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못해도 내 덕질 인생 어느 시점에라도 숲뱃 결혼을 원작이 해먹어주길 기원하며. 뻘글! 뻘글! '3')9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확률의 장(場)이다. 브루스는 배트맨으로서 항상 여러 가능성에 대해 골몰해왔다. 스스로도 그런 자신이 병적인 구석이 있다고 시인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위해 생각을 포기하기에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배트맨이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브루스는 눈앞 남자의 성급한 손길을 달래며 자신의 옷을 벗었다. 자신을 돌봐주는 집사에게 이제는 평상복마저 찢어 드시는 거냐는 핀잔을 듣고 싶지 않았다. 태양을 등지고 드넓은 하늘의 품에서 상쾌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남자가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그런 브루스를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꼭 제일 좋아하는 간식을 눈앞에 두고 ‘기다려.’를 들은 티투스가 생각났다. 브루스는 장난삼아 그런 클락을 향해 두 팔을 벌려보았다. 언젠가 데미안이 티투스에게 그랬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클락은 그런 브루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운 좋게 브루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니까, 브루스 웨인과 클락 켄트는 연인이다. 그 배트맨과 슈퍼맨이 로맨틱한 관계란 이야기다. 브루스는 다시 가능성의 우주에 대해 생각했다. 저 어디선가의 슈퍼맨과 배트맨은 박이 터지도록 싸우는 사이일 테고, 또 어디선가는 무난한 친구 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는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이일 수 있고, 둘 중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둘 다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는... 어딘가의 배트맨은 지금의 자신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은 저 하늘의 달도 부숴버릴 수 있는 존재의 손에 자신의 나신을 있는 그대로, 어떤 장치하나 없이 노출하고 있다. 클락은 브루스의 빗장뼈부터 시작해 목을 타고 올라와 턱 선을 따라 그리듯 키스했다. 그리고 귓가로 다가온 그의 입술이 브루스의 이름을 불렀다.
"브루스..."
브루스는 등골을 따라 오한이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브루스는 우선 평정을 가장한 손길로 그런 클락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봤자 클락은 순간 크게 튀어 오른 브루스의 심장 소리를 여과 없이 들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최근 클락은 자신의 연인에 대해 한 가지 꾀를 익힌 참이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귓가에 몇 번이고 쪼듯 입을 맞추면서 그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번역하건데, 뭔 생각을 하냐- 나를 봐 달라, 그런 거다.
"클락, 그만..."
브루스는 클락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클락은 의외로 쉽게 밀려나며 브루스의 이마에 키스했다. 클락의 눈이 즐겁게 웃고 있었다.
"왜? 자넨 내 목소리 좋아하잖아." "내가 그랬나?" "지금 또 심박수 올라갔어."
...망할. 브루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게 꿍해하지 마. 연인 목소리를 좋아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나도 자네 목소리 좋아해."
클락이 수줍은 듯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조금 과장되게 코웃음을 쳐보였다. 슈퍼맨이 배트맨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건 온 저스티스 리그 원들마저 아는 사실이었다. 클락은 브루스와 사귀기 전부터 몇 번이고 "배트맨은 목소리가 좋아."하는 말을 해서 리그원들(주로 그린랜턴이나 플래시)을 경악시키고는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브루스는 클락과 같이 그런 간단한 심정으로 클락의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클락의 목소리는 좋았다. 객관적인 관점에서도 클락의 목소리는 세간의 미적 기준에 따라 큰 점수 받을만한 그런 울림이 좋은 목소리라 브루스는 생각했다. 다만 브루스에게 그의 목소리는 단순히 클락 켄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슈퍼맨의 목소리였고, 파괴된 행성의 생존자의 목소리였다. 브루스는 그와의 첫 만남에서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고압적일 수 있는지 짧게나마 경험한 바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항상 브루스보다 우위에서 떨어지는 듯 했다. 브루스는 에덴의 첫 빗방울을 바라보는 들짐승처럼 그 미지의 무언가에 경계하듯 그의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의 목소리가 좋았다. 어쩌면 지나치게 좋은 탓인지도 모른다. 브루스에게 클락의 목소리는 언제나 너무 크게 다가왔다.
"브루―"
다시금 입술이 열리며 브루스의 이름을 그리려는 클락의 입술에 브루스가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자신의 이름이 클락과 자신의 입 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느꼈다.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입술은 자신과 키스하는 그가 어떤 신성이 아닌 자신의 연인인 클락 켄트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브루스는 그렇게 클락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브루스는 클락의 목에 팔을 감았다. 에로스/사랑은 의심하는 프시케/마음에는 깃들지 못한다 했던가. 그렇다면 브루스는 결코 사랑이란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노상강도가 성급하게 뻗은 총구로 인해 부모님을 눈앞에서 잃은 후 브루스에게 세계란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었고 브루스는 그에 대비해야만 했다. 그저 확실한 것은 브루스가 어떤 것을 원하느냐 뿐이었다. 브루스는 눈앞의 이 지구상의 무엇보다도 강인한 남자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돌아설 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는 한편 그가 종종 ‘보이스카우트’라 놀리곤 하는 그의 해밝은 웃음이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클락을, 슈퍼맨을 친구라고 생각했을 때부터 브루스는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위험에 대비하면서 배트맨만의 방식으로 최대한 그를 신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연인이 된 지금 역시도 그런 브루스의 노력은 진행 중이다. 브루스는 배트맨으로서 포기할 줄 모르는 집념을 지녔고 자신의 하릴없는 강박증에 맞추어 전력을 다하는 일에도 꽤 이골이 난 편이었다. 앞으로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에 비해 키스 하나로 목소리를 삼킬 수 있는 이 연인은 분명, 브루스가 감당할 수 있는 어떤 것일 터다. 브루스는 클락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맞닿은 단단한 두 가슴에서 심장소리가 공명하듯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