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utler did it(sowhat42.tistory.com/81)에서 이어집니다.
※알피뱃 외에 숲뱃 등 뱃른요소가 있는 글입니다.
※DCEU+엔드게임 이후의 이야기를 섞었으며 뱃대숲과 저스티스 리그 영화 상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인물들이 나오는 설정파괴가 두드러지는 글입니다.
※살인과 폭력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일어나야지, 내 사랑. 찬란하게 떠올라—…
빗줄기가 끼인 듯 깨져버린 화면이 해독되지 않는 소음과 함께 액정을 가득 메운다. 고담에 거주하는 몇몇 주민들은 제 각각의 위치에서 거의 동시에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으며 전파를 수신 받는 기기를 툭툭 두드렸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보다 내부가 섬세해진 기계에게 과연 그들의 그런 행동이 오작동을 고치는데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는 의문이지만 얼마안가 노이즈는 사라지고 다시 한껏 진지한 얼굴로 리포트를 읊는 아나운서나 터치다운을 극적으로 실패한 풋볼팀, 미치도록 귀여운 고양이의 목울음 소리, 제인과 존의 밀고 당기기가 어떻게 되었는가 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조커와 그를 위시한 반체제 무리들로 인해 미국 본토와 단절되고 사회 전반이 마비되었던 고담은 사건 이후 3개월가량의 시간이 지나가자 겉보기만큼은 거의 이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리는 이어지고 통신은 원활하며 부서진 건물은 수리되고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 내부를 좀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도시에는 혼란이 무자비하게 긁고 지나간 시뻘건 상흔이 군데군데에 크고 작게 산재해 있는데 처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스마트폰 등에서 발생한 노이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방송국, 기지국, 발전소, 경찰서, 소방서로 원인을 밝히라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바삐 거는 시민들의 모습이 그랬다. 조커가 방송국 전파를 이용해 영상을 퍼뜨렸던 이후로 이어졌던 아비규환을 사람들은 평생이 흘러서야 간신히 잊을까 말까 할 테다. 그런 시민들의 불안을 안정하기에 시정에서는 물론이고 어느 힘 있는 기관에서도 이렇다 속 시원한 답은 내어주지 못했고 그들 모두가 하나 같이 “원인을 밝히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많은 시민들이 분통과 울분을 터뜨렸지만 그마저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자신이 가진 스트레스에 스스로 지쳐버린 이들은 하나둘 체념하고, 자신이 밟고 선 고향이라는 곳이 고담이라는 사실에 저주하며 더러는 일부러 무심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인정해버렸다. 시를 운영하는 예산은 거의 대부분이 그 가문에게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충당된다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일컬어지던 대부호가 실종되고 더는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는 달이 뜨는 도시에서 그럼에도 사람들은 제 삶을 이어가야한다. 어쨌든 어제가 지나 오늘이 왔고, 이 오늘이 지난다면 내일은 오고야 마는 것이므로.
매치스 말론은 멀거니 서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주알 같은 흑색의 노이즈가 기묘한 패턴을 그리고 지나간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았다. 뇌리 속에서 낯선 이가 소곤소곤 말이라도 건넨 듯이 귓가가 아리는 것처럼 간지럽다가 뒷목으로 소름이 옮았다. 비명 같은 웃음을 남기고 암전해버린 매치스의 기억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순간과 순간 사이에 그르릉하고 제 존재를 어렴풋 보이고는 한다. 그저 매치스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할 뿐.
“매치스 씨?”
카트의 앞쪽에서 방향을 잡으며 걸어가던 루시우스가 우뚝 멈춰선 매치스를 돌아보며 의아한 듯 이름을 불렀다. 커다란 어깨를 잠깐 움찔하고 떤 매치스가 중후한 안경테 너머에서 자신을 살피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한들한들 웃었다. 매치스는 조금 힘을 넣어 다시 카트를 앞으로 밀었다.
보육원에 자원봉사자와 보육사가 머물고 있는 지금, 배치스는 필요한 생필품과 소모품을 사기 위해 장을 보러 나왔다. 이전 관리인이 보육원을 돌보고 있었던 적에 거래하던 업체가 온갖 종이무더기 속에 있던 메모에 쓰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영 미덥지 못할뿐더러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소비되는 물품은 특정한 곳에 신청해서 물건을 받고 싶었지만 요즘처럼 도시 재건으로 정신없는 시기에 굳이 기름값을 들여 작은 보육원에까지 상품을 도매가로 넘기고 싶어 하는 업주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매치스는 여유가 되는 때를 잘 찾아 직접 발품을 팔아야했다. 그렇지만 직접 이것저것 살피면서 보다 아이들에게 괜찮은 것들을 구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치스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덧붙여 오늘처럼 루시우스가 그의 차까지 동원해서 함께 나와준 날에는 불평의 여지가 없었다. 임의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매치스에게 자동차라는 이동수단은 새삼 정말이지 편리하기 짝이 없는 기계인 것이다. 물론 이런 정신없는 요즘 같은 때에 자신을 하나하나 돌보아주는 루시우스가 고마운 건 두말할 것도 없었고.
세제가 있는 통로로 나아가던 중 루시우스는 걸음을 슬쩍 늦춰서 매치스의 옆으로 왔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또박또박한 영국식 발음으로 루시우스가 작게 물었다. 코와 턱을 그리는 선이 선명해서 냉랭한 인상을 가진 그는 오히려 누군가를 보살피고 걱정하는 일이 몸에 아주 깊이 밴 것 같았다. 여전히 바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보육원을 찾아오는 루시우스는 들떠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물론이고 다 자란 매치스를 어르는 일에도(단어가 영 낯부끄럽지만 그의 행동을 달리 설명할 낱말이 없었다.) 천부적이었다. 한 세 번 정도는 그래도 성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어 루시우스에게 한소리를 구시랑 하기는 했지만 매치스의 행동에 루시우스가 그저 눈꼬리를 희미하게 접어보이자 자신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 같아져서 그만두어버렸다. 과거에 루시우스는 어느 집에서 아이의 보디가드로 일했던 적도 있다고 했으니 아직 그때의 습관 중에 하나가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알프레드의 물음에 매치스로 불리는 브루스는 그저 고개를 내젓고 있다.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폭신하게 흔들렸다. 거의 본능처럼 브루스의 거짓말을 잡아낼 수 있는 알프레드에게 지금 브루스는 그저 말갛게 비쳐 보일 뿐이다.
정식적인 뉴스 보도도 이렇다 할 부고 선언도 없었지만 배트맨의 부재가 알음알음 퍼져나간 후로 제 세력을 갖춘 이들이 하나둘 고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박쥐가 스스로를 구심점으로 하여 잡아놓았던 인위적인 질서가 흩어졌고 오랜 세월 고담을 근거지로 하던 팔코네와 같은 마피아 집단이나 배트맨과 더불어 조커 사태를 수습했던 뿌리 깊은 빌런들, 그리고 새로 세력을 키워나가는 다양한 신흥 갱까지 고삐가 풀린 채 목표를 잃고 금방이라도 다시금 도시를 혼돈으로 물들일 듯 웅성이었다. 뒷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이제 싸움은 종종 바깥에도, 밝은 낮에도 눈에 보일만큼 미어져 나왔지만 저스티스 리그라는 세계적인 지지와 협력을 필요로 하고 또 지구인들의 정신적 상징과도 같이 된 집단으로 이름 붙여진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때그때 눈에 보이는 것을 잘라내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나마 이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라고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은 무거운 숨을 내쉬는 다이애나에게 알프레드는 덤덤히 이야기했다. 고든을 비롯한 고담시경은 그저 부디 일이 너무 심각하게만 돌아가지 않기를 헛되게 바라며 나날이 쏟아지는 과중한 업무에 몸서리를 쳤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에 ‘그’가 등장했다. 어둠과 어둠의 사이에서 교활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움직이는 그의 수법이나 기술이 박쥐의 그것과 참 많이 닮아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철없이 동경을 품은 겁 모르는 이의 흉내정도로 여기던 자들도 하루, 이틀 다시금 등장하는 자경단의 수법에 차츰 그들이 배트맨으로부터 학습한 공포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배트맨과 관련해서 뼈가 굵은 그의 적들은 그가 박쥐와는 다른 누군가라고 줄곧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이들로부터 해서 ‘레드후드’라는 칭호가 정착된 이 고담의 새로운 자경단 소식을 접한 알프레드 역시도 그가 수법이 많이 닮았을지언정 브루스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리그와 머리를 맞대는 일보다 독단적으로 활동하는 일이 많아진 슈퍼맨이 불쑥 알프레드를 찾아와 조각 같은 눈썹을 찡그리며 “그는 누구죠?” 하고 묻기보다도 전에 말이다.
다만 오랜 세월을 브루스 웨인의 후견인이자 집사로서 그리고 배트맨의 공범으로서 지내왔던 알프레드에게 혹시나 하는 가정이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더구나 요즘처럼 꿈만 같았던 일상이 기이한 형태로나마 자리 잡기 시작한 때에는 더더욱 알프레드는 보다 집요하고 예민해졌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브루스의 기억이 돌아온 거라면? 이 기회에 브루스 웨인이라는 테를 벗어버리고 보다 거리낄 것 없이 자경활동을 영위하기로 마음먹은 거라면? 생각을 이어갈수록 그것들 모두 그럼직한 가정들이었고 알프레드는 한동안 브루스와 브루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얻은 거라고는 좀처럼 늘지 않는 요리 실력으로 아이들에게 실컷 놀림을 당하는 브루스의 모습과 브루스에게서 달리 기억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는 레슬리의 소견, 부활절 이후로 종종 교류하는 작은 성당의 신부정도였다. 레드후드라는 인물이 누가 되었던지 간에 브루스는 아니라는 점에 짧게 안도한 알프레드지만 여전히 걱정 모두가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불과 이틀 전 시청에서 내려오는 지원금과 보육원 사업 연장 신청을 위해 여러 증명서류들과 명세서를 발급 받으러 시내로 갔던 브루스는 은행에서 4명의 무장 강도를 맞닥뜨렸다. 비록 브루스가 기억을 잃고 두 번째로 평온한 삶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알프레드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말로 많았다.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적절히 선별하여 고담시경과 저스티스 리그로 넘겨야하고 리그를 꾸려가기 위해 만들어진 회계를 돌보며 알프레드의 독단으로 정말 얼결에 회장 대리를 떠맡게 된 루시우스의 서포트 또한 해야 했다.(알프레드가 스스로 브루스 웨인의 생사에 관련해서 어떤 일을 저질렀다 선언하는 바람에 직접 웨인 엔터프라이즈 일에 관여하지 못하게 된 터라 일이 보다 복잡해져버렸다.) 그런 스케줄 속에서 예전처럼 일일이 브루스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못해도 통신으로라도 이어져 있던 전과 다르게 지금 알프레드가 브루스와 두고 있는 물리적인 거리는 자연히 정보의 지연을 가져오게 되었고 알프레드는 ‘또다시’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야 제가 덮던 담요를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브루스를 부랴부랴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강도와 마주한 브루스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마치 오래도록 훈련받은 사람처럼 담담했다. 오히려 브루스는 강도의 존재보다도 경찰들이 출동하기 전에 도착해서 무장 강도들을 제압했던 자경단, 레드후드에 대해서 보다 길게 알프레드에게 이야기했다. 알프레드는 그 모든 게 탐탁지 않았다. 기어이 위험을 배제할 수 없는 이 도시도, 브루스의 위험에 늘 한 발 늦는 자신의 평범함도, 아이가 정체불명의 자경단과 마주친 것도 모두. 나이가 들어서 늘어난 건 이 도련님에 대한 욕심뿐이라고 알프레드는 한숨을 삼킨다.
“정말 별 일 없으신 겁니까?”
얼마 전에 매치스가 무장 강도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듣고 달려온 후로 루시우스는 줄곧 어딘가 극성맞을 정도로 걱정을 한다. 저자극 세제와 친환경 세제 사이에서 기웃거리며 깨알 같은 글씨로 죽 늘여진 성분표를 살피던 매치스가 고개를 돌려 앉은 자세에서 루시우스를 올려다보았다. 루시우스의 입에서 아직도 ‘브루스’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 아마 루시우스는 아직도 그를 찾는 중일테다. 이렇게 섬세하게 하나하나를 살피고 신경을 기울이는 사람이 지인을 잃는다면 도대체 얼마나 걱정하고 고민할지 매치스는 통 알 수 없어서(왜일까, 매치스가 처음 그를 보았을 적보다도 지금의 루시우스가 훨씬 안정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루시우스는 감정을 쉽게 보이는 유의 사람이 아닌지라 그의 속사정을 혼자 삭이고 있는 것이라고 매치스는 생각했다.) 오랜 고민을 끝내고 파란 통에 들어있는 세제를 집어 자리에서 일어서며 빙긋 웃었다.
“다 괜찮아요. 레슬리 선생님이 이안이 아주 좋아졌다고 했어요. 다른 아이들도 건강하고요. …나도요.”
마치 다독이듯 술술 이야기 하던 매치스가 말을 끝내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 말을 늦추었다. 딱 그 타이밍에 곱슬머리에 체크무니 니트 조끼를 입은 남성이 중얼거리며(“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바삐 둘 사이에 위치했던 상품을 집어 갔다.
“톰킨스 선생님께서 충분히 안정을 취해야 한다 말씀하신 것 기억하시겠죠? 퇴원도 그렇고 당신은 도통 고집이 세서…”
루시우스가 드물게도 툴툴 거리는 것처럼 말을 하며 다음 목록에 올라온 물건을 찾기 위해 카트를 이끌었다. 매치스는 그저 미소 띤 얼굴로 그의 하소연을 들을 뿐이다.
보육원에서 동쪽으로 뻗은 좁은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보면 높은 나무들 사이에 흐리게 보이던 십자가가 있는 첨탑이 점점 분명해지며 그곳에는 작은 성당이 고즈넉하게 위치한다. 첨탑이 우뚝 솟아있어 십자가는 그나마 눈에 들어오지만 건물의 크기는 그에 비해 한참 작은 이 교회는 그 크기만큼이나 운영하는 규모도 작아서 젊은 신부가 미사는 물론이고 성당의 사무며 온갖 일들을 혼자서 꾸려나가고 있다. 약 한달 전에 있던 부활절 즈음 성당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이웃주민들을 초대하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아 찾아온 요한 신부와는 전임자가 제대로 된 인계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맨 땅을 두드리는 식으로 사무를 돌보고 있다는 점도 같고 해서 일손이 부족한 사람끼리 이래저래 마음이 맞아 함께 부활절 달걀을 닦기도 하고 이후에 매치스가 신부가 해결하지 못한 회계 일을 풀기도 하고 신부가 보육원 아이들의 활동을 돌봐주기도 하면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매치스가 보기에 신부는 사람을 어려운 이들을 미사여구에서 따온 동정이 아닌 그의 삶 속에서 공감하기에 돕고자 하는 사람이고 성직자 이전에 봉사자로서 있고자 하는 인물이며 이따금 이를 살짝 드러내고 개구지게 웃을 때면 그 얼굴이 정말 앳되게 보이는 젊은이이다.
아이들은 지역 봉사를 이유로 고담 여기저기로 담당자의 손에 이끌려 나가버렸고 바지런히 보육원의 청소를 끝낸 매치스는 부엌 한켠에 수북이 쌓인 크랜베리 쿠키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몇 개 포장해서 바깥으로 나왔다. 루시우스는 정말이지(매치스로서는 조금 약이 오를 만큼) 요리를 잘하는데 거기다가 도대체 어떤 요술을 부리는 건지 늘 매치스 입맛에 꼭 맞아떨어지게 간을 했다. 매치스는 음식에 대해서 조예가 있는 편이 아니었고 자신만이 입에 대는 음식이라면 먹고 큰일이 나지 않을 것 같은 한 어쨌든 씹어 삼킬 수 있다는 주의였지만-그래서 요리가 그렇게 형편이 없는 걸까?- 그런 애매모호한 매치스의 식성을 예리하게 기호로 나누고 끄집어낼 만큼 루시우스의 솜씨는 대단했다. 그러니 매치스는 요한 신부에게도 그가 만든 쿠키를 나누어 주고 싶었다. 혼자만 알 고 있기에는 아까운 것이니까, 괜히 매치스가 자랑하고 싶어질 만큼-정말 왜일까?- 루시우스는 대단하니까, 전에 신부가 마들렌을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을 보았으니까.
헌금도 많은 날에야 10달러가 들어 올까말까 한 성당은-“여기서 하는 사업이 있기는 해.” 시설을 어떻게 꾸려나가는가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던 중 신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잠깐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와선 라벨이 붙지 않은 와인병의 코르크를 땄다. 근처 머그컵에 아주 약간 와인을 따른 신부는 한 번 마셔보라는 듯 매치스에게 잔을 건넸고 매치스는 의심 없이 그것을 입에 댔다. …그리고 와인은 정말 끔찍하게 떫고 맛이 없었다. “못쓰겠지?” 쿨럭쿨럭, 목 위로 훅 끼쳐온 알코올에 밭은기침을 하는 매치스에게 신부는 짓궂게 웃었다.- 역시나 주위의 풀벌레나 새의 소리 정도가 소란스럽다. 익숙하게도 인기척이 없는 돌길을 따라 걸으며 매치스는 성모 마리아상 앞을 지나 성당 내부로 들어서는 곳까지 다다랐다. 그때, 또각또각 날카로운 굽이 바닥을 경쾌하게 밟아내며 어두운 저쪽에서부터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성당을 찾아오는 건 시간 죽일 곳을 찾지 못한 노인들과 쉼터를 정하지 못한 노숙인 정도로 알고 있는 매치스에게는 낯설고 예상하지 못한 기척이었다.
예배당에서부터 걸어 나온 여자는 이 도시의 흐린 하늘 아래 차있는 가시광선 속에서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당당히 펴진 어깨와 곧게 뻗은 시선이 자신의 죄를 고해하기에도 부활한 이를 찬미하기에도 영 어울리지 않다. 짙게 자리한 강인한 눈매가 인상적인 여자는 매서운 굽을 거리낌 없이 울리며 성큼성큼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안, 녕하세요.”
매치스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낯선 사람을 염치도 없이 빤히 보고 있던 게 부끄러워서 목을 살짝 움츠리며 매치스가 조금 샌 소리로 인사말을 했다. 척추를 반듯하게 세워 시선 그 너머를 보고만 있을 것 같은 여자는 한 번 눈을 감았다 뜨고 매치스를 힐끗 보며, 쿡쿡, 바람을 삼켜 깊고 부드럽게 웃는다. 귓가로 스민 가벼운 진동에 매치스가 목을 바로 했을 때 여자는 이미 홀연하게 저만치로 가버렸다.
“매치스?”
바람을 흔들고 유유히 사라진 모습을 왜인지 한참 바라보고 있던 매치스를 젊은 남자가 부른다. 본래 매치스가 향하던 방향으로 고개를 원위치로 하여 그는 막 사무실로 향하려던 신부와 마주했다.
“신부님.”
매치스는 반사적으로 반가움이 가득한 미소를 담았다.
“제이면 된다고 했잖아.”
장난스럽게 눈썹을 찡그린 신부, 제이는-그의 세례명이 요한(John)이기 때문일까?- 가볍게 매치스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매치스는 그저 실없이 한들한들 웃었고 제이는 매치스를 사무실 쪽으로 안내했다. 절실한 도둑에게조차 잡동사니로 비칠 뿐인 짐밖에 없는 곳이라고 제이는 이야기했지만 그는 사무실을 비우는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문을 잠그고 나왔다. “습관 때문인 거 같아.” 하고 지난 날 제이는 말했다. 찰칵찰칵, 두 금속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얼마 뒤 딱하고 열쇠가 자물쇠 안에 있던 빗장을 완전히 밀어내는 경쾌한 마찰음이 울렸다.
“아까 나가신 분이랑 무슨 이야기했어?”
수수하게 꾸려진 실내로 손짓하며 제이는 심상하게 물었다.
“아니.”
이 공간과 너무나 이질적이라 풍경에서 오려낸 듯한 여자를 어렵지 않게 떠올리며 매치스는 한두 번 고개를 저었다.
“그 분은 원래 여기 오시니? 제이 너와 알아?”
“그냥—”
전기포트와 찻주전자가 있는 곳으로 제이가 걸어가자 따라 걸음을 움직이는 매치스에게 제이는 손짓으로 테이블을 가리키며 흘러가듯 답했다.
“아주 가끔가다 오셔.”
제이가 답을 덧붙이지만 포트 안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울려서 분명하게 도달하지는 않는다. 작은 바구니 안에 정리된 티백 중 하나를 꺼내 찻주전자에 든 끓은 물에 담근 뒤 제이는 찻잔 두 개와 주전자를 쟁반에 담아 매치스를 앉힌 테이블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키보다 훨씬 작은 로우테이블 위로 쟁반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은 제이가
“왜? 반하기라도 했어?”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시답지 않은 농을 했다. 매치스는 화들짝 놀란 듯 몸을 뒤로 조금 빼며 고개는 물론 양손마저 저어가며
“그런 거 아니야.”
급하게 대꾸했다. 키득키득, 신부는 마치 장난기 많은 새처럼 웃는다.
매치스가 제이가 가져온 찻잔을 서로의 앞에 올려두고 티백 안에 든 차가 적절히 우러나기를 아주 잠깐의 시간을 기다리는 둘 사이에 온화한 침묵이 앉았다. 대화도 무엇도 오고가지 않았지만 그저 편안하고 안락한 수많은 초들의 집합이었다.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수색을 확인한 제이는 오른손으로 주전자의 손잡이를 들어 차를 따르려고 했다. 그러다 주전자를 잡은 그의 동작이 짧게 우뚝 멈추어 선다. 제이는 홀연 손을 거두어들인 다음 반대쪽 손에 무게를 실었다. 아까 쟁반을 내려놨을 때도 제이의 오른손가락이 조금 뻣뻣하게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던 것을 떠올린 매치스가 이번에는 넘어가지 않고 물었다.
“다쳤니?”
주전자를 건네받으려는 매치스의 손을 피하며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높이 있는 데 닦다가 조금 결렸어.”
하지만 매치스는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데 필요한 골격, 신경, 근육이 어떻게 이어져있고 작용하는지를 떠올리며 마치 오랜 습관처럼 익숙하게 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취합하고 배열하여 사실을 염탐했다. 친하게 지내는 지인을 걱정한다고 보기에 아주 잠깐 매치스의 시선은 외과의사의 매스마냥 벼려져 있었다. 그리고 매치스는 그런 자신의 시선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흘 전, 필요한 일들을 보기 위해 시내에 갔던 매치스는 은행에서 무장 강도를 맞닥뜨렸다. 사전 조사가 충분했던 건지 은행 직원 중에 내통자가 있는 건지 보안 카메라의 사각에서 평범하게 사람들의 사이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은 가지고 있던 화기로 무장을 하고 복면을 쓴 얼굴을 뻣뻣이 들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힘없는 경비원을 살해했다. 은행 내에 청원경찰이 한 사람 있기는 했지만 이제 막 배지를 달고 바쁜 중에 도움은 안 되고 가르칠 손도 없으니 외부로 차출되어버린 젊은이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돼서 그저 사람들을 제 좁은 등 뒤로 감추는 것이 전부였다.
“어려울 땐 서로 나눠야지 않겠어? 응?”
무리 중 두목으로 보이는 인물이 복면 쓴 얼굴을 과장되게 기웃기웃 움직이며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매치스는 인질들 중 맨 앞줄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깍지 껴 머리를 받치듯 들어 올린 상태에서 한껏 웅크린 자세로 숨마저 낮추어 마치 사냥을 준비하는 맹수처럼 주변을 살폈다. 등 뒤에서 깜짝 놀라 칭얼거리는 아이의 흐느낌과 혹시라도 아이에게 해가 갈까 무서워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소곤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말과 점점 가빠지는 누군가의 호흡이 들린다. 은행 직원은 소동이 시작되자마자 호출기를 눌렀을 것이고 그에 대해 따로 으름장을 놓지 않는 걸로 보아 강도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알 테다. 다만 이 도시의 교통 상황은 언제나 끔찍해서 앞으로 못해도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고 그것은 사람의 목숨이 결정되기에는 영겁만큼 기나긴 분량이었다.
매치스의 호흡은 강도들이 이리저리 발을 움직이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느려지고 이명이 들릴 듯 혼란했던 머릿속도 사람들의 두려움 하나하나를 감지할 때마다 또렷해졌다. 매치스는 누구는 배후 경계가 허술한 것도, 누군가는 왼쪽 발목이 약한 것도, 누군가는 옆구리에 얼마 지나지 않은 부상이 있는 것도, 누군가는 반강제로 이 소동에 참여한 것도 전부 보았다. …—그렇다면 맨 몸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텐가? 머릿속에서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은 낯선 자신이 냉소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언제까지 이런—…
“영감탱이, 죽고 싶어?”
뚝, 머릿속에서 모든 분쟁이 멎었다. 인질들을 감시하고 위협하며 주변을 맴맴 돌던 일당 중 하나가 오래된 가방을 끌어안듯 가지고 있는 노부부에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 이건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케빈과 스테이시는 그저 서로에게 기대어 자꾸만 떨리는 몸을 지탱해야 했다. 이제 막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온 손녀를 위해 작지만 그들이 가진 최대의 재산인 어선을 담보로 받은 대출금이 들어있는 가방이었다. 에이미는 사람 사는 일인데 어떻게든 된다며 조부모에게 손사래를 치고 밝게 웃었지만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그녀에게는 한참은 갚아야할 학자금이 있었다. 지금 이 돈을 저 불한당들에게 뺏기면 돈은 영영 찾을 수 없을 테고 에이미는 제대로 된 월세 방도 구하지 못한 채 자꾸 그녀의 꿈과는 먼 길만을 택하게 될 것이다. 몇 푼의 돈에 어리석다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에이미를 위해 기꺼이 그럴 수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이쯤 되면 한 번 더 본보기를 보여도 좋을 때라고 강도는 생각했을 것이다. 제 총부리 아래 평소에는 자신을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하게 바라보던 인간들이 벌벌 떠는 것을 그는 숱하게 지켜보았고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은 그토록 재밌는 일이다. 그는 총을 들었고,
“아악!!”
그대로 손목이 꺾여버렸다. 매치스는 멀어진 소음들을 뒤로 하고 손을 내리치고, 팔을 등 뒤로 꺾어 손목을 세게 틀어쥐며 상대의 무릎 뒤를 발로 가격하는 자신의 동작 하나하나를 이상하게 선명하게 인지한다. 사람들은 겁을 먹을 테고 강도들은 화를 낼 것이다. 매치스는 멀리서 장전되는 총기의 소리를 듣는다. 성급했군. 병적으로 침착한 자신이 말한다. 두근, 두근… 심장소리는 오히려 점점 차분해지고 매치스는 아주 반사적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여러 형태의 폭력에 대비했다. 그러는 순간에
“뭐야? 무슨 일이야?”
“불?”
“시발, 어떤 새끼야?!”
은행 내부에 자욱하게 잿빛의 연기가 충만한다. 소방경보도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았지만 이 도시에서야 숱하게 있을 일이라 사람들은 그저 두려움에 떤다. 탕! 탕! 악! 콰광! 매캐한 분진들 속에서 몇 발의 총성과 산발적인 비명과 까닭을 알 수 없는 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제 혼란에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린 노부부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자꾸만 날뛰려는 강도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탓에 그러지도 못하고 그저 소리와 공기의 흐름이 피부에 끼얹어지며 남기는 촉감에만 의존하여 매치스는 주변을 경계한다.
그러다 저 즈음에서 누군가가 매치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맨 눈에 와 닿는 연기가 자꾸만 각막을 따갑게 했지만 매치스는 굳게 눈을 떠있는 채로 그 인물이 누구인가를 지켜본다. “흑, 흑…” 저 어딘가에서는 어떤 이가 숨을 죽여서 운다. 그 인물은 머리에 헬멧과 같은 형태의 붉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라이더 재킷을 걸치고 왼손에 검은 피스톨을 쥔 그는 아까의 소동 속에서 오른팔을 잭나이프에 찔린 듯했다. 짙은 연막을 해치고 매치스 앞으로 성큼 다가선 그에게서는 탄환이 터진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그는 매치스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 겉옷 앞섬의 지퍼를 완전히 잠그지 않아 얼핏 그가 안에 입고 있는 방탄복 같은 형태의 상의에 그려진 새인지 무엇인지를 본뜬 빨간 마크가 보였다. 히히, 히히히히… 뒷목에서부터 악몽처럼 소름이 이유도 모르고 끼쳐왔다.
마스크를 쓴 인물은 불현듯 왼팔을 크게 들어 올리더니 가차 없이 매치스가 붙잡고 있던 강도의 머리를 권총의 그립 모서리로 내리찍어버렸다. 몸이 축 늘어져버린 강도를 매치스가 여전히 꼭 붙들고 있는 채로 서있자 그는 조금 불편하게 왼손으로 그를 잡아채서 저쯤에 내던져버렸다. 매치스는 입을 꾹 다물고서 그 광경을 그저 눈으로만 좇는다.
“당신은”
부츠 끝으로 강도의 의식 상태를 확인한 그가 마스크 안쪽에 있는 어떤 장치를 통해 변조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는 서서히 오른쪽 길목 즈음에서 희미하게 경찰차의 사이렌이 들리기 시작하기보다도 전에 옅어지는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러고 보면 딱 그의 키가 제이와 같았던 것 같다. 레드후드라 불리는 인물을 매치스는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매치스에 비해 약간 키가 작으면서 체격이 똑같이 건장하고 둘이 같이 오른팔에 부상을 입은 것 정도는 어쩌면 그저 숱하게 이 세상에 있는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요 근래 보육원 우편함에 이따금 들어오는 익명의 쪽지만 아니라면 매치스는 분명 이 사실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것이다.
부활절이 지나고 일주일이 될까 말까 하던 즈음 평소처럼 광고 우편이나 시나 기업 자선단체에서 온 안내문(그것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광고물이기는 했다.)은 없는지 또 거미가 들어와 집을 짓고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기 위해 매치스가 우편함을 열었을 때 우표도 발송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는 새하얀 봉투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속 편하게 자기 사정을 토로하지 못하는 이가 고민 끝에 남긴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싶어 매치스는 큰 의심 없이 봉투를 열어보았고 그 안에는 한 장의 A4가 있었다. 곱게 접어진 흰 종이를 피면 그 안에는 많은 여백을 뒤에 남겨둔 채 단 한 문장이 워드로 깔끔하게 출력되어 있었다. ‘신부(Father)를 믿지 마.'라고. 매치스가 알고지내는 신부는 제이밖에 없었기 때문에 도대체 마을 변두리에 조그맣게 위치하는 성당에 무슨 울분이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어도 쪽지가 목적으로 하는 인물은 분명하게 요한 신부였다.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동향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영 불쾌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먼저 매치스는 제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싶어서 골이 서늘했다. 매치스는 바로 제이에게 이런 글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짚이는 게 없는지 물었지만 제이는 별 것 아니라는 태도로 시원스레
“내게 서운한 일이라도 있으신 분이시겠지. 본분에 좀 더 신경 써야겠네.”
하고 말았을 뿐이다. 매치스는 지역 경찰서로 찾아가 방범 패트롤을 부탁했고 접수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역시나 효과는 미미했다.
과거에 자신이 어떤 일을 했었는지 매치스는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최근 생각하게 된 가장 그럼직한 가정은 자신이 사설탐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매치스는 이전에 전임자들이 운영했을 적에도 성당과 보육원 이 두 곳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것을, 전 관리인이 버리듯 놔두고 간 수첩과 달력 등에 쓰인 표시에서 알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둘이 무슨 일인가를 했었다는 사실을 추론했다. 보육원에 아주 가끔 이전에 시설에서 생활했던 청년이 찾아와 담장 밖에서 기웃거렸지만 매치스의 얼굴을 보고 서둘러 인사말도 없이 걸음을 돌리고는 했다.
“거티는 이제 우리랑 말도 안 해.”
샘이 시무룩하게 이야기했다.
“예전에는 거티가 색종이로 칼을 접는 법도 가르쳐줬는데…”
“거티는 거짓말쟁이야!”
샘이 킁 하고 코를 삼키자 도라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리고 매치스가 발견한 몇 거래 업체들은 지금은 보육원과 전혀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지만 매치스는 이제 서류상에 이름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그 가게들이 여간 미심쩍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이전의 관리인이 어떤 작당을 하였는가를 밝히는 중 다시 우편함에는 쪽지가 들어있었고 이전처럼 한 문장이 덜렁 써진 종이만 온 것이 아니라 사진도 세 장쯤 동봉되어 있었다. 늦은 밤, 성당의 뒤편에서 마스크를 뒤집어쓴 이가 홀연히 나오는 것과 어스름한 새벽 다시 성당으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마스크를 벗는 사진이었다.
“왜?”
손을 멈춘 채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 매치스에게 제이가 가볍게 묻는다.
“아니, 그냥… 맛있게 먹나 해서.”
매치스는 눈을 한 번 여닫는 것으로 상념을 거두었다.
“응, 맛있어. 좋아하는 맛이야.”
제이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쿠키의 커다란 덩어리를 바삭 쪼개어 부러 매치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루시우스가 적절한 경도로 구워낸 쿠키에서는 곡물과 견과류의 고소한 향과 말린 크랜베리의 시큼함, 화이트 초콜릿에 들어있는 양질의 카카오 버터 냄새가 어우러져 후각으로 전해오는 자극만으로도 침샘이 아린다. 다부진 손을 꼼질거리며 제이가 건네는 조각을 받아드는 매치스에게 제이는 씩하고 다정하게 웃었다.
“당신도 좋아하지?”
그야, 루시우스가 만드는 음식은 어떤 것이고 맛있다. 전에도 지나가는 말이지만 그에 대해 제이와 이야기 한 적이 있었던 매치스는(그때 제이는 그야말로 신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웃음을 지었었다.) 새삼 쑥스러워서 슬쩍 제 뒷목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이전의 신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관계없이 지금 이곳을 맡고 있는 제이는 수단이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순박한 성직자일 뿐이다. 매치스는 여태 품고 있던 자신의 편집증적인 의심을 탓했다. 이전에 있던 관리인과 신부가 약물 거래에 관련되었고 그것을 처리한 레드후드가 대신 신부로 성당에 들어와 정체를 숨긴 채 지내고 있다? 너무나도 아귀가 맞아떨어져서 잘 팔리지 않을 소설에서나 나올 이야기이다. 애초에 그 사진이 진짜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공들인 장난을 할 만큼 작은 성당을 꾸리는 신부에게 품을 원한이 무언지 매치스는 알지 못하지만 세상은 넓고 사람 마음이란 헤아리기 힘든 법이라 어쩌면 엉뚱한 이에게 쓸데없는 분풀이를 정성스레 하는 인물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쯤 그리 의아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매치스는 다시 경찰서에 가서 한 번 더 방범을 부탁드려야겠다고 결론지었다.
“넌 진즉 뒤졌어! 부활은, 염병, 거짓말이지.”
서서히 식어가는 차와 함께 고즈넉한 시간이 흐르는 중 바깥에서 발음이 살짝 뭉그러지는 외침이 고래고래 벽을 넘어왔다.
“찰리…”
제이는 익숙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님을 앞에 두고 곤란한지 미간을 살짝 좁히는 제이에게 매치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제이를 배웅했다. “형제님—…” 문을 열고 닫을 때 술에 취해서 성당으로 들어와 조각상들에게 괜한 시비만 붙고 있는 찰리를 하루는 쉬고 갈 수 있는 보금자리로 안내하기 위해 운을 떼는 제이의 목소리가 잠시 들린다.
아늑한 정적 속에서 매치스는 많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제이와 찰리의 말소리가 차츰차츰 멀어질 쯤 따르릉, 요란하게 오래된 전화의 벨이 고요를 깨뜨렸다. 매치스가 잠시 멈칫 뜸을 들이자 다시 따르릉, 전화가 울리고 매치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를 위해 마련된 책상에 놓인 수화기를 달칵 들어올렸다.
“네, 세인—”
“전에 말씀하신 건으로 연락드렸는데요.”
어지간히 급했는지 매치스가 성당의 이름을 다 읊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의 인물은 다짜고짜 제 말을 꺼냈다.
“—검토해본 결과 신부님과 계속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다시 확인해야할 사항이 있어요. 우선—”
“잠시만요. 지금 신부님은 잠깐 자리에 안 계세요. 전화주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어깨에 수화기를 받치고 턱으로 지탱하여 매치스는 메모용지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나뭇결이 선명한 책상 위에 놓인 것은 곱게 표지를 닫은 성경이 전부였다. 전에 어지럽게 물건이 굴러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서랍 안으로 볼펜 한 자루를 꼼꼼히 챙겨 넣던 제이가 떠올라 매치스는 정말 스스럼없이 서랍의 문을 당겨 열었다. 조금 뻑뻑하고 또 다소 무거운 느낌이 손끝에 걸리고 끼익 낮은 마찰음을 내며 서랍 안에 있던 물건들이 그 진동으로 배치가 어그러지면서 덜컹 하고 소란스럽게 서로 부딪친다. 그리고 드러난 내부를 보며 매치스는 그만 우뚝 멈추어 섰다.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사위가 조용해졌고 걸려온 전화는 상대가 신부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자 통화를 계속할 마음이 사라졌는지 뚜-뚜-뚜-, 하고 규칙적인 기계음만 들렸다.
이중 바닥으로 이루어진 서랍이 처음에 잘 닫히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매치스의 행동이 무언가 바닥을 드러내는 매개가 되었던 건지 뚜껑이 열려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내보이고 있었다. 매치스는 레드후드가 들고 있던 바로 그 검은 피스톨의 총구를 내려다보며 언제부터인가 다른 노이즈로 바뀐 백색소음을 들으면서 그저 애꿎은 눈만 깜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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