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면 행복해져요!”
어둑한 골목에서 아이가 밝게 말했다.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배트맨에게로 아이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그 손에는 아이의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머핀이 들려있었다. 배트맨은 아무 말 없이 아이의 손끝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패트롤을 돌던 중, 브루스는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가의 주택단지 골목 벽에 노란빛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그 작고 동그란 빛 한가운데에는 매직으로 칠해 중간 중간 빛이 스미어 나오는 박쥐 모양이 들어 있었다. 요즘에 와서는 이런 형태의 배트시그널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브루스는 그 소박한 신호를 따라 이동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불빛의 끝에서 만난 것이 바로 지금 눈앞에 서있는 아이였다. 아이는 제가 배트맨을 부르고도 놀랐는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불과 3일 전의 일이었다. 배트맨은 이 골목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빵집에서 유세를 떨고 있는 갱단의 잔챙이들을 손봐준 적이 있었다. 이제 막 그 규모가 자라기 시작한 갱단은 유치하지만 끈질긴 방식으로 이 일대 상가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빵집 문을 닫기 위해 마감 작업을 하다가 곤욕을 치르던 가게 주인과 그녀의 아이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카운터 앞 한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모자의 모습은 가엾었지만 불행하게도 고담에서는 그렇게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배트맨이 지금 이렇게 활동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배트맨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 수련해온 만큼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기억력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얼굴을 그렇게 오랫동안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는 분명 지금 이 아이였다. 그리고 그 기억이 원인이라 친다면... 그러니까, 아이가 내밀고 있는 머핀은 일종의 답례인 것 같았다. 모양이 조금 삐뚤빼뚤하게 잡힌 머핀은 빵집 주인의 솜씨라기보다 아이의 작품일성 싶었다.
브루스는 배트맨으로서 이런 종류의 호의에 익숙하지 않았다. 선량한 피해자가 배트맨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브루스가 품을 수 있는 최대한의 욕심이었다. 그마저도 되면 좋고 말면 말고 정도로 브루스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저 메트로폴리스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존재였으니까.
브루스는 여전히 그가 다음으로 취해야할 행동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였다. 그런 배트맨에게 아이는 내민 손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우리 엄마가 맛있다고 해줬어요!”
아이는 머핀의 맛에 대해 최고의 보장을 받은 듯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결국 브루스는 아이의 빛나는 눈동자에 못 이겨 조심스레 아이가 내민 머핀을 받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의 얼굴에는 불이 켜진 듯 반짝하고 웃음이 퍼졌다. 배트맨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입만 꾹 다물었다. 아이는 배트맨에게 머핀을 건넸다는 것으로 만족했는지 통통 튀듯 뒤를 돌아 자신의 집 현관으로 뛰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아이는 다시 한 번 더 해맑게 이야기 했다.
“먹으면, 정말 행복해질 거예요!”
그리고 아이는 쏙 하니 제 집안으로 사라졌다. 브루스는 그제야 너무 늦은 시간에 혼자 집 밖에 있지 말라 한소리를 하려 입을 열었지만, 이미 골목에 남은 것은 배트맨과 머핀뿐이었다.
자, 그럼 이것을 어찌한다. 브루스는 다른 행인이나 거주민과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건물의 꼭대기를 향해 오르면서 생각했다. 슈퍼맨이라면... 클락이라면 앞뒤 잴 것 없이 아이가 내민 머핀을 기쁜 얼굴로 받아들고, 크게 한입 먹고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머핀이었다며 아이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배트맨인 브루스가 머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생각하는 거라고는 독은 없을지 따위의 것이었다. 브루스는 쓰게 웃었다. 이런 스스로의 편집증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새삼스럽지 않아서 더 웃음이 나온 것도 같았다. 브루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브루스는 입을 벌려 머핀의 한 귀퉁이를 베어 물었다. 폭신한 머핀에서는 초콜릿과 설탕, 버터, 계란, 호두의 냄새가 적절히 섞여 브루스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좋은 맛이 났다. 그리고 머핀은 따뜻했다. 아이는 배트맨이 활동하는 밤 시간에 맞추어 머핀을 구운 모양이었다. 이런 밤중과 머핀은 풍속으로 보기엔 그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지만, 배트맨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식사인지도 모른다.
브루스가 먹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지금 굉장히 행복했을 정도로 머핀은 맛있었다.
클락의 등 뒤로 페리 편집장이 “켄트!”하고 성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슈퍼맨의 청각을 지닌 클락이 그것을 못 들을 리는 없었지만, 클락은 부름을 무시하고 허둥지둥 서둘러 데일리 플래닛 건물을 빠져나왔다.
기자가 좋은 점은 비록 회사 건물 안에 진득하게 붙어있지 않더라도, 신문 면을 장식할 기사를 건져올 수만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자리가 치워질 염려는 없다는 것이었다. 클락은 성실한 직장인으로서의 죄책감을 덜어내듯 변명하며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재빠르게 슈퍼맨이 되어 고담을 향해 날아갔다.
브루스로부터 그 자신의 문제에 관련해 호출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호출은 드문 만큼 내용이 까다로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클락은 초조한 마음에 웨인 저택으로 가는 속도를 높였다. 방금 고담 강을 지났으니 곧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클락은 마치 옛날 영주의 성과 같은 웨인 저택에 도착했다.
클락에게 연락을 걸어온 브루스의 목소리에서는 크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묻는 클락의 말에 브루스는 애매한 어조로 답을 얼버무렸다. 더욱더 드물게 그는 클락에게 동굴이 아닌 저택으로 곧장 오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드문 일들이 이렇게 겹치자 클락은 아무래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일을 좋아하는 그가 동굴에 있지 못할 만큼 어디를 다친 건 아닐까, 고집쟁이인 그가 알프레드에게 억지도 못쓸 만큼 몸이 상한 건 아닐까, 혹시 그 전화 속에서 말꼬리를 흐리던 그 망설임 속에 보다 많은 의미가 있지는 않았을까.
클락은 현관을 지나쳐 그가 있는 응접실 쪽을 향해 날아갔다. 언뜻 본 결과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듯 했지만 이제는 그 멀쩡함 마저 불안이 되려 했다.
“브루스!”
슈퍼맨이 난간에 쌩하니 내려오자 집주인과 그의 집사의 눈이 둥그레졌다. 하지만 이내 둘은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브루스는 손에 들린 차로 고개를 돌렸고, 알프레드는 적당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발코니의 유리문을 열어주었다. 저택 안에서 큰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게마저 보였다.
클락은 알프레드를 향해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브루스에게로 날아갔다. 재빨리 브루스의 몸을 스캔한 결과 그는 역시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너무 정신없이 날아온 탓일까? 클락은 브루스의 앞에 발을 디딘 순간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하지만 클락은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도 자신을 이런 시간 저택으로 굳이 부른 브루스가 신경 쓰여 그것을 의식에서 배제했다.
“브루스, 무슨 일 있어?”
“음...”
브루스는 찻잔을 낮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손짓으로 클락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마치 문제가 생겨 교장실에 불려온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클락은 얼떨떨했지만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질 좋은 시트가 소리 없이 슈퍼맨의 몸을 지탱했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클락에게 알프레드가 정중히 물었다.
“아, 아뇨. 전 괜찮―”
“얼 그레이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클락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그런 클락의 말을 자르며 브루스가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클락이 다시 자신은 괜찮다는 말을 꺼내려 시도하기보다 알프레드가 깔끔하게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게 먼저였다.
클락은 황망한 듯 알프레드가 나간 문 쪽을 보았다. 그런 클락이 재밌는지 브루스에게서 쿡쿡하고 목안으로 삼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클락이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그 때 클락은 자신이 조금 억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급하게 부른 건 사과하지. 하지만 그렇게 안절부절 못할 문제는 아니니 안심해.”
“자네가 어디 쉽게 남의 손 빌리는 성격이야?”
클락이 불퉁하니 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브루스를 걱정스레 살피고 있었다. 집요해보이기까지 한 그 시선에는 미처 그가 찾아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은지 하는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브루스는 다시 웃었다. 그 드문 배트맨의 웃음을 두 번씩이나 보고도 클락의 걱정은 도통 가실 줄을 몰랐다.
“내가 곤란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치명적인 문제는 아냐.”
“자네가 곤란하다는 지점에서 나한텐 이미 치명적이야.”
“음...”
브루스가 다시 말을 삼켰다. 클락에게 뭐라 설명하면 좋을지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얼 그레이의 상큼한 향이 뽀얗게 올라오는 두 개의 찻잔을 준비한 알프레드가 그들을 브루스와 클락 앞에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브루스가 이용했던 빈 찻잔을 챙겨들고 소리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클락은 브루스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알프레드가 준비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웨인 가의 집사가 우린 차는 그 어느 전문 찻집의 차들보다도 정갈하고 완벽했다. 차를 들이키는 클락에게 브루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벽난로 위에 있는 저 액자. 보이나?”
“응. 자네 부모님 초상화 말이지?”
“...그래. 우리, 부모님.”
클락의 대꾸에 브루스가 단어를 입안으로 굴리듯 그의 말을 받았다. 브루스도 클락을 따라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느라 내리깔던 눈을 천천히 뜨며 브루스가 차분한 어조로 클락에게 말했다.
“내 눈엔 지금 그분들이 보이지 않아.”
“뭐?”
클락이 찻잔을 들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브루스가 말을 이어갔다.
“얘기한 그대로. 지금 내 눈에는 그분들의 초상화가 보이지 않아.”
“그게 무슨...”
“부모님과 관련해서 무엇 하나 기억나지 않아. 그리고 그분들의 모습이 담긴 시각적인 매체들은 볼 수 없고, 청각적 정보는 들을 수 없지.”
브루스는 천천히 한 단어씩 분명하게 이야기했지만 클락은 그 이야기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상실증? 인지장애? 몇몇 가정들이 클락의 머릿속에 애매하게 떠올랐다. 클락은 다시금 올라오는 어지러움에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브루스 자네 말은, ――――― 씨와 ―――― 씨가 자네의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야?”
“...지금 두 분의 이름을 이야기 했나?”
“응.”
“내겐 그 이름들이 들리지 않았어.”
클락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아주 내려놨다. 반면 브루스는 다시 잔을 들어 차를 들이켰다. 지나치게 평온해 보이는 브루스의 모습에 클락이 의아할 정도였다. 심지어 클락은 브루스가 자신에게 질 나쁜 장난을 거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 브루스라면 결코 그의 부모님을 걸고 이런 장난을 치지 않을 거란 사실을 클락은 상기했다.
“알프레드에게도... 이런 저런 말을 들었는데 하나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 꼭 귀는 듣는데 머리가 지워내는 것처럼 말이야.”
“뇌에 문제가 생긴 건...”
클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검사를 돌려도 이상은 없더군.”
“혹시 짐작 가는 원인 있어?”
“원인...”
브루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단정한 이목구비를 한 브루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그 스스로는 본디 살가운 분위기를 띠지 않았다. 그의 주변은 언제나 약간 낮은 온도의 바람이 부는 듯 서늘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브루스는 왜일까. 분명 냉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특유의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브루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클락을 맑은 파란 눈이 마주 봐왔다.
“특별한 사고는 없었어. 다만 어떤 아이에게서 머핀을 받았지.”
“머핀? 먹는?”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락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는 누구였어? 어디 빌런에게 협박이나 조종이라도 당하고 있었어? 스케어크로는... 아캄에 있군. 짐작 가는 배후는?”
“클락. 진정해.”
반쯤 몸을 일으키고 질문을 쏟아 붓는 클락에게 브루스가 손을 팔랑이며 말했다. 그런 브루스의 느긋한 반응에 클락이 오히려 애가 탔다. 그 배트맨이 스스로의 기억과 인지 문제에 있어 저리도 태연한 반응을 보일 수 있으리라곤 클락은 물론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평범한 아이야. 그 애가 누군가의 위협을 받거나 꿍꿍이가 있어 그런 거 같지는 않아.”
이 말에서 클락은 내심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다만 자네 말대로 배후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니까 조사를 해보려고 했는데...”
“했는데?”
브루스는 잠시 입을 닫고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찾아가봐야 소용이 없겠더군.”
“왜?”
“말하자면.”
브루스가 손을 들어 클락이 들어온 난간 너머를 가리켰다. 고담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저택인 만큼 브루스의 손이 서로 경쟁하듯 솟아오른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도시를 짚었다.
“난 지금 저 도시가 보이지 않아.”
브루스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역시 브루스의 호출은 드문 만큼 그 내용이 까다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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