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의 얼굴이 보고 싶은 밤이었다. 알프레드와 몇 마디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넓은 저택을 의미 없이 활보했다. 그렇게 몇 시간, 새벽이 깊어진 시간에 저택에 주인의 귀환을 알리는 알림이 울렸다. 나이든 집사는 깔끔한 동작으로 딕에게 양해를 구하곤 주인을 맞이하러 나갔다. 딕은 그의 뒤를 따라 같이 그를 반기러 갈까 하다가 문득 발을 멈추어 세웠다. 싱거운 장난기가 돌아서였다. 딕은 저택 복도의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종종 그가 올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며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곧 익숙한 실루엣이 딕이 생각한 방향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딕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말을 던지고자 입을 떼었다. 하지만 점점 더 또렷하게 딕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인물의 모습에 딕은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브루스는 그의 습관대로 자신이 걸친 옷을 하나하나 벗어 던지고 있었다. 마치 지금 주어진 이 휴식을 최선을 다해 만끽하겠다는 의지가 서려있는 듯 했다. 딕이 로빈으로서 브루스의 곁에 있을 때도 이따금 봤던 그 습관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에도 왜인지 이 광경이 딕에게는 가슴에 사무치듯 다가왔다. 너무 오랜만에 생생한 그를 보고 있는 탓일까. 저도 모르게 꽉 쥔 손에서부터 두근, 두근 하고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밤에 녹아들게 했던 박쥐의 거죽을 벗어던지자 드러난 그의 몸은 오래되고 새로운 상처들이 자잘하게 박혀있음에도 아름다웠다. 배트맨이 아닌 그저 일에 지쳐 돌아온 한 남자가 되어버린 브루스를 딕은 여전히 신처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딕을 브루스는 조용한 눈으로 바라봐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가 그 자리에 있을 것을 알았던 것처럼 담담하고 별스럽지 않다는 듯한 눈이었다.
"딕."
오랜만에 본 사람을 향한 인사말이라기엔 멋없는 말 한 마디었다. 하지만 딕은 그 한 마디가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이 기뻤다. 너무 기쁜 나머지 잠시 목이 멜 정도였다. 딕은 부러 발랄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듯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어요? 알프레드 화내지 않아요? 네 살 난 꼬마들도 빨래는 빨래 통에 넣는다고 알아요."
그는 브루스에게 언제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처음에는 자신과 브루스 사이에 놓인 침묵이 어색하고 불편해서였던 구실은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말에 희미하게 변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즐겁기 때문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는 마치 딕의 마음과 꼭 같았다. 브루스는 여전히 딕의 농담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루스의 얼굴에 그런 딕의 장난말이 싫지 않은 듯 흐릿한 미소가 서렸다. 딕은 그 얼굴을 각막 깊은 곳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고담의 가십 거리인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웃음과 다른 저 재미없는 호선 하나가 딕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딕은 홀린 듯 그런 브루스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브루스의 어깨에 닿기 전 브루스의 단단한 손이 딕의 손을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브루스..." "씻고 오마."
브루스는 딕에게 자신이 그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란 인상을 주고 싶은 듯 신중한 어조로 이야기하며 부드러운 얼굴로 딕을 바라보았다.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그 자신으로서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 서툰 그가 몇 세월을 보내면서 조금은 학습한 결과물이었다. 브루스가 조심히 딕의 손을 놓아주었다. 딕이 피식 웃으며 그런 그에게 두 손을 들어 보이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욕실 문 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 곧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딕은 잠시 그 소리를 음악을 감상하듯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얼마 후 샤워를 끝낸 브루스가 허리춤에는 목욕타월을 두르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나왔다. 그런 그에게 딕은 가운을 들고 다가갔다. 브루스는 딕의 손에 들린 가운을 보고 건네받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딕은 장난스레 그런 그의 손을 피했다.
"뒤 돌아요."
민망하게 공중을 부유하는 손을 다시 거두어들이며 브루스가 불퉁하게 말했다.
"나이트윙이 언제부터 내 집사를 지망했지?"
무뚝뚝한 그의 중저음이 딕의 귀를 유쾌하게 두드렸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핀잔으로 들릴 법한 그의 말이 딕에게는 그가 던지는 재미없는 농으로 들렸다. 딕은 당당한 어조로 대꾸했다.
"복리후생은 확실하잖아요. 꽤 진지하게 고려중이에요."
어느새 훤칠한 청년이 된 딕이 악동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브루스는 과장되게 눈썹을 치켜 올려 보였다. 하지만 그는 곧 순순히 딕에게 등을 보였다. 딕의 눈에 그의 견갑골과 섬세한 허리가 들어왔다. 그의 등에도 역시 크고 작은 흉터들이 마치 예술작품의 문양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흉들이 더 이상 그에게 어떤 신체적인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딕은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등에 가운을 둘러주었다. 브루스는 그런 딕의 행동에 순순히 응하여 따르며 가운의 앞을 여몄다. 그리고 다시 브루스는 천천히 몸을 돌려 딕을 바라보았다. 다시 자신을 바라봐오는 브루스의 파란 눈이 딕은 이상하리만치 그리웠다.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딕?"
브루스는 종종 그가 그 배트맨이나 그 브루스 웨인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순진한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눈을 깜박이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좋아서 딕은 가슴이 버거웠다. 딕은 조금 성급한 손길로 그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이번에 브루스는 그런 딕의 손을 막지 않고 얌전히 그런 그의 손을 기다렸다. 그리고 딕이 브루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기 까지는 이제 겨우...
...알프레드의 일을 복리후생이 좋다 농담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딕... 정도일까...ㄷㄷㄷㄷ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