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있었던 이야기)
The Butler did it> http://sowhat42.tistory.com/81
1> http://sowhat42.tistory.com/94
※알피뱃 외에 숲뱃 등 뱃른요소가 있는 글입니다.
※DCEU+엔드게임 이후의 이야기를 섞었으며 뱃대숲과 저스티스 리그 영화 상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인물들이 나오는 설정파괴가 두드러지는 글입니다.
※읽으시기에 불편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브루스 웨인의 집사는 오랜만이 동굴의 모니터 앞에 자리했다. 유리별장 주변의 반경 수 마일부터 산재해있는 감시카메라들로부터 전송되는 영상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알프레드는 느긋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알프레드의 심기를 곁눈질로 염탐하며 능청스레 커피가 든 머그를 건네는 이가 없이 알프레드가 직접 내린 커피는 훨씬 맛이 있고 한편 조금은 심심하다. 알프레드는 그 허전함을 일종의 빈 둥지 증후군의 일종이라 생각하며 그에 쓸쓸해하기보다 퍽 기쁘게 여기기로 결정했다. 지금껏 어느 감시카메라에서도, 보안시스템에서도 그림자 하나, 로그 하나 남기지 않았던 침입자를 알프레드는 몇몇 가정을 세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담담히 기다리고 있다. 알프레드가 정확히 파악한 바만으로도 벌써 세 차례 이 동굴을 오고간 그는 이곳의 구조와 생리를 매우 잘 아는 인물이었다. 브루스가 아니라면 저스티스 리그의 면면들이 그 다음으로 떠오른 후보들이지만 너무나 박쥐와 닮아있는 레드후드의 활동 모습을 보아서도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보였다. 그렇다면 누가 있을까. 누가...
턱을 받치고 한참 모니터 곳곳을 살피던 알프레드는 고담의 지하도와 이어진 입구 앞쪽에 나타난 이변에 눈동자의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고정했다. 누군가가 입구에 홀연히 서서 정확히 카메라가 설치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그의 시선이 어떤 우연도, 무엇도 아닌 카메라 너머의 사람, 즉 자신을 겨냥한 것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헬멧과 같은 형태의 붉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는 얼마쯤을 감시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그저 서 있다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킨 다음 입구를 손짓해 보였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발치에 내려놓은 산탄총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웨인의 집사로서, 손님 대접은 적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프레드는 장전이 되어 있는 산탄총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해 한 해 뻐근해가는 몸을 내색 없이 반듯하게 피며.
“안녕.”
배트케이브의 입구 바로 앞에서 고담의 새로운 자경단, 레드후드는 마치 오랜 집으로 돌아온 사람마냥 태평하고 자연스러웠다. 오른손에는 방아쇠에 걸고 왼손으로는 총신을 가볍게 받치며 그와 나란히 마주보는 위치에 발을 멈추었다.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는 마스크 뒤에서 변조되어 다소 무기질적이었다. 마치 배트맨처럼. 이런 사소한 위장까지 박쥐와 닮아 있는 인물의 정체를 알프레드는 자꾸만 추론하려 해보지만 알프레드가 가진 상식으로는 번번이 실패한다. 가슴팍에 어렴풋 보이는 빨간 박쥐의 문장은 이제는 비로소 잠이 들었을 박쥐를 자꾸만 연상시켜 총을 잡고 있는 손에서 약간 땀이 배어나왔다.
“그 사람, 그거 싫어할 텐데.”
피식,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레드후드는 마치 아심하라는 듯 손에 들고 있던 피스톨을 홀더에 꽂아 넣으며 가볍게 양손을 들었다. 그리곤 손을 머리 뒤로 돌려 마스크의 이음매 같은 곳에 대더니 찰칵 하고 가벼운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레드후드는 자신의 마스크를 벗었다. 위에 떠오른 표정이라고는 사위를 노려보듯 매서운 눈초리가 전부이던 마스크 너머에서는 제법 어려보이는, 젊은이의 얼굴이 있었다. 앞머리에는 하얗게 샌 새치가 눈에 띄었다. 아직 앳된 티가 다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얼굴의 윤곽을 그리는 턱뼈나 광대가 시원스레 뻗어 있는 청년이었다. 눈가에는 도미노를 꼼꼼히 착용했지만 잘생긴 얼굴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알프레드가 언젠가, 오랜 과거에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제이슨, 도련님?”
손으로 받치고 있던 총신을 슬며시 놓으며 알프레드는 눈을 둥글게 떴다. 씨익-하고 레드후드가 십여 년 전 이 장소의 일원이자 가족이었던 아이가 이를 가볍게 드러내며 개구지게 미소 짓는다. 이것은 무언가 지독한 농담일까. 알프레드는 잠금쇠가 잠긴 것을 확인하며 산탄총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 젊은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알프레드를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 이지?”
거의 반평생을 박쥐의 서포터로 지냈던 만큼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저 젊은이를 동굴의 의무실에서 차분히 분석해 보아야 한다지만 보다 감성적인 부분을 알프레드 앞에 등장한 얼굴은 지르고 들어왔다. 브루스의 오열과도 닮은 괴성과 또 한 번의 장례식, 박쥐의 곁에서 재잘재잘 노래하던 작은 새 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알프레드는 드물게도 동요하고 있다. 레드후드는, 어린 도련님은 마치 기약 없는 여행이라도 다녀왔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으쓱 어깨를 한 번 까딱이며 싱겁게 인사했다. 알프레드는 얼굴을 마른세수 하듯 손으로 한 번 훑어 지났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박쥐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제이슨 토드의 부활은 브루스 웨인이 생존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질문과 질문이 범람했고 알프레드는 그 중 하나를 간신히 끄집어냈다.
“언제부터지요?”
“살아난 것? 아니면 ‘제이슨 토드’로 돌아오게 된 것?”
알프레드는 침묵했다. 그의 혼란을 이해한 제이슨은 피식 웃으면서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편하게 등을 기둥에 기대고 선 자세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 그 때 조커가 내보낸 방송을 보고”
제이슨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잘 뻗은 콧대가 인상적이던 얼굴에 그 탓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금세 얼굴을 들어 그리 길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기억났지.”
“그리고 ‘레드후드’가 되셨다고요.”
알프레드는 제이슨이 제 옆구리에 끼고 있는 붉은 마스크와 홀스터에 담긴 피스톨로 차례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을 읽고 제이슨은 그저 비죽이 웃었다.
“이 도시에는 보다 선명한 질서가 필요하니까.”
도미노 너머에서 가려진 눈동자가 어둠보다도 선명한 붉은 빛으로 형형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알프레드의 지레짐작이나 노파심이 아니라 알프레드는 어린 도련님(으로 추정되는 젊은이)의 저 얼굴과 닮은 얼굴을 이제는 벌써 스무 해는 훌쩍 더 넘긴 과거에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조차 가능으로 만들 것만 같은 순진한 열정과 그 뒤에 품은 순수한 희망, 악에 대한 증오, 순례자와 같은 각오 같은 것이 두 얼굴에 겹쳐서 접점을 이루고 있다. 알프레드는 왠지 눈이 피로해서 안경 뒤에서 콧등을 살짝 주물렀다.
“도련님께서 안 계신 동안 이곳은 퍽 살풍경이었습니다.”
“그런 것 같네.”
제이슨은 저쪽에 디스플레이 된 오래된 코스튬을 그립게, 그리고 증오스럽게 흘깃 본다. 로빈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코스튬에 조커가 남긴 문구는 유품 위에 선명히 남아 누군가, 누군가들의 가슴에, 정신에, 영혼에 흉터로 박혀 떨어질 줄 모르는 광기로 자리한다.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오기 위해서 뇌에서 자체적으로 닫아버린 기억의 빗장을 가장 처음 연 것은 그 빌어먹을 웃음이었으니까. 그 웃음에 뒤덮여서 깨어나기까지 자신은 십여 년을 그와 떨어진 곳에서 모든 것을 잊고 살아야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도련님께선 지금 그것을,”
알프레드가 마스크를 향해 눈짓한다.
“택하셨다고요.”
“누군가는 해야만 하니까.”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우며 제이슨이 알프레드 앞으로 다가왔다. 굳게 다문 입매나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가 성큼 가까워진다. 자신을 닮아, 어쩔 때는 그 이상으로 과격해지던 아이의 행동에 걱정하던 브루스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했던 날. 그 다음의 아침, 아이는 트레일러 문 앞에서 하루를 준비하러 나올 알프레드를 기다리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배트맨이 하는 일은 로빈도 해. 브루스에게는 내가 필요하니까. 그치?”
하고 사명감과 닮은 자부심을 품고서 아이는 집사에게 어딘가 도전적인 투로 이야기했다. 그 바른 시선은 어딘가 오기를 담고 있던 것도 같다고 알프레드는 회상한다. 아이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고담에 무언가가 필요하고말고 그런 건 어찌되어도 좋습니다.”
알프레드는 참지 못하고 결국 한숨을 한 번 짧게나마 토로하고 말았다.
“제이슨 도련님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그 일의 끝이 어디로 갈지. 웨인 주인님께서 결국 어떻게 되셨는지. 당신 스스로가 어떻게 되셨는지 말입니다.”
“그럼 저스티스 리그 같은 잘난 나리들에게 배트맨의 일을 넘기겠다고.”
잠시 형형한 빛이 젊은이의 눈동자를 스친다.
“고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근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든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정작 바뀌어야 하는 것들이 바뀌지 않은 채 자경단이 하나 불쑥 생겨난 걸로는 그저 이,”
알프레드는 잠시 이를 악물며 울적 쏟아질 뻔한 욕지거리를 참아낸다.
“도시에 희생양만 던지는 꼴입니다. 웨인 주인님께서도, 도련님께서도 충분히 겪으셨잖습니까.”
“그 사람과 시스템이 어느 세월에 바뀔 줄 알고?”
“이건 인내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 사이에도 선한 사람들은 죽어가겠지.”
제이슨은 알프레드가 레드후드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쌓아두었던 신문 뭉치를 턱 끝으로 가리킨다.
“알프레드, 브루스를 지켜보면서 괴로웠던 건 알고 있어. 그래서 이제 레드후드가 있잖아. 브루스는 매치스 말론으로 외곽지의 보육원을 관리하고 말이지.”
“도련님께서는 어쩌실 겁니까. 경찰도, 마피아도, 빌런도 도련님의 목을 노리고 있는 건 알고 계십니까?”
“나는 배트맨처럼 무르지 않아. 그러니 더 나을 수 있는 거고.”
답답하며 쯧 혀를 차며 이 다음의 말을 고르기 위해 준비하는 알프레드를 보며 제이슨은 옆구리에 끼고 있는 마스크를 다시 뒤집어쓴다. 모든 대화를 끊어내듯 가면에 떠오른 무표정이 알프레드는 너무나도 익숙해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웨인 주인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알프레드는 찾아드는 피로를 숨기지 못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한숨처럼 말했다. 레드후드는 별 대답 없이 동굴을 떠나기 위해 발을 돌린다. 그러는 차에 그가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신호가 들어왔다.
“뭐지.”
딱딱한 목소리로 제이슨이 연락을 해온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얼마쯤의 공백 후 “뭐?” 하고 날카롭게 외치더니
“당신, 그는 내버리기로 했잖아! 약속은—”
얼마가지 않아 연락이 끊겼는지 “젠장.” 짧게 욕을 뱉는다. 그리고 방향을 바꾼 발끝 그대로 마치 혼잣말처럼 제이슨이 묻는다.
“...브루스에게 편지를 보낸 건 알프레드가 아니었어?”
“무슨 편지 말씀하십니까?”
손에 갑작스레 힘이 울컥 들어갔던지 제이슨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반으로 부수어버린다. 고장난 휴대전화를 레드후드는 동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렸다.
“브루스가 여기로 올 거야. ...슈퍼맨과 함께.”
“무슨,”
히어로의 이름을 어딘가 껄끄럽게 내뱉으며 제이슨은 알프레드가 더 설명을 요구할 새도 없이 바깥을 향해 달려가 버린다. 알프레드가 떨리는 손으로 레슬리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자신의 통신기를 찾았을 때는 이미 그로부터 도착한 메시지 하나가 불길하게 떠올라 있었다.
다소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매치스는 걸음을 재촉하며 걷고 있다. 이중 서랍 아래 숨겨진 총을 눈으로 보고 얼마쯤 싸늘하게 식었던 머릿속은 굳어 있었지만 행동만은 마치 잘 훈련받은 사람처럼 저쯤에서 다가오는 제이의 발소리가 문 앞으로 훌쩍 다가서기보다도 전에 빠르게 모든 것을 완벽히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날 성당을 나서면서 매치스는 제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혹은 않았다). 신부로서 한없이 다정한 이웃인 제이의 얼굴을 보면 붉은 가면을 뒤집어 쓴 무시무시한 징벌자의 모습은 매캐했던 연기 속으로 흩어져 매치스는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이 본 현실을 부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매치스는 은행 강도사건이 끝난 뒤 일당 중의 둘은 중상이고 한 명은 사망했으며 그나마 남은 한 명은 손목이 꺾인 채 기절하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는 상태라고 들었다. 그날부로 레드후드와 관련된 소식이 왜인지 눈과 귀에 밟히기 시작한 매치스는 얄팍하게나마 그의 행적을 좇아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알게 된 살인, 폭행, 뒷거래 등의 소식들은 정말이지 도통 고즈넉한 성당의 마음 좋은 성직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효과적인 위장이었던 것일까? 마치, 마치...
은행 강도 사건을 목격한 날,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어 고담시경에 간단히 경위진술만 하고(그마저 루시우스가 바득바득 재촉을 해대서 5분 정도 목격자 진술을 받고 있는 경찰관과 길거리에서 대화한 것이 전부였다. 서로 동행을 요구받았지만 루시우스는 경관에게 어느 번호를 건네며 매치스의 어깨를 감싸고 저만치로 떨어져갔다.) 돌아온 매치스에게 자원봉사로 나온 선생님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려 입을 여니 매치스를 둥글게 감싸 안았다. 어쩐지 정말 안전한 곳으로 온 것만 같아 매치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다독였다. 이안이 매치스를 올려다보며 아직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다소 단어를 쏟아내듯 빠른 투로 묻는다.
“매치스, 레드후드가 매치스를 구해준거야?”
매치스는 잠시 멈칫한 다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트맨은 정말 없구나...”
샘이 작게 속삭이듯 말했고 아이들 모두가 조용해졌다.
“배트맨?”
“뭐야, 매치스. 배트맨도 몰라? 고담을 돌보는 히어로잖아! 선생님들이 말했는걸. 나쁜 짓을 하면 배트맨이 이 놈 한다고.”
시무룩해진 샘의 손을 꼭 맞잡으며 도라가 어딘가 자부심 서린 얼굴로 이야기했다. 매치스는 불쑥 물었다.
“그 배트맨은 어디 갔니?”
그러자 아이들 모두 조용해졌다. 조심조심 서로의 얼굴만을 몇 번이고 돌아보던 아이들 중에서 도라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죽었을 거라고. 어른들이 말하는 거, 들었어.”
매치스의 기억이 끊긴 날의 사고로부터 사라진 고담의 히어로는 어쩔 때는 지나치게 숭고한 자기희생의 화신이고 어쩔 때는 그저 징벌을 핑계로 폭력을 일삼는 무법자였으며 고담시경의 아군이자 가장 큰 걸림돌이고 아캄의 간수이자 죄수였다. 고담 내의 매체들이 하는 서술은 대게가 한쪽 의견에 치우친 극단적인 것이었고 그에 대해 제법 객관적인 서술은 이웃도시의 메트로폴리스 데일리 플래닛 소속의 기자가 기고한 칼럼에서 볼 수 있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부를 수밖에 없다고 단정적으로 서두를 시작하는 칼럼은 배트맨의 자경활동은 시스템의 사각을 보완한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정말 고쳐나가야 할 부분을 더욱 어둡게 가리고 있다고 했다. 경범죄의 비율은 확실히 줄었지만 강력 범죄나 특수범죄율은 오히려 높아진 점을 꼬집으며 거기다 고담 치안만이 아닌 배트맨 그 본인조차도 제가 초래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물론 그로 인해 선량하고 희망 없던 이들이 보다 편하게 밤을 맞이하는 것은 사실이며 실제 몇몇이 같은 의견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고 기자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배트맨이 악을 행하는 이들을 겸제하려는 것은 의심할 길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무서운 불량배를 마주했을 때 다른 더 무서운 건달이 그를 쫓아내서 오는 안도이지 정말로 온전한 안전은 아니라고 그런 근본적인 변화는 시간이 걸리며 절대 개인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기사는 다음의 문장을 마지막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숭고할지언정 위대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배트맨은 조커라는 빌런이 고담 전역을 인질 삼아 벌인 대대적인 테러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새롭게 나타난 ‘레드후드’는 살인도 불사하는 자경단이다. 배트맨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 이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제이의 몫일까? 오늘도 제이는 레드후드가 되어 바깥을 나갔을까? 아무 일 없다는 듯 보육원으로 돌아온 매치스에게 몰려든 것은 죄책감이었다. 이 죄책감은 무엇일까? 범법자의 정체를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 그가 필연적으로 겪을 위험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것? 아니면...
매치스는 순간 그 강도 사건에서 느꼈던 생기 같은 것이 떠올라 뒷골이 오싹해졌다.
“...—스, 매치스!”
생각을 부유하던 매치스의 귀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매치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레슬리를 마주했다.
“무슨 걱정 있니, 얘야? 안색이 좋지 않구나.”
“레슬리...”
날이 보다 덥고 습해지기 전에 다시 한 번 방역을 위해 보육원을 비운 탓에 오늘 밤은 레슬리의 의원에서 머물게 되었다. 겸사겸사 아이들의 상태를 재확인 하고 나온 레슬리는 바깥 의자에 멀거니 앉아 복도 끝만 보고 있는 매치스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매치스는 반사적으로 생긋 무해하게 웃는다.
“너는 별 다른 일 없니?”
“저야 변함없죠.”
사르르 접어 웃는 매치스의 얼굴을 의사는 그저 덤덤하게 들여다보았다. 차분한 녹빛의 눈동자는 마치 그 웃음의 의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차분히 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루시우스도 그렇고, 레슬리도 이들 앞에서 매치스는 자신이 어딘가 한참 나이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 이런 것이 연륜인 걸까? 매치스는 괜스레 딴 생각을 해보지만 레슬리는 그런 매치스를 다그치지 않고 그저 신중하게 그가 스스로 입을 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빙긋 띄운 미소를 파르르 거두어내며 매치스는 잠시 눈동자를 아래에서 해매다 조심히 말을 뱉었다.
“친구, 가 있어요.”
어색한 발음에 쑥스러워서 매치스는 애꿎은 제 뒷목을 쓰다듬는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뜻을 지니고 있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걸 주저하지 않고요. 저한테 많이 도움을 주기도 했고 가끔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동생 같기도 해요. 그런데...”
매치스는 말은 꺼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적절히 잘라야할지 몰라 언어를 찾는다.
“레슬리, 저는 기억이 없지만 고담이 특수하다는 건 알아요. 그 친구는”
제이가 과거에 불우했던 것, 삶 속에서 소중한 사람을 만났고 하지만 원치 않게 그를 잃은 것에 대해 흘러가듯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걸 너무 잘 알았던 거겠죠.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이, 가진 신념이 그를 다치게 해요. 그는 지금은 이 도시에 없는 누군가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그도 죽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겁이 나요.”
매치스가 양손을 깍지 끼며 마주잡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내려 보던 레슬리가 당연한 수순으로 물었다.
“그 말을 친구에게는 해보았니?”
고개를 숙인 매치스는 설레설레 머리를 내저었다.
"매치스...“
레슬리는 어쩐지 조금 어색하게 이름을 발음했다.
“사람은 결코 누군가를 몇 마디의 말로 바꿀 수 없고 그러기를 바랄 수도 없는 거란다. 그럼에도 굳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은 네가 그 사람에게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 네가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란다. 그보다 더 나가면 과해지고 덜 하면 너는 제자리에 머물겠지.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건, 네가 네 친구를 아낀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어쩔 수 없지 않겠니.”
다정하면서도 세월을 머금어 강인한 호선 하나가 겨우 고개를 든 매치스의 눈에는 유달리 선명했다.
매치스에게로 이따금 불안이 죄의식처럼 찾아든다. 매치스가 가지는 불안은 뇌리 한편에 커다랗게 발생한 기억의 공백으로 인한 것보다도 대게는 형체를 알 듯 말 듯, 손끝에 걸릴 듯 말 듯 스쳐 지나는 기시감에서 비롯했다. 지(知)와 무지(無知)의 경계에서 무성의 날카로운 웃음과 기괴한 어둠의 장막들이 언뜻 보였고 매치스는 차마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노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매치스는 왜인지 자신이 이전의 모든 기억을 되살리고 나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막연하면서도 굳건한 짐작이 들었다. 이런 강한 의혹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부상 하나, 표정 하나 심상히 받아 넘기지 않는 주제에 정작 기억을 읽기 전의 자신은 가족이 있었는지, 친구가 있었는지, 누구였는지, 무엇이었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매치스는 기억이 돌아오고 난 다음에 자신은 혹시 아이들 앞에서 떳떳이 서있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닐까 봐, 루시우스처럼 상냥한 사람의 걱정을 받기에는 당치도 않게 과분한 인간일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매치스는 어쩌면 제 과거와 기억에는 별 미련이 없는지도 모른다. 지금 어설프게 형성되는 ‘매치스 말론’이라는 아무리 읊조려보아도 어색한 이름의 페르소나가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고담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이름을 불리게는 새로운 자경단 레드후드가 저 변두리에 꾸려진 조용한 성당의 신부와 동일인임을 알게 된 순간 매치스가 제일 아주 처음 생각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나 허술하다는 것이었다. 텅 비어가는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매치스에게 도달한 정보들 그 전부가 너무나도 알맞은 타이밍에 너무나도 딱딱 맞추어 매치스에게 전달되는 것이 통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매치스는 모든 판단을 보류하기로 하고 자신이 연 밑바닥 깊은 서랍을 차분히 정돈한 뒤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매치스는 자신의 판단에 위화감을 느낀다. 매치스가 제이에게 쉬이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은 그로 인해 친하게 지내던 지인과 껄끄러운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것 때문에도, 해당 주제가 입에 하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도 아닌 사위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결론을 유보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혼자 차분하게 레드후드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에게 도달한 몇 통의 편지와 도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매치스는 이런 자신의 다분히 편집증적인 사고에 몸서리 치고 말았다. 애초에 옳은 답이라곤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매치스의 어깨 위로 사뿐히 밤의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도시가 드리우는 어둠 속에서 매치스는 마치 속살거림과 같은 어느 짐승의 날갯짓을 듣는 것 같았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서두른다면 지금 쯤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제이와 만날 수 있을지 모르고, 늦는다면 오늘은 마치고 돌아올 그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 사이에 만일 제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것은 자신이 제이를 통해 반사되어 드러난 자신의 일면에 주춤하느라 망설였기 때문일 테다.
“당신과 나, 우리 왈츠를 추어요.”
가로등이 하나 꼭대기에 아스라이 빛나는 공터에 덩그러니 비치된 벤치에 앉은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발끝을 까딱이며 흥얼거리고 있다.
“당신은 뒤로 두 걸음, 나는 앞으로 두 걸음. 그림자처럼 당신과 나 서로를 따라다니네.”
길거리 예술가인지 주정뱅이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은 허밍이 섞인 소리로 큭큭큭 뜨문뜨문 웃었다. 미뤄둔 무언가를 마주하는 것은 이렇게도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일까. 술렁거리는 가슴 안쪽 때문에 발밑이 불안했지만 매치스는 해돋이를 재촉하는 것처럼 동쪽으로 뻗어진 길을 나간다. 그런 매치스의 시선 옆으로 건물과 건물의 좁다란 골목길이 스쳤다.
“...제발...”
꽁꽁 묻어놓은 어둠에서 잘게 떨려 끊어지는 말소리가 새나왔다. 빠르게 걸어온 매치스의 뒷목에 옅게 맺힌 땀이 뺨의 찬 공기에 쓸려 오싹하니 시려왔다. 행인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골목에 있던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누군가는 그저 길목에 폭력적으로 버티고 서서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 어둠 속에 빠져 도움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라는 건, 드릴게요. 해치지 마세요.”
“엄마.”
차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흔들림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와 그 옆에서 다른 어린 목소리가 어울려났다.
“너 뭐야?!”
매치스는 그저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와 자신의 등 뒤에 서로를 의지하듯 붙어서 웅크린 여자와 아이, 이 구도 만이 참을 수 없이 증오스러웠다. 저 먹구름 깔린 하늘을 날짐승도 들짐승도 아닌 짐승이 파드득 바쁘게 횡단한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기에는 모든 것이 늦다고, 조갑증을 닮은 다그침을 들으며 매치스는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떨어트리지 않은 강도에게로 손을 뻗었다.
타앙! 매치스가 채 남자의 손에서 총을 빼앗기도 전에 눈과 귀가 뜨거운 섬광이 매치스의 복부를 가르고 지났다. 매치스가 끈질기게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탓에 발포 시 놓기에 가해진 반동으로 그의 손목이 우둑 뒤틀렸다.
“아아악!”
고통에 악인이 비명을 지른다. 배에서 뜨듯한 액체가 흐르는 것을 알지만 척추에는 손상이 없는 듯하니 지혈을 하고 외상을 기우면 될 일일 뿐이었다. 그저 자신의 몸을 지나간 총알이 뒤에 있을 모자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남자는 그저 비명을 지르는 남자가 허튼 짓을 두 번 다시는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히히히, 히히히히... 머릿속에서 깜빡깜빡 점멸하는 필라멘트가 닳은 전구처럼 누군가가 웃는다. 놈을 제압해, 공포를 심어. 그리고 누군가가 그 웃음 뒤에서 속삭인다. 남자는 별안간 얇은 입술을 벌렸고
“하하...”
그 사이에서 김이 빠지는 것처럼 날숨과 의미 없는 단적인 발성이 섞이어 난다.
“하하, 하하하하!”
남자는 그렇게 웃기 시작했다. 쨍하니 머리가 갈라질 듯하며 증오와 분노가 마치 쾌감처럼 남자를 불태우듯 에워싼다. 총알 표면에 묻어있던 무언가는 인체에 닿아 타오르기라도 하는지 남자의 손상된 조직에 끓는 듯한 고통을 일으키며 호흡을 벅차게 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다시금 눈앞에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빈손을 굳게 주먹 쥔다. 그때, 무자비한 벼락이 남자의 상처 입은 등으로 내리꽂힌다. 남자는 몸이 무너져 내렸고 전기충격기의 스파크를 머금은 어떤 물질이 급속히 활성화되어 남자를 억지로 재생성하고 있었다.
“당신은 기억을 잃어도 사랑스럽네.”
가물가물한 시야로 묵직한 부츠 굽이 보인다. 남자는 어떻게든 몸을 세워보려 했지만 장기에서부터 근육을 타고 퍼지는 파괴와 생성의 통증으로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거기다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광기와 닮은 온갖 감정들로 남자는 정신이 미칠 듯하여 계속 간헐적으로 컥컥 웃어댔다. 이 감각을 남자는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랬던 기억이 흐릿하게 있다. 이보다 더 지독하고, 더 격렬하게, 모든 기억을 닫아야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끔찍하게.
“하지만 이젠 일어나야지.”
여자는 몸부림치는 남자의 셔츠 뒷목을 잡아 올려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 선명하고 강인한 눈동자가 무자비하게 미소한다.
“곧 만나길 바라.”
고통의 무저갱 속에서 간신히 저에게 뻗어진 손을 붙잡아 올라오려는 남자를 여자는 미련 없이 바닥에 뉘이며 어둠 사이로 작은 형체와 함께 사라진다. 하하하하하하!! 자신인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인지의 웃음소리를 멀게 그리고 너무나도 가깝게 들으며 남자의 정신은 수많은 박쥐와 박쥐의 날갯짓 소리 속에서 한 차례 다시 붕괴한다.
“브루스!”
비명 같은 웃음소리 속에 쪼개지는 시야를 어찌어찌 떠보면 어둑한 조도 속에서도 쨍하게 선명한 붉은 부츠와 망토자락이 보인다. 저것에는 기억이, 기억이 있다. 기억이—
“부상이... 등 쪽에는 남았지만 앞은 많이 아물었군. 브루스, 내가 보여? 정신을 차려. 당신은—...”
영웅은 살아나는 망령을 앞에 두고 절박하게 이야기한다. 망령은 마구 치솟아서 모든 것이 시커먼 분노로 보이는 감정 속에서 떨리는 손을 내뻗어 저에게로 날아온 히어로의 모래폭풍이 묻은 망토자락을 잡는다. 붉다, 붉다, 붉다, 붉은 망토가 온다. 어째서 이 도시로 왔느냐고, 이 도시가 어떤 곳인 줄 알고 오느냐고 외치고 싶은 중에 부서질 듯 잡은 주먹 위로 따듯한 손이 닿는다. 그 순간 총탄으로 인해 으스러졌던 맨 아래쪽 늑골이 느릿하게 재생성 한다. 다시금 오열처럼 광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망령을, 남자는 이를 악물어 참는다.
고통으로 핏발이 가득차서 피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은 두 눈동자를 마주하며 슈퍼맨은 늦어서 미안하다던가, 지금 막 저 편에서 날아왔노라고 이야기하려면 입술을 한 번 꾹 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날카롭게 자신을 벼릴 듯이 보아줬으면 좋겠다 싶어 클락은 맨 처음의 자신들을 떠올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당신이 필요해.”
차마 더 남은 다음의 이야기까지는 하지 못하며 클락은 말을 멈춘다.
심연보다도 깊은 우주의 바다가 자신을 보는 것을 인식하며 광기가 차오르던 남자는 점차 무심한 얼굴로 되어갔다. 눈앞의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그 아이는. 감히 짐작도 해볼 수 없을 타인의 경험을 되짚어 보며 울컥 차오르는 피와 행성 저 밑에 있는 미지의 웅덩이를 남자가 쿨럭 기침을 하여 뱉어낸다.
“동굴로.”
시선의 끝 저 먼지 낀 하늘에는 무시무시한 짐승들이, 최초의 ‘자신’을 구해주었던 존재들이 가득하다. 슈퍼맨의 어깨 너머에서 이제는 환청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남자는 짧게 전언한다. 다시금 광소가 밀려와 눈을 꾹 감아버리는 그에게 슈퍼맨은 방긋 웃으며 커다란 몸을 소중히 안아 올렸다.
동굴의 가장자리에서 알프레드는 밀랍인형처럼 서있다. 화면으로부터 누군가가(누군가들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악몽과도 같은 현실감과 한참전에 예견된 기시감이 알프레드의 목을 조르고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저기, 제 망토에 누군가를 소중히 두른 채 안고 온 슈퍼맨이 있다.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피는 토했지만 크게 다친 곳도 없고요. 그러니—”
“네, 알겠습니다.”
기계처럼 창백한 집사의 얼굴을 힐긋 본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두세 번쯤 발작이 찾아든 브루스였지만 강도는 점점 약해졌고 혹시나 몸부림을 치다가 자신의 몸에 부딪혀 상처라도 날까 꽁꽁 감싸서 왔으니 브루스는 괜찮을 거라고 설명을 해나가던 클락은 입을 다물었다. 잠깐 정신을 잃고 있는 주인을 앞에 하고서 안경알 너머에 있는 매서운 눈매는 전과 다를 것 없이 차분하다. 다소 지나칠 정도로. 클락은 브루스를 제 망토를 둘러놓은 채 저편에 보이는 병상 위에 눕혔다. 어느 날인가 잔뜩 부상을 입은 브루스를 억지로 부축해서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가 그에게 잔뜩 혼이 났던 기억이 나서 픽 하고 작게 웃어버렸다. 다시금 지구 저편에서 들리는 슈퍼맨의 도움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려와 클락은 조심히 브루스의 몸에서 제 망토를 거두어냈다.
나이든 집사에게 잔인한 짓인 것을 알면서도 클락은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 같은 반듯함에 떠오르는 벅찬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굳이 들떠버린 어린아이처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살아있어요.”
그리고 슈퍼맨은 잔상도 남기지 않고 떠나갔다.
그후 바로 남자는, 박쥐는, 브루스 웨인은 눈을 떴다. 익숙하게 어둑어둑한 천장과 그래서 유독 눈이 부신 동그란 광원을 본다. 온전히 깨어난 자신에게서는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났고 반면 어떤 연유에서인지 상처 하나 남지 않은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브루스의 마지막 기억보다는 다소 휑해 보이지만 흐릿하게 떠도는 휘발성 강한 약품의 냄새나 기계 정비에 사용되는 오일 냄새, 엔진이나 무기고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 등이 떠도는 이곳은 불쑥 집이라 불러버릴 만큼 친숙했다. 이상하게 그립기까지도 한 동굴에서 브루스는 크게 숨을 삼킨다.
브루스는 신중하게 호흡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침상 옆에는 미묘한 거리를 둔 채 집사가 늘 그랬든 서있다.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브루스의 움직임이 멎는다. 어떤 언어도 되지 못하는 시선이 하릴없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알면서도 브루스는 폭음 같던 웃음이 뇌리 깊은 곳으로 침잠해간다. 브루스는 응급처치를 위해 동굴 한 편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나와 우선 면도를 하기 위해 이동한다. 거울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자신이 유달리 낯설게도 보였다. 그 동안 이렇게 생겼었나? 자신은 이런 얼굴이던가 하고 전에 알프레드가 건넸던 사진 속의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처럼 브루스는 제 인지 속에서 헤매다 차분히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에 놓여 있는 면도기로 자신이 뱉어낸 피와 어느 호수 슬의 물이 엉겨 묻은 수엽을 깎아낸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제 복부를 매만지면 그곳에는 끈덕지게 말라가는 검붉은 피의 자국만이 옷에 남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아주 오래 전, 브루스가 배트맨을 시작하기 전에 만났었던 여러 위험하고 악독한 스승들 중 한 사람이 허무맹랑한 미신같이 신비한 어떤 웅덩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브루스가 걸치고 나갔던 배트슈트는 분명 고담의 어딘가에서 완전히 망가진 채 사그라졌겠지만 박쥐가 그랬듯 배트케이브의 저장고에는 역시나 여벌의 슈트가 언제나 준비되어 걸려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도리어 어색하게 자신의 가장을 꺼내어 꼼꼼하게 둘러보면 박쥐의 무게는 브루스가 기억했던 것보다도 훨씬 육중하고 또한 버거웠다. 그래도 이전에 슈퍼맨을 상대한답시고 온몸을 금속덩어리로 둘렀던 때에 비하면 훨씬 나을 것임은 분명했는데 이 정도의 무게가 새삼스레 다가온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했던 요 얼마간이 생각보다 길게 브루스의 몸에 박혔다는 뜻일 테다. 그런 자신을 다그치듯 브루스는 박쥐의 카울을 뒤집어쓴다.
“이스트 엔드에 있는 폐건물로 갈 거예요.”
기계에 의해 변조된 목소리가 무심하게도 이곳저곳을 울린다. 브루스의 뒤에 유령처럼 서있는 집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브루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배트맨은 미련 없이 돌아서 한참 동안 구리지 않았던 배트모빌의 연료를 확인하고 시동을 건다. 새것처럼, 작동이 잘 되었다.
“친구를 보러 가십니까.”
문을 닫으려는 찰나 반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단단한 프레임의 안경 너머에서 여전히 무표정하다 못해 마치 비난이라도 하듯 날카로운 얼굴을 한 알프레드는 브루스를, 배트맨을 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창백한 안색이 못내 걸렸지만 브루스는 천연덕스럽게도 자신의 집사만이 분간해낼 수 있는 엷은 미소를 띤다.
“돌아올게요.”
알프레드가 고개를 슬며시 돌려버리는 것을 닫혀가는 문 너머로 보았다.
죽음에서 두 번째 삶까지의 기억은 단편적이다.
“다, 괜찮아. 내가 있어.”
누군가 그렇게 속삭였고 몸은 물속으로 잠겼다. 숨이 막혀죽을 것 같은 액체 속에서 생명은 또렷하게 신경을 타고 흘러들어 온몸이 불에 타오르듯, 아니 불 그 자체가 된 듯 끓어올랐다. 고작 이따위로, 고작, 고작, 고작!! 마구 소리 질렀던 기억이 그게 돌아온 호흡을 만끽하고 싶어서였던 건지 그대로 외침 속에 폐를 도는 공기를 전부 실어 버리고 싶었던 건지 인과관계까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어나야지, 내 사랑. 찬란하게 떠올라—”
마치 주술처럼, 모든 감각의 포화 속에서 여자의 낮은 음성이 암시한다.
“—이 발아래 저물어.”
브루스는 노이즈로 끊임없이 브루스에게 입혀지던 메시지에 따라 이스트 엔드에 있는 폐건물로 왔다. 사위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게 잠들어서 침묵이 감시하듯 그곳에 낮게 드리워있다. 적막을 디디며 브루스는 건물의 내부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문은 문제없이 열린다. 문이 열리자 내부에 자욱이 차있던 화약이 비강을 질러 들어온다. 등골을 따라 익숙한 전율 같은 긴장이 뻣뻣하게 내달린다.
“어째서.”
텅 빈, 정확히는 비게 되어버린 공간에 누군가가 홀연히 서서 중얼거린다. 배트맨처럼 변조된 음성이 마스크 너머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저 가면 뒤의 얼굴을 브루스는 알고 있다. 아니, 지금으로서는 알고 있다고 추정한다. 배트맨과 같이 변조된 음성을 통해서 자신을 가려야 하는 그 인물은 온 얼굴을 붉은 마스크로 가리고 있다. 브루스는 저 뒤의 얼굴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아니, 지금으로서는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당신은 여기 오면 안 됐어.”
널브러져 있는 복면을 쓴 인간들에게서 브루스는 오랜 옛날 보았었던 이국의 문장을 확인했다.
“레드후드.”
배트맨의 기계음으로 가공된 목소리가 보통보다도 낮게 내려앉는다. 자신의 명명을 불린 레드후드는 고개를 돌려 배트맨을 바라본다. 그리고 하 하고 가면 뒤에서 헛바람을 뱉듯 웃음을 내던진다.
“이 가면?”
한 손을 재킷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레드후드는 큭큭 웃는다. 먼지의 냄새와 피 냄새도 공간에는 충만하다.
“여전히 이상한데서 고지식하네.”
당신 이상한데서 고지식하네. 까르르 웃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친다. 죽어가던 순간, 기묘한 평온과 조용한 추위와 본능적인 두려움 속에서, 하루를 끝낸 매순간 공백의 시간마다 브루스를 부르며, 원명하며, 경멸하며, 일깨우던 그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 생생하게 웃는다. 마치 악몽을 현실로 꺼내놓은 느낌이었다. 더 지독한 것은 이 악몽이 이상하게도 환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브루스는 자신의 생각과 생각이 허투루 불쑥 튀어나가지 않게 부러 꾹 입을 다었다. 운전 중 브루스는 알프레드에게 자료요청을 했고 알프레드의 목소리가 직접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전달해온 정보들이 배트모빌에 내장된 프로그램의 음성을 입고 브루스에게로 전달되었다.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통신장비 너머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의 상황이 어색해서 자꾸만 헛기침을 했다. 보통 무언가를 계속 이야기하고 침묵을 견디는 것은 알프레드였으니까.
“험한 일을 하더군.”
제 스스로의 말에 다시금 떠오르는 것은 자신보다도 한 걸음 앞서 나가 악당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작은 울새의 뒷모습이다. 브루스는 자신이 이렇게나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음을 새삼 되새기며 천천히 말을 뱉는다. 음성변조기를 거친 언어는 어딘가 위협적으로도 들렸다. 하지만 레드후드는 주저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배트맨을 마주한다.
“나는 당신보다 나으니까.”
레드후드는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을 빼어 잡고 있던 총을 들어 올리더니 어떤 예고도 무엇도 없이 이층 난간을 향해 발포한다. 탕, 하니 터져나오는 폭발음에 브루스는 내장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당신”
겨냥한 지점을 향해 레드후드는 목소리를 높인다. 인기척이 없던 어둠에서 부러 제 등장을 알리듯 뚜벅뚜벅 무거운 부츠 굽 소리가 들린다.
“나와 약속했잖아.”
“네가 그 대신이 되겠다는 거?”
이미 열적외선으로 건물을 스캔한 자료가 전해진 터라 놀라운 것은 없지만 사전에 정보를 받았음에도 여자의 등장은 갑작스럽게 느껴질 만큼 은밀했다. 저 위에서 지금 이 자리의 그 누구들보다도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을(혹은 지휘했을) 여자가 쿡쿡 삼켜웃는다. 자기 부하들의 시신이 놓인 바닥을 눈에 하고서도 여자는 제왕처럼 느긋하다.
“팔코네의 금고를 넘겼잖아.”
“아, 금고.”
한참 부드럽게 웃던 여자는 얼굴을 단숨에 굳히며 제 발 아래를 쏘아본다.
“온갖 쥐새끼들이 이미 다 갉아놓은 몇 푼짜리 찌꺼기에 내가 정말 동할 거라고 생각했나?”
뒷목에 오싹함을 느끼고 제이슨이 제 뒤를 향해 방어 자세를 취하자면 그보다 빠르게 검은 장상이 말끔하게 어디선가 달려드는 움직임을 막아냈다. 암살에 최적화된 알 굴의 용병들은 제 기척을 숨기는 게 호흡을 하듯 체화되어 있었고 그것은 젊은 시절 수련을 다니며 알 굴과 잠시 생활했었던 박쥐도 마찬가지였다. 제이슨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여자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다.
“그만.”
배트맨의 주먹에 맹렬히 달려들던 용병 하나가 기절해 바닥에 나뒹구는 중에도 여자는 자비롭게 한 손을 들어 좌중을 정리한다. 사격이 없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일종의 쇼임을 알지만 두 남자는 그저 손에 잡힌 긴장을 간직할 뿐 달리 도리는 없었다.
“라스 알 굴이 무슨 일로 고담에 관심을 가지지?”
“당신이 있으니까?”
그는 입술에 유려한 곡선을 입으며 친근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그리고 여자는 픽 정다운 어투로 친절하게 브루스의 무지를 정정해주었다.
“그리고 라스 알 굴이 아니야. 아버지... 라스 알 굴께서는 고대의 왕들처럼 잠이 들어 계시지.”
배트맨이 되기 위해 온갖 소리 소문을 좇아 무예에 통달했다는 인물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러 다녔던 시절에 ‘악의 수장’으로 불린 라스 알 굴은 무예에 조예가 깊은 것은 물론 국제사회 뒷면의 흐름을 꿰고 있는 동시에 그 자신이 그런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친구는 가깝게, 적은 보다 더 가깝게가 모토였던 브루스로서는 당연히 그에게 교육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는 그 어느 제자보다, 부하들보다 충성스러우며 영민하고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냉혹한 전사가 있다고 이야기를 귀에 들었다. 그는 라스 알 굴의 외동딸로 브루스가 라스에게 수련을 받을 당시부터도 라스의 부하들은 그를 다음의 알 굴로, 그들의 수장으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그가 라스를 다음의 죽음에서 끌어올릴 테니 모든 것은 의미 없는 미사여구였지만 말이다. 못해도 그가 무저갱에서 자시의 아버지를 충직하게 건져 올려낼 때까지는.
“당신이 나를 살리게 했나?”
곤죽처럼 뭉개진 순간의 기억 속에 선명하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브루스는 최대한 덤덤히 말했다. 쿡쿡, 여자는 잔뜩 기껍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점잖은 군주처럼 웃는다.
“나의 사랑을 받는 자(My beloved)야, 이렇게 눈을 뜬 당신을 보게 되어 정말이지 기뻐.”
레드후드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총을 겨눈다. 브루스가 빠르게 그의 팔을 잡아 천장 위를 향하게 하면 탕! 하고 총알이 저 허공으로 오발된다. 불합리함과 분노, 답답함으로 레드후드가 짧은 욕설을 뱉으며 저를 마크하려 드는 박쥐를 밀어내보지만 슬프게도 브루스에게는 이 모든 동작의 연쇄가 익숙했다. 불과 며칠 전의 기억이 앞뒤의 아귀도 없이, 시간도 장소도 없이 불분명하게 짓이겨져 있는데 십여 년 전의 과거가 이토록이나 생생한 것은 자신이 나이를 먹어 주책이 없어진 탓일까. 젊은 어느 날, 자신의 집사에게 ‘나는 절대 늙지 않으니까요.’ 하고 철없이 시시덕이던 자신이 떠올라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브루스는 레드후드의 상처 입은 오른팔을 거침없이 처냈고 레드후드는 브루스의 복부를 걷어찼다. 하하하, 콜로세움에서 서로에게 검을 겨눈 글래디에이터를 관전하는 로마의 황제처럼 여자는 기껍게 웃는다. 브루스는 조금 집요하다 싶을 만큼 레드후드의 오른팔을 잡아챘고 그의 소맷자락이 찢어져 배트맨의 손에 담겼다. 옷자락 선유 사이사이에는 갈색으로 말라붙어가는 액체가 끼어있다.
“그래, 당신의 일을 해야지. 어디 그토록 부정하던 희망 그 자체가 되어보아.”
[배트맨, 그곳에서 나오십시오.]
여자와 거의 동시에 계속 침묵을 일관하던 알프레드가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브루스는 폭탄이 장착된 배트랭을 집어던져 건물 벽을 무너뜨린 다음 그래플링건을 들어 저쪽 건물 외벽에 고정시킨다. 빠르게 남아있던 인기척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며 브루스는 레드후드를 옆구리에 안으며 건물 내부가 화염이 휩싸이는 순간 동시에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화기와 파편을 막아 망토로 레드후드와 자신을 잘 감싸며 옆 건물 외벽에 안착한 브루스는 잠시 자세를 유지하다 얼마쯤 잠잠해졌을 때 머리 위에 있는 난간을 잡고 오르며 발밑이 단단히 고정된 곳으로 장소를 옮긴다. 머리 위로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 줄 알아?!”
으득,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레드후드가 브루스의 멱살을 잡는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도 이렇게 추웠을까, 하나 둘 꺼져가는 감각이 무서웠을까, 이 적막 속에 자신을 찾아와야했을 누군가를 기다렸을까 원망했을까. 이 모자란 것 많고 결함투성이의 인간이 알량한 선의를 가장한 제 외로움에 손을 내밀었던 그 한 순간 때문에 아이는 죽음으로 보내졌는데 그 원흉인 자신이 죽음 앞에서 다시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너무나 크나큰 사치라고 생각되었다. 지금 어딘가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 집사에게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렇게나 과분하게 행복했노라고 고해하고 싶었다. 그런 순간이 있었다.
“설마 그가 정말 당신을 사랑이라도 하는 줄 알아? 알 굴의 수장을 찬탈한 탈리아가 당신을 어여삐 볼 거라 정말 생각해? 그게 아니면 당신, 그에게 정말 반하기라도 한 거야?!”
“알 굴이 어째서 고담에 있지?”
아까의 일들로 장비가 고장 났는지 레드후드에게 변조된 음성이 아닌 브루스가, 매치스 말론이 요한 신부로 알고 지내던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레드후드 복장의 내구성에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배트맨은 굳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제 멱살을 움켜잡은 왼손을 빼냈다.
“나는 당신을 살려야 했어.”
“그건 답이 되지 않아.”
“슈퍼맨도 되살렸던 당신이 할 말이야?”
“그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배트맨은 작정이라도 한 듯 레드후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 그러시겠지.”
그에 레드후드는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잘라 웃으며 외치다.
“슈퍼맨은 그저 묻어두면 그만인 한낱의 인간과는 다르니까!”
제가 소리를 지르고서도 그는 제 입술을 질근 깨물며 젠장, 하고 욕을 뱉는다.
“조커를 살려놓아서 영감, 당신 결국 어떻게 되었지? 당신의 로빈은? 당신, 죽고 돌아오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던 거야?”
“네가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군. 애초에 나를 살리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길 여지조차 없지 않나?”
젊은이는 말아 쥔 주먹을 성급하게 내질렀고 브루스는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레드후드는 건물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몸이 밀려나며 다른 층으로 통하는 문에 부딪힌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
레드후드가 제 마스크를 벗어 배트맨의 발치로 집어던졌다. 먹구름 짙은 하늘에서 언제부터인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그 마스크의 눈으로 떨어져 흐른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왔어. 그렇게 나는 내가 있을 곳 전부를 빼앗긴 줄조차 모르고 지냈지.”
도미노를 착용했지만 역시나 사진처럼, 목소리처럼 브루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제이이다. 과거의 누군가와 쏙 빼어 닮은 청년, 그는 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당신에게는 슈퍼맨보단 절실하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레드후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휙 하니 저 건너편 건물로 뛰어나가 버렸다.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는 빗방울 소리 속에 멀어지는 걸음걸음이 묻힌다. 원하는 증거물은 손에 입수했으니 상관없었다. 브루스는 유틸리티 벨트에 레드후드의 혈액이 묻은 섬유조각을 넣고 그가 남기고 간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빗물이 사위를 감싸 안는다.
“...제이슨.”
브루스는 결국 오래된 이름을 혼자 읊조리며 살아있는 고통과 환희의 사이에서 한숨을 삼켜냈다.
“무덤은?”
“비어있더군요.”
배트맨이 돌아왔다. 오랜만이 자경활동을 하고나서 별 다른 설명도 해명도 없이 불쑥 제 질문이나 하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대답한다. 알프레드 입에서 사실 하나를 파악하며 브루스는 유틸리티 벨트를 풀어 책상 위에 펼쳐둔다. 시료를 지금 당장 분석해야 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몸이 늘어져서 브루스는 비에 젖은 카울을 벗으며 그저 무성의하게 고개만 몇 번 주억주억 끄덕이며 풀썩 모니터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등을 받쳐주는 의자의 등받이가 편안해서 오랫동안 다녀온 여행에서 막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도 든다. 잠시 눈을 감고 촉감과 후각, 청각으로 전해오는 집이라는 존재를 머릿속으로 그려본 뒤 브루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모니터의 한가득 섹션 별로 고담 이곳저곳이 떠올라있다.
이곳에 오기 전 배트맨의 모습으로 브루스는 레슬리와 얼굴을 마주했다. 레슬리는 자신 앞에 불쑥 나타난 배트맨의 모습에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덤덤한 얼굴로
“아침에는 아이들 곁으로 오렴.”
하고 말했을 뿐이다. 매치스 말론이 보육원의 관리인으로 아직 이름이 남아있는 만큼 브루스는 남은 책임을 다 해야만 한다. 브루스는 차근히 지금부터 해나가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정리한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구실 생각이십니까?”
천연덕스럽게 흐르는 초와 초 사이를 견디지 못하고 알프레드가 말을 꺼냈다. 그의 본래 억양과 어조를 떠올리자면 다소 새되고 조급한 톤이었다. 브루스의 어느 기억에서보다(시간의 흐름 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버린 그는 입가의 주름을 굳게 잡고 그저 묵묵히 브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주인을 죽였다고 고담시경을 들볶은 집사를 두고서야 웨인 주인님 고생길이 훤하시군요.”
브루스가 알프레드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때 집사는 평소 잘 하지도 않던 허리 굽힌 인사를 무척 단정히 남기며 동굴 바깥을 향하는 길을 따라 발길을 튼다.
“알프레드.”
브루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 앞에 선다. 알프레드는 머리카락은 여전히 덥수룩하니 헝클어졌지만 면도는 해서 더는 그 순진무구한 매치스 말론이 아니게 된 브루스의 얼굴과 그의 가슴에 주홍글씨마냥 떨어지지 않는 박쥐를 번갈아 본다. 평생의 피로가 몰려드는 듯 눈이 뻑뻑하다.
알프레드를 붙잡은 브루스의 눈은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제자리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브루스 웨인이라는 작자는 입만은 곧 죽어도 살아서
“나를 죽은 걸로 하고 싶었다면 더미라도 만들지 그랬어요. 만드는 법, 모르지도 않잖아요.”
이런 소리를 한다.
“하하하하,”
알프레드는 최선을 다해 유쾌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당신께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라고 이 도시가 나의 브루스를 죽인 거라고 말할 걸 그랬습니다.”
늘 브루스와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금방 보호할 수는 있지만 하나로 동화되지는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던 알프레드가 바짝 브루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브루스의 목을 쥐었다. 카울을 벗어 여린 목줄기가 그래도 드러난 배트맨은 그저 묵묵히 집사의 혈관이 도드라진 기다란 손가락의 감촉만을 하릴없이 되새겨본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에는 하얀 뼈대와 퍼런 혈관이 도드라지지만 브루스의 목에는 아무런 압력도, 압박도 가해지지 않았다. 브루스는 자유로운 호흡을 의식적으로 보다 신중히 담고 뱉는다. 그의 손에 제 기도를 드나드는 공기의 진동이 닿도록.
“당신이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돼요.”
브루스는 그런 알프레드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뱀처럼 말했다. 알프레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내린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알프레드 가장 안쪽에 자리하던 이 얼굴을 브루스는 잔인하게도 세세하게 훑어서 새로이 자신이 된 제 뇌 속에 새겨 넣는다. 마치 손에 힘을 넣어 이 목쯤이야 졸라도 괜찮다고 종용하듯 배트맨의 손가락이 알프레드의 손등을 토닥인다.
“이런 짓, 그만 두어도 돼요. 당신은 그래도 돼요.”
“제가 고작 저 하나 편하고 싶어 이러는 줄 아십니까?"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무거운 음성이 매서운 칼바람 마냥 불어온다. 이를 드러낼 듯 사납게 말하는 알프레드를 앞에 하고서 브루스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침잠한다. 이것도 브루스가 알프레드 쪽에, 알프레드가 브루스 쪽에 서있던 일이 보다 빈번했던 걸로 기억한다.
목으로 가져갔던 손에 서서히 힘이 풀리면서 알프레드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차라리 눈이라도 질끈 감아 볼까 시피만 브루스의 머리 한 켠에 눈을 떠 자신이 한 일을 직시하라고 다그치는 소리가 있다. 스스로의 강박에 브루스는 눈도 거의 깜빡이지 못하고 모든 장면과 장면을 기억한다. 다시금 온전히 자신의 심장 된 가슴이 응어리로 아렸다. 몸을 웅크린 알프레드가 배트맨의 망토를 움켜쥔다.
“더미를 못한 것도, 여길 정리하지 못한 것도 나 때문이죠? 당신을 나아가지도 뒤돌아보지도 못하게 내가 만든 거예요.”
“저는 어찌되어도 좋습니다.”
거짓말로도 브루스 웨인의 장례식을 지켜보지 못할 집사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이들과 지내시면서 느끼신 게 아무 것도 없으십니까? 당신께는 다른 길이,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알프레드에게 보여줬을 자신의 얼굴 하나하나가, 매치스 말론으로서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알프레드의 미소 순간순간을 이끌어온다. 브루스는 오랜 옛날에서나 보았던 그의 편안한 웃음, 버석한 무채색으로 금방이라도 서있던 자리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던 그가 2인치 즈음의 선 모양 하나로 선명한 빛깔에 물들던 광경을 떠올렸다. 고담을 껄렁껄렁 활보하는 조무래기들에게조차 어찌 대응할 줄 몰라 맥없이 두들겨 맞고 돌아온 밤에, 박쥐가 되기로 결심하며 금빛 종을 울렸던 그 날에, 브루스는 자신이 제 집사의 말을 들었어야 했음을 안다. 알프레드는 언제나 옳았으므로. 그보다 우선 그는 브루스에게 언제나 최선과 최고만을 안겨다 주었으므로. 어차피 배트맨은 지금이야 다시 돌아왔다고 한들 얼마 없이 반백 살이 되고, 그 이상으로 점점 해가 지나가다 보면 자연적으로 사라져야만 할 존재였다. 법의 사각에서 모호하며 아슬아슬한 경계를 가지고 공포를 휘두르는 박쥐에게는 이번과 유사한 수 십, 수 백 가지의 마지막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 뿐인 집사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의 아집을, 세상 그 누구보다 강인한 사람일 텐데도 브루스 웨인이라는 존재 때문에 이리 무너진 이에게 자신은 설명해야한다.
“당신이 원하는 브루스 웨인은 될 수 없어요.”
자신의 목을 움켜쥔 손을 얼마든지 지지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절박하게 안전한 곳, 따듯한 곳, 사랑스러운 곳으로 붙드는 손은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어 브루스는 죄를 지으면서도 꼿꼿하게 선 자세로 알프레드의 잿빛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알고서, 그 많은 짓들을 하고서 아무 일 없던 것 처럼 순진한 매치스 말론이 될 수 없어요. 나는,”
브루스는 몰래 숨을 깊이 삼켜본다.
“살아있으니까요.”
하, 고개를 들어 브루스를 올려다본 알프레드가 공허하게 웃었다.
“그래서 당신께선 혼자 죽으실 건가요? 저를 이, 곳에 혼자 내버려두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당신의 집사는,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그 정도의 존재입니까? 나는 다시 당신의 시신이 언제면 내게로 돌아오는가만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그저 못 한다, 하지 않겠다, 포기하겠다 그런 말들이면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알프레드가 마지막 최악의 선택을 종용당하는 사람처럼 절박하고 비통한 눈을 한다. 이 불합리를 브루스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브루스는 문득 자신이 처음 죽던 날에 알프레드에게 자신이 받아온 과분한 모든 것에 대해 고해하지 못한 것을 기억한다. 결국 자신은 이러니저러니 아직은 죽을 수 없던 것 아닐까, 하고 다소 느긋한 생각도 이쯤에서는 들기 시작한다. 브루스는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지금보다도 훨씬, 훨씬은 나이 들어버린 집사에게 감사와 사랑과 행복을 전하는 자신을 염치없이 떠올리며 겁 많은 용기를 가지고 알프레드의 파리한 손을 간신히 마주 잡는다. 브루스가 자세를 낮추어 알프레드의 얼굴을 보면 안경알의 그림자에 흐려져 확인은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믿음직하지 못한 남자가 하나 있을 것을 안다. 언어는 허무하고 형체 따위 없지만 그 무력한 것을 배트맨은 자신의 무기로, 신념으로 벼려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래서 허풍쟁이는 얄팍한 약속을 입에 한다.
“알프레드, 당신 장례식의 상주는 브루스 웨인이에요.”
일곱 살 이후 거짓말에는 도가 튼 브루스였지만 알프레드에게는 왜인지 어린 도련님의 거짓말이 뻔히 손바닥 보듯 보여서 브루스는 이후 진실을 고의로 선택해서 일부만을 얘기하거나 아니면 정말 스스로가 진신이라고 믿어버린 거짓을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거짓말을 한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고 브루스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아이가 음절과 음절을 뱉어낼 때면 그의 몸에서 울리는 진동과 박동이 어우러져 보다 선명하게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을 알고 알프레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미열이 있는 이마를 박쥐의 위에 얹어본다. 주저주저하던 브루스가 손만 한참 꼼질거리던 양팔을 들어 알프레드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내 찻잔에 수면제를 타도되는 건 알프레드 당신뿐이니까요.”
두근, 두근. 얄궂게도 평온한 심장소리가 이 너머에 있다. 이곳에 분명하게 있다. 알프레드는 그간의 오랜 습관 때문에 조건반사처럼 이 사소한 것에 금방 기뻐할 수밖에 없다. 집에 어서 오렴, 브루스. 점점 막히는 목이라 제대로 이 말썽쟁이 도련님에게 전달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조심조심 얹어진 아이의 무게를 가늠하며 알프레드는 지금 당장은 자신에게 내려앉는 편안한 어둠에 피곤한 눈을 감아본다.
어찌되었건, 알프레드의 브루스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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