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감을 맛있게 쌈싸먹으며...
으아아아, 덥다. 거기다 습하다... 그아아아 ㅇ<-<
눈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려 했었다. 하지만 눈은 언제나 문득 창밖을 바라보면 이미 소리 소문 없이 소복이 세상 위를 덮고 있었다. 어차피 모양만 다를 뿐 그것도 그저 물로 구성된 얼음 조각이었지만 깃털 같은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클락은 눈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졌었다. 물론 지금이야 지상에 쌓인 눈이 얼마나 성가신 존재일 수 있는지 안 이상 그 시절만큼 순수하게 감탄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클락은 여전히 하늘에서 하롱하롱 떨어지는 눈송이를 퍽 아름답다 여겼다.
기념일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거대한 우주의 흐름 속에서 시간의 단편이란 허무하기 그지없을 뿐이지만 이 지구상에서 기념일은 설레고 반짝였다. 브루스라면 쓰잘데기 없는 걸로 호들갑 떤다고 일축할지 모르는 그런 일련의 행사를 클락은 꽤 좋아했다. 오히려 그 쓰잘데기 없는 것에 호들갑을 떤다는 점이 더더욱 좋았다.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인사말들과 정신없이 준비한 선물과 삼삼오오 떠들어대는 저녁시간. 클락은 사람들의 온기가 한 가득 느껴지는 시간들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저 '기념일'이라는 이유로 철을 가리지 않고 바쁜 배트맨을 몰래 찾아가볼 명분이 생긴다는 것도 좋았다.
크리스마스에 범죄라는 것은 복불복과 같았다. 어느 때는 더없이 조용하게, 그야말로 성탄을 축하하는 날에 어울릴 만큼 조용하고 온화하게 시간이 흘러가기도 하지만 또 어떨 때는 떠들썩한 분위기를 더 정신없게 만들려 작정한 무리들의 소동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그리고 배트맨이 담당하고 있는 그의 도시는 다른 곳도 아닌 '고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려하게 빛이 나는 거리의 그림자를 따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배트맨을 그의 집사도, 로빈들도 강경하게 말리지 못하는 것일 터였다.
클락은 아까부터 조용히 배트맨의 행동반경을 허공에서 쫓았다. 최대한 조용히, 최대한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도록 하며 클락은 무겁게 깔린 잿빛 구름 아래서 건물 사이사이를 오가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길을 가는 가족을 위협하던 우스꽝스런 차림의 강도를 제압하고, 크리스마스를 맞아 높은 매출을 올렸을 상점을 털던 도둑 무리를 잡아넣었으며, 몇 번 쯤 고담 내의 위험 지역을 빙 돌아본 후, 잠잠히 꺼진 배트 시그널을 확인한 뒤 그가 즐겨 찾는 석상 위에 내려앉았다.
클락은 아주 조용히 조금 더 가까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모처럼 이브의 밤, 곧 크리스마스가 될 이 시간에 괜히 모습을 드러내서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의 뒷모습이 보이는 건물의 그림자 쪽으로 날아갔다. 차가운 바람에 붉은 망토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브루스가 두르고 있는 박쥐의 날개와 같은 검은 망토를 스쳐 지나갔다. 배트맨이 두른 케이프는 그 재질 탓에 좀 더 무겁게, 느릿느릿 펄럭였다.
그림자 속에서, 조용하게 도시를 바라보는 브루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그의 머릿속에는 이번 크리스마스이브 밤은 그럭저럭 조용하게 넘어가리라 안도하는 동시에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할 것이다. 어쩌면 내일 아침에는 그래도 그의 가족들에게 크리스마스다운 인사를 건네고 그의 집사가 차려준 맛있는 식사에 얌전하게 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클락 켄트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 무거운 하늘에서 새하얀 솜털이 팔랑, 팔랑 떨어져 내렸다. 클락은 눈앞의 검은 실루엣과 자신 사이를 가볍게 가르고 지나가는 작은 그 알갱이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눈송이는 클락의 시야를 방해했으면서도 무심하게 그저 조용히 땅으로,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곧 도시의 화려한 불빛에 섞여 그 흔적을 잃고 말았다. ...아, 소리를. 클락은 오래전의 자신이 생각했던 스스로에게 낸 숙제 하나가 떠올랐다.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으려고 했었는데.
클락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하나 둘, 점점 더 많은 눈송이들이 아래로, 아래로 낙하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아주 오랜만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슬로건으로 걸었던 이벤트들이 성황 하겠군, 하는 생각이 들어 클락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니 아까의 자신처럼 하늘을 바라보는 배트맨.
빗방울보다는 가볍게, 깃털보다는 무겁게. 어쩔 때는 툭툭, 어쩔 때는 그저 소리 없이. 클락은 하늘을 수놓듯 떨어지는 눈송이와 그 사이에 흐려지는 브루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마치 지금 광경이 자신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침 울려 퍼지는 조용한 종소리. 이브에서 성탄절 당일을 맞이했음을 알리는 성당의 묵직한 종소리.
"메리 크리스마스, 배트맨."
클락이 사방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인사말을 섞어 보냈다. 보다 시간이 지나면, 이 말을 그의 옆에서, 앞에서 전할 수 있을 날이 올까. 클락이 아무 주저 없이 브루스를 붙잡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브루스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클락을 맞이할 날이 올까. 클락은 그것이야 말로 '기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메트로폴리스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때.
"메리 크리스마스, 클락."
바람에 펄럭이는 케이프의 소리와 마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락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송이 사이사이로 배트맨이 보였다. 무서운 인상을 한 카울 아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호선을 그리면서 하얗게 공기 중으로 그려지는 답을 뱉은 브루스의 얼굴이 보였다. 클락은 그 얼굴을 더 제대로 보고 싶어서 흩날리는 눈송이를 가르고 그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차가워진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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