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제목 생각해냈을 땐 오호, 말 된다 이랬는데 곱씹어보니 뭔가 미묘?;;;
핏물 속에 떨어지는 진주. 추락하는 자신. 스러진 다크나이트와 그가 남긴 짙은 그림자. 뻔한 환상이었다. 브루스는 이를 악물고, 악령같이 번들거리는 눈을 한 스케어크로우의 안면을 사납게 가격했다. 일은 언제나 그렇듯 놈의 가스에 당한 피해자들은 해독제와 충분한 수면을 처방받고, 그리고 놈은 배트맨의 공포에 시달리며 아캄 수용소의 독방에서 기나긴 밤을 선고받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콰광. 굉음과 함께 거대한 트럭이 수직으로 도로 한구석에 내리꽂혔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조각들이 시커먼 먼지를 일으키며 사방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붉은 망토가 홀연히 휘날렸다. 불타오를 듯 뜨거워졌던 엔진은 슈퍼맨의 숨으로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방탄처리가 된 단단한 트럭의 컨테이너 속에서는 복면무장을 한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이 준비한 기자재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을 터였다.
동행했던 몇몇 저스티스 리그 일원들과 사이좋게 상황을 마무리하던 차에 저 하늘에서 검은 비행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슈퍼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뿐히 착륙한 배트윙을 바라보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곳에서 불과 몇 분 전만하더라도 범죄자들의 아지트를 탈탈 털었을 배트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 상황은 다 잘 정리됐는데.”
성큼성큼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배트맨에게 슈퍼맨이 조금 퉁명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가시 돋친 반응이었다.
“...잘?”
“사상자도 없었고, 일도 신속하게 마무리 되었어. 도대체 또 뭐가 불만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이게 자네의 최선이야? 진심으로―”
“배트맨.”
이마에 자잘한 주름을 새긴 채 한마디, 한마디 씹어 뱉듯 말하는 배트맨의 말을 끊으며 슈퍼맨이 그를 불렀다. 막 한 차례의 추격전과 소음으로 뒤범벅이던 현장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슈퍼맨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이 났다.
“난 자네 로빈이 아니야. 잔소리가 하고 싶거든 고담으로 가.”
그리고 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차곡차곡 내려앉았다. 주변에서 그런 둘을 의아한 듯 바라보던 리그 멤버들조차 그에 동화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거기에는 이런 공공연한 장소에서 슈퍼맨과 배트맨의 싸움이라는 이슈가 폭발하진 않을까 하는 불안도 한몫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트맨은 카울 아래로 보이는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뒤를 돌아 다시 배트윙에 올랐다. 그리고 올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점점 멀어져갔다. 하늘 속의 점처럼 변해버린 그 비행기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노려보며 슈퍼맨은 어금니를 악 물었다.
요 근래 배트맨은 한층 더 까탈스러웠다. 원래부터도 워낙 그 고집과 철두철미한 성미 탓에 종종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에게(특히 그린 랜턴에게) 싫은 소리를 하긴 했지만 최근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아니, 사실 다른 멤버들에게는 오히려 그의 잔소리 빈도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모든 화력을 슈퍼맨에게 집중한 것 마냥 요즈음 배트맨은 슈퍼맨을 곧잘 다그쳤다. 그 내용을 듣고 있자면 마치 배트맨이 슈퍼맨을 훈련 내지는 훈육시키는 듯한 인상마저 들었다.
“숲스. 뱃츠랑 무슨 일 있었어?”
“너 걔한테 돈이라도 삥땅쳤냐?”
플래시와 장난기를 담았지만 그 그린랜턴마저도 걱정스러운 듯 슈퍼맨에게 다가와 물었다. 슈퍼맨은 눈을 꾹 감으며 깊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두운 케이브의 컴퓨터 앞에서 브루스는 카울을 벗고 얼굴을 감싸 쥐며 신음했다. 사실 브루스도 자각하고 있었다. 요 근래 자신은 침착하지 못했다. 그렇게 사사건건 슈퍼맨의 행동에 주석을 달 권리가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직 스케어크로우의 가스가 브루스의 정신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브루스는 그 가정이 틀리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혼란의 원인은 그 스스로에게 있었다.
이카로스 신화가 말하듯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른 인간에게 남은 것은 까마득한 추락뿐이다. 브루스는 언제까지고 자신을 영웅이 아닌 박쥐로서 생각해왔다. 이 도시에는 악의 무리들과 그들을 몰아붙이는 박쥐가 끝나지 않을 추격을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그 일의 끝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브루스는 배트맨으로서 그 끝을 향해 언제까지고 손을 뻗을 생각이었다. 브루스에게 정작 자신의 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않을지라도.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스스로가 모르는 새에 하나, 둘 소중한 것들이 생기고 말았다. 어두컴컴한 동굴과도 같던 브루스의 내면에 반짝, 반짝하고 웃음과도 닮은 빛들이 생겨났다. 브루스는 그것들이 그들 스스로 멋대로 찾아든 거라 여겼지만 그가 스스로 그들에게 손을 뻗은 것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브루스는 그 빛들을 감히 자신의 ‘약함’이라 칭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약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빛들을 집어 삼킬 수 있는 자신의 어둠은, 스스로가 만든 배트맨으로서의 굴레는 그렇지 못했다. 이 딜레마는 배트맨의 원죄와도 같았다.
마치 신기루를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뇌리 속 어딘가에서 만든 그 빛의 이미지를 붙잡듯 가슴께에, 심장이 박동하는 쪽으로 꾹 하고 주먹을 쥐어보았다. 둥글게 몸을 웅크리며 브루스는 마치 피를 토하듯 심호흡했다. 짓씹듯 악 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의 맛이 났다. 브루스는 이 공포는 어찌되든 좋았다. 브루스는 공포를 수긍과 대비라는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극복해왔다. 그가 스케어크로우에 의해 본 환상도 이미 그가 몇 번이고 꿈에서, 현실에서 재현하고 그려본 또 하나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공포가 아니라 브루스가 저도 모르게 품은 꿈에 있었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통해 가정했던 것은 비단 암울한 미래만이 아니었다. 브루스는 슈퍼맨의 힘과 클락 켄트의 선량함이 얼마나 절묘한 기적인가에 대해 이따금 감탄했다. 어느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그 이상적인 조화에 브루스는 그에 감히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는, 추락하는 인간과는 달랐다. 지구의 물리란 슈퍼맨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 그라면. 밝게 빛나는 태양 속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그라면, 거침없이 끝을 향해 날 수 있을 터였다. 브루스는 그 꿈을 줄곧 감추어왔다.
본래 이상이란 스스로를 통해 실현하는 것보다 남에게 투영하는 것이 더 쉬운 법이었다. 그 이기적인 바람을, 그럼에도, 슈퍼맨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거뜬하게 들어줄 것만 같은 환상을 브루스는 한켠에 품었다. 그라면, 자신과 다른 그라면 얼마든지 더 나은 미래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달라야했다.
“뭘 하고 있어.”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브루스가 헉하고 숨을 들이키며 몸을 일으켰다. 그 곳에는 슈퍼맨, 클락이 서 있었다. 브루스가 잠시 말도 못 한 채 눈만 깜빡이고 있자 클락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난 역시 자네가 나 때문에 그런 얼굴 하는 게 좋아.”
전에 있었던 신경전은 마치 거짓말 같았다. 브루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왜 이곳에 왔느냐.’고 클락을 다그치고 있었다.
“얘기 좀 해.”
“자네와 할 얘긴 없... 아니, 아니지. 아깐...”
클락이 브루스의 말을 끊듯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아니야. 브루스. 사과를 받자는 것도, 하자는 것도 아니야.”
클락의 말에 브루스는 의아한 듯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문 브루스의 입술에 붉은 핏물이 서려있었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클락이 말했다.
“자네, 괜찮아?”
클락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브루스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멋대로 네 미래를 생각했다고? 브루스는 자신이 꾼 꿈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줄 잘 알았다. 배트맨은 곧잘 슈퍼맨에게 ‘보이스카우트’라고 야유하듯 말했지만 거기에는 그의 성정에 대한 놀림만이 아닌 배트맨의 바람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브루스는,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런 이상향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이, 브루스의 꿈 한 자락이 말했다. 클락이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브루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얼결에 클락의 물음에 부정을 표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며칠 간, 자네가 나한테 했던 거... 아마 그것들은 자네가 스스로에게 하는 일의 일부도 안 되겠지?”
클락이 그 며칠을 참은 데에는 그가 브루스와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아서라는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카울 너머로는 브루스의 맨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에 클락은 종종 브루스에게 따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는 배트맨이었다. 이쪽에서 파고들려고 한다고 해서 그의 안쪽을 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클락은 기다렸다. 어느 한편으론 일이 그냥 지나가기를, 또 한편으론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또는.
“...난 자네가 바라는 사람이 될 수 없어.”
또는, 그가 먼저 브루스에게 줄 대답을 찾기를.
“...어째서?”
자세는 언제나처럼 고집스러울 만치 꼿꼿했지만 브루스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있었다. 클락은 잠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복장, 가슴에 새겨진 S, 땅에서 조금 떠오른 몸. 클락은 철이 들기 시작했던 때부터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붙은 고독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고독이 만들어낸 지금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마치, 공포가 만들어낸 배트맨처럼.
“난, 자네가 아닐 테니까.”
“...알고 있어.”
브루스가 잠시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꼭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듯도 한 어조였다.
“그렇다면.”
브루스는 조금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상처가 생긴 입술을 다시금 짓씹으며 브루스는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듯 내뱉듯 얘기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는 거 아닌가?”
클락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한숨을 쉬듯 쓴 웃음을 지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해?”
보통 때라면 질문을 질문으로 되돌리는 그의 행동에 답답해했을 브루스는 눈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클락은 소리 없이 브루스의 코앞까지 날아가 조심스레 브루스의 입술에 손을 대어보았다. 미지근한 피가 묻어났다.
“...그래서 내가 있겠군.”
“그래서 자네가 있어.”
뻔한 답에 브루스는 기가 막혀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클락은 그걸로 만족하고 다시 웃어보였다.
어느 한쪽을 고르기 보다도, 둘이서 한 세트여도 좋지 않을까...
둘이라서 행복한 세상, 푸르게 푸르게...
그나저나, 다른 픽션의 인물을 팔 때도 그렇지만, 숲뱃은 아, 얘넨 이렇구나하고 생각하는 순간, 읭? 걔네 그거 아닌데? 하는 일이 더 많은 거 같다. ...물론 이든저든 지 좋을 대로 덕질할 인간이지만서도
아메코믹은 트포에서 이겨낸(?) 뒤 어떻게 그걸로 연이 끝났구나 생각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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