스스로 "제가 브루스 웨인입니다."라고 한다 해도 그와 친분이 없는 이라면 쉽게 믿음이 가지 않을 정도였고 실제로 병원에서도 업무량이 밀려들어오는 중에 신원불명의 남자가 브루스 웨인과 닮기는 했는데 정말 그라면 이런 곳에 저렇게 덜렁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프레드가 다른 사람을 브루스로 착각할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브루스의 모습은 알프레드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 다만 아주 오래 전의 것이었다. 브루스는 단순히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가 브루스 웨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무언가가 알프레드의 머릿속에서 빛났다. 한동안 말이 없는 알프레드의 모습에 브루스는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면서 알프레드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돌려받은 사진 속의 브루스의 모습을 한참 보던 알프레드는 이내 어떤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들어 브루스를 마주보았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어두워서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알프레드의 모습에 브루스는 더욱더 당황해서 머리를 붕붕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실례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사진을 지갑에 담고서 다시 품 안에 들여 넣은 알프레드는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실종된 지인을 찾으러 온 알프레드가 걱정이 되는지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던 브루스는 그런 알프레드의 얼굴에 한결 차분해진 얼굴이 되었다.
"혹시 그 분 소식을 여기서라도 듣게 되면 전해드릴게요. 아... 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음, 제 이름을 말씀드릴 수 없어서 그렇기는 한데..."
멋쩍은 듯 말을 흘리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생각을 위해 잠깐 한 박자 정도 말을 늦추었다가 답변했다.
"루시우스. 루시우스 폭스라고 합니다."
"루시우스 씨..."
알프레드가 대답한 이름을 브루스는 따라서 발음해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꼭 알프레드를 다독이듯 브루스는 이야기했다.
"브루스 씨를 꼭 찾으실 수 있기를 빌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부터, 알프레드가 결정하기를, 브루스 웨인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 후로 알프레드는 지나가는 길에 들르는 척 브루스에게 찾아갔다. 기억상실로 인해 연고자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난 브루스를 찾는 이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브루스는 자신을 방문하는 알프레드에게 밝은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했고 더해서 '브루스'를 찾았는지, 알프레드는 괜찮은지를 물으며 걱정해주고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브루스가 몸에 별 다른 이상이 없는 자신이 계속 병원에 있는 건 가뜩이나 바쁜 요즘 같은 때에 별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무작정 퇴원해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언제까지고 브루스를 찾았다는 여유를 만끽할 수만도 없어졌다. 도무지 고집을 부리는 성격은 기억을 잃어도 어디 가지를 않는 모양인지 기억상실 자체가 몸의 이상이기 때문에 얼마쯤 더 입원해있을 것을 권하는 알프레드를 만류하며 브루스는 "가끔씩 내원해서 상태를 살피는 방법도 있잖아요."하고 기어이 병원을 나오고 말았다. 그런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매치스 말론이라는 임의의 이름을 주며 루시우스에게 연락해 그가 임시로 머물 수 있는 한적하고 안전한 장소는 없는지에 대해 물었고 그렇게 브루스는 고담 외각에 있는 보육시설의 관리인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알프레드는 자신이 반듯하게 다려놓은 의복이 아닌 캐주얼한 기성복을 입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얼굴을 한 브루스를 다시 한 번 차분히 바라본다. 시설 뒤편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숙식하면서 지내는 브루스는 아이들이 좋은지 나날이 즐겁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동안 알프레드는 정말 고집스러울 정도로 브루스에게 웨인으로서 존재하도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의 매무새를 정리하고 또 흐트러졌을 경우 그것을 끈질기게 지적하고는 했었다. 알프레드의 심미안과 더불어 보통 알프레드가 브루스에게 요구했던 차림새에 비해 지금 브루스의 모습은 빈말로도 만족스럽다 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알프레드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왜냐면 브루스는 매치스 말론이었으니까. 이것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됐다.
"나이가 들어 자꾸 말실수가 늘어서 큰일입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에게 장난말처럼 가볍게 말했다. 그런 알프레드의 태도에 어깨에서 힘을 살짝 뺀 브루스는 자기도 가끔 시설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바꿔서 부르고는 한다며 대꾸해주었다. 요리가 끝난 음식들을 그릇에 사람 수 만큼 나누어 담고 씻은 채소와 썬 삶은 계란을 샐러드 볼에 넣어 드레싱을 뿌리는 알프레드의 옆에서 스푼과 포크를 준비하던 브루스가 한참 뒤에 조용히 이야기했다.
"브루스가 루시우스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인가 봐요. 종종 이름이 잘못 튀어나올 정도로요."
살짝 눈을 크게 뜨고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린 알프레드를 보면서 브루스는 아몬드 빛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어보였다. 브루스는 웃는 얼굴로 알프레드의 실수가 괜찮은 것이라고,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이런 브루스의 얼굴을 그가 아주 어렸을 적 이후로는 본 기억이 없었다. 토마스와 마사가 세상을 떠나고 배트맨이 된 후로 브루스의 얼굴에는 거두어지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그림자는 ‘앎’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중한 것을 쉽게 빼앗아가는 세상을 알고 있는 브루스는 언제고 살짝 음영이 진 미소를 지었다. 알프레드는 평생이 가도 그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개는 것은 볼 수 없을 거라고, 그것이 삶의 무심함과 같은 거라고 체념한 상태였다. 알프레드는 다른 대꾸의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두말할 것 없이 소중하다. 브루스의 웃는 얼굴을 위해서라면 배트맨도 그리고 브루스 웨인조차 죽일 수 있을 만큼. 오히려 지금까지 용케도 별 탈 없이 배트맨을 수행하는 브루스를 지켜봐왔다고 스스로도 멀거니 생각할 정도로 알프레드는 지금 눈앞에 있는 순진한 남자가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미어졌다. 알프레드는 손을 들어 아까 브루스에게 카나페를 줬을 때 입술 끝 수염에 몇 안 되게 묻은 크래커 부스러기를 털어주었다. 조용히 뻗어진 뒤 가볍게 거두어지는 알프레드의 손을 보고 눈을 둥글게 뜬 브루스는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뭐 묻었었어요?!"하고 외치며 부끄러운지 볼을 붉히며 몸을 내뺐다. 그런 브루스의 모습에 알프레드는 가볍게 웃었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챙긴 뒤 뒷정리를 하고 나니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브루스는 늦은 시간이라 하룻밤 머물다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지만 알프레드는 괜찮다고 답한 뒤 차를 몰아 주인 없이 덜렁 남은 유리별장에 왔다. 별장으로 온 알프레드는 경찰도 수색하지 못한 통로를 통해 지하에 있는 배트케이브로 내려왔다. 그렇게 밝지 않은 조명이 켜져 있는 귀가 아프게 조용한 실내를 한참동안 막연하게 바라만 보던 알프레드는 벌써 조금 먼지가 앉은 장비들 위로 창고에서 꺼내온 커버를 덮기 시작했다. 이제 이것들이 사용될 일은 없다. 어쩌면 몇몇 중요한 데이터는 사이보그를 불러 저스티스 리그에서 이용할 수 있게 보내고 적당한 때를 보아 이 케이브 자체를 붕괴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무기고에는 자물쇠를 잠그고, 기기 위로는 검은 천을 덮으면서 알프레드는 이상하게 몸이 가뿐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저녁에 알프레드가 한 요리를 먹고 맛있다면서 매치스가 한 것과 딴판이라고 아우성치던 아이들에게 시무룩한 눈길을 보내던 브루스의 얼굴이 생각이 나 알프레드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그렇게 홀로 동굴 내부를 정리하고 있던 알프레드의 등 뒤로 불쑥 말소리가 들려왔다.
"불기소 축하해요."
"슈퍼맨."
하지만 알프레드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뒤를 돌아 공중에 떠서 자신을 바라보는 슈퍼맨을 맞이했다. 슈퍼맨은 무언가 불만이 있는지 눈썹을 찌푸린 채 알프레드를 보다 비꼬는 듯 이야기했다.
"아니면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유감스럽다고 해야 하나요?"
"무죄추정의 원리가 고담에서도 잘 작동되는 모양입니다. 유감이고 말고 할 것도 없겠지요."
알프레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땅 위에 가볍게 착지한 슈퍼맨은 팔짱을 끼며 딱딱한 눈으로 침착하기 그지없는 알프레드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거죠? 브루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웨인 주인님과는 관계없습니다. 이미 없는 분께 무슨 혐의가 있다고 그러시는지요."
"거짓말 말아요."
꼭 으르렁 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슈퍼맨은 알프레드 앞으로 한발자국 가까워졌다. 새파랗게 빛이 나는 것 같은 눈동자가 위협적일 법도 했지만 알프레드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브루스, 살아 있잖아요."
"주인님의 바이탈 사인을 찾을 수 없다고 하셨던 건 슈퍼맨, 당신이었을 텐데요."
"그래도 브루스는 살아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브루스가 이야기 했다. "참, 전에 하늘에서 슈퍼맨을 보았어요." 알프레드가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으로 털어준 후로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 안절부절 못하던 브루스가 한참 만에 꺼낸 화제였다. 알프레드가 무심하게 "슈퍼맨이 왔다갔나요?"하고 되묻자 브루스는 "음... 정확히는 스쳐 갔다고 해야 하나... 무슨 일인지 여기 하늘에서 잠깐 멈춰 있다가 다시 날아갔어요. 도시 복구에 일손이 부족하다는데 그걸 도우러 왔던 길인 모양이에요."하고 제법 자세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브루스의 앞으로 득달같이 다가가지 않은 걸 고맙다고 해야 할까. 이나저나 이 외계의 젊은 히어로는 상냥한 인물이라고 알프레드는 생각했다.
"제가 무슨 이유로 경찰서에 갔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브루스를 죽였다고요? 하..."
슈퍼맨은 코웃음을 친다. 고든 청장도 그렇고 슈퍼맨도 그렇고... 그렇게 알프레드 페니워스가 브루스 웨인을 살해한다는 게 있음직하지 않은 일인 걸까? 언론에서는 거참 그럴싸하다며 덤벼들었는데 말이다. 별다른 동요 없이 고요하게 저를 보는 알프레드에게 슈퍼맨은 답답한 듯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다시 돌아와야 해요."
"브루스 웨인은 죽었습니다."
"다이애나의 올가미면 브루스의 기억이 돌아올지 몰라요. 아무 시도도 안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원더우먼께서는 전선에서 물러난 이를 억지로 끌어오는 일은 하시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는 지지 않고 또박또박 슈퍼맨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슈퍼맨은 얼굴을 더욱 찌푸리며 결국 푹하니 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는 지금쯤 배트맨의 그 성질이 어디에서 온지 알겠다며 속으로 납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리그에는 배트맨이 필요해요. 고담은 물론이고요."
"전에 배트맨에게 그 스스로를 묻으라 조언해주셨던 분의 말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군요."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끝내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인 슈퍼맨에게 알프레드는 덤덤하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슈퍼맨, 당신이 옳았습니다."
언뜻 달래는 것도 같고 한편으론 조용히 못을 박는 것 같은 투로 말을 시작한 알프레드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날카로운 슈퍼맨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애초에 배트맨이라는 자경활동 자체가 양날의 검 같은 것이었습니다. 배트맨이 있기에 지금의 저스티스 리그가 만들어졌지만 이번의 사태 역시 배트맨이 있기에 생겨난 것이지요. 거기다 언제까지 웨인 주인님이 배트맨으로 있으실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자격지심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실제 웨인 주인님은 아무리 극단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무예에 뛰어나시다고는 하나 평범한 인간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몸이 성해서 어떻게든 지내왔지만 앞으로는 어떨 것 같으십니까. 주인님이 저만큼의 나이를 먹고, 그보다 더 해가 지나면 어떻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뿐이지 배트맨의 부재는 언젠가는 있을 일입니다. 외적인 이유로든 내적인 이유로든 배트맨은 어느 시점에인가는 사라지게 되어있어요."
"하지만 그게 왜 지금이어야 하죠? 무엇보다 브루스 본인이 이런 걸 바랄 것 같아요?"
"전 이미 오랫동안 도련님의 억지를 따르며 살아왔습니다. 배트맨에 의해 그동안 브루스 웨인이 죽었으니 이제 배트맨이 브루스를 위해 죽을 차례입니다. 아니 그 아이를 위해서면 브루스 웨인도 죽어있는 편이 낫겠죠. 이 정도 고집을 부릴 권리가 제게는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퇴직금을 대신해서요."
"그래서 당신이 브루스를 죽였다고 경찰서에 간 겁니까? 혹시라도 브루스가 돌아와도 더는 당신이 돕지 못하게 하려고요? 브루스의 발을 묶어 놓으려고?"
알프레드는 조용히 미소만 짓는다. 입술을 꾹꾹 깨물며 여전히 불만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슈퍼맨은 흔히 전능하다고 일컬어지나 역시 죽을 수도 있는 목숨인 만큼 많이 여린 존재이다. 알프레드는 새삼 슈퍼맨의 나이가 자신이나 브루스에 비해서 한참 어리다고 지각한다.
"저는 납득할 수 없어요."
한동안 분을 삭이듯 침묵을 이어가던 슈퍼맨이 지친 듯이, 하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브루스였다면 풀이 죽은 듯한 그의 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제 성질을 꺾어줄 법도 했지만 인생의 긴 시간을 브루스의 집사로서 지내왔던 알프레드는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그런 슈퍼맨의 고집을 물렸다.
"외람되지만, 납득도 이해도 바라지 않습니다. 필요하지도 않고요. 죽음은 그런 거라고 당신도 아시겠지요. 모든 것이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남은 이들의 욕심입니다. 당신은 웨인 주인님의 신호를 발견하지 못하셨지요? 그게 답입니다. 브루스 웨인은 정말 죽었던 거예요. 그리고 슈퍼맨.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고 배트맨 없이도 세상은 어떻게든 되기 마련입니다."
"그럼 당신은요.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은 뭐죠? 이게 당신의 욕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배트맨에 비해 무르다 뿐이지 슈퍼맨도 그렇게 놀놀한 성질은 아니라서 젊은 히어로는 마치 알프레드의 허점을 잡아낸 듯 지지 않고 집요하게 물었다. 그럼에도 노련한 집사는 아랑곳없이 희미한 미소를 그대로 유지할 뿐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주인이 말갛게 웃는다.
어둠, 어둠, 어둠, 쇠 냄새 가득한 어둠.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거지? 새까맣게 먹칠된 머리로 계속 생각해보아도 답은 떠오르지 않고 모든 것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검은 소용돌이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모든 의식을 집어 삼키려 했다. 온몸의 감각은 둔해서 아무 것도 감지되지 않는 것도 같고 정반대로 어마어마한 통증이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것도 같았다. 히히, 히히히... 박쥐의 친구는 날짐승일까 들짐승일까, 히히히히히히히히. 돌바닥을 긁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며 남자의 귓가에 메아리 쳤다. 가슴뼈를 짓누르는 것 같은 버거움에 남자는 뭍에 껴내진 물고기마냥 한껏 입을 벌려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했다.
"헉!"
그때 매치스는 눈을 떴다. 조커라는 빌런이 일으킨 대대적인 사건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악몽을 꾸는 이안을 달래다가 오늘도 방이 아닌 아이들 방에 인접한 거실에 놓인 소파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었던 매치스는, 어째서인지 이 이름은 이상할 정도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갑자기 눈동자로 몰려드는 하얀 빛이 아려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부신 아침이었다.
또 같은 꿈을 꾸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뒷골이 선득해지는 불쾌함만은 오랫동안 남아있는 이 꿈을 매치스는 병원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계속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안처럼 자신 역시도 그 사건에 의해 신경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매치스는 정확히 사건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서 그에 자신이 어떻게 휘말렸기에 기억이 누락된 걸로도 모자라 매번 똑같은 꿈까지 보게 된 건지 알지 못했다. 매치스는 고담이 겪은 재해를 지금에서 보고 듣는 상황들로 당시의 참혹함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일이 바빠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풍문처럼 듣기로 이 도시에서 꽤 중요하게 자리 매김 했던 기업의 회장도 실종이 되었다는 것 같았다. 재력을 가졌다는 이도 피해가지 못한 재난이라면 보통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도대체 얼마나 절박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매치스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어딘가 비겁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아침에 미취학아동들을 전문적으로 돌봐주는 복지사가 도착을 하고, 교사 내부가 어느 정도 정리가 돼서 다시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 학교로 몇몇 아이들을 배웅하고 나면 매치스는 건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시작했다. 본래는 지금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시설에서 근무하며 아이들을 돌보았었지만 사건 이후로 더 사람 손이 절박해진 곳으로 파견되거나 아니면 그가 누군가를 돌보기에 여의치 않게 되어 퇴직을 하거나 해서 매치스는 관리인으로서 두세 사람의 일을 추가로 해야 했다. 거기다 매치스 이전에 있던 관리인도 아마 사건에 휘말린 건지 갑작스럽게 그만두어서 회계장부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못해 매치스는 시설에 온 첫날부터 영수증을 뒤지며 한동안 컴퓨터 앞에서 씨름을 해야 했다. 특히 재난이후 구호물품이나 지원금에 대한 신청 공문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물론 바쁘긴 했지만 그 첫 주는 매치스에게는 정말 눈 돌아갈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매치스가 이런 유의 작업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나아지고 있다고 매치스는 생각했다. 갑자기 새롭게 찾아온 관리인이 낯설어서 경계하느라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어딘가 겁에 질리고 불안해보이던 아이들이 지금은 제법 재잘재잘 떠들며 앞뜰에서 뛰어놀기도 했다. 조금 나이가 있는 아이들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의 이야기보다 친구의 일화나 어디선가 주워들은 농담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섬으로 이루어진 고담과 미국의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가 끊어진 이후로 지원이나 물자의 수송이 원활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히어로들의 도움 아래 급한 불은 끌 수 있었고 지금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이 복구가 되었다고 했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도 조금씩이나마 일상이 돌아오고 있다고 학교로 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매치스는 생각했다. 이안도 잠을 보채는 시간이 전에 보다 많이 짧아진 걸로 보아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다. 물론 매치스 본인의 꿈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지만.
어제 오랜만이 루시우스의 얼굴을 본 매치스는 사실 자신이 꾸는 꿈에 대해 그에게 말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냥 이렇게 반복되는 꿈이라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걸까 싶어서 그게 자신만이 느끼는 건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선이 날카롭지만 어딘가 온화한 분위기를 띠던 루시우스가 ‘브루스’의 이름이 나온 순간 기운 없이 복잡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말을 아끼기로 마음을 바꿨다. 매치스가 이전에 사진으로 잠깐 확인한 바에 따르면 브루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닮지 않았지만 루시우스의 눈에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입원해 있을 당시 종종 자신을 찾아왔던 것도, 지금 이렇게 짬을 내서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하고 매치스는 추측하고 있다. 이제까지 루시우스의 입에서 브루스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 그의 지인은 여전히 실종된 상태일 것이다. 그런 그에게 괜히 뒤숭숭한 꿈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루시우스가 상담가도 아닌데 별것 아닌 것마저 미주알고주알 토로하는 건 조금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루시우스는 묘하게 자신을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어제 말을 아낀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꽤 잘한 일인 것 같다. 오늘은 오후에 의사인 레슬리가 아이들을 상담해주러 온다. 정 마음이 걸리면 그녀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매치스는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햇빛을 맞추기 위해 실내에 있던 화분 몇 개를 바깥으로 꺼내 놓았다. 그러다 정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검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니 자전거를 끌고 온 신부가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신부가 먼저 매치스를 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무슨 일이신가요?"
"얼마 있으면 부활절이라 저희 교회에서 있을 행사에 혹시 형제님과 아이들이 참여하실 마음이 있는지 여쭈고 싶어서 왔습니다."
젊은 나이의 신부는 웃으면서 자신이 달려온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끝에는 십자가가 있는 성당의 첨탑이 있었다. 자신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착실하게 고개를 돌리는 매치스에게 신부는 자전거의 바구니에 담긴 종이뭉치 중에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깔끔하게 프린트 된 전단에는 알록달록한 달걀이 있는 바구니를 든 토끼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행사 내용이나 일시, 시간에 대해 적혀있었다. “정말 금방 있으면 부활절이네요.” 전단을 보면서 매치스는 맞장구치듯 이야기했다.
"그간 슬픈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렇기에 아이들과 작은 기쁨이라도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려운 때에 우리가 해야 할 건 믿음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 것이니까요. 비록 교회에서 하는 행사입니다만 너무 종교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동네 행사라고 보아주시면 좋겠어요."
실제로 전단지에 쓰여 있는 행사 내용은 미사나 어린 아이들이 준비하는 종교적인 극에 대한 이야기보다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놀이나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도움을 주거나 할 수 있는 일종의 집단상담 비슷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좋은 생각인거 같아요."
전단지의 내용들을 살피던 매치스가 호의적으로 이야기 하자 신부는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어딘가 의기양양한 듯한 웃음이 순간 매치스의 머릿속에 이상하게 와 박혔다. 새삼 다시 확인해본 신부의 얼굴은 아직 앳된 끼가 남아 있어 젊다는 말보다 어리다는 말이 조금은 더 어울려보였다. 다만 그런 신부의 앞머리에는 하얀 새치가 나있었다. 문득 매치스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 이건 단순한 기시감인걸까? 기억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그럴 리가 없는데도 웃고 있는 신부의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형제님?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불현듯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매치스가 의아했는지 신부가 묻자 그때서야 자신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매치스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할게요.”
매치스의 말이 끝나고도 아주 잠깐 그런 그를 지켜본 신부는 그럼, 평안하세요. 살짝 인사를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매치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멀어져가는 젊은 신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느 나무에서 날개를 쉬고 있던 작은 새가 맑게 울었다.
내년의 부활절은 만우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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