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utler did it+He's alive
->알피뱃+뱃른 성향의 DCEU와 코믹스 뉴52 배트맨의 엔드게임 이후를 요상하게 섞어놓은 이야기
◇Le Chat Magique
->루님께서 1월 말에 주신 리퀘스트 [알프레드와 브냥 도련님의 일상]에서 나온 이야기
먼지 낀 고요함이 가득한 작은 사각형 공간에서 짐은 남자와 마주하고 있다. 고담시경의 청장인 제임스 고든은 직급 상 그가 직접 용의자 취조에 나서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보통 짐은 업무 수행에 마땅한 인원을 배치하여 전체적인 수사를 지휘하고 관련된 사안의 최종결재와 총책임을 맡고 있으며 덧붙여 배트맨과의 연락을 전담하고 있다. 이번 일에는 무려 자신이 범인이라며 스스로 나선 용의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이 그와 대면하여 조사를 진행하는 까닭은 이 사건에 물증은 물론 심증도 없을 뿐더러 허리를 곧게 펴서 반듯한 자세로 저를 마주하고 있는 자칭 용의자, 알프레드 페니워스가 너무나도 지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랬다. 벌써 2시간 가까이 좁은 취조실에서 처음에 나눴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단정한 모습을 한 웨인의 집사는 과연이라 해야 할지 청량한 향수 냄새가 묻은 질 좋은 양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짐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배인 땀내나 담뱃재에 찌든 냄새, 탄내와 흡사한 커피의 냄새가 묘하게 두드러지는 것만 같아 코를 씰룩이며 킁 하니 숨을 삼켰다. 목적으로 했던 고담의 외곽에 위치한 보육원을 겸해서 청소년 쉼터로 운영되고 있는 시설에 도착한 알프레드는 차를 세웠다. 알프레드는 뒷좌석에서 잔뜩 사온 식료품들을 꺼내들다가 습관적으로 가지고온 신문의 1면 위에 난 기사 제목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고담의 대부호 실종, 범인은 집사?] 꼭 무슨 추리 소설의 제목과도 같은 문장이었다. 결국 어떠한 증거도, 심지어 혐의점조차도 찾아내지 못한 검사는 알프레드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경찰 측에서도 이렇다 할 증거가 없어 검사에게 파일을 보내는 것조차 주저했었지만 그만 말이 세어나가 언론에서 입방아를 찧는 바람에 벌어진 형식적인 절차와 같은 것이었다. 요 근래 고담에서는 정신없는 사건사고들이 가득했지만 더해서 브루스 웨인의 실종에 이런 흥미로운 에피소드까지 딸려오자 고담의 언론사들은 거의 명절 분위기였다. 물론 사안이 사안인지라 어디서 일이 넘친다며 자랑은 못하고 다닐 테지만, 어떤 사건을 추적하고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지 크게 고민하지 않고도 기사를 쓸 수 있는 나날에 그들이 나름의 호재를 맞이한 것은 분명했다. 비록 불기소가 되었지만 언론들은 그들이 가진 온갖 상상력과 배경지식을 동원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당장 웨인의 대리를 맡은 인물이 브루스의 후견인인 알프레드밖에 없어서 여러 파장들을 고려하여 검사는 물론이고 ‘그’ 짐 고든마저도 이번 사건에서 한발 물러난 것 아니냐는 의심 어린 눈초리를 세우는 정석적인 추론도 빼놓지 않았다. 한 가지 알프레드에게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그가 군복무 시절부터 비롯해서 웨인, 나아가 브루스와 배트맨의 집사로 일하기까지의 경험들이 그를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게 만들어서 알프레드가 언론들과 직접 마주하는 일은 전무했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들쑤신 벌집에서 튀어나온 벌떼처럼 소란스럽지만 웨인 기업은 지금 고담 복구사업에 자금을 융통하고 있으며, 제대로 매뉴얼을 갖춘 기업이라면 CEO가 한 사람 사라진 것 정도야 당장 주가에 타격은 있을지언정 상황이 안정된 후에는 분명 타개해나갈 수 있을 테니 시간만 지나면 곧 잠잠해질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이런 소동이 길게 가지 않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보다도 알프레드는 자백만으로는 기소조차 되지 않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저스티스 리그라고 부르는 일종의 히어로 집단이 생긴 후로 브루스의 정서는 그 전에 비하자면 눈에 띌 정도로 안정되었다. 더구나 슈퍼맨이 살아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 다음부터는 더더욱 브루스는 그 나름으로 보다 건실한 자경활동을 하게 되었다. 가끔씩 배트맨의 의중을 알지 못하는 어린 히어로가 하나나 둘, 셋 정도 알프레드에게 찾아와 넌지시 브루스의 속마음을 묻기도 했지만 알프레드라고 모든 걸 아는 것은 아닐지라도 한 가지 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브루스가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백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알프레드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만족할 만큼 지나치게 박쥐에게만 붙들린 것도 연기에 의해 만들어진 브루스 웨인만이 남은 것도 아닌 브루스는 괜찮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모인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종종 이전의 배트맨이 겪지 못했던 규모의 사건과 대면하기는 했지만 그건 배트맨이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료와 함께 해쳐나가는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그가 오래전에 어린 파트너를 잃었을 적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슈퍼맨의 죽음에 그가 어떤 식으로 감정을 삭이는지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친구’라 불리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그만한 감정적 리스크를 지니는 이벤트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브루스 웨인으로인해 오롯이 골머리를 앓는 일쯤 알프레드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그가 배트맨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이 도련님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걱정을 완전히 거두어갈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테다. “브루… 매치스 씨. 이거 한 번 드셔보시겠습니까?” 알프레드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조차 누구인지 모르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차분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브루스가 살아만 있다면야 다른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그 다음의 일일뿐이었다. 우선 알프레드는 예전에 그와 자신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보이며 낯선 이의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하고 있을 그를 안심시키려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건네는 사진과 알프레드의 얼굴을 몇 번 번갈아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챙긴 뒤 뒷정리를 하고 나니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브루스는 늦은 시간이라 하룻밤 머물다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지만 알프레드는 괜찮다고 답한 뒤 차를 몰아 주인 없이 덜렁 남은 유리별장에 왔다. 별장으로 온 알프레드는 경찰도 수색하지 못한 통로를 통해 지하에 있는 배트케이브로 내려왔다. 그렇게 밝지 않은 조명이 켜져 있는 귀가 아프게 조용한 실내를 한참동안 막연하게 바라만 보던 알프레드는 벌써 조금 먼지가 앉은 장비들 위로 창고에서 꺼내온 커버를 덮기 시작했다. 이제 이것들이 사용될 일은 없다. 어쩌면 몇몇 중요한 데이터는 사이보그를 불러 저스티스 리그에서 이용할 수 있게 보내고 적당한 때를 보아 이 케이브 자체를 붕괴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무기고에는 자물쇠를 잠그고, 기기 위로는 검은 천을 덮으면서 알프레드는 이상하게 몸이 가뿐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저녁에 알프레드가 한 요리를 먹고 맛있다면서 매치스가 한 것과 딴판이라고 아우성치던 아이들에게 시무룩한 눈길을 보내던 브루스의 얼굴이 생각이 나 알프레드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어둠, 어둠, 어둠, 쇠 냄새 가득한 어둠.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거지? 새까맣게 먹칠된 머리로 계속 생각해보아도 답은 떠오르지 않고 모든 것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검은 소용돌이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모든 의식을 집어 삼키려 했다. 온몸의 감각은 둔해서 아무 것도 감지되지 않는 것도 같고 정반대로 어마어마한 통증이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것도 같았다. 히히, 히히히… 박쥐의 친구는 날짐승일까 들짐승일까, 히히히히히히히히. 돌바닥을 긁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며 남자의 귓가에 메아리 쳤다. 가슴뼈를 짓누르는 것 같은 버거움에 남자는 뭍에 껴내진 물고기마냥 한껏 입을 벌려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했다.
일어나야지, 내 사랑. 찬란하게 떠올라—… 보육원에서 동쪽으로 뻗은 좁은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보면 높은 나무들 사이에 흐리게 보이던 십자가가 있는 첨탑이 점점 분명해지며 그곳에는 작은 성당이 고즈넉하게 위치한다. 첨탑만은 덜렁 솟아있어 십자가가 그나마 눈에 들어오지만 건물의 크기는 그에 비해 한참 작은 이 교회는 크기만큼이나 운영하는 규모도 작아서 젊은 신부가 미사는 물론이고 성당의 사무며 온갖 일들을 혼자서 꾸려나가고 있다. 약 한달 전에 있던 부활절 즈음 성당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이웃주민들을 초대하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아 찾아온 요한 신부와는 전임자가 제대로 된 인계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맨 땅을 두드리는 식으로 사무를 돌보고 있다는 점도 같고 해서 일손이 부족한 사람끼리 이래저래 마음이 맞아 함께 부활절 달걀을 닦기도 하고 이후에 매치스가 신부가 해결하지 못한 회계 일을 풀기도 하고 신부가 보육원 아이들의 활동을 돌봐주기도 하면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매치스가 보기에 신부는 사람을, 어려운 이들을 미사여구에서 따온 동정이 아닌 그의 삶 속에서 공감하기에 돕고자 하는 사람이고 성직자 이전에 봉사자로서 있고자 하는 인물이며 이따금 이를 살짝 드러내고 개구지게 웃을 때면 그 얼굴이 정말 앳되게 보이는 젊은이이다. 브루스 웨인의 집사는 오랜만이 동굴의 모니터 앞에 자리했다. 유리별장 주변의 반경 수 마일부터 산재해있는 감시카메라들로부터 전송되는 영상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알프레드는 느긋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알프레드의 심기를 곁눈질로 염탐하며 능청스레 커피가 든 머그를 건네는 이 없이 알프레드가 직접 내린 커피는 훨씬 맛이 있고 한편 조금은 심심하다. 알프레드는 그 허전함을 빈 둥지 증후군의 일종이라 생각하며 그에 쓸쓸해하기보다 퍽 기쁘게 여기기로 결정했다. 지금껏 어느 감시카메라에서도, 보안시스템에서도 그림자 하나, 로그 하나 남기지 않았던 침입자를 알프레드는 몇몇 가정을 세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담담히 기다리고 있다. 알프레드가 정확히 파악한 바만으로도 벌써 세 차례 이 동굴을 오고간 그는 이곳의 구조와 생리를 매우 잘 아는 인물이었다. 브루스가 아니라면 저스티스 리그의 면면들이 후보로 떠올랐지만 너무나 박쥐와 닮아있는 레드후드의 활동 모습을 보아서도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보였다. 그렇다면 누가 있을까. 누가… 다소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매치스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동굴의 가장자리에서 알프레드는 밀랍인형처럼 서있다. 화면으로부터 누군가가(누군가들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악몽과도 같은 현실감과 한참 전에 예견된 기시감이 알프레드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기, 제 붉은 망토에 누군가를 소중히 두른 채 안고 온 슈퍼맨이 온다. 죽음에서 두 번째 삶까지의 기억은 단편적이다. “무덤은?”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진화를 거듭하는 중 손을 사용하고, 도구를 이용하면서 인간은 커다란 용적을 자랑하는 두뇌를 얻었다고 한다. 특히 고등적 사고를 담당한다고 일컬어지는 대뇌가 전체 뇌중에서 80% 가량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데에 어떤 종(種)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기술하는 경우도 이따금 있을 만큼 인간은 자신의 뇌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 하지만 뭐든 복잡하고 다양해지다 보면 문제 또한 일어날 구석이 많아지는 법이어서 인간은 자신의 뇌가 만들어내는 정신과 마음을 간혹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자신의 스트레스 요인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거기서 인간은 일종의 방어기작으로서 의태를 하게 된다. 제 자신의 감정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부로 해결되지 못하는(혹은 할 수 없는) 부담들이 쌓이게 되면 인간은 제 자신과 가까운 습성을 지닌 동물(어쩌면 그가 그러한 동물로 의태할 수 있는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성격이 그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일 수도 있지만)로 일정 시간 변하여 회복을 하게 된다. 즉 쓸데없는 사고의 잔가지를 잘라내고 보다 현재와 생존에 집중하도록 신체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먀옥, 먀아아아!! 고양이 모습이 된 브루스는 수다쟁이이다. 커프스니 서스펜더니 조끼니 챙겨 입어야 할 것은 여럿 있었지만 알프레드는 그저 셔츠와 면바지만 챙겨 입은 모양새로 유리벽에 의해 사방이 훤히 뚫려 보이는 브루스의 방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에는 알프레드가 말끔하게 정리해놓았던 이불이 고의적으로 잔뜩 흩뜨려져서는 가운데 둥그렇게 굴이 생겨있다. 이불동굴 밖으로 기다란 꼬리가 물기를 말리기는 했지만 빗질이 되어있지 않아 조금은 볼품없는 털 모양새로 알프레드가 부러 낸 발걸음 소리에 반응하여 흔들흔들 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알프레드가 들어온 것 따위 관심 없는 양 브루스는 이불속으로 더 파고들고 있지만 그 아래서는 앙증맞은 귀가 바삐 이쪽저쪽 옴찔옴찔하고 있을 것이 알프레드의 눈에 선했다. 알프레드는 조심히 다가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시신도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보통의 수사는 사건에 대해 의심 가는 정황을 포착한 경찰이 용의자를 지목하고 그를 조사하여 진상을 파악하는 순서로 진행되지만 이번에는 역으로 용의자라는 인물이 먼저 경찰 쪽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한 의심을 덥석 물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그 다음에야 그에 맞는 증거가 있는지를 따져보는 식이었다. 경찰서 내로 오자마자 불쑥 “고든 청장님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를 꺼낸 알프레드는 무슨 일인지 의아해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짐에게 다짜고짜 이야기했다.
“제가 살해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짐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괜히 자신의 와이셔츠 주머니를 더듬었다. 담배 생각이 날 때면 저도 모르게 옷에 달린 주머니들을 두드려보는 습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규정 상 취조실 내에서는 금연이다. 쓰게 마른 입술을 축이며 짐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가 몇 장 들지 않아 얄팍한 파일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들면서 다시 말했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으면 뭔가 그럴싸한 근거를 말하세요.”
“제가 웨인 주인님을 죽였습니다.”
피곤이 묻어난 짐의 목소리와 달리 알프레드는 지치지도 않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차라리 여타의 범죄자들과 같았더라면 징계를 감수하고 멱살을 잡아 을러서라도 다른 이야기를 뽑아볼 법도 했지만 짐 본인조차도 어째서 자신이 이런 취조를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 어쩌면 고담에 또 하나의 사이코패스가 탄생한 걸지도 모른다. 이 차분하게 생긴 집사의 이면에 제 주인을 살해하고 그 사실을 통보한 뒤에 그와 관련된 증거를 찾지 못한 경찰이 사법체계에 따라 저를 놓아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을 보면서 즐기는 섬뜩한 광기가 숨어 있었다 해도 이 도시에서 미친놈이 하나둘 정도 늘어나는 거야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실제로 브루스 웨인이 실종된 지금 상황에서 그의 대리인인 알프레드를 기소하는 일은 분명 증거가 확보된다 해도 이래저래 잡음이 발생할 것임은 분명했다. 짐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했을 것이다. 그가 알프레드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짐이 아주 오래 전 고담시경에 들어온 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 출동했던 사건들 중에서 고담시민이라면 거의 모두가 안타까워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웨인부부가 누군가에 의해 총격을 당해 사망한 크라임 앨리에서의 사건이었다. 부부와 같이 있던 외아들, 브루스는 부모의 죽음을 그야말로 코앞에서 목격하고 마치 끈이 떨어져버린 인형처럼 넋을 놓은 채 현장을 찾아온 경찰에게 제대로 말도 하지 않으며 그저 망연하게 부모님이 쓰러져 있던 자리만 보고 있었다. 그때 그런 그에게 달려온 것이 바로 알프레드였다. 알프레드를 보자 마음 붙일 곳이 생긴 건지 비로소 움직임을 보인 브루스는 자신을 찾는 창백한 얼굴이 된 집사를 한참 보다가 그의 품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 후로 줄곧 알프레드는 브루스 웨인을 피후견인으로서, 그의 주인으로서 돌보며 살아왔다. 그런 그가 브루스를 살해한다고? 아무리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운 터부도 있는 법이다.
한 달 하고 며칠 전 고담에서는 도시 전체를 타깃으로 한 조커의 대대적인 테러가 벌어졌었다. 섬뜩한 방송이 흘러가는 것으로 시작된 테러는 도시 내 전력 공급의 마비로도 모자라 조커를 따르는 갱들에 의한 온갖 반달리즘과 고담 이곳저곳에서 카운트다운을 세는 폭탄 등으로 깨지 못 하는 끔찍한 악몽과 같았다. 어디 한쪽에서 소동이 났다 싶어 달려가면 또 다른 한쪽에 있는 고담 주요 시설에서 폭탄이 터지는 일이 일어났다. 배트맨은 물론 최근에 결성된 저스티스 리그의 다른 히어로나 심지어 고담에 터를 잡은 뿌리 깊은 빌런들까지 나서서 사태를 수습에 참여했지만 사건이 끝나 며칠이 흐른 지금까지 고담의 기반시설은 전부 복구되지 못했고 사상자들의 집계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경찰서로는 쉼 없이 크고 작은 사건에 대한 도움 요청이 쏟아졌지만 복구 작업에 상당 인력이 투입된 터라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중에 모습을 감춘 것으로 알려진 브루스 웨인의 후견인이 자신이 그를 죽였다며 나타난 것이다. 겉보기야 반듯하니 정정하다고는 하나 웨인의 비극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험한 고담의 사건사고를 보고 겪으며 지내온 그도 젊지 않은 나이에 속에 아무런 고름이 없을 리 없었다. 짐은 경찰병원, 그리고 아캄에서 근무하는 정신과의에게 연락하여 알프레드의 상태를 자문했다. 결론은 정말 믿어지지 않았지만 알프레드가 기억에도, 사고에도 어떠한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페니워스 씨. 저는 도무지 당신이 웨인 씨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신 청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의아합니다.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곳은 고담입니다만…”
짐은 말을 끌며 힐끗 알프레드를 보았다. 집사는 중후한 디자인의 테가 둘러진 안경알 너머에서 동요하는 기색 없이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면서 짐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한 가지 답밖에는 도출할 수 없었다.
“브루스가 어떤 사건에 휘말린 겁니까?”
알프레드는 미동 없이 그저 눈만 깜빡였다.
“페니워스 씨,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말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겁니까? 주저하지 말고 말씀을 하세요. 협력이라면 얼마든지―”
“고든 청장님.”
“네.”
짐의 말을 끊으며 알프레드가 입을 열자 짐은 이번에야 말로라는 기대를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브루스 웨인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다시 집사의 입에서 고집스럽게 나온 말은 이전과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이야기였다. 짐은 무거운 숨을 끌면서 불편한 의자의 등받이에 푹 몸을 기대어 자신의 콧잔등을 주물렀다.
탁, 차 문을 닫고 품에 한 아름 짐을 안아 올린 알프레드는 담장에 난 정문을 몸으로 힘겹게 열며 뜰 안으로 들어서려했다. 철로 된 문에서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나자 텃밭을 가꾸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루시우스!”
안으로 들어오려는 알프레드를 발견한 남자는 급하게 문을 열어주면서 알프레드로부터 짐을 하나 받아냈다. 부숭부숭하게 자란 수염이나 정돈하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덥수룩했지만 그런 모양새가 포근하고 자연스러워서 어딘가 청초해 보이는 남자는 알프레드에게 반가움을 표하듯 놀라움에 커졌던 눈을 휘어 티 없는 웃음을 그렸다. 알프레드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맞이한 그는 알프레드를 ‘루시우스 폭스’라고 알고 있다.
“오랜만이에요. 많이 바빴어요?”
“예, 조금… 지금은 괜찮습니다.”
알프레드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남자에게 알프레드는 빙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알프레드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그럼에도 잠시 알프레드를 말없이 보고 있다가 조금 걱정스럽게 말했다.
“피곤한데 무리해서 온 거 아니에요?”
그저 한동안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뿐인데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걸까. 남자에게 말을 들은 후에 알프레드는 문득 피로감에 뻑뻑한 자신의 눈동자를 인식했다. 시큰한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알프레드는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남자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당신이 걱정 되는데요. 밥은 제대로 해 드셨습니까?”
“이제 밥 정도는 차려 먹을 수 있어요!”
코흘리개 아이가 아니니까요! 귓바퀴를 발갛게 물들이며 남자는 비명처럼 항변한다. 일전에 채소는 잘 씻어 드시라는 알프레드의 말에 식기세제로 양상추를 씻는 남자를 보고나서 알프레드는 남자에게 요리에 대한 기초적인 사항들을 손수 수첩에 적어 건네주었다. 그 후에도 몇 번씩 알프레드는 생각이 날 때마다 어린 아이에게 물어보듯 또 세제로 음식을 씻은 거 아니지요, 흰자는 다 팬에 붙여놓고 탄 계란프라이에서 노른자만 떼어 드신 것은 아니지요 하고 물었고 그런 알프레드에게 남자는 조금 약이 올라 있었다. 알프레드가 흐음 하고 되묻듯 코를 울리자 남자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이야기했다.
“도라도 이제 내가 밥을 한다고 해서 다짜고짜 시리얼을 찾지 않는단 말이에요. 샘도 먹을 만하다고 했고요.”
“그럼 제가 저녁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알프레드의 말에 남자는 윽 하고 입술을 질근 씹었다. 물론 샘은 먹을 만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다만 젖살이 통통한 아이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감정이 쏙 빠져 있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는 게 문제지. 남자는 고개를 휙 돌리면서 입안에서 굴리듯이 꿍얼꿍얼 대꾸했다.
“…저녁 만드는 거 도와주세요.”
“그렇게 하죠.”
실상으로는 자신이 주된 요리를 만들고 남자가 거드는 모양새겠지만 알프레드는 적절한 정도에서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 안까지 걸어 들어가 짐을 내려놓은 뒤 한들한들 웃는 얼굴로 돌아온 남자는 알프레드와 함께 식료품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루시우스도 같이 먹을 거죠?”
“네.”
알프레드의 대답에 남자는 다시 생긋 웃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꾸 웃어서 그런 건지 남자의 머리카락에 섞여있는 흰머리가 그의 나이를 짐작해주고 있었지만 남자는 어딘가 어려 보였다. 어쩌면 알프레드가 남자보다 나이가 더 많아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뿐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렇다기에 남자는 알프레드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어리게 느껴졌다. 알프레드는 찬장에 통조림을 진열하고 있는 남자를 문득 불렀다.
“매치스 씨.”
“네?”
“…아닙니다.”
남자를 알프레드는 ‘매치스 말론’이라고 부른다.
그런 식으로 한동안 방심을 했던 것 같다. 그간에 비해 심리적으로 부담이 덜한 상황에 있다 보니 알프레드는 배트맨과 관계된 일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사건은 고담에 흘러나오는 방송이 하나의 수신국 채널로 전환되면서 시작되었다.
“요즘 우리 마을 박쥐가 자꾸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거 같아서 말이지.”
마치 B급 영화 같은 탁한 화질의 카메라 영상이 군데군데 노이즈를 머금고 흘러가고 있었다. 꼭 배트맨의 카울을 흉내 낸 것 같은 조잡한 검은 헝겊을 뒤집어쓴 사람의 목에 조커는 기괴하게 웃으면서 자꾸 손에 든 면도칼을 대었다가 떼었다가를 반복했다. 흐윽, 흐으윽. 달달 몸을 떠는 인질의 흐느낌을 배경으로 조커가 어딘가 노래하는 톤으로 외쳤다.
“박쥐의 친구는 날짐승일까, 들짐승일까! 소중한 단짝을 버리고 두 번씩이나 애먼 놈과 붙어먹으면 이 충성스러운 제스터의 마음이 어떻겠어? 응? 자기가 한 번 말해봐. 아빠가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 살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땡!”
땡! 땡! 땡! 하하하하하하! 마치 엄청난 쇼라도 본 것처럼 인질의 등을 때리며 커다랗게 웃던 조커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목을 그어버렸다. 비명과 신음, 흐느낌이 뒤섞인 울부짖음이 화면을 메우고 검게 보이는 피가 튀어 분을 칠한 광대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자 립스틱 바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조커는 말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우리 둘만의 왈츠를 춰볼까? 응? 뱃시―”
그리고 방송이 끊어지며 도시는 정전되었다. 방송이 수신된 위치를 추적하면서 브루스는 망설임 없이 배트모빌을 몰아 고담으로 향해갔다.
“끝을 낼 때가 온 것 같아요.”
한동안 배트케이브에서 얻은 자료를 요구하거나 작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던 브루스가 무섭게 내려앉았던 침묵을 깨며 알프레드에게 이상하게 가벼운 어투로 건넨 말이었다. 정전과 동시에 시청 앞에 설치된 시계탑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갑자기 유일하게 불이 들어온 도심 한복판에 있던 전광판에 떠오른 카운트다운 표시가 째깍째깍 움직였다. 그것은 조커가 설치해둔 폭탄의 시간제한을 나타냈다. 폭탄은 화약이 들었거나 혹은 독가스가 들어있었고 도시에 있는 커다란 건물이나 주요 시설, 아니면 하수구나 지하도를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를 해제했다 싶으면 다음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의 반복이었다. 그 외에도 그의 부하들이 멋대로 설치한 듯한 자잘한 폭탄들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조커의 단서를 찾는 동시에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참가했던 배트맨은 자신이 코앞에 닥친 문제들에 달려들기보다 조커 본인에게 주력해야한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배트케이브에서 이루어진 수색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위치를 알아낸 폭탄 중에 원격으로 조작하는 것 외에 해제방법이 없는 폭탄이 원자력 발전소에 부착되어 있었다. 배트맨은 더 늦기 전에 직접 조커를 찾아내야만 했다. 찾아서 직접 끝을 보아야 했다. 이것은 그런 게임이었다. 배트맨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입을 열어 그의 이름조차도 부르기 전에 마지막 전언을 했다.
“친구를 보러 갈게요.”
치직― 그리고 브루스와 연결되었던 모든 통신이 끊어졌다. 그 이후 브루스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사태가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되는 날이 벌써 일주일 정도가 흘러가고 있었다. 복구가 한창인 구역에서는 물론 다른 어디에서도 배트맨과 브루스는 나타나지 않았고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마지막 행선지로 좌표가 찍힌 지점에서 시작해 수색을 진행했지만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알프레드는 이런 정신없는 중에 미안한 일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힘을 빌리기 위해 슈퍼맨을 불러 브루스의 신호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하지만 한동안 눈을 감고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슈퍼맨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미안해요, 알프레드. …배트맨, 브루스를 찾을 수가 없어요.”하고 말을 하는 본인조차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경악과 당혹스러움으로 굳어진 표정은 세간에서 쉽게 ‘신’으로 비유되는 인물의 얼굴에서 보기에는 드문 것이었지만 알프레드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현실적으로 새하얗게 표백이 된 알프레드의 머릿속에는 아이의 시신이라도 찾아야한다는 것 단 하나만이 시끄럽게 메아리쳤다. 이유라면 알프레드가 그의 후견인이기 때문이든가 배트맨의 시신이 괜한 불한당의 손에 넘어갔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사태들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그보다도 알프레드가 슈퍼맨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시신을 눈으로 보기까지, 브루스는 죽은 게 아니니까. 어쩌면 슈퍼맨의 감각조차 회피할 수 있는 곳에서 브루스는 몸을 숨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슈퍼맨은 이전에 조커의 위치를 특정 하는 것을 실패하기도 했으니까, 조커에게 가능한 일이라면 배트맨에게 불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 아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니 알프레드는 빨리 브루스를 찾아내야만 했다. 찾아서, 빨리 찾아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알프레드가 그렇게 소득 없는 수색을 계속 하고 있을 때였다. 직접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브루스를 찾는 알프레드를 대신해 고담 시에 있는 모든 병원들의 기록을 살피던 루시우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의 외곽에 있는 한 작은 병원에 신원불명의 남성이 발견되어 입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락을 받고 알프레드는 곧장 그곳으로 향해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멍하니 침대머리에 기대어 앉아서 창 밖을 보고 있는, 환자복을 입고는 있지만 의아할 정도로 별다른 부상 없이 깔끔한 몸을 하고 있는 브루스를.
“브루스?”
“…저를, 부르신 거예요?”
브루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알프레드를 보았다. 알프레드가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브루스는 자신이 착각한 건가 싶었는지 주변을 기웃기웃 둘러보다가 알프레드가 말을 건 게 분명 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진 다음에 다시 물어보았다.
“누구세요? 저를 아시나요?”
한참만에야 찾아낸 브루스는 너무나도 말간 눈을 하고 있었다.
계란의 껍데기를 까던 브루스는 불쑥 끼어든 알프레드의 부름에 금방 응하며 그가 손에 잡고 내미는 카나페를 망설임 없이 받아먹었다. 얇은 크래커에 무염 치즈와 알프레드가 만든 키위소스가 얹어진 한입 크기의 카나페를 입에 담은 브루스는 얇은 입술을 우물우물 움직여서 바지런히 씹은 뒤 삼켰다. 브루스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맛있어요!”
“다행이군요.”
예전에 브루스가 좋아하던 방식으로 달게 만든 소스가 기억을 잃은 지금에도 그의 입맛에는 맞았는지 브루스는 꼭 어릴 적에 알프레드가 만든 쿠키를 처음 먹었을 때처럼 방긋방긋 웃었다. 별스럽지 않게 반응했지만 알프레드는 희미한 미소를 짓은 채로 만들어둔 소스에서 적당량을 덜고 남는 것을 소독된 병 안에 담았다. 커피 정도야 그런대로 끓일 수 있지만(갈은 콩만 제대로 마련된다면 거의 대부분의 과정을 기계가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전반적으로 요리에 있어서 젬병인 브루스라도 샐러드에 드레싱을 뿌리거나 준비된 재료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 정도야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알프레드는 병의 뚜껑을 꼭 닫았다. 브루스 말고도 요리를 먹을 인원은 있기 때문에 아마 이정도 분량이면 아주 길어야 5일 정도면 다 먹고 없어질 것이다.
다시 까고 있던 계란 껍데기를 벗기면서 브루스는 닭고기가 익고, 스튜가 끓는 중에 알프레드가 카나페를 만드는 것을 잠깐씩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렇게 닮아 보여요?”
“네?”
“브루스… 라는 사람이요. 루시우스, 처음 봤을 때도 날 브루스라고 불렀었죠?”
불현듯 알프레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온화하던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진 듯한 변화에 브루스도 몸을 움찔하고 굳히자 알프레드는 금방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브루스에게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아뇨, 탓하는 게 아니었는데…”
브루스는 커다란 몸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손과 머리를 내저었다. 조커와 있었던 사건 이후 잠깐 행방을 감추었던 브루스를 찾아낸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그간에 억눌렀던 불안이 더불어서 작용하는 바람에 자신의 행동이 조심스럽지 못하다는 자각이 있었지만 그게 브루스에게 드러날 정도라는 건 문제가 있었다. 거기다가 오늘의 자신은 혹시라도 자신이 브루스 웨인에 대한 살인죄로 기소가 된다면 한동안은 이 시설 아이들의 상담을 위해 찾아오는(동시에 알프레드의 부탁으로 브루스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레슬리나 진짜 루시우스(알프레드가 자신의 이름을 빌린 것을 알고 루시우스는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한숨 한 번으로 넘어가 주었다.)를 통해서나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브루스와 직접 만날 수 있게 돼서 어딘가 들떠있다. 민간인이 다 되었군, 페니워스. 알프레드는 속으로 몰래 혀를 찼다.
“음, 이건 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중, 최근에 이 도시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연락이 닿지 않게 된 가족이나 지인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병원으로 달려온 이들이 얼마나 애끓는 울음을 토해냈던가를 지켜보았던 남자는 난감하기보다 오히려 미안한 얼굴로 알프레드를 올려다보았다. 알프레드가 건네준 사진을 조심스럽게 되돌리는 브루스의 손끝을 보면서 알프레드는 눈을 깜빡였다. 물론 지금 브루스의 분위기는 이전의 그가 두르던 것과는 너무 다른 유의 것이라서 그가 스스로 “제가 브루스 웨인입니다.”라고 한다 해도 그와 친분이 없는 이라면 쉽게 믿음이 가지 않을 정도였고 실제로 병원에서도 업무량이 밀려들어오는 중인데다 신원불명의 남자가 브루스 웨인과 닮든 뭐하든 정말 그라면 이런 곳에 저렇게 덜렁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프레드가 다른 사람을 브루스로 착각할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브루스의 모습은 알프레드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 다만 아주 오래 전의 것이었다. 브루스는 단순히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가 브루스 웨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무언가가 알프레드의 머릿속에서 빛났다. 한동안 말이 없는 알프레드의 모습에 브루스는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면서 알프레드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돌려받은 사진 속의 브루스의 모습을 한참 보던 알프레드는 이내 어떤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들어 브루스를 마주보았다.
“제가 눈이 어두워서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실례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알프레드의 모습에 브루스는 더욱더 당황해서 머리를 붕붕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진을 지갑에 담고서 다시 품 안에 들여 넣은 알프레드는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실종된 지인을 찾으러 온 알프레드가 걱정이 되는지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던 브루스는 그런 알프레드의 얼굴에 한결 차분해진 얼굴이 되었다.
“혹시 그 분 소식을 여기서라도 듣게 되면 전해드릴게요. 아… 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음, 제 이름을 말씀드릴 수 없어서 그렇기는 한데…”
멋쩍은 듯 말을 흘리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생각을 위해 잠깐 한 박자 정도 말을 늦추었다가 답변했다.
“루시우스, 루시우스 폭스라고 합니다.”
“루시우스 씨…”
알프레드가 대답한 이름을 브루스는 따라서 발음해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꼭 알프레드를 다독이듯 브루스는 이야기했다.
“브루스 씨를 꼭 찾으실 수 있기를 빌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부터, 알프레드가 결정하기를, 브루스 웨인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 후로 알프레드는 지나가는 길에 들르는 척 브루스에게 찾아갔다. 기억상실로 인해 연고자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난 브루스를 찾는 이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브루스는 자신을 방문하는 알프레드에게 밝은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했고 더해서 ‘브루스’를 찾았는지, 알프레드는 괜찮은지를 물으며 걱정해주고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브루스가 몸에 별 다른 이상이 없는 자신이 계속 병원에 있는 건 가뜩이나 바쁜 요즘 같은 때에 별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무작정 퇴원해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언제까지고 브루스를 찾았다는 여유를 만끽할 수만도 없어졌다. 도무지 고집을 부리는 성격은 기억을 잃어도 어디 가지를 않는 모양인지 기억상실 자체가 몸의 이상이기 때문에 얼마쯤 더 입원해있을 것을 권하는 알프레드를 만류하며 브루스는 “가끔씩 내원해서 상태를 살피는 방법도 있잖아요.” 하고 기어이 병원을 나오고 말았다. 그런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매치스 말론이라는 임의의 이름을 주며 루시우스에게 연락해 그가 임시로 머물 수 있는 한적하고 안전한 장소는 없는지에 대해 물었고 그렇게 브루스는 고담 외각에 있는 보육시설의 관리인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알프레드는 자신이 반듯하게 다려놓은 의복이 아닌 캐주얼한 기성복을 입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얼굴의 브루스를 다시 한 번 차분히 바라본다. 시설 뒤편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숙식하면서 지내는 브루스는 아이들이 좋은지 나날이 즐겁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동안 알프레드는 정말 고집스러울 정도로 브루스에게 웨인으로서 존재하도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의 매무새를 정리하고 또 흐트러졌을 경우 그것을 끈질기게 지적하고는 했었다. 알프레드의 심미안과 더불어 보통 알프레드가 브루스에게 요구했던 차림새에 비해 지금 브루스의 모습은 빈말로도 만족스럽다 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알프레드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왜냐면 브루스는 매치스 말론이었으니까. 이것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됐다.
“나이가 들어 자꾸 말실수가 늘어서 큰일입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에게 장난말처럼 가볍게 말했다. 그런 알프레드의 태도에 어깨에서 힘을 살짝 뺀 브루스는 자기도 가끔 시설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바꿔서 부르고는 한다며 대꾸해주었다. 요리가 끝난 음식들을 그릇에 사람 수 만큼 나누어 담고 씻은 채소와 썬 삶은 계란을 샐러드 볼에 넣어 드레싱을 뿌리는 알프레드의 옆에서 스푼과 포크를 준비하던 브루스가 한참 뒤에 조용히 이야기했다.
“브루스가 루시우스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인가 봐요. 종종 이름이 잘못 튀어나올 정도로요.”
살짝 눈을 크게 뜨고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린 알프레드를 보면서 브루스는 아몬드 빛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어보였다. 브루스는 웃는 얼굴로 알프레드의 실수가 괜찮은 것이라고,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이런 브루스의 얼굴을 그가 아주 어렸을 적 이후로는 본 기억이 없었다. 토마스와 마사가 세상을 떠나고 배트맨이 된 후로 브루스의 얼굴에는 거두어지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그림자는 ‘앎’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중한 것을 쉽게 빼앗아가는 세상을 알고 있는 브루스는 언제고 살짝 음영이 진 미소를 지었다. 알프레드는 평생이 가도 그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개는 것은 볼 수 없을 거라고, 그것이 삶의 무심함과 같은 거라고 체념한 상태였다.
알프레드는 다른 대꾸의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두말할 것 없이 소중하다. 브루스의 웃는 얼굴을 위해서라면 배트맨도 그리고 브루스 웨인조차 죽일 수 있을 만큼. 오히려 지금까지 용케도 별 탈 없이 배트맨을 수행하는 브루스를 지켜봐왔다고 스스로도 멀거니 생각할 정도로 알프레드는 지금 눈앞에 있는 순진한 남자가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미어졌다. 알프레드는 손을 들어 아까 브루스에게 카나페를 줬을 때 입술 끝 수염에 몇 안 되게 묻은 크래커 부스러기를 털어주었다. 조용히 뻗어진 뒤 가볍게 거두어지는 알프레드의 손을 보고 눈을 둥글게 뜬 브루스는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뭐 묻었었어요?!”하고 외치며 부끄러운지 볼을 붉히며 몸을 내뺐다. 그런 브루스의 모습에 알프레드는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홀로 동굴 내부를 정리하고 있던 알프레드의 등 뒤로 불쑥 말소리가 들려왔다.
“불기소 축하해요.”
“슈퍼맨.”
하지만 알프레드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뒤를 돌아 공중에 떠서 자신을 바라보는 슈퍼맨을 맞이했다. 슈퍼맨은 무언가 불만이 있는지 눈썹을 찌푸린 채 알프레드를 보다 비꼬는 듯 이야기했다.
“아니면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유감스럽다고 해야 하나요?”
“무죄추정의 원리가 고담에서도 잘 작동되는 모양입니다. 유감이고 말고 할 것도 없겠지요.”
알프레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땅 위에 가볍게 착지한 슈퍼맨은 팔짱을 끼며 딱딱한 눈으로 침착하기 그지없는 알프레드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거죠? 브루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웨인 주인님과는 관계없습니다. 이미 없는 분께 무슨 혐의가 있다고 그러시는지요.”
“거짓말 말아요.”
꼭 으르렁 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슈퍼맨은 알프레드 앞으로 한발자국 가까워졌다. 새파랗게 빛이 나는 것 같은 눈동자가 위협적일 법도 했지만 알프레드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브루스, 살아 있잖아요.”
“주인님의 바이탈 사인을 찾을 수 없다고 하셨던 건 슈퍼맨, 당신이었을 텐데요.”
“그래도 브루스는 살아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브루스가 이야기 했다. “참, 전에 하늘에서 슈퍼맨을 보았어요.” 알프레드가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으로 털어준 후로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 안절부절 못하던 브루스가 한참 만에 꺼낸 화제였다. 알프레드가 무심하게 “슈퍼맨이 왔다갔나요?”하고 되묻자 브루스는 “음… 정확히는 스쳐 갔다고 해야 하나… 무슨 일인지 여기 하늘에서 잠깐 멈춰 있다가 다시 날아갔어요. 도시 복구에 일손이 부족하다는데 그걸 도우러 왔던 길인 모양이에요.”하고 제법 자세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브루스의 앞으로 득달같이 다가가지 않은 걸 고맙다고 해야 할까. 이나저나 이 외계의 젊은 히어로는 상냥한 인물이라고 알프레드는 생각했다.
“제가 무슨 이유로 경찰서에 갔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브루스를 죽였다고요? 하…”
슈퍼맨은 코웃음을 친다. 고든 청장도 그렇고 슈퍼맨도 그렇고… 그렇게 알프레드 페니워스가 브루스 웨인을 살해한다는 게 있음직하지 않은 일인 걸까? 언론에서는 거참 그럴싸하다며 덤벼들었는데 말이다. 별다른 동요 없이 고요하게 저를 보는 알프레드에게 슈퍼맨은 답답한 듯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다시 돌아와야 해요.”
“브루스 웨인은 죽었습니다.”
“다이애나의 올가미면 브루스의 기억이 돌아올지 몰라요. 아무 시도도 안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원더우먼께서는 전선에서 물러난 이를 억지로 끌어오는 일은 하시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는 지지 않고 또박또박 슈퍼맨의 말에 꿋꿋이 대꾸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슈퍼맨은 얼굴을 더욱 찌푸리며 결국 푹하니 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는 지금쯤 배트맨의 그 성질이 어디에서 온지 알겠다며 속으로 납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리그에는 배트맨이 필요해요. 고담은 물론이고요.”
“전에 배트맨에게 그 스스로를 묻으라 조언해주셨던 분의 말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군요.”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끝내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인 슈퍼맨에게 알프레드는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슈퍼맨. 당신이 옳았습니다.”
언뜻 달래는 것도 같고 한편으론 조용히 못을 박는 것 같은 투로 말을 시작한 알프레드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날카로운 슈퍼맨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애초에 배트맨이라는 자경활동 자체가 양날의 검 같은 것이었습니다. 배트맨이 있기에 지금의 저스티스 리그가 만들어졌지만 이번의 사태 역시 배트맨이 있기에 생겨난 것이지요. 거기다 언제까지 웨인 주인님께서 배트맨으로 있으실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자격지심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실제 웨인 주인님께서는 아무리 극단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무예에 뛰어나시다고는 하나 평범한 인간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몸이 성해서 어떻게든 지내왔지만 앞으로는 어떨 것 같으십니까. 주인님께서 저만큼의 나이를 먹고, 그보다 더 해가 지나면 어떻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뿐이지 배트맨의 부재는 언젠가는 있을 일입니다. 외적인 이유로든 내적인 이유로든 배트맨은 어느 시점에인가는 사라지게 되어있어요.”
“하지만 그게 왜 지금이어야 하죠? 무엇보다 브루스 본인이 이런 걸 바랄 것 같아요?”
“전 이미 오랫동안 도련님의 억지를 따르며 살아왔습니다. 배트맨에 의해 그동안 브루스 웨인이 죽었으니 이제 배트맨이 브루스를 위해 죽을 차례입니다. 아니 그 아이를 위해서면 브루스 웨인도 죽어있는 편이 낫겠죠. 이 정도 고집을 부릴 권리가 제게는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퇴직금을 대신해서요.”
“그래서 당신이 브루스를 죽였다고 경찰서에 간 겁니까? 혹시라도 브루스가 돌아와도 더는 당신이 돕지 못하게 하려고요? 브루스의 발을 묶어 놓으려고?”
알프레드는 조용히 미소만 짓는다. 입술을 꾹꾹 깨물며 여전히 불만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슈퍼맨은 흔히 전능하다고 일컬어지나 역시 죽을 수도 있는 목숨인 만큼 많이 여린 존재이다. 알프레드는 새삼 슈퍼맨의 나이가 자신이나 브루스에 비해서 한참 어리다고 지각한다.
“저는 납득할 수 없어요.”
한동안 분을 삭이듯 침묵을 이어가던 슈퍼맨이 지친 듯이, 하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브루스였다면 풀이 죽은 듯한 그의 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제 성질을 꺾어줄 법도 했지만 인생의 긴 시간을 브루스의 집사로서 지내왔던 알프레드는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그런 슈퍼맨의 고집을 물렸다.
“외람되지만, 납득도 이해도 바라지 않습니다. 필요하지도 않고요. 죽음은 그런 거라고 당신도 아시겠지요. 모든 것이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남은 이들의 욕심입니다. 당신은 웨인 주인님의 신호를 발견하지 못하셨지요? 그게 답입니다. 브루스 웨인은 정말 죽었던 거예요. 그리고 슈퍼맨.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고 배트맨 없이도 세상은 어떻게든 되기 마련입니다.”
“그럼 당신은요.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은 뭐죠? 이게 당신의 욕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배트맨에 비해 무르다 뿐이지 슈퍼맨도 그렇게 놀놀한 성질은 아니라서 젊은 히어로는 마치 알프레드의 허점을 잡아낸 듯 지지 않고 집요하게 물었다. 그럼에도 노련한 집사는 아랑곳없이 희미한 미소를 그대로 유지할 뿐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주인이 말갛게 웃는다.
“헉!”
그때 매치스는 눈을 떴다. 조커라는 빌런이 일으킨 대대적인 사건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악몽을 꾸는 이안을 달래다가 오늘도 방이 아닌 아이들 방에 인접한 거실에 놓인 소파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었던 매치스는-어째서인지 이 이름은 이상할 정도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갑자기 눈동자로 몰려드는 하얀 빛이 아려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부신 아침이었다.
또 같은 꿈을 꾸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뒷골이 선득해지는 불쾌함만은 오랫동안 남아있는 이 꿈을 매치스는 병원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계속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안처럼 자신 역시도 그 사건에 의해 신경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매치스는 정확히 사건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서 그에 자신이 어떻게 휘말렸기에 기억이 누락된 걸로도 모자라 매번 똑같은 꿈까지 보게 된 건지 알지 못했다. 매치스는 고담이 겪은 재해를 지금에서 보고 듣는 상황들로 당시의 참혹함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일이 바빠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풍문처럼 듣기로 이 도시에서 꽤 중요하게 자리 매김 했던 기업의 회장도 실종이 되었다는 것 같았다. 재력을 가졌다는 이도 피해가지 못한 재난이라면 보통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도대체 얼마나 절박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매치스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어딘가 비겁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아침에 미취학아동들을 전문적으로 돌봐주는 복지사가 도착을 하고, 교사 내부가 어느 정도 정리가 돼서 다시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 학교로 몇몇 아이들을 배웅하고 나면 매치스는 건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시작했다. 본래는 지금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시설에서 근무하며 아이들을 돌보았었지만 사건 이후로 더 사람 손이 절박해진 곳으로 파견되거나 아니면 그가 누군가를 돌보기에 여의치 않게 되어 퇴직을 하거나 해서 매치스는 관리인으로서 두세 사람의 일을 추가로 해야 했다. 거기다 매치스 이전에 있던 관리인도 아마 사건에 휘말린 건지 갑작스럽게 그만두어서 회계장부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못해 매치스는 시설에 온 첫날부터 영수증을 뒤지며 한동안 컴퓨터 앞에서 씨름을 해야 했다. 특히 재난이후 구호물품이나 지원금에 대한 신청 공문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물론 바쁘긴 했지만 그 첫 주는 매치스에게는 정말 눈 돌아갈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매치스가 이런 유의 작업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나아지고 있다고 매치스는 생각했다. 갑자기 새롭게 찾아온 관리인이 낯설어서 경계하느라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어딘가 겁에 질리고 불안해보이던 아이들이 지금은 제법 재잘재잘 떠들며 앞뜰에서 뛰어놀기도 했다. 조금 나이가 있는 아이들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의 이야기보다 친구의 일화나 어디선가 주워들은 농담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섬으로 이루어진 고담과 미국의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가 끊어진 이후로 지원이나 물자의 수송이 원활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히어로들의 도움 아래 급한 불은 끌 수 있었고 지금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이 복구가 되었다고 했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도 조금씩이나마 일상이 돌아오고 있다고 학교로 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매치스는 생각했다. 이안도 잠을 보채는 시간이 전에 보다 많이 짧아진 걸로 보아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다. 물론 매치스 본인의 꿈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지만.
어제 오랜만이 루시우스의 얼굴을 본 매치스는 자신이 꾸는 꿈에 대해 그에게 말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냥 이렇게 반복되는 꿈이라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걸까 싶어서 그게 자신만이 느끼는 건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선이 날카롭지만 어딘가 온화한 분위기를 띠던 루시우스가 ‘브루스’의 이름이 나온 순간 기운 없이 복잡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말을 아끼기로 마음을 바꿨다. 매치스가 이전에 사진으로 잠깐 확인한 바에 따르면 브루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닮지 않았지만 루시우스의 눈에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입원해 있을 당시 종종 자신을 찾아왔던 것도, 지금 이렇게 짬을 내서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하고 매치스는 추측하고 있다. 이제까지 루시우스의 입에서 브루스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 그의 지인은 여전히 실종된 상태일 것이다. 그런 그에게 괜히 뒤숭숭한 꿈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루시우스가 상담가도 아닌데 별것 아닌 것마저 미주알고주알 토로하는 건 조금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루시우스는 묘하게 자신을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어제 말을 아낀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꽤 잘한 일인 것 같다. 오늘은 오후에 의사인 레슬리가 아이들을 상담해주러 온다. 정 마음이 걸리면 그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매치스는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햇빛을 맞추기 위해 실내에 있던 화분 몇 개를 바깥으로 꺼내 놓았다. 그러다 정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검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니 자전거를 끌고 온 신부가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신부가 먼저 매치스를 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무슨 일이신가요?”
“얼마 있으면 부활절이라 저희 교회에서 있을 행사에 혹시 형제님과 아이들이 참여하실 마음이 있는지 여쭈고 싶어서 왔습니다.”
젊은 나이의 신부는 웃으면서 자신이 달려온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끝에는 십자가가 있는 성당의 첨탑이 있었다. 자신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착실하게 고개를 돌리는 매치스에게 신부는 자전거의 바구니에 담긴 종이뭉치 중에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깔끔하게 프린트 된 전단에는 알록달록한 달걀이 있는 바구니를 든 토끼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행사 내용이나 일시, 시간에 대해 적혀있었다. “정말 금방 있으면 부활절이네요.” 전단을 보면서 매치스는 맞장구치듯 이야기했다.
“그간 슬픈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렇기에 아이들과 작은 기쁨이라도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려운 때에 우리가 해야 할 건 믿음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 것이니까요. 비록 교회에서 하는 행사입니다만 너무 종교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동네 행사라고 보아주시면 좋겠어요.”
실제로 전단지에 쓰여 있는 행사 내용은 미사나 어린 아이들이 준비하는 종교적인 극에 대한 이야기보다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놀이나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도움을 주거나 할 수 있는 일종의 집단상담 비슷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좋은 생각인거 같아요.”
전단지의 내용들을 살피던 매치스가 호의적으로 이야기 하자 신부는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어딘가 의기양양한 듯한 웃음이 순간 매치스의 머릿속에 이상하게 와 박혔다. 새삼 다시 확인해본 신부의 얼굴은 아직 앳된 끼가 남아 있어 젊다는 말보다 어리다는 말이 조금은 더 어울려보였다. 다만 그런 신부의 앞머리에는 하얀 새치가 나있었다. 문득 매치스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 이건 단순한 기시감인걸까? 기억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그럴 리가 없는데도 웃고 있는 신부의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형제님?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불현듯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매치스가 의아했는지 신부가 묻자 그때서야 자신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매치스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할게요.”
매치스의 말이 끝나고도 아주 잠깐 그런 그를 지켜본 신부는 그럼, 평안하세요. 살짝 인사를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매치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멀어져가는 젊은 신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느 나무에서 날개를 쉬고 있던 작은 새가 맑게 울었다.
빗줄기가 끼인 듯 깨져버린 화면이 해독되지 않는 소음과 함께 액정을 가득 메운다. 고담에 거주하는 몇몇 주민들은 제 각각의 위치에서 거의 동시에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으며 전파를 수신 받는 기기를 툭툭 두드렸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보다 내부가 섬세해진 기계에게 과연 그들의 그런 행동이 오작동을 고치는데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는 의문이지만 얼마안가 노이즈는 사라지고 다시 한껏 진지한 얼굴로 리포트를 읊는 아나운서나 터치다운을 극적으로 실패한 풋볼 팀, 미치도록 귀여운 고양이의 목울음 소리, 제인과 존의 밀고 당기기가 어떻게 되었는가 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조커와 그를 위시한 반체제 무리들로 인해 미국 본토와 단절되고 사회 전반이 마비되었던 고담은 사건 이후 3개월가량의 시간이 지나가자 겉보기만큼은 거의 이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리는 이어지고 통신은 원활하며 부서진 건물은 수리되고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 내부를 좀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도시에는 혼란이 무자비하게 긁고 지나간 시뻘건 상흔이 군데군데에 크고 작게 산재해 있는데 처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스마트폰 등에서 발생한 노이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방송국, 기지국, 발전소, 경찰서, 소방서로 원인을 밝히라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바삐 거는 시민들의 모습이 그랬다. 조커가 방송국 전파를 이용해 영상을 퍼뜨렸던 이후로 이어졌던 아비규환을 사람들은 평생이 흘러서야 간신히 잊을까 말까 할 테다. 그런 시민들의 불안을 안정하기에 시정에서는 물론이고 어느 힘 있는 기관에서도 이렇다 속 시원한 답은 내어주지 못했고 그들 모두가 하나 같이 “원인을 밝히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많은 시민들이 분통과 울분을 터뜨렸지만 그마저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자신이 가진 스트레스에 스스로 지쳐버린 이들은 하나둘 체념하고, 자신이 밟고 선 고향이라는 곳이 고담이라는 사실에 저주하며 더러는 일부러 무심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인정해버렸다. 시를 운영하는 예산은 거의 대부분이 그 가문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충당된다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일컬어지던 대부호가 실종되고 더는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는 달이 뜨는 도시에서 그럼에도 사람들은 제 삶을 이어가야한다. 어쨌든 어제가 지나 오늘이 왔고, 이 오늘이 지난다면 내일은 오고야 마는 것이므로.
매치스 말론은 멀거니 서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주알 같은 흑색의 노이즈가 기묘한 패턴을 그리고 지나간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았다. 뇌리 속에서 낯선 이가 소곤소곤 말이라도 건넨 듯이 귓가가 아리는 것처럼 간지럽다가 뒷목으로 소름이 옮았다. 비명 같은 웃음을 남기고 암전해버린 매치스의 기억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순간과 순간 사이에 그르릉하고 제 존재를 어렴풋 보이고는 한다. 그저 매치스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할 뿐.
“매치스 씨?”
카트의 앞쪽에서 방향을 잡으며 걸어가던 루시우스가 우뚝 멈춰선 매치스를 돌아보며 의아한 듯 이름을 불렀다. 커다란 어깨를 잠깐 움찔하고 떤 매치스가 중후한 안경테 너머에서 자신을 살피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한들한들 웃었다. 매치스는 조금 힘을 넣어 다시 카트를 앞으로 밀었다.
보육원에 자원봉사자와 보육사가 머물고 있는 지금, 매치스는 필요한 생필품과 소모품을 사기 위해 장을 보러 나왔다. 이전 관리인이 보육원을 돌보고 있었던 적에 거래하던 업체가 온갖 종이무더기 속에 있던 메모에 쓰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영 미덥지 못할뿐더러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소비되는 물품은 특정한 곳에 신청해서 물건을 받고 싶었지만 요즘처럼 도시 재건으로 정신없는 시기에 굳이 기름 값을 들여 작은 보육원에까지 상품을 도매가로 넘기고 싶어 하는 업주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매치스는 여유가 되는 때를 잘 찾아 발품을 팔아야했다. 그렇지만 직접 이것저것 살피면서 보다 아이들에게 괜찮은 것들을 구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치스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고 덧붙여 오늘처럼 루시우스가 그의 차까지 동원해서 함께 나와준 날에는 불평의 여지가 없었다. 임의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매치스에게 자동차라는 이동수단은 새삼 정말이지 편리하기 짝이 없는 기계인 것이다. 물론 이런 정신없는 때에 자신을 하나하나 돌보아주는 루시우스가 고마운 건 두말할 것도 없었고.
세제가 있는 통로로 나아가던 중 루시우스는 걸음을 슬쩍 늦춰서 매치스의 옆으로 왔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또박또박한 영국식 발음으로 루시우스가 작게 물었다. 코와 턱을 그리는 선이 선명해서 냉랭한 인상을 가진 그는 오히려 누군가를 보살피고 걱정하는 일이 몸에 아주 깊이 밴 것 같았다. 여전히 바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보육원을 찾아오는 루시우스는 들떠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물론이고 다 자란 매치스를 어르는 일에도(단어가 영 낯부끄럽지만 그의 행동을 달리 설명할 낱말이 없었다.) 천부적이었다. 한 세 번 정도는 그래도 성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어 루시우스에게 한소리를 구시랑 하기는 했지만 매치스의 행동에 루시우스가 그저 눈꼬리를 희미하게 접어보이자 자신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 같아져서 그만두어버렸다. 과거에 루시우스는 어느 집에서 아이의 보디가드로 일했던 적도 있다고 했으니 아직 그때의 습관 중에 하나가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알프레드의 물음에 매치스로 불리는 브루스는 그저 고개를 내젓고 있다.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폭신하게 흔들렸다. 거의 본능처럼 브루스의 거짓말을 잡아낼 수 있는 알프레드에게 지금 브루스는 그저 말갛게 비쳐 보일 뿐이다. 그에 알프레드는 안도하면서도 한편 박쥐의 무리로서 익혀온 불신이 남아 짐짓 엄격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게 된다.
정식적인 뉴스 보도도 이렇다 할 부고 선언도 없었지만 배트맨의 부재가 알음알음 퍼져나간 후로 제 세력을 갖춘 이들이 하나둘 고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박쥐가 스스로를 구심점으로 하여 잡아놓았던 인위적인 질서가 흩어졌고 오랜 세월 고담을 근거지로 하던 팔코네와 같은 마피아 집단이나 배트맨과 더불어 조커 사태를 수습했던 뿌리 깊은 빌런들, 그리고 새로 세력을 키워나가는 다양한 신흥 갱까지 고삐가 풀린 채 목표를 잃고 금방이라도 다시금 도시를 혼돈으로 물들일 듯 웅성이었다. 뒷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이제 싸움은 종종 바깥에도, 밝은 낮에도 눈에 보일만큼 미어져 나왔지만 저스티스 리그라는 세계적인 지지와 협력을 필요로 하고 또 지구인들의 정신적 상징과도 같이 된 집단으로 이름 붙여진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때그때 눈에 보이는 것을 잘라내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나마 이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라고 그에게 어울리지 않은 무거운 숨을 내쉬는 다이애나에게 알프레드는 덤덤히 이야기했다. 고든을 비롯한 고담시경은 그저 부디 일이 너무 심각하게만 돌아가지 않기를 헛되게 바라며 나날이 쏟아지는 과중한 업무에 몸서리를 쳤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에 ‘그’가 등장한 것이다. 어둠과 어둠의 사이에서 교활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움직이는 그의 수법이나 기술은 박쥐의 그것과 참 많이 닮아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철없이 동경을 품은 겁 모르는 이의 흉내정도로 여기던 자들도 하루, 이틀 다시금 나타나는 자경단에게서 차츰 그들이 배트맨으로부터 학습한 공포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반면 배트맨과 관련해서 잔뼈가 굵은 적들은 그가 박쥐와는 다른 누군가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레드후드’라 부르며 새로운 자경단의 호칭을 정착시켰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을 방해하는 새 자경단의 등장보다도 배트맨의 활동을 다른 누군가에게 침해받은 것을 무척이나 불쾌해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언젠가부터 리그와 머리를 맞대는 일보다 독단적으로 활동하는 일이 많아진 슈퍼맨도 불쑥 알프레드를 찾아와 조각 같은 눈썹을 찡그리며 “그는 누구죠?” 하고 물을 만큼은 레드후드의 등장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오랜 세월을 브루스 웨인의 후견인이자 집사로서 그리고 배트맨의 공범으로서 지내왔던 알프레드인 만큼 가장 처음 새로운 자경단이 배트맨의 수법과 닮아있다는 점을, 그러면서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알아챘지만 혹시나 하는 가정이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더구나 요즘처럼 꿈만 같았던 일상이 기이한 형태로나마 자리 잡기 시작한 때에는 더더욱 알프레드는 보다 집요하고 예민해졌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브루스의 기억이 돌아온 거라면? 이 기회에 브루스 웨인이라는 테를 벗어버리고 보다 거리낄 것 없이 자경활동을 영위하기로 마음먹은 거라면? 생각을 이어갈수록 그것들 모두 그럼직한 가정들이었고 알프레드는 한동안 브루스와 브루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얻은 거라고는 좀처럼 늘지 않는 요리 실력으로 아이들에게 실컷 놀림을 당하는 브루스의 모습과 브루스에게서 달리 기억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는 레슬리의 소견, 부활절 이후로 종종 교류하는 작은 성당의 인자한 신부정도였다.
레드후드라는 인물이 누가 되었던지 간에 브루스는 아니라는 점에 짧게 안도한 알프레드지만 여전히 걱정 모두가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불과 이틀 전 시청에서 내려오는 지원금과 보육원 사업 연장 신청을 위해 여러 증명서류들과 명세서를 발급 받으러 시내로 갔던 브루스는 은행에서 4명의 무장 강도를 맞닥뜨렸다. 비록 브루스가 기억을 잃고 두 번째로 평온한 삶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알프레드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말로 많았다.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적절히 선별하여 고담시경과 저스티스 리그로 넘겨야하고 리그를 꾸려가기 위해 만들어진 회계를 돌보며 알프레드의 독단으로 정말 얼결에 회장 대리를 떠맡게 된 루시우스의 서포트 또한 해야 했다.(알프레드가 스스로 브루스 웨인의 생사에 관련해서 어떤 일을 저질렀다 선언하는 바람에 직접 웨인 엔터프라이즈 일에 관여하지 못하게 된 터라 일이 보다 복잡해져버렸다.) 그런 스케줄 속에서 예전처럼 일일이 브루스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못해도 통신으로라도 이어져 있던 전과 다르게 지금 알프레드가 브루스와 두고 있는 물리적인 거리는 자연히 정보의 지연을 가져오게 되었고 알프레드는 ‘또다시’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야 제가 덮던 담요를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브루스를 부랴부랴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강도와 마주한 브루스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마치 오래도록 훈련받은 사람처럼 담담했다. 거기다 브루스는 강도의 존재보다도 경찰들이 출동하기 전에 도착해서 무장 강도들을 제압했던 자경단, 레드후드에 대해서 보다 길게 알프레드에게 이야기했다. 알프레드는 그 모든 게 탐탁지 않았다. 기어이 위험을 배제할 수 없는 이 도시도, 브루스의 위험에 늘 한 발 늦는 자신의 평범함도, 아이가 정체불명의 자경단과 마주친 것도 모두. 나이가 들어서 늘어난 건 이 도련님에 대한 욕심뿐이라고 알프레드는 한숨을 삼킨다.
“정말 별 일 없으신 겁니까?”
얼마 전에 매치스가 무장 강도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듣고 달려온 후로 루시우스는 줄곧 어딘가 극성맞을 정도로 걱정을 한다. 저자극 세제와 친환경 세제 사이에서 기웃거리며 깨알 같은 글씨로 죽 늘여진 성분표를 살피던 매치스가 고개를 돌려 앉은 자세에서 루시우스를 올려다보았다. 루시우스의 입에서 아직도 ‘브루스’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 아마 루시우스는 아직도 그를 찾는 중일테다. 이렇게 섬세하게 하나하나를 살피고 신경을 기울이는 사람이 지인을 잃는다면 도대체 얼마나 걱정하고 고민할지 매치스는 통 알 수 없어서(왜일까, 매치스가 처음 그를 보았을 적보다도 지금의 루시우스가 훨씬 안정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루시우스는 감정을 쉽게 보이는 유의 사람이 아닌지라 속사정을 혼자 삭이고 있는 것이라고 매치스는 생각했다.) 오랜 고민을 끝내고 파란 통에 들어있는 세제를 집어 자리에서 일어서며 빙긋 웃었다.
“다 괜찮아요. 레슬리 선생님이 이안이 아주 좋아졌다고 했어요. 다른 아이들도 건강하고요. …나도요.”
마치 다독이듯 술술 이야기 하던 매치스가 말을 끝내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 말을 늦추었다. 딱 그 타이밍에 곱슬머리에 체크무늬 니트 조끼를 입은 남성이 중얼거리며(“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바삐 둘 사이에 위치했던 상품을 집어 갔다.
“톰킨스 선생님께서 충분히 안정을 취해야 한다 말씀하신 것 기억하시겠죠? 퇴원도 그렇고 당신은 도통 고집이 세서…”
루시우스가 드물게도 툴툴 거리는 것처럼 말을 하며 다음 목록에 올라온 물건을 찾기 위해 카트를 이끌었다. 매치스는 그저 미소 띤 얼굴로 그의 하소연을 들을 뿐이다.
아이들은 지역사회의 이해와 봉사를 이유로 고담 여기저기로 담당자의 손에 이끌려 나가버렸고 바지런히 보육원의 청소를 끝낸 매치스는 부엌 한켠에 수북이 쌓인 크랜베리 쿠키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몇 개 포장해서 바깥으로 나왔다. 루시우스는 정말이지(매치스로서는 조금 약이 오를 만큼) 요리를 잘하는데 거기다가 도대체 어떤 요술을 부리는 건지 늘 매치스 입맛에 꼭 맞아떨어지게 간을 했다. 매치스는 음식에 대해서 조예가 있는 편이 아니었고 자신만이 입에 대는 음식이라면 먹고 큰일이 나지 않을 것 같은 한 어쨌든 씹어 삼킬 수 있다는 주의였지만-그래서 요리가 그렇게 형편이 없는 걸까?- 그런 애매모호한 매치스의 식성을 호불호로 나누고 예리하게 그 사이에서 호만을 끄집어낼 만큼 루시우스의 솜씨는 대단했다. 그러니 매치스는 요한 신부에게도 그가 만든 쿠키를 나누어 주고 싶었다. 혼자만 알 고 있기에는 아까운 것이니까, 괜히 매치스가 자랑하고 싶어질 만큼-정말 왜일까?- 루시우스는 대단하니까, 전에 신부가 마들렌을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을 보았으니까.
헌금도 많은 날에야 10달러가 들어 올까말까 한 성당은(“여기서 하는 사업이 있기는 해.” 시설을 어떻게 꾸려나가는가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던 중 신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잠깐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와선 라벨이 붙지 않은 와인병의 코르크를 땄다. 근처 머그컵에 아주 약간 와인을 따른 신부는 한 번 마셔보라는 듯 매치스에게 잔을 건넸고 매치스는 의심 없이 그것을 입에 댔다. …그리고 와인은 정말 끔찍하게 떫고 맛이 없었다. “못쓰겠지?” 쿨럭쿨럭, 목 위로 훅 끼쳐온 알코올에 밭은기침을 하는 매치스에게 신부는 짓궂게 웃었다.) 역시나 주위의 풀벌레나 새의 소리 정도가 소란스럽다. 익숙하게도 인기척이 없는 돌길을 따라 걸으며 매치스는 성모 마리아상 앞을 지나 성당 내부로 들어서는 곳까지 다다랐다.
그때, 또각또각 날카로운 굽이 바닥을 경쾌하게 밟아내며 어두운 저쪽에서부터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성당을 찾아오는 건 시간 죽일 곳을 찾지 못한 노인들과 쉼터를 정하지 못한 노숙인 정도로 알고 있는 매치스에게는 낯설고 예상하지 못한 기척이었다. 예배당에서부터 걸어 나온 여자는 이 도시의 흐린 하늘 아래 차있는 가시광선 아래로 점차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당당히 펴진 어깨와 곧게 뻗은 시선이 자신의 죄를 고해하기에도 부활한 이를 찬미하기에도 영 어울리지 않다. 짙게 자리한 강인한 눈매가 인상적인 여자는 매서운 굽을 거리낌 없이 울리며 성큼성큼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그리고 매치스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 녕하세요.”
낯선 사람을 염치도 없이 빤히 보고 있던 게 부끄러워서 목을 살짝 움츠리며 매치스가 조금 샌 소리로 인사말을 했다. 척추를 반듯하게 세워 시선 그 너머를 보고만 있을 것 같은 여자는 한 번 눈을 감았다 뜨고 매치스를 힐끗 보며, 쿡쿡, 바람을 삼켜 깊고 부드럽게 웃는다. 귓가로 스민 가벼운 진동에 매치스가 목을 바로 했을 때 여자는 이미 홀연하게 저만치로 가버렸다.
“매치스?”
바람을 흔들고 유유히 사라진 모습을 왜인지 한참 바라보고 있던 매치스를 젊은 남자가 부른다. 본래 매치스가 향하던 방향으로 고개를 원위치로 하여 그는 막 사무실로 향하려던 신부와 마주했다.
“신부님.”
매치스는 반사적으로 반가움이 가득한 미소를 담았다.
“제이면 된다고 했잖아.”
장난스럽게 눈썹을 찡그린 신부, 제이는-그의 세례명이 요한(John)이기 때문일까?- 가볍게 매치스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매치스는 그저 실없이 한들한들 웃었고 제이는 매치스를 사무실 쪽으로 안내했다. 절실한 도둑에게조차 잡동사니로 비칠 뿐인 짐밖에 없는 곳이라고 제이는 이야기했지만 그는 사무실을 비우는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문을 잠그고 나왔다. “습관 때문인 거 같아.” 하고 지난 날 제이는 말했다. 찰칵찰칵, 두 금속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얼마 뒤 딱하고 열쇠가 자물쇠 안에 있던 빗장을 완전히 밀어내는 경쾌한 마찰음이 울렸다.
“아까 나가신 분이랑 무슨 이야기했어?”
수수하게 꾸려진 실내로 손짓하며 제이는 심상하게 물었다.
“아니.”
이 공간과 너무나 이질적이라 풍경에서 오려낸 듯한 여자를 어렵지 않게 떠올리며 매치스는 한두 번 고개를 저었다.
“그 분은 원래 여기 오시니? 제이 너와 알아?”
“그냥—”
전기포트와 찻주전자가 있는 곳으로 제이가 걸어가자 따라 걸음을 움직이는 매치스에게 제이는 손짓으로 테이블을 가리키며 흘러가듯 답했다.
“아주 가끔가다 오셔.”
제이가 답을 덧붙이지만 포트 안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울려서 분명하게 도달하지는 않는다. 작은 바구니 안에 정리된 티백 중 하나를 꺼내 찻주전자에 든 끓은 물에 담근 뒤 제이는 찻잔 두 개와 주전자를 쟁반에 담아 매치스를 앉힌 테이블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키보다 훨씬 작은 로우테이블 위로 쟁반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은 제이가
“왜? 반하기라도 했어?”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시답지 않은 농을 했다. 매치스는 화들짝 놀란 듯 몸을 뒤로 조금 빼며 고개는 물론 양손마저 저어가며
“그런 거 아니야.”
급하게 대꾸했다. 키득키득, 신부는 마치 장난기 많은 새처럼 웃는다.
매치스가 제이가 가져온 찻잔을 서로의 앞에 올려두고 티백 안에 든 차가 적절히 우러나기를 아주 잠깐의 시간을 기다리는 둘 사이에 온화한 침묵이 앉았다. 대화도 무엇도 오고가지 않았지만 그저 편안하고 안락한 수많은 초들의 집합이었다.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수색을 확인한 제이는 오른손으로 주전자의 손잡이를 들어 차를 따르려고 했다. 그러다 주전자를 잡은 그의 동작이 짧게 우뚝 멈추어 선다. 제이는 홀연 손을 거두어들인 다음 반대쪽 손에 무게를 실었다. 아까 쟁반을 내려놨을 때도 제이의 오른손가락이 조금 뻣뻣하게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던 것을 떠올린 매치스가 이번에는 넘어가지 않고 물었다.
“다쳤니?”
주전자를 건네받으려는 매치스의 손을 피하며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높이 있는 데 닦다가 조금 결렸어.”
제이는 평범하게 대답했지만 매치스는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데 필요한 골격, 신경, 근육이 어떻게 이어져있고 작용하는지를 떠올리며 마치 오랜 습관처럼 익숙하게 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취합하고 배열하여 진실을 염탐했다. 친하게 지내는 지인을 걱정한다고 보기에 아주 잠깐 매치스의 시선은 외과의사의 매스마냥 벼려져 있었다. 그리고 매치스는 그런 자신의 시선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흘 전, 필요한 일들을 보기 위해 시내에 갔던 매치스는 은행에서 무장 강도를 맞닥뜨렸다. 사전 조사가 충분했던 건지 은행 직원 중에 내통자가 있는 건지 보안 카메라의 사각에서 평범하게 사람들의 사이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은 가지고 있던 화기로 무장을 하고 복면을 쓴 얼굴을 뻣뻣이 들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힘없는 경비원을 살해했다. 은행 내에 청원경찰이 한 사람 있기는 했지만 이제 막 배지를 달고 바쁜 중에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없이 덜컥 배치부터 받아버린 젊은이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돼서 그저 사람들을 제 좁은 등 뒤로 감추는 것이 전부였다.
“어려울 땐 서로 나눠야지 않겠어? 응?”
무리 중 두목으로 보이는 인물이 복면 쓴 얼굴을 과장되게 기웃기웃 움직이며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매치스는 인질들 중 맨 앞줄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깍지 껴 머리를 받치듯 들어 올린 상태에서 한껏 웅크린 자세로 숨마저 낮추어 마치 사냥을 준비하는 맹수처럼 주변을 살폈다. 등 뒤에서 깜짝 놀라 칭얼거리는 아이의 흐느낌과 혹시라도 아이에게 해가 갈까 무서워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소곤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말과 점점 가빠지는 누군가의 호흡이 들린다. 은행 직원은 소동이 시작되자마자 호출기를 눌렀을 것이고 그에 대해 따로 으름장을 놓지 않는 걸로 보아 강도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알 테다. 다만 이 도시의 교통 상황은 언제나 끔찍해서 앞으로 못해도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고 그것은 사람의 목숨이 결정되기에는 영겁만큼 기나긴 분량이었다.
매치스의 호흡은 강도들이 이리저리 발을 움직이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느려지고 이명이 들릴 듯 혼란했던 머릿속도 사람들의 두려움 하나하나를 감지할 때마다 또렷해졌다. 매치스는 누구는 배후 경계가 허술한 것도, 누군가는 왼쪽 발목이 약한 것도, 누군가는 옆구리에 얼마 지나지 않은 부상이 있는 것도, 누군가는 반강제로 이 소동에 참여한 것도 전부 보았다. …—그렇다면 맨 몸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텐가? 머릿속에서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은 낯선 자신이 냉소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언제까지 이런—…
“영감탱이, 죽고 싶어?”
뚝, 머릿속에서 모든 분쟁이 멎었다. 인질들을 감시하고 위협하며 주변을 맴맴 돌던 일당 중 하나가 오래된 가방을 끌어안듯 가지고 있는 노부부에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 이건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케빈과 스테이시는 그저 서로에게 기대어 자꾸만 떨리는 몸을 지탱해야 했다. 이제 막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온 손녀를 위해 그들이 가진 최대의 재산인 어선을 담보로 받은 대출금이 들어있는 가방이었다. 2층에서 현금을 수령하고 액수가 꽤 되는 만큼 1층 창구에서 입금 절차를 밟으려던 돈이었다. 에이미는 사람 사는 일인데 어떻게든 된다며 조부모에게 손사래를 치고 밝게 웃었지만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그에게는 한참은 갚아야할 학자금이 있었다. 지금 이 돈을 저 불한당들에게 뺏기면 돈은 영영 찾을 수 없을 테고 에이미는 제대로 된 월세 방도 구하지 못한 채 자꾸 그의 꿈과는 먼 길만을 택하게 될 것이다. 몇 푼의 돈에 어리석다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에이미를 위해 기꺼이 그럴 수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이쯤 되면 한 번 더 본보기를 보여도 좋을 때라고 강도는 생각했을 것이다. 제 총부리 아래 평소에는 자신을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하게 바라보던 인간들이 벌벌 떠는 것을 그는 숱하게 지켜보았고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은 그토록 재밌는 일이다. 그는 총을 들었고,
“아악!!”
그대로 손목이 꺾여버렸다. 매치스는 멀어진 소음들을 뒤로 하고 손을 내리치고, 팔을 등 뒤로 꺾어 손목을 세게 틀어쥐며 상대의 무릎 뒤를 발로 가격하는 자신의 동작 하나하나를 이상하게 선명하게 인지한다. 사람들은 겁을 먹을 테고 강도들은 화를 낼 것이다. 매치스는 멀리서 장전되는 총기의 소리를 듣는다. 성급했군. 병적으로 침착한 자신이 말한다. 두근, 두근… 심장소리는 오히려 점점 차분해지고 매치스는 아주 반사적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여러 형태의 폭력에 대비했다. 그러는 순간에
“뭐야? 무슨 일이야?”
“불?”
“시발, 어떤 새끼야?!”
은행 내부에 자욱하게 잿빛의 연기가 충만한다. 소방경보도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았지만 이 도시에서야 숱하게 있을 일이라 사람들은 그저 두려움에 떤다. 탕! 탕! 악! 콰광! 매캐한 분진들 속에서 몇 발의 총성과 산발적인 비명과 까닭을 알 수 없는 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제 불안에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흑, 흑…” 저 어딘가에서는 어떤 이가 숨을 죽여서 운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린 노부부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자꾸만 날뛰려는 강도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탓에 그러지도 못하고 그저 소리와 공기의 흐름이 피부에 끼얹어지며 남기는 촉감에만 의존하여 매치스는 주변을 경계한다.
그러다 저 즈음에서 누군가가 매치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맨 눈에 와 닿는 연기가 자꾸만 각막을 따갑게 했지만 매치스는 굳게 눈을 떠있는 채로 그 인물이 누구인가를 지켜본다. 그 인물은 머리에 헬멧과 같은 형태의 붉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라이더 재킷을 걸치고 왼손에 검은 피스톨을 쥔 그는 아까의 소동 속에서 오른팔을 잭나이프에 찔린 듯했다. 짙은 연막을 해치고 매치스 앞으로 성큼 다가선 그에게서는 탄환이 터진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그는 매치스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 겉옷 앞섬의 지퍼를 완전히 잠그지 않아 얼핏 그가 안에 입고 있는 방탄복 같은 형태의 상의에 그려진 새인지 무엇인지를 본뜬 빨간 마크가 보였다. 히히, 히히히히… 뒷목에서부터 악몽처럼 소름이 이유도 모르고 끼쳐왔다.
마스크를 쓴 인물은 불현듯 왼팔을 크게 들어 올리더니 가차 없이 매치스가 붙잡고 있던 강도의 머리를 권총의 그립 모서리로 내리찍어버렸다. 몸이 축 늘어져버린 강도를 매치스가 여전히 꼭 붙들고 있는 채로 서있자 그는 조금 불편하게 왼손으로 그를 잡아채서 저쯤에 내던져버렸다. 매치스는 입을 꾹 다물고서 그 광경을 그저 눈으로만 좇는다.
“당신은”
부츠 끝으로 강도의 의식 상태를 확인한 그가 마스크 안쪽에 있는 어떤 장치를 통해 변조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는 오른쪽 길목 즈음에서 희미하게 경찰차의 사이렌이 들리기 시작하기보다도 전에 옅어지는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러고 보면 딱 그의 키가 제이와 같았던 것 같다. 레드후드라 불리는 인물을 매치스는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둘 다 매치스에 비해 약간 키가 작으면서 체격이 똑같이 건장하고 나란히 오른팔에 부상을 입은 것 정도는 어쩌면 그저 숱하게 이 세상에 있는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요 근래 보육원 우편함에 이따금 들어오는 익명의 쪽지만 아니라면 매치스는 분명 이 사실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했을 것이다.
부활절이 지나고 일주일이 될까 말까 하던 즈음 평소처럼 광고 우편이나 시나 기업 자선단체에서 온 안내문(그것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광고물이기는 했다.)은 없는지 또 거미가 들어와 집을 짓고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기 위해 매치스가 우편함을 열었을 때 우표도 발송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는 새하얀 봉투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속 편하게 자기 사정을 토로하지 못하는 이가 고민 끝에 남긴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싶어 매치스는 큰 의심 없이 봉투를 열어보았고 그 안에는 한 장의 A4가 있었다. 곱게 접어진 흰 종이를 피면 그 안에는 많은 여백을 뒤에 남겨둔 채 단 한 문장이 워드로 깔끔하게 출력되어 있었다. ‘신부(Father)를 믿지 마.‘라고. 매치스가 알고지내는 신부는 제이밖에 없었기 때문에 도대체 마을 변두리에 조그맣게 위치하는 성당에 무슨 울분이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어도 쪽지가 목적으로 하는 인물은 분명하게 요한 신부였다.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동향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영 불쾌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먼저 매치스는 제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싶어서 골이 서늘했다. 매치스는 바로 제이에게 이런 글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짚이는 게 없는지 물었지만 제이는 별 것 아니라는 태도로 시원스레
“내게 서운한 일이라도 있으신 분이시겠지. 본분에 좀 더 신경 써야겠네.”
하고 말았을 뿐이다. 매치스는 지역 경찰서로 찾아가 방범 패트롤을 부탁했고 접수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역시나 효과는 미미했다.
과거에 자신이 어떤 일을 했었는지 매치스는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최근 생각하게 된 가장 그럼직한 가정은 자신이 사설탐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매치스는 이전에 전임자들이 운영했을 적에도 성당과 보육원 이 두 곳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것을, 전 관리인이 버리듯 놔두고 간 수첩과 달력 등에 쓰인 표시에서 알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둘이 무슨 일인가를 했었다는 사실을 추론했다. 보육원에 아주 가끔 이전에 시설에서 생활했던 청년이 찾아와 담장 밖에서 기웃거렸지만 매치스의 얼굴을 보고 서둘러 인사말도 없이 걸음을 돌리고는 했다.
“거티는 이제 우리랑 말도 안 해.”
샘이 시무룩하게 이야기했다.
“예전에는 거티가 색종이로 칼을 접는 법도 가르쳐줬는데…”
“거티는 거짓말쟁이야!”
샘이 킁 하고 코를 삼키자 도라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리고 매치스가 발견한 몇 거래 업체들은 지금은 보육원과 전혀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지만 매치스는 이제 서류상에 이름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그 가게들이 여간 미심쩍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이전의 관리인이 어떤 작당을 하였는가를 밝히는 중 다시 우편함에는 쪽지가 들어있었고 이전처럼 한 문장이 덜렁 써진 종이만 온 것이 아니라 사진도 세 장 동봉되어 있었다. 늦은 밤, 성당의 뒤편에서 마스크를 뒤집어쓴 이가 홀연히 나오는 것과 어스름한 새벽 다시 성당으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마스크를 벗는 사진이었다.
“왜?”
손을 멈춘 채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 매치스에게 제이가 가볍게 묻는다.
“아니, 그냥… 맛있게 먹나 해서.”
매치스는 눈을 한 번 여닫는 것으로 상념을 거두었다.
“응, 맛있어. 좋아하는 맛이야.”
제이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쿠키의 커다란 덩어리를 바삭 쪼개어 부러 매치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루시우스가 적절한 경도로 구워낸 쿠키에서는 곡물과 견과류의 고소한 향과 말린 크랜베리의 시큼함, 화이트 초콜릿에 들어있는 양질의 카카오 버터 냄새가 어우러져 후각으로 전해오는 자극만으로도 침샘이 아린다. 다부진 손을 꼼질거리며 제이가 건네는 조각을 받아드는 매치스에게 제이는 씩하고 다정하게 웃었다.
“당신도 좋아하지?”
그야, 루시우스가 만드는 음식은 어떤 것이고 맛있다. 전에도 지나가는 말이지만 그에 대해 제이와 이야기 한 적이 있었던 매치스는(그때 제이는 그야말로 신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웃음을 지었었다.) 새삼 쑥스러워서 슬쩍 제 뒷목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이전의 신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관계없이 지금 이곳을 맡고 있는 제이는 수단이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순박한 성직자일 뿐이다. 매치스는 여태 품고 있던 자신의 편집증적인 의심을 탓했다. 이전에 있던 관리인과 신부가 약물 거래에 관련되었고 그것을 처리한 레드후드가 대신 신부로 성당에 들어와 정체를 숨긴 채 지내고 있다? 너무나도 아귀가 맞아떨어져서 잘 팔리지 않을 소설에서나 나올 이야기이다. 애초에 그 사진이 진짜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공들인 장난을 할 만큼 작은 성당을 꾸리는 신부에게 품을 원한이 무언지 매치스는 알지 못하지만 세상은 넓고 사람 마음이란 헤아리기 힘든 법이라 어쩌면 엉뚱한 이에게 쓸데없는 분풀이를 정성스레 하는 인물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쯤 그리 의아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매치스는 다시 경찰서에 가서 한 번 더 방범을 부탁드려야겠다고 결론지었다.
“넌 진즉 뒤졌어! 부활은, 염병, 거짓말이지.”
서서히 식어가는 차와 함께 고즈넉한 시간이 흐르는 중 바깥에서 발음이 살짝 뭉그러지는 외침이 고래고래 벽을 넘어왔다.
“찰리…”
제이는 익숙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님을 앞에 두고 곤란한지 미간을 살짝 좁히는 제이에게 매치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제이를 배웅했다. “형제님—…” 문을 열고 닫을 때 술에 취해서 성당으로 들어와 조각상들에게 괜한 시비만 붙고 있는 찰리를 하루는 쉬고 갈 수 있는 보금자리로 안내하기 위해 운을 떼는 제이의 목소리가 잠시 들린다.
아늑한 정적 속에서 매치스는 많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제이와 찰리의 말소리가 차츰차츰 멀어질 쯤 따르릉, 요란하게 오래된 전화의 벨이 고요를 깨뜨렸다. 매치스가 잠시 멈칫 뜸을 들이자 다시 따르릉, 전화가 울리고 매치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를 위해 마련된 책상에 놓인 수화기를 달칵 들어올렸다.
“네, 세인—”
“전에 말씀하신 건으로 연락드렸는데요.”
어지간히 급했는지 매치스가 성당의 이름을 다 읊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의 인물은 다짜고짜 제 말을 꺼냈다.
“—검토해본 결과 신부님과 계속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다시 확인해야할 사항이 있어요. 우선—”
“잠시만요. 지금 신부님은 잠깐 자리에 안 계세요. 전화주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어깨에 수화기를 받치고 턱으로 지탱하여 매치스는 메모용지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나뭇결이 선명한 책상 위에 놓인 것은 곱게 표지를 닫은 성경이 전부였다. 전에 어지럽게 물건이 굴러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서랍 안으로 볼펜 한 자루를 꼼꼼히 챙겨 넣던 제이가 떠올라 매치스는 정말 스스럼없이 서랍의 문을 당겨 열었다. 조금 뻑뻑하고 또 다소 무거운 느낌이 손끝에 걸리고 끼익 낮은 마찰음을 내며 서랍 안에 있던 물건들이 그 진동으로 배치가 어그러지면서 덜컹 하고 소란스럽게 서로 부딪친다. 그리고 드러난 내부를 보며 매치스는 그만 우뚝 멈추어 섰다.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사위가 조용해졌고 걸려온 전화는 상대가 신부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자 통화를 계속할 마음이 사라졌는지 뚜-뚜-뚜-, 하고 규칙적인 기계음만 들렸다.
이중 바닥으로 이루어진 서랍이 처음에 잘 닫히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매치스의 행동이 무언가 바닥을 드러내는 매개가 되었던 건지 뚜껑이 열려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내보이고 있었다. 매치스는 레드후드가 들고 있던 바로 그 검은 피스톨의 총구를 내려다보며 언제부터인가 다른 노이즈로 바뀐 백색소음을 들으면서 그저 애꿎은 눈만 깜빡일 뿐이다.
턱을 받치고 한참 모니터 곳곳을 살피던 알프레드는 고담의 지하도와 이어진 입구 앞에 나타난 이변에 눈동자의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고정했다. 누군가가 입구에 홀연히 서서 정확히 카메라가 설치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그의 시선이 어떤 우연도, 어림짐작도 아닌 카메라 너머의 사람, 즉 자신을 겨냥한 것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헬멧과 같은 형태의 붉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는 얼마쯤을 감시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그저 서 있다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킨 다음 입구를 손짓해 보였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발치에 내려놓은 산탄총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웨인의 집사로서, 손님 대접은 적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프레드는 장전이 되어 있는 산탄총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해 한 해 뻐근해가는 몸을 내색 없이 반듯하게 펴며.
“안녕.”
보통의 인사말을 들으며 알프레드는 오른손에는 방아쇠에 걸고 왼손으로는 총신을 가볍게 받치며 그와 나란히 마주보는 위치에 발을 멈추었다. 배트케이브 실내로 이어지는 통로의 시작에서 고담의 새로운 자경단, 레드후드는 마치 오랜 집으로 돌아온 사람마냥 태평하고 자연스럽다.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는 마스크 뒤에서 변조되어 다소 무기질적이었다. 마치 배트맨처럼. 이런 사소한 위장까지 박쥐와 닮아 있는 인물의 정체를 알프레드는 자꾸만 추론하려 해보지만 그가 가진 상식 탓으로 번번이 실패한다. 가슴팍에 어렴풋 보이는 빨간 박쥐의 문장은 이제는 비로소 잠이 들었을 박쥐를 자꾸만 연상시켜 총을 잡고 있는 손에서 약간 땀이 배어나왔다.
“그 사람, 그거 싫어할 텐데.”
피식,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레드후드는 마치 안심하라는 듯 손에 들고 있던 피스톨을 홀더에 꽂아 넣으며 가볍게 양손을 들었다. 그리곤 손을 머리 뒤로 돌려 마스크의 이음매 같은 곳에 대더니 찰칵 하고 가벼운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레드후드는 자신의 마스크를 벗었다. 위에 떠오른 표정이라고는 사위를 노려보듯 매서운 눈초리가 전부이던 마스크 너머에서는 제법 어려보이는 젊은이의 얼굴이 있었다. 그에 비해 앞머리에 하얗게 샌 새치가 눈에 띄었다. 아직 앳된 티가 다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얼굴의 윤곽을 그리는 턱뼈나 광대가 단단하게 자리 잡아 시원스레 뻗어 있는 청년이었다. 눈가에는 도미노를 꼼꼼히 착용했지만 잘생긴 얼굴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알프레드가 언젠가, 오랜 과거에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제이슨, 도련님?”
손으로 받치고 있던 총신을 슬며시 놓으며 알프레드는 눈을 둥글게 떴다. 씨익-하고 레드후드가 십여 년 전 이 장소의 일원이자 가족이었던 아이가 이를 가볍게 드러내며 개구지게 미소 짓는다. 이것은 무언가 지독한 농담일까. 알프레드는 잠금쇠가 잠긴 것을 확인하며 산탄총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 젊은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알프레드를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이지?”
거의 반평생을 박쥐의 서포터로 지냈던 만큼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저 젊은이를 동굴의 의무실에서 차분히 분석해 보아야 한다였지만 보다 감성적인 부분을 알프레드 앞에 등장한 얼굴은 지르고 들어왔다. 브루스의 오열과도 닮은 괴성과 또 한 번의 장례식, 박쥐의 곁에서 재잘재잘 노래하던 작은 새 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알프레드는 드물게도 동요하고 있다. 레드후드는, 어린 도련님은 마치 기약 없는 여행이라도 다녀왔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으쓱 어깨를 한 번 까딱이며 싱겁게 인사했다. 알프레드는 얼굴을 마른세수 하듯 손으로 한 번 훑어 지났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박쥐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제이슨 토드의 부활은 브루스 웨인이 생존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질문과 질문이 범람했고 알프레드는 그 중 하나를 간신히 끄집어냈다.
“언제부터지요?”
“살아난 것? 아니면 ‘제이슨 토드’로 돌아오게 된 것?”
알프레드는 침묵했다. 그의 혼란을 이해한 제이슨은 피식 웃으면서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편하게 등을 기둥에 기대어 선 자세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 그 때 조커가 내보낸 방송을 보고”
제이슨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잘 뻗은 콧대가 인상적이던 얼굴에 그 탓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금세 얼굴을 들어 그리 길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기억났지.”
“그리고 ‘레드후드’가 되셨다고요.”
알프레드는 제이슨이 제 옆구리에 끼고 있는 붉은 마스크와 홀스터에 담긴 피스톨로 차례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을 읽고 제이슨은 그저 피식 웃었다.
“이 도시에는 질서가 필요하니까.”
도미노 너머에서 가려진 눈동자가 어둠보다도 선명한 붉은 빛으로 형형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알프레드의 지레짐작이나 노파심이 아니라 알프레드는 어린 도련님(으로 추정되는 젊은이)의 저 얼굴과 닮은 얼굴을 이제는 벌써 스무 해는 훌쩍 더 넘긴 과거에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조차 가능으로 만들 것만 같은 순진한 열정과 그 뒤에 품은 순수한 희망, 악에 대한 증오, 순례자와 같은 각오 같은 것이 두 얼굴에 겹쳐서 접점을 이루고 있다. 알프레드는 왠지 눈이 피로해서 안경 뒤에서 콧등을 살짝 주물렀다.
“도련님께서 안 계신 동안 이곳은 퍽 살풍경이었습니다.”
“그런 것 같네.”
제이슨은 저쪽에 디스플레이 된 오래된 코스튬을 그립게, 그리고 증오스럽게 흘깃 본다. 로빈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코스튬에 조커가 남긴 문구는 유품 위에 선명히 남아 누군가, 누군가들의 가슴에, 정신에, 영혼에 흉터로 박혀 떨어질 줄 모르는 광기로 자리한다.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오기 위해서 뇌에서 자체적으로 닫아버린 기억의 빗장을 가장 처음 연 것은 그 빌어먹을 웃음이었으니까. 그 웃음에 뒤덮여서 깨어나기까지 자신은 십여 년을 그와 떨어진 곳에서 모든 것을 잊고 살아야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도련님께선 지금 그것을,”
알프레드가 마스크를 향해 한 번 더 눈짓한다.
“택하셨다고요.”
“누군가는 해야만 하니까.”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우며 제이슨이 알프레드 앞으로 다가왔다. 굳게 다문 입매나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가 성큼 가까워진다. 자신을 닮아, 어쩔 때는 그 이상으로 과격해지던 아이의 행동에 걱정하던 브루스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했던 날, 그 다음의 아침. 아이가 트레일러 문 앞에서 하루를 준비하러 나올 알프레드를 기다리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배트맨이 하는 일은 로빈도 해. 브루스에게는 내가 필요하니까. 그치?”
하고 사명감과 닮은 자부심을 품고서 아이는 집사에게 어딘가 도전적인 투로 이야기했다. 그 바른 시선은 어딘가 오기도 담고 있던 것도 같다고 알프레드는 회상한다. 아이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고담에 무언가가 필요하고말고 그런 건 어찌되어도 좋습니다.”
알프레드는 참지 못하고 결국 한숨을 한 번 짧게나마 토로하고 말았다.
“제이슨 도련님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그 일의 끝이 어디로 갈지. 웨인 주인님께서 결국 어떻게 되셨는지. 당신 스스로가 어떻게 되셨는지 말입니다.”
“그럼 저스티스 리그 같은 잘난 나리들에게 배트맨의 일을 넘기겠다고.”
잠시 형형한 빛이 젊은이의 눈동자를 스친다.
“고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근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든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정작 바뀌어야 하는 것들이 바뀌지 않은 채 자경단이 하나 불쑥 생겨난 걸로는 그저 이,”
알프레드는 잠시 이를 악물며 울컥 쏟아질 뻔한 욕지거리를 끈기 있게 참아낸다.
“도시에 희생양만 던지는 꼴입니다. 웨인 주인님께서도, 도련님께서도 충분히 겪으셨잖습니까.”
“사람과 시스템이 어느 세월에 바뀔 줄 알고?”
“이건 인내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 사이에도 선한 사람들은 죽어가겠지.”
제이슨은 알프레드가 레드후드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책상 위로 쌓아두었던 신문 뭉치를 턱 끝으로 가리킨다.
“알프레드, 브루스를 지켜보면서 괴로웠던 건 알고 있어. 그래서 이제 레드후드가 있잖아. 브루스는 매치스 말론으로 외곽지의 보육원을 관리하고 말이지.”
“도련님께서는 어쩌실 겁니까. 경찰도, 마피아도, 빌런도 도련님의 목을 노리고 있는 건 알고 계십니까?”
“나는 배트맨처럼 무르지 않아. 그러니 더 나을 수 있는 거고.”
답답함에 쯧 혀를 차며 이다음의 말을 고르려 준비하는 알프레드를 보며 제이슨은 옆구리에 끼고 있는 마스크를 다시 뒤집어쓴다. 모든 대화를 끊어내듯 가면에 떠오른 무표정이 알프레드는 너무나도 익숙해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웨인 주인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알프레드는 버겁게 찾아드는 피로를 숨기지 못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한숨처럼 말했다. 레드후드는 별 대답 없이 동굴을 떠나기 위해 발을 돌린다. 그러는 차에 그가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신호가 들어왔다.
“뭐지.”
딱딱한 목소리로 제이슨이 연락을 해온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얼마쯤의 공백 후 “뭐?” 하고 날카롭게 외치더니
“당신, 그는 내버리기로 했잖아! 약속은—”
연락이 금방 끊겼는지 “젠장.” 짧게 욕을 뱉는다. 그리고 방향을 바꾼 발끝 그대로 마치 혼잣말처럼 제이슨이 묻는다.
“…브루스에게 편지를 보낸 건 알프레드가 아니었어?”
“무슨 편지 말씀하십니까?”
“‘나’를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야?”
질문의 맥락을 알 수 없어 알프레드는 순간 답을 주저하다 두 번쯤 못미덥게 고갯짓을 한다. 손에 갑작스레 힘이 울컥 들어갔던지 제이슨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반으로 부수어버렸다. 고장 난 휴대전화를 레드후드는 동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브루스가 여기로 올 거야. …슈퍼맨과 함께.”
히어로의 이름을 어딘가 껄끄럽게 내뱉으며 제이슨은 알프레드가 더 설명을 요구할 새도 없이 바깥을 향해 달려가 버린다. 알프레드가 떨리는 손으로 레슬리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통신기를 찾았을 때는 이미 그로부터 도착한 메시지 하나가 불길하게 떠올라 있었다.
레드후드의 피스톨을 발견한 그날 성당을 나서면서 매치스는 제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혹은 않았다). 이중 서랍 아래 숨겨진 총을 눈으로 보고 얼마쯤 싸늘하게 식은 머릿속은 굳어 있었지만 행동만은 마치 잘 훈련받은 사람처럼 저쯤에서 다가오는 제이의 발소리가 문 앞으로 훌쩍 다가서기보다도 전에 빠르게 모든 것을 완벽히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신부로서 한없이 다정한 이웃인 제이의 얼굴을 보면 붉은 가면을 뒤집어 쓴 무시무시한 징벌자의 모습은 매캐했던 연기 속으로 흩어져 매치스는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이 본 현실을 부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매치스는 은행 강도사건이 끝난 뒤 일당 중의 둘은 중상이고 한 명은 사망했으며 그나마 남은 한 명은 손목이 꺾인 채 기절하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는 상태라고 들었다. 그날부로 레드후드와 관련된 소식이 왜인지 눈과 귀에 밟히기 시작한 매치스는 얄팍하게나마 그의 행적을 좇아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알게 된 살인, 폭행, 뒷거래 등의 소식들은 정말이지 도통 고즈넉한 성당의 마음 좋은 성직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효과적인 위장이었던 것일까? 마치, 마치… 매치스의 기억 저 끝에 아슬아슬한 어떤 형체가 흐릿하게 매달려있다.
은행 강도 사건을 목격한 날,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어 고담시경에 간단히 경위진술만 하고(그마저 루시우스가 바득바득 재촉을 해대서 5분 정도 목격자 진술을 받고 있는 경찰관과 길거리에서 대화한 것이 전부였다. 서로 동행을 요구받았지만 루시우스는 경관에게 어느 번호를 건네며 매치스의 어깨를 감싸고 저만치로 떨어져갔다.) 돌아온 매치스에게 자원봉사로 나온 선생님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이들 얼굴에 떠오른 표정 하나하나를 살피며 다녀왔다는 인사를 위해 입을 여니 아이들은 매치스를 둥글게 감싸 안았다. 어쩐지 정말 안전한 곳으로 온 것만 같아 매치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다독였다. 이안이 매치스를 올려다보며 아직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다소 단어를 쏟아내듯 빠른 투로 묻는다.
“매치스, 레드후드가 매치스를 구해준거야?”
매치스는 잠시 멈칫한 다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트맨은 정말 없구나…”
샘이 작게 속삭이듯 말했고 아이들 모두가 조용해졌다.
“배트맨?”
“뭐야, 매치스. 배트맨도 몰라? 고담을 돌보는 히어로잖아! 선생님들이 말했는걸. 나쁜 짓을 하면 배트맨이 이 놈 한다고.”
시무룩해진 샘의 손을 꼭 맞잡으며 도라가 어딘가 자부심 서린 얼굴로 이야기했다. 매치스는 불쑥 물었다.
“그 배트맨은 어디 갔니?”
그러자 아이들 모두 조용해졌다. 조심조심 서로의 얼굴만을 몇 번이고 돌아보던 아이들 중에서 도라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죽었을 거라고 어른들이 말하는 거, 들었어.”
매치스의 기억이 끊긴 날의 사고로부터 사라진 고담의 히어로는 어쩔 때는 지나치게 숭고한 자기희생의 화신이고 어쩔 때는 그저 징벌을 핑계로 폭력을 일삼는 무법자였으며 고담시경의 아군이자 가장 큰 걸림돌이고 아캄의 간수이자 죄수였다. 고담 내의 매체들이 하는 서술은 대게가 한쪽 의견에 치우친 극단적인 것이었고 그에 대해 제법 객관적인 서술은 오히려 이웃도시의 메트로폴리스 데일리 플래닛 소속의 기자가 기고한 칼럼에서 볼 수 있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부를 수밖에 없다고 단정적으로 서두를 뗀 칼럼은 배트맨의 자경활동은 시스템의 사각을 보완한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정말 고쳐나가야 할 부분을 더욱 어둡게 가리고 있다고 했다. 경범죄의 비율은 확실히 줄었지만 강력 범죄나 특히 특수범죄의 비중은 오히려 높아진 점을 꼬집으며 뿐만 아니라 고담 치안만이 아닌 배트맨 그 본인조차도 제가 초래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물론 그로 인해 선량하고 희망 없던 이들이 보다 편하게 밤을 맞이하는 것은 사실이며 실제 몇몇이 같은 의견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고 기자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배트맨이 악을 행하는 이들을 겸제하려는 것은 의심할 길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무서운 불량배를 마주했을 때 다른 더 무서운 건달이 그를 쫓아내서 오는 안도이지 정말로 온전한 안전은 아니라고 그런 근본적인 변화는 시간이 걸리며 절대 개인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기사는 다음의 문장을 마지막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숭고할지언정 위대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배트맨은 조커라는 빌런이 고담 전역을 인질 삼아 벌인 대대적인 테러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새롭게 나타난 ‘레드후드’는 살인도 불사하는 자경단이다. 배트맨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 이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제이의 몫일까? 오늘도 제이는 레드후드가 되어 바깥을 나갔을까? 아무 일 없다는 듯 보육원으로 돌아온 매치스에게 몰려든 것은 죄책감이었다. 이 죄책감은 무엇일까? 범법자의 정체를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 그가 필연적으로 겪을 위험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것? 아니면… 매치스는 순간 그 강도 사건에서 느꼈던 생기 같은 것이 떠올라 뒷골이 오싹해졌다.
“…—스, 매치스!”
생각을 부유하던 매치스의 귀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레슬리를 마주했다.
“무슨 걱정 있니, 얘야? 안색이 좋지 않구나.”
“레슬리…”
날이 보다 덥고 습해지기 전에 방역을 위해 보육원을 비운 탓에 오늘 밤은 레슬리의 의원에서 머물게 되었다. 겸사겸사 아이들의 상태를 재확인 하고 나온 레슬리는 바깥 의자에 멀거니 앉아 복도 끝만 보고 있는 매치스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매치스는 반사적으로 생긋 무해하게 웃는다.
“너는 별 다른 일 없니?”
“저야 변함없죠.”
사르르 접어 웃는 매치스의 얼굴을 의사는 그저 덤덤하게 들여다보았다. 차분한 녹빛의 눈동자는 마치 그 웃음의 의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훤히도 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다. 루시우스도 그렇고, 레슬리도 이들 앞에서 매치스는 자신이 어딘가 한참 나이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이런 것이 연륜인 걸까? 매치스는 괜스레 딴 생각을 해보지만 레슬리는 그런 매치스를 다그치지 않고 그저 신중하게 그가 스스로 입을 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빙긋 띄운 미소를 파르르 거두어내며 매치스는 잠시 눈동자를 아래에서 해매다 조심히 말을 뱉었다.
“친구, 가 있어요.”
어색한 발음에 쑥스러워서 매치스는 애꿎은 제 뒷목을 쓰다듬는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뜻을 지니고 있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걸 주저하지 않고요. 저한테 많이 도움을 주었고 가끔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나이가 떨어진 동생 같기도 해요. 그런데…”
매치스는 말은 꺼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적절히 잘라야할지 몰라 언어를 찾는다.
“레슬리, 저는 기억이 없지만 고담이 특수하다는 건 알아요. 그 친구는”
제이가 과거에 불우했던 것, 삶 속에서 소중한 사람을 만났고 하지만 원치 않게 그를 잃은 것에 대해 흘러가듯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걸 너무 잘 알았던 거겠죠.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이, 가진 신념이 그를 다치게 해요. 그는 지금은 이 도시에 없는 누군가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그도 죽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겁이 나요.”
매치스가 양손을 깍지 끼며 마주잡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내려 보던 레슬리가 당연한 수순으로 물었다.
“그 말을 친구에게는 해보았니?”
고개를 숙인 매치스는 설레설레 머리를 내저었다.
“매치스…“
레슬리는 어쩐지 조금 어색하게 이름을 발음했다.
“사람은 결코 누군가를 몇 마디의 말로 바꿀 수 없고 그러기를 바랄 수도 없는 거란다. 그럼에도 굳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은 네가 그 사람에게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 네가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란다. 그보다 더 나가면 참견이겠고 덜 한다면 방관이 되지. 네가 이리 고민하면서도 말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건, 네가 네 친구를 아낀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어쩔 수 없지 않겠니.”
다정하면서도 세월을 머금어 강인한 호선 하나가 겨우 고개를 든 매치스의 눈에는 유달리 어둔 밤 속 달처럼 선명했다.
매치스에게로 이따금 불안이 죄의식처럼 찾아든다. 매치스가 가지는 그것은 뇌리 한편에 커다랗게 발생한 기억의 공백으로 인한 것보다도 대게는 형체를 알 듯 말 듯, 손끝에 걸릴 듯 말 듯 스쳐 지나는 기시감에서 비롯했다. 지(知)와 무지(無知)의 경계에서 무성의 날카로운 웃음과 기괴한 어둠의 장막들이 언뜻 보였고 매치스는 차마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노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매치스는 왜인지 자신이 이전의 모든 기억을 되살리고 나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막연하면서도 굳건한 짐작이 들었다. 이런 강한 의혹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부상 하나, 표정 하나 심상히 받아 넘기지 않는 주제에 정작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에 대해 가족이 있었는지, 친구가 있었는지, 누구였는지, 무엇이었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매치스는 기억이 돌아오고 난 다음에 자신은 혹시 아이들 앞에서 떳떳이 서있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닐까 봐, 루시우스처럼 상냥한 사람의 걱정을 받기에는 당치도 않은 인간일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매치스는 어쩌면 제 과거와 기억에는 별 미련이 없는지도 모른다. 지금 어설프게 형성되는 ‘매치스 말론’이라는 아무리 읊조려보아도 어색한 이름의 페르소나가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고담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이름을 불리는 새로운 자경단 레드후드가 저 변두리에 꾸려진 조용한 성당의 신부와 동일인임을 알게 된 순간 매치스가 제일 아주 처음 생각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나 허술해 보일 정도로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텅 빈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매치스에게 도달한 정보들 그 전부가 너무나도 알맞은 타이밍에 너무나도 딱딱 맞추어 매치스에게 전달되는 것이 통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매치스는 모든 판단을 보류하기로 하고 자신이 연 밑바닥 깊은 서랍을 차분히 정돈한 뒤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매치스는 자신의 판단에 위화감을 느낀다. 매치스가 제이에게 쉬이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은 그로 인해 친하게 지내던 지인과 껄끄러운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것 때문에도, 해당 주제가 입에 하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도 아닌 사위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결론을 유보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혼자 차분하게 레드후드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에게 도달한 몇 통의 편지와 세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매치스는 이런 자신의 다분히 편집증적인 사고에 몸서리 치고 말았다. 애초에 옳은 답이라곤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바삐 걸음 하는 매치스의 어깨 위로 사뿐히 밤의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도시가 드리우는 어둠 속에서 매치스는 마치 속살거림과 같은 어느 짐승의 날갯짓을 듣는 것 같았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서두른다면 지금쯤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제이와 만날 수 있을지 모르고, 늦는다면 오늘은 마치고 돌아올 그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 사이에 만일 제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것은 자신이 제이를 통해 반사되어 드러난 자신의 일면에 주춤하느라 망설였기 때문일 테다.
“당신과 나, 우리 왈츠를 추어요.”
가로등이 하나 꼭대기에 아스라이 빛나는 공터에 덩그러니 비치된 벤치에 앉은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발끝을 까딱이며 흥얼거리고 있다.
“당신은 뒤로 두 걸음, 나는 앞으로 두 걸음. 그림자처럼 당신과 나 서로를 따라다니네.”
길거리 예술가인지 주정뱅이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은 허밍이 섞인 소리로 큭큭큭 뜨문뜨문 웃었다.
미뤄둔 무언가를 마주하는 것은 이렇게도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일까. 술렁거리는 가슴 안쪽 때문에 발밑이 불안했지만 매치스는 해돋이를 재촉하는 것처럼 동쪽으로 뻗어진 길을 나간다. 그런 매치스의 시선 옆으로 건물과 건물의 좁다란 골목길이 스쳤다.
“…제발…”
꽁꽁 묻어놓은 어둠에서 잘게 떨려 끊어지는 말소리가 새나왔다. 빠르게 걸어온 매치스의 뒷목에 옅게 맺힌 땀이 찬 공기에 쓸려 오싹하니 시려왔다. 행인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골목에 있던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누군가는 그저 길목에 폭력적으로 버티고 서서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 어둠 속에 빠져 도움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라는 건, 드릴게요. 해치지 마세요.”
“엄마.”
차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흔들림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와 그 옆에서 다른 어린 목소리가 어울려났다. 매치스의 시야가 어쩐지 새까맣게 된다.
“너 뭐야?!”
매치스는 그저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와 자신의 등 뒤에 서로를 의지하듯 붙어서 웅크린 여자와 아이, 이 구도 만이 참을 수 없이 증오스러웠다. 저 먹구름 깔린 하늘을 날짐승도 들짐승도 아닌 것이 파드득 바쁘게 횡단한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기에는 모든 것이 늦다고, 조갑증을 닮은 다그침을 들으며 매치스는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떨어트리지 않은 강도에게로 손을 뻗었다.
타앙! 매치스가 채 남자의 손에서 총을 빼앗기도 전에 눈과 귀가 뜨거운 섬광이 매치스의 복부를 가르고 지났다. 매치스가 끈질기게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탓에 발포 시 놓기에 가해진 반동으로 그의 손목이 우둑 뒤틀렸다.
“아아악!”
고통에 악인이 비명을 지른다. 배에서 뜨듯한 액체가 흐르는 것을 알지만 척추에는 손상이 없는 듯하니 지혈을 하고 외상을 기우면 될 일일 뿐이었다. 그저 자신의 몸을 지나간 총알이 뒤에 있을 모자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남자는 그저 비명을 지르는 남자가 허튼 짓을 두 번 다시는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히히히, 히히히히… 머릿속에서 깜빡깜빡 점멸하는 필라멘트가 닳은 전구처럼 누군가가 웃는다. 놈을 제압해, 공포를 심어. 그리고 누군가가 그 웃음 뒤에서 속삭인다. 남자는 별안간 얇은 입술을 벌렸고
“하하…”
그 사이에서 김이 빠지는 것처럼 날숨과 의미 없는 단적인 발성이 섞이어 난다.
“하하, 하하하하!”
남자는 그렇게 웃기 시작했다. 쨍하니 머리가 갈라질 듯하며 증오와 분노가 마치 쾌감처럼 남자를 불태우듯 에워싼다. 총알 표면에 묻어있던 무언가는 인체에 닿아 타오르기라도 하는지 남자의 손상된 조직에 끓는 듯한 고통을 일으키며 호흡을 벅차게 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다시금 눈앞에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빈손을 굳게 주먹 쥔다. 그때, 무자비한 벼락이 남자의 상처 입은 등으로 내리꽂힌다. 남자는 몸이 무너져 내렸고 전기충격기의 스파크를 머금은 어떤 물질이 급속히 활성화되어 남자를 억지로 재생성하고 있었다.
“당신은 기억을 잃어도 사랑스럽네.”
가물가물한 시야로 묵직한 부츠 굽이 보인다. 남자는 어떻게든 몸을 세워보려 했지만 장기에서부터 근육을 타고 퍼지는 파괴와 생성의 아픔으로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거기다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광기와 닮은 온갖 감정들로 남자는 정신이 미칠 듯하여 계속 간헐적으로 컥컥 웃어댔다. 이 감각을 남자는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랬던 기억이 흐릿하게 있다. 이보다 더 지독하고, 더 격렬하게, 모든 기억을 닫아야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끔찍하게.
“하지만 이젠 일어나야지.”
여자는 몸부림치는 남자의 셔츠 뒷목을 잡아 올려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 선명하고 강인한 눈동자가 무자비하게 미소한다.
“곧 만나길 바라.”
고통의 무저갱 속에서 저에게 뻗어진 손을 간신히 붙잡아 올라오려는 남자를 여자는 미련 없이 바닥에 버리며 어둠 사이로 작은 형체와 함께 사라진다. 하하하하하하!! 자신인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인지의 웃음소리를 멀게 그리고 너무나도 가깝게 들으며 남자의 정신은 수많은 박쥐와 박쥐의 날갯짓 소리 속에서 한 차례 다시 붕괴한다.
“브루스!”
비명 같은 웃음소리 속에 쪼개지는 시야를 어찌어찌 떠보면 어둑한 조도 속에서도 쨍하게 선명한 붉은 부츠와 망토자락이 보인다. 저것에는 기억이, 기억이 있다. 기억이—
“부상이… 등 쪽에는 남았지만 앞은 많이 아물었군. 브루스, 내가 보여? 정신을 차려. 당신은—…”
영웅은 살아나는 망령을 앞에 두고 절박하게 이야기한다. 망령은 마구 치솟아서 모든 것이 시커먼 분노로 보이는 감정 속에서 떨리는 손을 내뻗어 저에게로 날아온 히어로의 모래폭풍이 묻은 망토자락을 잡는다. 붉다, 붉다, 붉다, 붉은 망토가 온다. 어째서 이 도시로 왔느냐고, 이 도시가 어떤 곳인 줄 알고 오느냐고 외치고 싶은 중에 부서질 듯 잡은 주먹 위로 따듯한 손이 닿는다. 그 순간 총탄으로 인해 으스러졌던 맨 아래쪽 늑골이 느릿하게 재생성 한다. 다시금 오열처럼 광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망령은, 남자는 이를 악물어 참는다.
고통으로 핏발이 가득차서 피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은 두 눈동자를 마주하며 슈퍼맨은 늦어서 미안하다던가, 지금 막 지구 저편에서 날아왔노라고 이야기하려면 입술을 한 번 꾹 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날카롭게 자신을 벼릴 듯이 보아줬으면 좋겠다 싶어 클락은 맨 처음의 자신들을 떠올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당신이 필요해.”
차마 더 남은 다음의 이야기까지는 하지 못하며 클락은 말을 멈춘다.
심연보다도 깊은 우주의 바다가 자신을 보는 것을 인식하며 광기가 차오르던 남자는 점차 무심한 얼굴로 되어갔다. 눈앞의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그 아이는. 감히 짐작도 해볼 수 없을 타인의 경험을 되짚어 보며 울컥 차오르는 피와 이 행성 저 밑에 있는 미지의 웅덩이를 남자가 쿨럭 기침을 하여 뱉어낸다.
“동굴로.”
시선의 끝 저 먼지 낀 하늘에는 무시무시한 짐승들이, 최초의 ‘자신’을 구해주었던 존재들이 가득하다. 슈퍼맨의 어깨 너머에서 이제는 환청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남자는 짧게 전언한다. 다시금 광소가 밀려와 눈을 꾹 감아버리는 그에게 슈퍼맨은 빙긋 웃으며 커다란 몸을 소중히 안아 올렸다.
“정신이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피는 토했지만 크게 다친 곳도 없고요. 그러니—”
“네, 알겠습니다.”
기계처럼 창백한 집사의 얼굴을 힐긋 본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두세 번쯤 발작이 찾아든 브루스였지만 강도는 점점 약해졌고 혹시나 몸부림을 치다가 자신의 몸에 부딪혀 상처라도 날까 꽁꽁 감싸서 왔으니 브루스는 괜찮을 거라고 설명을 해나가려던 클락은 입을 다물었다. 잠깐 정신을 잃고 있는 주인을 앞에 하고서 안경알 너머에 있는 매서운 눈매는 전과 다를 것 없이 차분하다. 다소 지나칠 정도로.
클락은 급한 대로 제 망토로 둘러놓은 브루스를 저편에 보이는 병상 위에 눕혔다. 어느 날인가 잔뜩 부상을 입은 브루스를 억지로 부축해서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가 그에게 혼이 났던 기억이 나서 픽 하고 작게 웃어버렸다. 다시금 지구 저쪽에서 슈퍼맨의 도움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려와 클락은 조심히 브루스의 몸에서 제 망토를 거두어냈다.
나이든 집사에게 잔인한 짓인 것을 알면서도 클락은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 같은 반듯함에 떠오르는 벅찬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굳이 들뜬 어린아이처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살아있어요.”
그리고 슈퍼맨은 잔상도 남기지 않고 떠나갔다.
그 후 바로 남자는, 박쥐는, 브루스 웨인은 눈을 떴다. 익숙하게 어둑어둑한 천장과 그래서 유독 눈이 부신 동그란 광원을 본다. 온전히 깨어난 자신에게서는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났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고 그저 물먹은 솜처럼 축 쳐질 뿐이다. 브루스의 마지막 기억보다는 휑해 보이지만 흐릿하게 떠도는 휘발성 강한 약품의 냄새나 기계 정비에 사용되는 오일 냄새, 엔진이나 무기고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 등이 떠도는 이곳은 불쑥 집이라 불러버릴 만큼 친숙했다. 이상하게 그립기까지도 한 동굴에서 브루스는 크게 숨을 삼켜보았다. 신중하게 호흡을 하며 브루스는 상체를 일으켰다. 침상 옆에는 미묘한 거리를 둔 채 집사가 늘 그랬든 서있다.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브루스의 움직임이 멎는다. 어떤 언어도 되지 못하는 시선이 하릴없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알면서 자꾸만 비어지던 폭음 같던 웃음은 브루스의 뇌리 깊은 곳으로 침잠해간다.
브루스는 응급처치를 위해 동굴 한 편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나와 우선 면도를 하기 위해 이동한다. 거울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자신이 유달리 낯설게도 보였다. 그 동안 이렇게 생겼었나? 자신은 이런 얼굴이던가? 하고 전에 알프레드가 건넸던 사진 속의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처럼 브루스는 제 인지 속에서 헤매다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에 놓여 있는 면도기로 자신이 뱉어낸 피와 어느 호수바닥의 물이 엉겨 묻은 수염을 깎아낸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제 복부를 매만지면 그곳에는 끈덕지게 말라가는 검붉은 피의 자국만이 옷에 남았을 뿐 아무런 외상이 없었다. 아주 오래 전, 브루스가 배트맨을 시작하기 전 수련을 하며 돌아다녔을 때에 만났었던 여러 위험하고 악독한 스승들 중 한 사람이 허무맹랑한 미신같이 신비한 어떤 웅덩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수염을 거두어낸 자신은 보다 익숙하고 고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브루스가 걸치고 나갔던 배트슈트는 분명 고담의 어딘가에서 완전히 망가진 채 사그라졌겠지만 박쥐가 늘 그랬듯 배트케이브의 저장고에는 역시나 여벌의 슈트가 준비되어 걸려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도리어 어색하게 자신의 가장을 꺼내어 꼼꼼하게 둘러보면 박쥐의 무게는 브루스가 기억했던 것보다도 훨씬 육중하고 또한 버거웠다. 이전에 슈퍼맨을 상대한답시고 온몸을 금속덩어리로 둘렀던 때에 비하면 훨씬 나을 것임은 분명했는데 이 정도의 무게가 새삼스레 다가온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했던 요 얼마간이 생각보다 길게 브루스의 몸에 박혔다는 뜻일 테다. 그런 자신을 다그치듯 브루스는 박쥐의 카울을 뒤집어쓴다.
“이스트 엔드에 있는 폐건물로 갈 거예요.”
기계에 의해 변조된 목소리가 무심하게도 이곳저곳을 울린다. 브루스의 뒤에 유령처럼 서있는 집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브루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배트맨은 미련 없이 돌아서 한참 동안 굴리지 않았던 배트모빌의 연료를 확인하고 시동을 건다. 새것처럼, 작동이 잘 되었다.
“친구를 보러 가십니까.”
문을 닫으려는 찰나 반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단단한 프레임의 안경 너머에서 여전히 무표정하다 못해 마치 비난이라도 하듯 날카로운 얼굴을 한 알프레드는 브루스를, 배트맨을 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창백한 안색이 못내 걸렸지만 브루스는 천연덕스럽게도 자신의 집사만이 분간해낼 수 있는 엷은 미소를 띤다.
“돌아올게요.”
알프레드가 고개를 슬며시 돌려버리는 것을 닫혀가는 문 너머로 보았다.
“다, 괜찮아. 내가 있어.”
누군가 그렇게 속삭였고 몸은 물속으로 잠겼다. 숨이 막혀죽을 것 같은 액체 속에서 생명은 또렷하게 신경을 타고 흘러들어 온몸이 불에 타오르듯, 아니 불 그 자체가 된 듯 끓어올랐다. 고작 이따위로, 고작, 고작, 고작!! 마구 소리 질렀던 기억이 그게 돌아온 호흡을 만끽하고 싶어서였던 건지 그대로 외침 속에 폐를 도는 공기를 전부 실어 버려버리고 싶었던 건지 인과관계까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어나야지, 내 사랑. 찬란하게 떠올라—”
마치 주술처럼, 모든 감각의 포화 속에서 여자의 낮은 음성이 암시한다.
“—이 발아래 저물어.”
브루스는 노이즈로 끊임없이 입혀지던 메시지에 따라 이스트 엔드에 있는 폐건물로 왔다. 사위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게 잠들어서 침묵이 감시하듯 그곳에 낮게 드리워있다. 적막을 디디며 브루스는 건물의 내부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문은 문제없이 열린다. 점점 넓어지는 문틈에서 내부에 자욱이 차있던 화약이 비어져 나와 비강을 질러 들어온다. 등골을 따라 익숙한 전율 같은 긴장이 뻣뻣하게 내달린다.
“어째서.”
텅 빈, 정확히는 비게 되어버린 공간에 누군가가 홀연히 서서 중얼거린다. 배트맨처럼 변조된 음성이 마스크 너머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저 가면 뒤의 얼굴을 브루스는 알고 있다. 아니, 지금으로서는 알고 있다고 느낀다. 배트맨과 같이 변조된 음성을 통해서 자신을 꽁꽁 감추어야 하는 그 인물은 온 얼굴을 붉은 마스크로 가리고 있다. 그 얼굴을 이루는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어쩐지 바로 보이지 않는 만큼 그리울 만치 눈에 선하다. 지금 이 모든 감각을 브루스는 착각이고 조작이라 가정하며 보류한다.
“당신은 여기 오면 안 됐어.”
인물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는 복면을 쓴 인간들에게서 브루스는 오랜 옛날 보았었던 이국의 문장을 확인했다.
“레드후드.”
배트맨의 기계음으로 가공된 목소리가 보통보다도 가라앉아 둘 사이에 떨구어진다. 자신의 명명을 불린 레드후드는 고개를 돌려 배트맨을 바라본다. 그리고 하 하고 가면 뒤에서 헛바람을 뱉듯 웃음을 내던진다.
“이 가면?”
한 손을 재킷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레드후드는 큭큭 웃는다. 공간에는 먼지의 냄새와 피 냄새가 충만하다.
“여전히 이상한데서 고지식하네.”
당신 이상한데서 고지식하네. 까르르 웃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친다. 죽어가던 순간, 기묘한 평온과 조용한 추위와 본능적인 두려움 속에서, 하루를 끝낸 매순간 공백의 시간마다 브루스를 부르며, 원명하며, 경멸하며, 일깨우던 그 목소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생생하게 웃는다. 마치 악몽을 현실로 꺼내놓은 느낌이었다. 더 지독한 것은 이 악몽이 이상하게도 환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브루스는 자신의 생각과 생각이 허투루 불쑥 튀어나가지 않게 부러 꾹 입을 다물었다.
운전 중 브루스는 알프레드에게 자료요청을 했고 알프레드의 목소리가 직접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전달해온 정보들이 배트모빌에 내장된 프로그램의 음성을 입고 브루스에게로 전달되었다.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통신장비 너머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의 상황이 어색해서 자꾸만 헛기침을 했다. 보통 무언가를 계속 이야기하고 침묵을 견디는 것은 알프레드였으니까.
“험한 일을 하더군.”
음성변조기를 거친 언어는 어딘가 위협적으로도 들렸다. 제 스스로가 뱉는 말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은 자신보다도 한 걸음 앞서 나가 악당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작은 울새의 뒷모습이다. 브루스는 자신이 이렇게나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음을 새삼 되새기며 공포의 화신다운 얼굴을 만들어본다. 하지만 레드후드는 주저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배트맨을 마주했다.
“나는 당신보다 나으니까.”
레드후드는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을 빼어 잡고 있던 총을 들어 올리더니 어떤 예고도 무엇도 없이 이층 난간을 향해 발포한다. 탕, 하니 터져나오는 폭발음에 브루스는 내장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당신”
겨냥한 지점을 향해 레드후드는 목소리를 높인다. 인기척이 없던 어둠에서 부러 제 등장을 알리듯 뚜벅뚜벅 무거운 부츠 굽 소리가 들린다.
“나와 약속했잖아.”
“네가 그 대신이 되겠다는 거?”
이미 열적외선으로 건물을 스캔한 자료가 전해진 터라 놀라운 것은 없지만 사전에 정보를 받았음에도 여자의 등장은 갑작스럽게 느껴질 만큼 은밀했다. 저 위에서 지금 이 자리의 그 누구들보다도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을(혹은 지휘했을) 여자는 짐짓 자애롭게 삼켜웃는다. 자기 부하들의 시신이 놓인 바닥을 눈에 하고서도 여자는 제왕처럼 느긋했다.
“팔코네의 금고를 넘겼잖아.”
“아, 금고.”
한동안 부드럽게 웃던 여자는 얼굴을 단숨에 굳히며 제 발 아래를 쏘아본다.
“온갖 쥐새끼들이 이미 다 갉아놓은 몇 푼짜리 찌꺼기에 내가 정말 동할 거라고 생각했나?”
뒷목에 오싹함을 느끼고 제이슨이 제 뒤를 향해 방어 자세를 취하자면 그보다 빠르게 검은 장상이 말끔하게 어디선가 달려드는 움직임을 막아냈다. 암살에 최적화된 알 굴의 용병들은 제 기척을 숨기는 게 호흡을 하듯 체화되어 있었고 그것은 젊은 시절 수련을 다니며 알 굴과 잠시 생활했었던 박쥐도 마찬가지였다. 제이슨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여자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다.
“그만.”
배트맨의 주먹에 맹렬히 달려들던 용병 하나가 기절해 바닥에 나뒹구는 중에도 여자는 자비롭게 한 손을 들어 좌중을 정리한다. 사격이 없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일종의 쇼임을 알지만 두 남자는 그저 손에 잡힌 긴장을 간직할 뿐 달리 도리는 없었다.
“라스 알 굴이 무슨 일로 고담에 관심을 가지지?”
“당신이 있으니까?”
그는 입술에 유려한 곡선을 입으며 친근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그리고 여자는 픽 정다운 어투로 친절하게 브루스의 무지를 정정해주었다.
“그리고 이젠 라스 알 굴이 아니야. 아버지… 라스 알 굴께서는 고대의 명예로운 왕들처럼 잠들어 계시지.”
배트맨이 되기 위해 온갖 소리 소문을 좇아 무예에 통달했다는 인물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러 다녔던 시절에 ‘악의 수장’으로 불린 라스 알 굴은 무술에 조예가 깊은 것은 물론 국제사회 뒷면의 흐름을 꿰고 있는 동시에 그 자신이 그런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친구는 가깝게, 적은 보다 더 가깝게가 모토였던 브루스로서는 당연히 그에게 교육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는 그 어느 제자들보다, 부하들보다 충성스러우며 영민하고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냉혹한 전사가 있다 이야기를 귀에 들었다. 그는 라스 알 굴의 외동딸로 브루스가 라스에게 수련을 받을 당시부터도 라스의 부하들은 그를 다음의 알 굴로, 그들의 수장으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그가 라스를 다음의 죽음에서 끌어올릴 테니 모든 것은 의미 없는 미사여구였지만 말이다. 못해도 그가 무저갱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충직하게 건져 올려낼 때까지는.
“당신이 나를 살리게 했나?”
곤죽처럼 뭉개진 순간의 기억 속에 주술과도 가까운 최면을 읊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브루스는 덤덤히 물었다. 쿡쿡, 다시 짧게 웃은 여자는 잔뜩 기껍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점잖은 군주의 음성으로 이야기한다.
“나의 사랑을 받는 자(My beloved)야, 이렇게 눈을 뜬 당신을 보게 되어 정말이지 기뻐.”
레드후드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총을 겨눈다. 브루스가 빠르게 그의 팔을 잡아 천장 위를 향하게 하면 탕! 하고 총알이 저 허공으로 오발된다. 불합리함과 분노, 답답함으로 레드후드가 짧은 욕설을 뱉으며 저를 마크하려 드는 박쥐를 밀어내보지만 슬프게도 브루스에게는 이 모든 동작의 연쇄가 익숙했다. 불과 며칠 전의 기억이 앞뒤의 아귀도 없이, 시간도 장소도 없이 불분명하게 짓이겨져 있는데 십여 년 전의 과거가 이토록이나 생생한 것은 자신이 나이를 먹어 주책이 없어진 탓일까. 젊은 어느 날, 자신의 집사에게 ‘나는 절대 늙지 않으니까요.’ 하고 철없이 시시덕이던 자신이 떠올라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브루스는 레드후드의 상처 입은 오른팔을 거침없이 처냈고 레드후드는 브루스의 복부를 걷어찼다. 하하하, 소리 높여 웃는 여자는 콜로세움에서 서로에게 검을 겨눈 글래디에이터를 관전하는 로마의 황제와 같이 보였다. 자신의 의도에 따라 제가 사랑했던 이와 춤을 추듯 겨루는 검은 박쥐의 모습이란 역시나 그 순진하고 무지한 눈동자보다도 더욱 귀여운 것이었다.
탈리아의 웃음을 신호로 주위를 어지럽히던 기척이 하나둘 옅어져 간다. 브루스는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브루스는 조금 집요하다 싶을 만큼 레드후드의 오른팔을 잡아챘고 그의 소맷자락이 찢어져 배트맨의 손에 담겼다. 옷자락 섬유 사이사이에는 갈색으로 말라붙어가는 액체가 끼어있다.
“그래, 당신의 일을 해야지. 어디 그토록 부정하던 희망 그 자체가 되어보아.”
[배트맨, 그곳에서 나오십시오.]
여자와 거의 동시에 계속 침묵을 일관하던 알프레드가 간결하게 말한다. 브루스는 폭탄이 장착된 배트랭을 집어던져 건물 벽을 무너뜨린 다음 그래플링건을 들어 저쪽 건물 외벽에 고정시키고 브루스는 레드후드를 옆구리에 안으며 건물 내부가 화염이 휩싸이는 순간 동시에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화기와 파편을 막아 망토로 레드후드와 자신을 잘 감싸며 옆 건물 외벽에 안착한 브루스는 잠시 자세를 유지하다 얼마쯤 잠잠해졌을 때 머리 위에 있는 난간을 잡고 오르며 발밑이 단단히 고정된 곳으로 장소를 옮긴다. 머리 위로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 줄 알아?!”
으득,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레드후드가 브루스의 멱살을 잡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외침을 들었다. 그 아이도 이렇게 추웠을까, 하나 둘 꺼져가는 감각이 무서웠을까, 이 적막 속에 자신을 찾아와야했을 누군가를 기다렸을까 원망했을까. 이 모자란 것 많고 결함투성이의 인간이 알량한 선의를 가장한 제 외로움에 손을 내밀었던 그 한 순간 때문에 아이는 죽음으로 보내졌는데 그 원흉인 자신이 죽음 앞에서 다시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너무나 크나큰 사치라고 생각했다. 지금 어딘가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 집사에게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렇게나 과분하게 행복했노라고 고해하고 싶었다. 그런 순간이 있었다.
“설마 그가 진짜로 당신을 사랑이라도 하는 줄 알아? 라스의 후계선언 이후 수장을 찬탈한 탈리아가 당신을 정말 어여삐 볼 거라 생각해? 그게 아니면 당신, 그에게 정말 반하기라도 한 거야?!”
“알 굴이 어째서 고담에 있지?”
아까의 일들로 장비가 고장 났는지 레드후드에게 변조된 음성이 아닌 브루스가, 매치스 말론이 요한 신부로 알고 지내던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레드후드 복장의 내구성에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배트맨은 굳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제 멱살을 움켜잡은 왼손을 정 없이 빼냈다.
“나는 당신을 살려야 했어.”
“그건 답이 되지 않아.”
“슈퍼맨도 되살렸던 당신이 할 말이야?”
“그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배트맨은 작정이라도 한 듯 레드후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 그러시겠지.”
그에 레드후드는 신경질적으로 헛하니 거칠게 잘라 웃으며 외쳤다.
“슈퍼맨은 그저 묻어두면 그만인 한낱 인간과는 다르니까!”
제가 소리를 지르고서도 예정에는 없었던 말에 그는 제 입술을 질근 깨물며 젠장, 하고 욕을 뱉는다.
“조커를 살려놓아서 영감, 당신 결국 어떻게 되었지? 당신의 로빈은? 당신, 죽고 돌아오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던 거야?”
“네가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군. 애초에 나를 살리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길 여지조차 없지 않나?”
젊은이는 말아 쥔 주먹을 성급하게 내질렀고 브루스는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레드후드는 건물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몸이 밀려나며 다른 층으로 통하는 문에 부딪힌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
레드후드가 제 마스크를 벗어 배트맨의 발치로 집어던졌다. 먹구름 짙은 하늘에서 언제부터인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그 마스크의 눈으로 떨어져 흐른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왔어. 그렇게 나는 내가 있을 곳 전부를 빼앗긴 줄조차 모르고 지냈지.”
도미노를 착용했지만 역시나 사진처럼, 목소리처럼 브루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제이이다. 과거의 누군가와 쏙 빼어 닮은 청년, 그는 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당신에게는 슈퍼맨보단 절실하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레드후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휙 하니 저 건너편 건물로 뛰어나가 버렸다.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는 빗방울 소리 속에 멀어지는 걸음걸음이 묻힌다. 원하는 증거물은 손에 입수했으니 상관없었다. 브루스는 유틸리티 벨트에 레드후드의 혈액이 묻은 섬유조각을 넣고 그가 남기고 간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빗물이 사위를 감싸 안는다. 알 굴이 제법 박쥐에게 유효한 인질을 잡은 모양이었다.
“…제이슨.”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위태로워질 지금의 호흡이 못 견디게 새로워 브루스는 결국 오래된 이름을 혼자 읊조리며 살아있는 고통과 환희의 사이에서 한숨을 갈음했다.
“비어있더군요.”
배트맨이 돌아왔다. 오랜만이 자경활동을 하고나서 별 다른 설명도 해명도 없이 불쑥 제 질문이나 하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대답한다. 알프레드 입에서 사실 하나를 파악하며 브루스는 유틸리티 벨트를 풀어 책상 위에 펼쳐둔다. 시료를 지금 당장 분석해야 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몸이 늘어져서 비에 젖은 카울을 벗은 브루스는 그저 무성의하게 고개만 몇 번 주억주억 끄덕이며 풀썩 모니터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등을 받쳐주는 의자의 등받이가 편안해서 오랫동안 다녀온 여행에서 막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도 든다. 잠시 눈을 감고 촉감과 후각, 청각으로 전해오는 집(결국 이 표현이 박쥐에게는 딱 맞았다.)이라는 존재를 머릿속으로 그려본 뒤 브루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모니터의 한가득 섹션 별로 고담 이곳저곳이 떠올라있다.
이곳에 오기 전 배트맨의 모습으로 브루스는 레슬리와 얼굴을 마주했다. 레슬리는 자신 앞에 불쑥 나타난 배트맨의 모습에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덤덤한 얼굴로
“아침에는 아이들 곁으로 오렴.”
하고 말했을 뿐이다. 매치스 말론이 보육원의 관리인으로 아직 이름이 남아있는 만큼 브루스는 남은 책임을 다 해야만 한다. 브루스는 차근히 지금부터 해나가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정리한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구실 생각이십니까?”
천연덕스럽게 흐르는 초와 초 사이를 견디지 못하고 알프레드가 말을 꺼냈다. 그의 본래 억양과 어조를 떠올리자면 다소 새되고 조급했다. 브루스의 어느 기억에서보다(시간의 흐름 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버린 그는 입가의 주름을 굳게 잡고 그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딱딱하게 브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루스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을 다문 채였고 알프레드는 허탈함에 허파에서 바람이 샜다.
“제 주인을 죽였다고 고담시경을 들볶은 집사를 두고서야 웨인 주인님 고생길이 훤하시군요.”
브루스가 알프레드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때 집사는 평소 잘 하지도 않던 허리 굽힌 인사를 무척 단정히 남기며 동굴 바깥을 향하는 길을 따라 발길을 튼다.
“알프레드.”
브루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 앞에 섰다. 알프레드는 머리카락은 여전히 덥수룩하니 헝클어졌지만 면도는 해서 더는 그 순진무구한 매치스 말론이 아니게 된 브루스의 얼굴과 그의 가슴에 주홍글씨마냥 떨어지지 않는 박쥐를 번갈아 본다. 평생의 피로가 몰려드는 듯 눈이 뻑뻑하다.
알프레드를 붙잡은 브루스의 눈은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제자리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브루스 웨인이라는 작자는 입만은 곧 죽어도 살아서
“나를 죽은 걸로 하고 싶었다면 더미라도 만들지 그랬어요. 만드는 법, 모르지도 않잖아요.”
이런 소리를 한다.
“하하하하,”
알프레드는 최선을 다해 유쾌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당신께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라고 이 도시가 나의 브루스를 죽인 거라고 말할 걸 그랬습니다.”
늘 브루스와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필요할 때면 바로 버팀목으로서 자리할 수 있지만 하나로 동화되지는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던 알프레드가 바짝 브루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브루스의 목을 쥐었다. 카울을 벗어 여린 목줄기가 그대로 드러난 배트맨은 그저 묵묵히 집사의 혈관이 도드라진 기다란 손가락의 감촉만을 하릴없이 되새겨본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에는 하얀 뼈대와 퍼런 혈관이 도드라지지만 브루스의 목에는 아무런 압력도, 압박도 가해지지 않았다. 브루스는 자유로운 호흡을 의식적으로 보다 신중히 담고 뱉는다. 그의 손에 제 기도를 드나드는 공기의 진동이 닿도록.
“당신이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돼요.”
브루스는 그런 알프레드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뱀처럼 말했다. 알프레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내린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알프레드 가장 안쪽에 자리했을 이 얼굴을 브루스는 잔인하게도 세세하게 훑어서 새로이 자신이 된 제 뇌 속에 새겨 넣는다. 마치 손에 힘을 넣어 이 목쯤이야 졸라도 괜찮다고 종용하듯 배트맨의 손가락이 알프레드의 손등을 토닥인다.
“이런 짓, 그만 두어도 돼요. 당신은 그래도 돼요.”
“저는 어찌되어도 좋습니다!”
뱃속 깊은 곳을 긁고 올라온 거친 음성이 매서운 칼바람이 되어 불어온다. 이를 드러낼 듯 사납게 말하는 알프레드를 앞에 하고서 브루스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침잠한다. 이것도 브루스가 알프레드 쪽에, 알프레드가 브루스 쪽에 서있던 일이 보다 빈번했던 걸로 기억한다.
기어이, 기어이 다시금 견고하게 제 형상을 갖춘 브루스를 보며 목으로 가져갔던 손에 서서히 힘이 풀리면서 알프레드는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차라리 눈이라도 질끈 감아 볼까 싶지만 브루스의 머리 한 켠에 눈을 떠 자신이 한 일을 직시하라고 다그치는 소리가 있다. 스스로의 강박에 브루스는 눈도 거의 깜빡이지 못하고 모든 장면과 장면을 기억한다. 한 번 더 온전히 브루스 웨인이 된 심장이 응어리로 아렸다. 브루스 웨인이 어떤 말을 듣든, 배트맨이 어떤 서사를 가지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든 알프레드에게는 브루스의 사회적인 생존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러지를 못했다. 매치스 말론이 돼 버린 브루스를 그냥 내버려두면 되었을 텐데 알프레드는 루시우스로서 자신을 보살폈다.
“더미를 못한 것도, 여길 정리하지 못한 것도 나 때문이죠? 나는, 매치스 말론은 언젠가 브루스 웨인이 될 테니까요.”
거짓말로도 브루스 웨인의 장례식은 지켜보지 못할 집사는 몸을 웅크리고 절박하게 배트맨의 망토를 움켜쥔다.
“아이들과 지내시면서 느끼신 게 아무 것도 없으십니까? 당신께는 다른 길이,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알프레드에게 보여줬을 자신의 얼굴 하나하나가, 매치스 말론으로서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알프레드의 미소 순간순간을 이끌어온다. 브루스는 오랜 옛날에서나 보았던 그의 편안한 웃음, 버석한 무채색으로 금방이라도 서있던 자리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던 그가 2인치 즈음의 선 모양 하나로 선명한 빛깔에 물들던 오래전의 광경을 떠올렸다.
고담을 껄렁껄렁 활보하는 조무래기들에게조차 어찌 대응해야 할 줄 몰라 감정에 몸을 맡기고 달려들었다 맥없이 두들겨 맞고 돌아온 밤에, 박쥐가 되기로 결심하며 금빛 종을 울렸던 그 날에, 브루스는 자신이 제 집사의 말을 들었어야 했음을 안다. 알프레드는 언제나 옳았으므로, 그보다 우선 그는 브루스에게 언제나 최선과 최고만을 안겨다 주었으므로. 어차피 배트맨은 지금이야 다시 돌아왔다고 한들 얼마 없이 반백 살이 되고, 그 이상으로 점점 해가 지나가다 보면 자연적으로 사라져야만 할 존재였다. 법의 사각에서 모호하며 아슬아슬한 경계를 가지고 공포를 휘두르는 박쥐에게는 이번과 유사한 수 십, 수 백 가지의 마지막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 뿐인 집사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의 아집을, 세상 그 누구보다 강인한 사람일 텐데도 브루스 웨인이라는 존재 때문에 이리 무너진 이에게 자신은 설명해야한다.
“당신이 원하는 브루스 웨인은 될 수 없어요.”
자신의 목을 움켜쥔 손을 얼마든지 지지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절박하게 안전한 곳, 따듯한 곳, 사랑스러운 곳으로 붙드는 손은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어 브루스는 죄를 지으면서도 꼿꼿하게 선 자세로 알프레드의 잿빛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알고서, 그 많은 짓들을 하고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순진한 매치스 말론이 될 수 없어요. 나는,”
브루스는 몰래 숨을 깊이 삼켜본다.
“살아있으니까요.”
하, 고개를 들어 브루스를 올려다본 알프레드가 공허하게 웃었다.
“그래서 당신께선 혼자 죽으실 건가요? 저를 이, 곳에 혼자 내버려두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당신의 집사는,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그 정도의 존재입니까? 나는 다시 당신의 시신이 언제면 내게로 돌아오는가만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그저 못 한다, 하지 않겠다, 포기하겠다 그런 말들이면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알프레드가 마지막 최악의 선택을 종용당하는 사람처럼 절박하고 비통한 눈을 한다. 이 불합리를 브루스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브루스는 자신이 처음 죽던 날에 알프레드에게 자신이 받아온 과분한 모든 것에 대해 고해하지 못한 것을 기억한다. 결국 자신은 이러니저러니 그때는 아직 죽을 수 없던 것 아닐까, 하고 다소 느긋한 생각도 이쯤에서는 들기 시작한다. 브루스는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지금보다도 훨씬, 훨씬은 나이 들어버린 집사에게 감사와 사랑과 행복을 전하는 자신을 염치없이 떠올리며 겁 많은 용기를 가지고 알프레드의 파리한 손을 간신히 마주 잡는다. 브루스가 자세를 낮추어 알프레드의 얼굴을 보면 안경알의 그림자에 흐려져 확인은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믿음직하지 못한 남자가 하나 있을 것을 안다. 언어는 허무하고 형체 따위 없지만 그 무력한 것을 배트맨은 자신의 무기로, 신념으로 벼려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래서 허풍쟁이는 얄팍한 약속을 입에 한다.
“알프레드, 당신 장례식의 상주는 브루스 웨인이에요.”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는 한요. 브루스의 속삭임은 재미없는 농담과도 같고 또 기도문과도 같았다. 일곱 살 이후 거짓말에는 도가 튼 브루스였지만 알프레드에게는 왜인지 어린 도련님의 거짓말이 뻔히 손바닥 보듯 보여서 브루스는 이후 진실을 고의로 선택해서 일부만을 얘기하거나 아니면 정말 스스로가 진실이라고 믿어버린 거짓을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거짓말을 한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고 브루스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브루스가 알프레드와 바짝 가까워진 탓에 아이가 음절과 음절을 뱉어낼 때면 그의 몸에서 울리는 진동과 박동이 어우러져 보다 선명하게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을 알고 알프레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미열이 있는 이마를 박쥐의 위에 얹어본다. 주저주저하던 브루스가 손만 한참 꼼질거리던 양팔을 들어 알프레드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두근, 두근. 얄궂게도 평온한 심장소리가 이 너머에 있다. 이곳에 분명하게 존재한다. 울컥 슬퍼질 정도로 온전하게, 완전하게. 알프레드는 그간의 오랜 습관 때문에 조건반사처럼 이 사소한 것에 금방 기뻐할 수밖에 없다. 집에 어서 오렴, 브루스. 점점 막히는 목이라 제대로 이 말썽쟁이 도련님에게 전달됐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조심조심 얹어진 아이의 무게를 가늠하며 알프레드는 지금 당장은 자신에게 내려앉은 편안한 어둠에 피곤한 눈을 감아본다.
어찌되었건, 알프레드의 브루스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웨인 주인님께서야말로 어찌 이러시는지요.”
담갈색의 눈동자가 울렁울렁 독기 어리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마주하면서도 알프레드는 마냥 심상하게 되묻는다. 정 없는 집사의 대꾸에 주인은 제 뚱한 얼굴 위로 마치 거짓말을 가차 없이 지적당했던 일곱 살이 나던 때와 같이 억울함을 그득히 써 내리며 무어라 말을 이어가려고 얇은 입술을 달싹인다. 하지만 그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기보다도 빠르게 알프레드는 무뚝뚝이 제가 할 이야기를 이어간다.
“재료를 고르고, 운반하고, 손질하고, 요리한 뒤 당신 앞으로 내놓는 제 수고를 모르시지 않으실 텐데요.”
알프레드의 말은 마치 시의 운율처럼 주욱 매끄럽게 단어로 이어져 있어 듣기에 즐거웠지만 브루스는 하, 하고 날카롭게 웃어버린다. 그리고 브루스는
“알죠, 자-알 알죠!”
라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뾰족하게 모가 돋아난 눈과 살짝 대각선을 이루며 비뚤어진 입꼬리가 제법 간담이 서늘하다 못 해줄 것도 아니었지만 알프레드는 그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제 도련님이 어디까지 더 말을 꺼내는가 지켜보겠다는 양 그의 역정을 내버려둔다. 한 번 입술을 불만스레 꾹 물어 닫은 브루스가 말을 쏟아낸다.
“일주일! 일주일이에요, 일주일! 첫날에는 식빵에다 콩을 끼워 넣었었죠? 그 다음날이 냉두부, 그그 다음날이 콩샐러드, 베이크드 빈스, 칠리 콘 카르네, 파솔라다에 오늘은 완두콩 스프구요. 그뿐이에요? 프로틴 셰이크를 무가당 두유로 바꿔놓은 데다가 간식은 콩푸딩이었잖아요! 이쯤이면 나도 악의를 느낄 법 하지 않나요?”
비록 브루스는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대기업의 CEO를 맡고 있는데다 고담 시의 역사와 맥을 같이해온 웨인의 유일한 상속인이기는 하지만 짜장 바보는 아니라서 제 입맛에 맞지 않는 식단이 나온다면 제 손으로 밥을 챙겨먹든(모종의 이유로 서바이벌 생활에 능한 브루스이니 맛이야 어쨌건 굶어죽지 않는 법은 숙지하고 있을 테다.) 바깥에서 식사를 하든 하면 될 일이었지만 문제는 알프레드가 조금만 제가 준비한 것 이외의 무언가를 브루스가 집어먹으려고 하면 어떻게든 소소하게라도 반드시 응징을 했기 때문에 이런 유치한 입씨름이 시작된 것이다. 말을 뱉어낼 때마다 브루스의 머리에 그 간의 장면들이 되살아나며 브루스는 사위를 경계하고서 일격의 기회를 엿보는 고양잇과 짐승마냥 커다란 등을 살짝 구부리며 적의를 감추지 못하고 으르렁댔다. 브루스의 목에서는 어딘가 쉿쉿 하는 바람이 목구멍을 거칠게 부딪쳐 나는 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다.
“악의라니요?”
허리를 반듯이 편 알프레드는 다소 과장스러울 만큼 청승맞게 브루스가 꺼낸 단어를 따라 읊으며 능청스레 눈썹을 휜다. 들으시라는 듯이 한숨을 한 번 푹 하니 내쉰 알프레드는 버석하니 메마른 사막의 모래와도 같이 건조한 표정을 짓고서 왕년에 셰익스피어 비극을 건드러지게 읊어본 솜씨로 이야기한다.
“밤이면 밤마다 이곳저곳 쏘다니시기에 여념이 없으신 주인님께 보다 맛도 건강에도 좋은 요리를 대접하겠다는 갸륵한 집사의 노력을 그리 폄하하십니까? 애석하기 그지없군요.”
알프레드가 깔끔하게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을 무렵 브루스의 귀가 끝이 살짝 둥근 삼각형 꼴을 하고 머리카락과 같이 밤색의 털이 보송하게 나있는 동물의 것으로 변했다. 바닥과 의자에 무언가가 타닥타닥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엉덩이에서 꼬리도 돋아난 듯하다. 보통 때라면 쫑긋하게 서있을 귀가 잔뜩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뒤틀린 심사를 내보이고 있다. 빛무리 속에서는 종종 초록이 섞인 금빛으로도 빛나 보이는 아몬드 색 눈동자 가운데 자리한 동공이 타원형으로 길쭉해져 있었다.
“내가 콩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청년은 볼멘소리로 외친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진지하게 심통을 부리며 외치기에는 퍽 우스운 내용이었지만 알프레드는 그런 건 입꼬리에 가는 떨림도 보이지 않은 채 웨인가의 보디가드로서, 집사로서, 그리고 후견인으로서 자리하는 만큼 브루스의 불한당과 같은 태도를 묵시하지 않고 지적했다.
“밥상 앞에서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목소리를 높이십니까?”
쉿쉿하고 은근슬쩍 브루스의 목구멍에서 세어나는 공기의 마찰로 나던 소리가 기어이 위협적으로 햐아악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브루스는 불쑥 알프레드의 시야에서 쏙 하니 사라졌다. 브루스가 앉았던 의자 위에는 허물처럼 옷가지들이 자신을 입고 있어야할 주인을 잃고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다. 그리고 제 도련님의 머리카락처럼 밤색의 고운 털을 가진 고양이가 와다다 하고 저만치로 도망가고 있었다. 털이 길어서 그런지 듬직해 보이는 엉덩이가 풍성한 꼬리를 휘휘 저으며 알프레드가 뭐라 말을 해볼 틈도 없이 이미 저쪽 복도를 돌아 나가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안경 프레임 너머에서 제 콧등을 가볍게 주무르고는 한숨을 다시 한 번 폭 쉰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좋은 소재로 지어진 셔츠와 의자 위에서 스르륵 떨어져 내리는 슬랙스를 주워 모으는 알프레드 앞에서는 애꿎게 녹색 콩알만이 차게 식은 스프그릇 안에서 옹기옹기 불어터지고 있었다.
다만 의태를 해서 동물이 되어버린 인간은 산업화를 거쳐 현대사회에 이른 지금에 와서는 약간의 사회문제와 주되게는 생산성의 문제를 야기했고 거기서 인간은 ‘사회화’라는 장치를 마련해 10대 때부터는 제 기분과 감정을 조절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며 점차 의태를 하지 않게 되도록 교육받으며 성인이 된 인간이 의태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게 되었다. 어쩌면 사회에서 의태라는 현상에 덧씌운 이미지-절제심 없음, 아나키스트, 무법자, 무뢰배 등-의 효과도 한몫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요즘에 들어서는 의태를 억제해주는 약물도 여럿 출시되어 밝고 희망찬 미소를 머금은 광고 모델의 커머셜 하에 판매되고 있다.
어린 시절, 총구에서 발포된 두 발의 탄환으로 부모님이 죽는 것을 바로 코앞에서 목격한 이후 브루스는 트라우마와 함께 자라났다. 사고 이후 브루스에게는 여러 상담사와 정신과의, 심리치료사가 배정되었지만 아이가 그들에게 한 말은 단 한 마디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어요.” 그것뿐이었다. 그 누구도 부정도 반박도 할 수 없는 진실 하나를 기계처럼 반복하여 말하는 아이는 그 자리에서 작디작은 고양이로 변해 모든 대화를 차단했다. 그런 브루스의 상태를 어디서 어떻게 주워들은 건지 한 동안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미래를 짊어지게 될 후계자는 제 감정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동물로 의태해버리는 코흘리개라는 비아냥거림 가득한 기사를 쓰는 곳마저 있었다.
알프레드는 신나게 유리별장의 살짝 열린 창문을 통해 뛰쳐나가 브루스가 풀숲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유리별장 주변 웨인 사유지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 화면을 비춰주는 휴대용 PDA를 통해 지켜본다. 동선에 따라서는 지금 당장 고양이(코드네임-말썽쟁이) 포획작전에 들어가야 하지만 브루스가 신나게 달려가는 방향이 자신의 트레일러 쪽임을 파악한 알프레드는 여유롭게 의자에 몸을 앉히고서 머그잔에 담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차를 우리는 일보다 커피를 내리는 일이 더욱 잦아진 것을 새삼 깨닫는다. 미국인이 다 되었군, 하고 알프레드는 싱겁게 픽 웃는다.
딱딱한 안경 너머에서 부드럽게 끝이 떨어지는 눈매가 트레일러의 주변 이곳저곳을 알프레드가 주로 밟았던 동선을 따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밤색 고양이를 세세하게 좇는다. 나무를 베다 알프레드가 잠시 걸터앉는 그루터기에 꼬리를 살랑이며 접근하더니 온몸이 근지러운지 몸을 비벼대다가 고개를 바짝 들고서 이쪽저쪽 탐색을 하더니 불현듯 와다다 달려서는 트레일러 아래로 기어들어 다른 동물이 깃들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탐색을 하면서(바닥 아래에서 삐져나온 털이 풍성한 꼬리가 앙큼하게 휘적이고 있었다.) 브루스는 알프레드의 행동반경을 점유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삐지기는 삐졌지만 알프레드의 주변을 떠날 마음은 없는 주인의 심리를 진단한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내키는 만큼 제 얼굴을 자신의 트레일러 주변 여기저기에 문지르다 돌아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거진 한 시간. 신나게 트레일러 곳곳을 온몸으로 쓸고 다닌 브루스는 슬슬 유리별장을 향하는 길을 돌아보며 귀를 쫑긋 세우다 다시 눕히고, 그러다 낙엽 수북한 바닥을 제 꼬리가 빗자루라도 된 것 마냥 쓸듯이 탕탕 치더니 홱 고개를 돌리다 또 괜스레 작은 포도빛 코를 킁킁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제 외로움을 못 견디겠는지 어슬렁어슬렁 사냥에 실패한 맹수마냥 어기적어기적 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마지못한 듯 밟는다. 알프레드는 미리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고(이정도 관심과 성의를 보여 놓지 않으면 이 똥고양이 도련님이 어디로 홀랑 튀어 나가버릴 지 모르기 때문에) 제가 우다다 달려 나갔던 통로를 지나 브루스가 들어오는 것을 종종 꺼내어 보는 세간에서는 그리 화제가 되지 못했던 시집을 읽으며 차분히 기다린다. 자연광을 조명삼아 구절을 읽어나가는 알프레드의 귀에 드문드문 들리는 소음 속에는 얇은 미색의 종이를 손끝의 마찰로 넘기면 팔랑하고 경쾌한 소리가 있다. 그리고 조금 기다리니 그 사이사이로 작지만 야무진 발톱으로 집안 이곳저곳을 괜스레 시비를 걸듯이 박박 긁어보는 소리가 섞인다. 고양이의 모습이 아닐 적에는 커피머신, 고담의 온갖 정보들이 흘러들어오는 전용 컴퓨터, 전대와 전전대 그 전전전대 웨인들이 남기고간 술병 진열장 외에는 그리 관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고양이가 되더니 무언가 감회가 새롭기라도 한 것인지 이것저것 툭툭 (본래에 비하면) 작은 발로 건드느라 달그락달그락, 덜걱덜걱 소리가 난다. 알프레드가 무심을 가장하며 흘깃 탁자 위에 둔 PDA 화면을 보면 손바닥만 한 크기의 화분이 살짝 움직이거나 하는 정도이다. 아직은 떠보는 중인 모양이다. 팔랑, 하고 알프레드는 시집의 다음 장을 넘긴다. 그대여, 시인은 제법 거창하게 독자를 불러본다, 내 오늘 이곳에 멎었을 때 그대 앞길에는 다음 계절의 꽃들이 무성하리라. 흘깃흘깃, 아주 작은 시선이 자신을 짬짬이 향하는 것을 알지만 알프레드는 허리를 그저 곧게 피고 앉아서 꿋꿋하게 종이 위에 써진 구절을 머릿속에 담는다.
마치 여유는 이런 식으로 부리면 된다고 몸소 가르치는 것처럼 알프레드는 이 유리별장의 잔잔한 공기에 한껏 동화되어 고요와 평온을 자아낸다. 평소의 브루스였다면 그런 알프레드 옆으로 슬쩍 다가와서 자신도 검토해야할 서류를 살피거나,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거나, 비교적 여유롭다면 그도 그가 좋아하는 책 한 권을 들고 와 읽으며 알프레드와 커피를 나눠마시고서 시간을 보낼 테다. 하지만 지금, 고양이가 된 브루스는 잔뜩 심통이 난 상태이고 그것을 숨길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다. 밤빛 고양이는 긴 꼬리를 느릿느릿 펄럭이며 잘 정돈된 바닥에 제가 몰고 온 흙먼지들을 토독토독 떨어트린다. 브루스가 지나간 자리자리마다 그가 주렁주렁 달고 있던 마른 풀잎이며 잔나무조각 같은 것들이 포르르 떨어져 길을 그리고 있다. 알프레드는 그래도 덤덤하게 다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그에 맞추어 덜컹하고 이번에는 제법 큰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브루스가 장식장 사이로 제 커다란 몸뚱이를 들여 넣은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장식장에 진열된 술병들 사이사이에 발을 딛고서 브루스는 지금일까, 언젤까 하고 타이밍을 힐끗힐끗 엿보며 앞발을 작게 휘적이기 시작한다. 달그락 하고 독수리 장식이 머리에 달린 브루스와 같은 나이의 위스키 병이 흔들린다. 알프레드가 정말 기분 좋을 때나 한 잔 브루스와 나누어 마시는 그 병이었다. 고집하고는. 알프레드는 탁, 일부러 소리가 나게 책을 닫은 다음 안경을 고쳐 쓴다. 그리고 의자를 뒤로 빼며 몸을 브루스가 어슬렁거리는 진열장 쪽으로 살짝 틀었다.
“브루스.”
알프레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른다. 마치 어디 좁은 곳에 콕 박혀서 나오지 않는 새끼고양이를 쯋쯋 혀를 차서 어르며 부르는 톤이다. 지금 이 목소리가 브루스 본인 입으로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집사에게 얼레지는 것을 좋아하는 도련님이 엄한데 홀리지 않고서야 못 배겨낼 것임을 알프레드는 잘 안다. 거기다 어린 시절 이후 드물게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니. 폴짝, 하고 커다란 몸인데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가볍고 깔끔하게 크기가 제각각인 고운 유리병들을 넘어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거의 중형견만 한 몸체였지만 디딘 발끝이 가지런하다.
브루스는 잠깐 자리에 앉아 꼬리를 좌우로 살랑, 살랑 천천히 움직인다. 알프레드의 목소리에 동했지만 사소한 모든 것에도 의심을 하고보는 브루스의 성정상 우선은 집사가 무슨 꿍꿍이인지를 떠보지 않고서야 비록 관심을 주지 않았다고 알프레드가 아끼는 위스키 병을 깨뜨리겠다고 시위해놓았다지만 쉬이 자리를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알프레드는 빙긋 웃으며 제 무릎 위를 가볍게 톡톡 두드려 보인다.
“야옹.”
브루스가 청아한 목소리로 길게 한 번 운다. 느릿느릿 마치 사냥감에게 다가가는 고양잇과동물처럼 조용조용한 걸음으로 긴 털들을 한들한들 흔들며 브루스가 조심스럽게 알프레드에게로 다가왔다.
“여기 올라오십시오.”
알프레드는 살짝 허리를 구부려 고양이가 된 브루스와 눈높이를 비슷하게 해보이며 다정하게 자신의 발치에서 멈춰선 브루스에게 속삭였다. 브루스가 자라나는 것과 동시에 처음에는 알프레드의 손 한 줌에 동그랗게 들어차던 작은 고양이는 이제는 앉은키가 알프레드의 무릎께만 하다. 브루스가 열네 살이던 즈음 알프레드에게 잔뜩 삐져서는 어린 시절 쏙 들어갈 수 있던 상자 속으로 거칠게 뛰어들었다가 처참히도 망가뜨린 후로부터 고양이가 된 브루스는 웬만하면 알프레드에게 달려와 안기거나 하지 않는다. 웨인 주인님께서 마음을 써주셔 할 곳은 그쪽이 아닙니다만 하고 생각하면서도 알프레드가 두 팔을 벌려 브루스를 안아드려는 제스처를 보이면 세모난 귀가 한 번 쫑긋 서더니 브루스는 조심스럽게 알프레드의 무릎으로 올라온다. 고릉고릉하고 기분 좋은 백색 소음처럼 따듯한 동물의 목울음이 한 아름 가까워진다. 브루스의 표정이 어째 조금 뚱해지는 것을 보니 본의는 아닌 모양이었다. 영차, 하고 알프레드는 그런 브루스를 쏙 품에 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무겁지 않았다. 알프레드가 겨우내 이고 져 나르는 장작더미나 배트모빌의 엔진에 비하면 고양이가 된 브루스 정도야 포근한 솜뭉치니까.
갑자기 몸이 공중에 붕 뜨자 브루스의 털이 풍성한 꼬리가 흔들리며 귀가 쫑긋하며 눈망울이 반짝인다. 품에 안은 말캉하고 커다랗지만 그래서 한없이 무르게 느껴지는 존재를 알프레드가 바라보자 브루스는 그 시선에 참지 못하고 눈을 게슴츠레 깜빡인다. 조금 전만 해도 알프레드가 보관해둔 비장의 위스키를 떨어트릴까 말까 하던 것치곤 천진하기 그지없다. 달랑 안기느라 곱게 접힌 앞발과 든든한 발바닥이 드러난 뒷발에 흙먼지들이 엉킨 것을 본다. 말캉하게 잡히는 뱃살 쪽 털도 슬쩍 주물러보니 까끌까끌한 먼지들이 만져지는 게 털색이 어두워서 그렇지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느라 브루스가 지금 제법 더럽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야옹, 순진하게 브루스가 울자 순간 안경 너머에 있던 알프레드의 눈꼬리가 아주아주 조금 파르르 떨렸지만 금방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알프레드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서 다시금 브루스를 꼭 받쳐 안았다.
“가실까요, 웨인 주인님?”
“아웅?”
고양이가 순진하게 되묻지만 알프레드는 그저 묵묵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향하는 곳은 배트케이브, 로 이어진 길에 설치해둔 욕실이었다.
“가만히 계세요.”
알프레드가 타이르며 소음이 최소한으로 나는 드라이기를 한 손에 그리고 보송한 수건을 다른 한 손에 들고서 물기를 머금어 이리저리 엉키고 처량해진, 좋은 냄새가 나는 털을 말렸다. 아까 잠시 마주친 눈은 알프레드의 트레일러 주변을 서성인 뒤 기어코 알프레드의 관심을 받았을 때 새초롬하게 좋았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알프레드, 어떻게 나한테!’ 하고 뼈에 사무친 배신감만 한껏 토로하고 있었다. 그러게 결과가 뻔히 보이는 행동을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어째서 하는 것인지, 속으로 쯧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차면서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굳이 심술이랍시고 말썽을 부리는 것을 보면 1%의 가능성 어쩌고 하는 건 편집증도 추리도 무엇도 아닌 그저 본인의 고집을 관철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알프레드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을 때 브루스는 정말 많은 말과 말과 말을 쏟아냈다. 쏴아아 하고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고양이가 들어가기에 좋은 크기의 작은 간이 욕조에 받아질 때 그와 어우러져 냐아아아아악 와오오오옹 와우우우웅 하고 요란한 울음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어 욕실 이곳저곳에 튕겨졌다. 잔뜩 항의심을 뱃속에 싣고서 울어대는 브루스는 두 발로 일어서 앞발로 휘적휘적 닫아놓은 욕실 문을 열려고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완벽한 구형을 이루어 고양이의 손으로는 쉬이 돌리기 어려운 형태로 고안된 손잡이는 굳건하게 브루스를 무시무시한 욕실 안에 가두고 있었다. 그래도 몇 번의 거듭된 시도를 통한다면 기어이 문을 열고 말 브루스이기 때문에 물이 샤워기 머리가 잠길 정도로 차오르자 샤워기를 물속에 담그며 알프레드는 브루스를 다시 끙차 안아 올렸다. 고양이의 모습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본래는 인간인지라 물도 씻는 것도 그렇게 싫어하지 않으면서 항의는 거나하게 쏟아내는 브루스의 몸부림을 받아내며 알프레드는 먼지 끼인 발바닥이며(“이거 보십시오. 흙물이 나오잖습니까.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돌아다니신 건지.” 쯧쯧, 부러 혀를 크게 차는 알프레드에게 브루스가 젖은 꼬리를 타닥타닥 부딪친다. 대충 자기는 나쁘지 않다는 뜻인 거 같다.) 본래 고양이들이 가지는 것에 비하면 근육이 더 잡힌 탓에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캉한 살집이 있는 배로 트레일러 아래로 기어들어가느라 온갖 것을 묻혀온 털(조물조물 배를 주물러 보면서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식단에 대해 생각했다. 좀 더 잘 드셔야겠는걸.), 저리 가라고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정신없이 팔랑이는 풍성한 꼬리(“먀오오오옥, 와우우웅.” 브루스가 자꾸 서러운 양 울자 물에 젖어 보다 살에 가깝게 드러나 작아진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를 보드랍게 거품 낸 샴푸로 정성스레 손가락 사이사이로 빗질하듯 씻겼다. 브루스가 발을 털고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몸부림을 치면서 알프레드의 옷에는 그대로 고양이의 털이 엉긴 샴푸물이 묻었다. 그래도 브루스가 소란스럽고 조금 벅찰 만큼 활동적인 건 알프레드에게는 참 좋은 일이었다. 웨인부부가 세상을 떠났던 날, 과도한 스트레스로 아주아주 작은 새끼고양이로 변해버렸던 브루스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응당 어린 짐승이면 가지고 있을 따끈한 체온마저 바람 앞에 일렁이는 촛불마냥 위태로웠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소란스러움은 사랑스러워 눈가가 살짝 뜨뜻해질 정도였다.
브루스를 씻길 때처럼 구석구석을 말린 알프레드는 이제 브루스의 엉킨 털들을 곱게 빗질하려고 빗을 손에 쥔다.
“냐악!”
한손으로 자신을 무릎에서 떠나지 못하게 받치면서 소파 앞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빗을 든 손을 뻗어오는 알프레드를 본 브루스는 팩 고개를 들어보이고선 크게 한 번 빼어 운 다음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알프레드의 허벅지를 톡하니 앞발로 두드리고는 저만치 와다다 달려가 버렸다. 따끈한 털 덩어리를 황망히 놓친 알프레드는 지금 젖어서 구깃구깃 주름져버린 옷가지를 걸치고 있어 조금 으슬으슬했다. 피식 웃으며 알프레드는 거창하게 늘여놓은 도구들을 정리하며 우선 제 옷을 갈아입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빗질 안하실 겁니까?”
“냐아.”
브루스는 단호하게 안한다고 잘라 답한다.
“하면 기분 좋으실 텐데요.”
“냐아—”
하기에 지금이야 고양이 모습지만 어차피 이제 곧 본래대로 돌아오고 나면 고양이 적에 한 빗질은 소용이 없다. 그건 그저 도련님의 수발을 드는 게 즐거운 알프레드에게나 좋은 일이었다.
브루스가 배트맨으로서 돌아다닐 때야 배트맨 그 자체가 브루스에게 있어서는 제 트라우마로 인한 스트레스의 표현이고, 일종의 승화였으니 활동 도중 고양이가 되어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웨인으로서 일 할 때는 제 감정을 억눌러야할 일이 왕왕 있기 때문에 브루스는 레슬리의 상담 아래 브루스의 체질과 생리에 꼭 맞춘 약을 복용하고 있다. 사회의 인식 때문보다도 브루스는 제 사회적 필요에 의해 약을 상시 지참했고 그래서 수련인지 뭔지로 바깥을 나돌아 다니다 긴 시간 끝에 고담으로, 알프레드에게로 돌아온 후로 브루스가 고양이로 변하는 일은 거의 보기가 힘들어졌다. 알프레드는 그게 썩 달갑지 않았다. 브루스가 고양이로 변하는 것이 그의 신체가 마련한 스트레스 해소법중 하나라면 최대한 그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그렇게 두고 싶었다. 그 순간만이라도 제 현실과 삶에만 집중하는 모습으로 있기를 바랐다. 아니, 곧 죽어도 입 밖에 내지 못할 마음속에 밀어 담아둔 욕심을 말하자면 실은 알프레드가 브루스가 이렇게 고양이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수발을 도맡은 게 자기 자신이라는 것 또한. 브루스는 영민했고 그렇기에 알프레드는 지금 브루스가 고양이가 되어버린 것은 항의의 표시이자 일종에 애정표현인 것도 알고 있다.
“제가 즐거운 건 분하십니까?”
그럼에도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양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보면 자그맣게 이불 속에 들어있던 형체가 묵직하게 커진다. 아직 귀와 꼬리는 고양이의 그것이 남았지만 브루스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꼬리를 바깥으로 자세인 탓에 브루스의 맨 발이 가지런히 정리된 베개를 밀어내며 브루스는 어느새 알프레드가 걸터앉은 쪽으로 눈만 쏙 빼어 알프레드를 불만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심통 맞은 얼굴에 약간의 아쉬움과 상당량의 사랑스러움을 느끼며 알프레드는 차분하게 이불 밖으로 드러난 맨 다리에 난 기다랗게 그어진 상처를 본다.
“새로 흉이 지셨군요.”
알프레드가 말하자 브루스는 이불을 끌어안으며 뒹굴 몸을 모로 돌려버린다. 표정을 숨기려고 하는 행동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덕분에 맨 등과 엉덩이가 훤히 드러난다. “여기에도.” 알프레드는 둥글게 말아져서는 척추 하나하나가 드러난 브루스의 등 어느 매를 손가락으로 다정히 짚었다.
“나 아직 화났어요.”
꿈틀하고, 브루스가 돌아누운 자세로 어깨를 들썩였다. 견갑골이 작게 볼록하니 움직이고 꼬리뼈를 타고 튀어나온 밤색 기다린 꼬리도 팔랑하니 알프레드를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잖습니까.”
알프레드는 그에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브루스의 뒷머리를 정돈하듯 손끝으로만 쓰다듬는다. 알프레드가 드라이기로 잘 말렸지만 아직 피부 바로 위에 남은 수분기가 있어 본래 보다도 살짝 짙게 보이는 머리카락이 손에 달라붙듯 했다. 쫑긋 서있는 귀 한쪽이 팔랑 하고 움직인다. 토닥토닥 침대를 두드리던 꼬리가 어느 새 침대 가에 살짝 걸쳐진 알프레드의 허벅지로 올라와 있다.
“고담으로 돌아오신 다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무력하고 어렸을 적부터
“웨인 주인님께선 겪어 오신 일들 아닙니까.”
“나야 어찌되어도 좋아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브루스는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당신께서 상관없으시다면, 저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내 이야기로 말 돌리지 말아요. 알프레드, 내 선 약속 잡아 놓으려고 했죠?”
“정기적으로 만나시는 분이 계셨습니까? 제가 한다는 일이 그만, 실례했습니다.”
척 듣기에도 마음에 없는 집사의 건조한 사과에 브루스는 코로 웃으며 그제야 알프레드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몸을 돌리면서 안고 있던 이불이 따라와 브루스의 맨살이 알프레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는 거 뻔히 알면서 말하지 마요.”
“지난 번 자선파티 때 춤추신 영애 분 아니십니까. 캠벨 님께서 직접 웨인 주인님과 만나고 싶으시다 말씀 주셨으니 그에 집사로서는 예를 다해 받아들 수밖에요. 웨인 주인님 나이시면 이런 유의 만남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요.”
“내가 누군가와 그렇게 만날 수 없다는 거, 알프레드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굳이 온갖 스케줄을 조정하면서도 그와의 만남을 주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만 하고 알프레드는 목구멍에 달랑달랑 걸리는 대꾸를 차분히 깊은 숨으로 삼킨다.
“호의에 대해 예를 다해 응대한다는 당신 방침에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캠벨 씨에게는 나부터도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죠. 하지만 내가 문제 삼는 건 그게 아니에요. 왜 이 타이밍에 당신이 선을 잡았는가 하는 거예요.”
알프레드를 직선으로 바라보는 아몬드의 눈동자가 푸르스름한 주변 가시광선에 빛나며 풀빛으로 싱그럽다. 그 빛에 이끌리듯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이마며 광대뼈가 그리는 선을 설핏 지문으로 따라본다. 브루스는 한 번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어느 새인가 브루스의 꼬리가 사라졌다. 귀도 점점 작아져 세모난 모양이 작은 타원형으로 바뀌고 있다.
“알프레드, 나를 떠나고 싶어요?”
브루스의 목소리를 그저 덤덤했다. 시선은 여전히 천진하게 빛나고 브루스의 얼굴에는 슬픔도 화도 없이 그저 평온하다. 그때 귓바퀴가 선명하게 뼈대를 잡은 인간의 것으로 브루스의 귀가 자리를 잡았다. 또 하나의 마음을 브루스는 혼자 정리를 끝낸 모양이었다.
“떠나고 싶으면 내가 말했죠? 말리지 않아요, 나는.”
브루스가 고담 갱단의 잔챙이들에게 흠신 맞고서는 비실비실 유리별장으로 돌아왔던 밤 이후, 박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한 번 크게 알프레드와 언쟁을 한 적이 있었다. 박쥐 가죽 하나 얄팍하게 둘러쓰고서 마치 무엇이라도 된 듯 저 도시로 뛰어드는 브루스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알프레드는 자꾸만 돋는 소름에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다가 결국 외쳐버렸다. 이럴 거면 자신이 브루스의 옆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당신 시체를 말끔히 처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자신은 그럴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으니 그리 아시라고 말이다. 그리고 브루스는, 그렇다면 이곳을 떠나도 좋다고 대꾸했다.
“하지만 당신 대안의 누군가를 나한테 떠밀 생각은 말아요.”
“대안 같은 게 아닙니다.”
잘라 말하는 브루스의 얼굴을 알프레드는 자꾸만 달래듯(혹은 알프레드 스스로를 추스르듯) 쓰다듬는다. 뺨과 이마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곱게 넘기고, 잘 정돈된 눈썹도 쓸어본다. 일주일 전쯤, 브루스는 고담 시의 부흥을 위해 웨인 엔터프라이즈 임원회의 때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고 그 사업은 좋게 말하면 퍽 획기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한 것이었다. 웨인부부가 죽은 이후, 알프레드가 후견인으로 자리하기는 했지만 브루스는 어린 나이부터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CEO가 되었다. 하지만 10대 중후반부터 그가 남긴 공백은 제법 길어서 탕아 생활을 마치고 불쑥 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염문을 뿌리는 동시에 회장이라는 권한으로 온갖 활개를 치는 브루스의 모습이 기존의 임원들에게 좋게 비치기란 힘든 것이었다. 특히 애덤스는 그런 브루스의 작태를 제일 눈에 거슬려했다. 그가 브루스에게 이야기했다.
“아직도 그 낡은 후견인의 말씀만 듣고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게 낙천적이지 못합니다. ‘도련님’. 늘 붙들고 계신 측근들 보다 주변에 믿을 만한 새로운 바람을 들이심이 어떠십니까? 당신의 친척인 필립, 그 분이시라면 식견도 있으시고 현실감각도 좋으신데 말입니다. 언제까지 집사와 붙어먹… 큼, 실례. 함께만 계시다간 돌아가신 선대께서도 슬퍼하실 테지요.”
그리고 그 다음다음 날 애덤스는 블러드헤이븐의 웨인 엔터프라이즈 지사의 마케팅 총괄책임자로 인사이동 되었다. 알프레드는 다분히 보복성을 띤 인사에 브루스를 질책했고 브루스는 당연히도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야망이 있는 직원에게 어울리는 기회를 주었을 뿐이라고 답할 뿐. 그리고 알프레드는 그런 브루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콩 요리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딱히 자신의 브루스에게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인 그 치가 어떻게 되건 말건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트러블 하나하나에서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젊은 회장인 브루스는 그의 역량을 승냥이 같은 임원진과 이사들에게 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본의는 아니었지만 애덤스 그의 말 중 하나에는 공감했다. 자신은 브루스가 성인이 되어버린 이제는 후견인이라고 말하기도 어색한 위치였고, 잘 쳐줘서 집사였다. 그의 어떤 미친 짓도 안 된다 밀어붙이지 못한 지독한 공범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브루스에게는 이런 무력한 자신보다도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를 정말 그의 자리에 있게 해줄, 브루스 웨인이 가면이 아닌 그의 본래 모습으로 채워질 수 있게 해줄 누군가를. 하지만 역시 자신의 의도는 브루스에게는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전달되어도 브루스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실은 알프레드는 그런 브루스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세간에서 매체들에서 브루스 웨인에 대해 어떤 세치 혀의 말과 말들을 떠들어도 그가 업고 있는 가십과 스캔들에 오히려 한들한들 알량한 미소로 기름을 부을 뿐인 브루스가 그저 알프레드가 언급되었을 뿐인 언쟁에 이리도 쉽게 토라져버리는 것을 보면 알프레드는 얄궂게도 자신이 기뻐하고 있는 걸 자각하게 된다. 심통 맞은 고양이가 되어버린 브루스를 한가득 품에 안고 그의 앞에 서기 위해 차려입은 옷에 물을 뒤집어쓰고서도 그저 행복밖에는 알지 못하는 자신은 결국 브루스 웨인의 알프레드 페니워스인 것이다.
“내가 당신을 떠날 수 있었다면 진즉 그랬을 테지요.”
그저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난 수많은 꿈들을 그릴 뿐. 그 정도는 괜찮지 않겠느냐고 알프레드는 제 욕심 많은 가슴에 되물어본다.
“그럼 이 이야기는 끝났네요. 이제 꿈도 꾸지 말아요.”
그걸 이 도련님은 그 마저도 거만하게 가로 막아서지만. 알프레드는 피식 웃으며 브루스가 꼼질꼼질 하얀 발가락으로 딛고 있는 베개 옆에 있는 다른 새 베개를 집고 반듯하게 베갯잇을 펴며 브루스의 머리에 받쳐 주었다. 코끝에 알프레드가 정성스레 고양이를 씻겼던 샴푸 냄새가 났다. 브루스는 마음의 정리가 끝난 다음 드물게도 편안해졌는지 가물가물 눈을 감는다.
“‘나’를 찾는 연락이 있어요?”
“아직은 없군요. 두 시간 정도는 여유로울 것 같습니다.”
알프레드의 말에 브루스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오물오물 움직이던 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자신의 악몽과 싸우기 위해서 이 무르고 여린 존재는 적절히 쉬어주어야 한다. 브루스는 짤막한 휴식 일분일초조차 효율이라는 계산아래 도출하겠지만 알프레드는 알고리즘이 어떻고 간에 브루스가 조금이라도 편안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두 개째의 달이 뜨고 나면, 박쥐의 거죽을 뒤집어쓰고서 고양이는 제 마음속 발톱을 세우고 한껏 목소리를 날카롭게 벼리어 악을 쫓아 밤을 누빌 것이다. 알프레드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이 존재는 그 스스로의 가치도 모르고서 또 이곳저곳 지저분한 곳을 찾아 쏘다닐 테다. 그러니, 내 사랑 나는 응당히 없어지되 그대는 영원하리. 그 시인이 말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몸 위로 이불을 곱게 정돈하며 고른 숨이 느껴지는 그의 뺨 위로 가볍게 입맞춤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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