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면 행복해져요!"
어둑한 골목에서 아이가 밝게 말했다.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배트맨에게로 아이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그 손에는 아이의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머핀이 들려있었다. 배트맨은 아무 말 없이 아이의 손끝을 바라만 보았다.
여느 때처럼 패트롤을 돌던 중, 브루스는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가의 주택단지 골목 벽에 노란빛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작고 동그란 빛 한가운데에는 매직으로 칠해 중간 중간 빛이 스미어 나오는 박쥐 모양이 들어 있었다. 요즘에 와서는 이런 형태의 배트시그널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브루스는 그 소박한 신호를 따라 이동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불빛의 끝에서 만난 것이 바로 지금 눈앞에 서있는 아이였다. 아이는 제가 배트맨을 부르고도 놀랐는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불과 3일 전의 일이었다. 배트맨은 이 골목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빵집에서 유세를 떨고 있는 갱단의 잔챙이들을 손봐준 적이 있었다. 이제 막 그 규모가 자라기 시작한 갱단은 유치하지만 끈질긴 방식으로 이 일대 상가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빵집 문을 닫기 위해 마감 작업을 하다가 곤욕을 치르던 가게 주인과 그녀의 아이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카운터 앞 한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모자의 모습은 가엾었지만 불행하게도 고담에서는 그렇게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배트맨이 지금 이렇게 활동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배트맨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 수련해온 만큼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기억력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얼굴을 그렇게 오랫동안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는 분명 지금 이 아이였다. 그리고 그 기억이 원인이라 친다면... 그러니까, 아이가 내밀고 있는 머핀은 일종의 답례인 것 같았다. 모양이 조금 삐뚤빼뚤하게 잡힌 머핀은 빵집 주인의 솜씨라기보다 아이의 작품일성 싶었다. 브루스는 배트맨으로서 이런 종류의 호의에 익숙하지 않았다. 선량한 피해자가 배트맨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브루스가 품을 수 있는 최대한의 욕심이었다. 그마저도 되면 좋고 말면 말고 정도로 브루스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저 메트로폴리스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존재였으니까.
브루스는 여전히 그가 다음으로 취해야할 행동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였다. 그런 배트맨에게 아이는 내민 손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우리 엄마가 맛있다고 해줬어요!”
아이는 머핀의 맛에 대해 최고의 보장을 받은 듯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결국 브루스는 아이의 빛나는 눈동자에 못 이겨 조심스레 아이가 내민 머핀을 받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의 얼굴에는 불이 켜진 듯 반짝하고 웃음이 퍼졌다. 배트맨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입만 꾹 다물었다. 아이는 배트맨에게 머핀을 건넸다는 것으로 만족했는지 통통 튀듯 뒤를 돌아 자신의 집 현관으로 뛰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아이는 다시 한 번 더 해맑게 이야기 했다.
“먹으면, 정말 행복해질 거예요!”
그리고 아이는 쏙 하니 제 집안으로 사라졌다. 브루스는 그제야 너무 늦은 시간에 혼자 집 밖에 있지 말라 한소리를 하려 입을 열었지만, 이미 골목에 남은 것은 배트맨과 머핀뿐이었다.
자, 그럼 이것을 어찌한다. 브루스는 다른 행인이나 거주민과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건물의 꼭대기를 향해 오르면서 생각했다. 슈퍼맨이라면... 클락이라면 앞뒤 잴 것 없이 아이가 내민 머핀을 기쁜 얼굴로 받아들고, 크게 한입 먹고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머핀이었다며 아이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배트맨인 브루스가 머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생각하는 거라고는 독은 없을지 따위의 것이었다. 혹시 아이가 그때의 갱들에게 위협을 당했다거나 원래 한패였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가정 따위를 생각했다. 브루스는 쓰게 웃었다. 이런 스스로의 편집증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새삼스럽지 않아서 더 실소가 나왔다. 브루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브루스는 입을 벌려 머핀의 한 귀퉁이를 베어 물었다. 폭신한 머핀에서는 초콜릿과 설탕, 버터, 계란, 호두의 냄새가 적절히 섞여 브루스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좋은 맛이 났다. 그리고 머핀은 따뜻했다. 아이는 배트맨이 활동하는 밤 시간에 맞추어 머핀을 구운 모양이었다. 이런 밤중과 머핀은 풍속으로 보기엔 그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지만, 배트맨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식사인지도 모른다.
브루스가 먹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지금 굉장히 행복했을 정도로 머핀은 맛있었다.
클락의 등 뒤로 페리 편집장이 “켄트!”하고 성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슈퍼맨의 청각을 지닌 클락이 그것을 못 들을 리는 없었지만, 클락은 부름을 무시하고 허둥지둥 서둘러 데일리 플래닛 건물을 빠져나왔다. 기자가 좋은 점은 회사 건물 안에 진득하게 붙어있지 않더라도 신문 면을 장식할 기사를 건져올 수만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자리가 치워질 염려는 없다는 것이었다. 클락은 성실한 직장인으로서의 죄책감을 덜어내듯 변명하며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재빠르게 슈퍼맨이 되어 고담을 향해 날아갔다.
브루스로부터 그 자신의 문제에 관련해 호출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꼭 그만큼 그의 호출은 내용이 까다로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클락에게 연락을 걸어온 브루스의 목소리에서는 크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묻는 클락의 말에 브루스는 애매한 어조로 답을 얼버무렸다. 더욱더 드물게 그는 클락에게 동굴이 아닌 저택으로 곧장 오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드문 일들이 이렇게 겹치자 클락은 아무래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일을 좋아하는 그가 동굴에 있지 못할 만큼 어디를 다친 건 아닐까, 고집쟁이인 그가 알프레드에게 억지도 못쓸 만큼 몸이 상한 건 아닐까, 혹시 그 전화 속에서 말꼬리를 흐리던 그 망설임 속에 보다 많은 의미가 있지는 않았을까. 이미 그의 심장박동이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클락은 초조한 마음에 웨인 저택으로 가는 속도를 높였다. 방금 고담 강을 지났으니 곧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클락은 마치 옛날 영주의 성과 같은 웨인 저택에 도착했다.
클락은 현관을 지나쳐 그가 있는 응접실 쪽을 향해 날아갔다. 눈으로 확인한 결과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었지만 이제는 그 멀쩡함 마저 불안이 되려 했다.
“브루스!”
슈퍼맨이 난간에 쌩하니 내려오자 집주인과 그의 집사의 눈이 둥그레졌다. 하지만 이내 둘은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브루스는 손에 들린 차로 고개를 돌렸고, 알프레드는 적당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발코니의 유리문을 열어주었다. 저택 안에서 큰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게마저 보였다.
클락은 알프레드를 향해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브루스에게로 날아갔다. 재빨리 브루스의 몸을 스캔한 결과 그는 역시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너무 정신없이 날아온 탓일까? 클락은 브루스의 앞에 발을 디딘 순간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하지만 클락은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도 자신을 이런 시간 저택으로 굳이 부른 브루스가 신경 쓰여 그것을 의식에서 배제했다.
“브루스, 무슨 일 있어?”
“음...”
브루스는 찻잔을 낮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손짓으로 클락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마치 문제가 생겨 교장실에 불려온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클락은 얼떨떨했지만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질 좋은 시트가 소리 없이 슈퍼맨의 몸을 지탱했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클락에게 알프레드가 정중히 물었다.
“아, 아뇨. 전 괜찮―”
“얼 그레이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클락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그런 클락의 말을 자르며 브루스가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클락이 다시 자신은 괜찮다는 말을 꺼내려 시도하기보다 알프레드가 깔끔하게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게 먼저였다.
클락은 황망한 듯 알프레드가 나간 문 쪽을 보았다. 그런 클락이 재밌는지 브루스에게서 쿡쿡하고 목안으로 삼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클락이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그 때 클락은 자신이 조금 억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급하게 부른 건 사과하지. 하지만 그렇게 안절부절 못할 문제는 아니니 안심해.”
“자네가 어디 쉽게 남의 손 빌리는 성격이야?”
클락이 불퉁하니 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브루스를 걱정스레 살피고 있었다. 집요해보이기까지 한 그 시선에는 미처 그가 찾아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은지 하는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브루스는 다시 웃었다. 그 드문 배트맨의 웃음을 두 번씩이나 보고도 클락의 걱정은 도통 가실 줄을 몰랐다.
“내가 곤란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치명적인 문제는 아냐.”
“자네가 곤란하다는 지점에서 나한텐 이미 치명적이야.”
“음...”
브루스가 다시 말을 삼켰다. 클락에게 뭐라 설명하면 좋을지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얼 그레이의 상큼한 향이 뽀얗게 올라오는 두 개의 찻잔을 준비한 알프레드가 그들을 브루스와 클락 앞에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브루스가 이용했던 빈 찻잔을 챙겨들고 소리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클락은 브루스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알프레드가 준비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웨인 가의 집사가 우린 차는 그 어느 전문 찻집의 차들보다도 정갈하고 완벽했다. 차를 들이키는 클락에게 브루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벽난로 위에 있는 저 액자. 보이나?”
“응. 자네 부모님 초상화 말이지?”
“...그래. 우리, 부모님.”
클락의 대꾸에 브루스가 단어를 입안으로 굴리듯 그의 말을 받았다. 브루스도 클락을 따라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느라 내리깔던 눈을 천천히 뜨며 브루스가 차분한 어조로 클락에게 말했다.
“내 눈엔 지금 그분들이 보이지 않아.”
“뭐?”
클락이 찻잔을 들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브루스가 말을 이어갔다.
“얘기한 그대로. 지금 내 눈에는 그분들의 초상화가 보이지 않아.”
“그게 무슨...”
“부모님과 관련해서 무엇 하나 기억나지 않아. 그리고 그분들의 모습이 담긴 시각적인 매체들은 볼 수 없고, 청각적 정보는 들을 수 없지.”
브루스는 천천히 한 단어씩 분명하게 이야기했지만 클락은 그 이야기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상실증? 인지장애? 몇몇 가정들이 클락의 머릿속에 애매하게 떠올랐다. 클락은 다시금 올라오는 어지러움에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브루스 자네 말은, ――――― 씨와 ―――― 씨가 자네의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야?”
“...지금 두 분의 이름을 이야기 했나?”
“응.”
“내겐 그 이름들이 들리지 않았어.”
클락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아주 내려놨다. 반면 브루스는 다시 잔을 들어 차를 들이켰다. 지나치게 평온해 보이는 브루스의 모습에 클락이 의아할 정도였다. 심지어 클락은 브루스가 자신에게 질 나쁜 장난을 거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 브루스라면 결코 그의 부모님을 걸고 이런 장난을 치지 않을 거란 사실을 클락은 상기했다.
“알프레드에게도... 이런 저런 말을 들었는데 하나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 꼭 귀는 듣는데 머리가 지워내는 것처럼 말이야.”
“뇌에 문제가 생긴 건...”
클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검사를 돌려도 이상은 없더군.”
“혹시 짐작 가는 원인 있어?”
“원인...”
브루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단정한 이목구비를 한 브루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그 스스로는 본디 살가운 분위기를 띠지 않았다. 그의 주변은 언제나 약간 낮은 온도의 바람이 부는 듯 서늘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브루스는 왜일까. 분명 냉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특유의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브루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클락을 맑은 파란 눈이 마주 봐왔다.
“특별한 사고는 없었어. 다만 어떤 아이에게서 머핀을 받았지.”
“머핀? 먹는?”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락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는 누구였어? 어디 빌런에게 협박이나 조종이라도 당하고 있었어? 스케어크로는... 아캄에 있군. 짐작 가는 배후는?”
“클락. 진정해.”
반쯤 몸을 일으키고 질문을 쏟아 붓는 클락에게 브루스가 손을 팔랑이며 말했다. 그런 브루스의 느긋한 반응에 클락이 오히려 애가 탔다. 그 배트맨이 스스로의 기억과 인지 문제에 있어 저리도 태연한 반응을 보일 수 있으리라곤 클락은 물론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평범한 아이야. 그 애가 누군가의 위협을 받거나 꿍꿍이가 있어 그런 거 같지는 않아.”
이 말에서 클락은 내심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다만 자네 말대로 배후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니까 조사를 해보려고 했는데...”
“했는데?”
브루스는 잠시 입을 닫고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찾아가봐야 소용이 없겠더군.”
“왜?”
“말하자면.”
브루스가 손을 들어 클락이 들어온 난간 너머를 가리켰다. 고담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저택인 만큼 브루스의 손이 서로 경쟁하듯 솟아오른 건물들이 까맣게 모여 있는 도시를 짚었다.
“난 지금 저 도시가 보이지 않아.”
브루스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역시 브루스의 호출은 드문 만큼 그 내용이 까다로웠다.
브루스가 클락에게 부탁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담에서 활동이 불가능한 브루스를 대신해 그가 짐작하는 문제 원인에 대한 단서를 조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러는 겸 덤으로 도시의 패트롤이었다. 브루스의 말에 클락은 눈을 껌뻑였다.
“왜?”
“아, 아니. 진짜? 진짜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보이는 게 없는데 돌아다녀봐야 소용이 없잖아.”
브루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가 한 이야기에는 이상한 점도 불합리한 점도 없었다. 심지어 지극히 평범한 의견이었고 일반적인 대안이었다. 클락은 바로 그 점에 놀라고 있었다. 브루스가 자신의 본업에 대해 보통 사람들처럼 대응하다니! 클락은 오늘 하루 몇 번째인지 모를 놀라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클락은 알프레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도시로 나가보니 웬 안개더미들만 보이더라고 담담히 말하는 브루스를 어떻게 하면 달래서 무리한 활동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비록 브루스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순순히 배트맨의 일을 부탁하는 모습을 보리라곤 정말 꿈에도 보지 못했다. 클락은 브루스의 연인이었지만 고담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제3자로 분류되었다. 그 간극을 섭섭하게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있는 와중에 브루스의 입에서 이런 부탁을 들으니 클락은 놀라다 못해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달력에 있는 오늘 날짜 아래에 세상에서 가장 진기한 날이라는 코멘트라도 달아놔야지 않을까하고 클락은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단 복장은 배트맨으로써 부탁하지. 이 도시에 슈퍼맨이 도사린다는 소문이 돌았다간 뒷감당이 힘들거든.”
이 정도 조건은 양호했다. 클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락의 답에 브루스는 편안한 표정으로 남은 차를 들이켰다. 브루스의 반듯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이 그리는 선이 햇빛에 도드라졌다. 근심이 보이지 않는 브루스의 얼굴에 클락마저 지금 상황을 잊고 실없이 웃어버릴 것만 같았다. 클락은 억지로 표정을 굳히며 브루스가 자신의 차를 다 마실 때 까지 조용히 브루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데일리 플래닛으로 돌아가는 길, 현관까지 배웅을 나온 알프레드에게서 ‘주인님께서 남기신 답례’라며 파일 하나를 건네받았다. 파일 속에는 최근 렉스 코프에서 국방부에 로비중인 무기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었다. 결국 브루스는 브루스였다. 어떻게 슈퍼맨의 인지에 닿지 않는 곳까지 정보력이 미칠 수 있는 건지 그에 짐짓 질린 듯 혀를 내두르는 한편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클락은 그 파일 덕에 편집장의 부름을 무시하고 외근을 나간 데에 대한 벌충을 할 수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브루스의 부탁에 따라 클락은 다시 고담을 찾아왔다. 알프레드가 시계바늘을 돌리자 배트케이브로 내려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브루스는 아무 말 없이 알프레드가 맞춘 시계 판을 바라보다가 먼저 성큼성큼 동굴 아래로 내려갔다. 클락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브루스... 혹시 아까 시계도...”
“음.”
클락이 조심스럽게 묻자 브루스는 그저 목만 울렸다. 어렵지 않게 보이는 그의 삶의 공백에 클락은 새삼 그의 부모님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가가 실감났다.
배트케이브에 다다라서 클락은 브루스로부터 장비들을 받고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브루스로부터 패트롤의 배웅을 받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배트맨의 차림을 하고. 반면 원래대로라면 한창 본업을 시작할 시간인 브루스는 편안한 평상복의 차림을 하고 그런 클락 앞에 서 있었다. 조금 뻣뻣한 자세로 서있는 클락에게 브루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
“문제는 아니고... 그냥... 어색해서.”
클락이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아 대답했다. 브루스는 픽하니 웃었다.
“급하다고 히트비전을 쓰거나 하진 말아줬음 싶군.”
“조심할게.”
“지나치게 살갑게 구는 것도 자제하도록.”
“...조심할게.”
살짝 어깨를 웅크리며 클락이 답했다. 그러자 브루스는 그런 클락의 어깨를 잡아 핀 후 카울아래 드러난 클락의 턱에 가볍게 키스했다. 클락의 머릿속이 다시 한 번 가볍게 요동쳤다. 브루스의 입가에 진한 호선이 떠올랐다.
“어디한번 실력 좀 보자고 ‘배트맨’.”
클락은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웨인 씨.”
브루스가 알려준 가게와 아이가 사는 집이 있는 거리를 찾아가면서 클락은 강도와 소매치기, 마약쟁이를 잡았다. 고담의 길거리는 음영이 너무 분명해서 큰길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금세 음산한 광경이 펼쳐졌다.
슈퍼맨과 다르게 카울과 장갑까지 꼼꼼하게 착용한 배트맨의 복장은 보다 세상에 대해 방어적이고 적대적이었다. 클락은 내심 브루스가 매일 밤 지고 있는 무게에 놀라고 있었다. 크립토니안인 자신에게야 얇은 천 한 장이든 든든한 갑주든 별 차이가 없었지만 인간인 브루스에게는 전혀 다르리라는 사실을 클락은 알고 있었다. 최대한 가벼운 소재를 이용하여 활동에 큰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고는 있겠지만, 장비에 일정 수준 이상의 기능을 원하는 한 거기에는 합당한 질량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게 하나하나가 브루스를 지탱해 왔을 것이다. 어쩌면 내몰았거나.
클락은 배트맨을 가장하고 있는 만큼 되도록 비행능력이 아닌 와이어를 이용해서 도시를 오가려고 했지만 아까도 그만 두 거리 정도를 날아서 이동하고 말았다. 하지만 브루스도 도무지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이곤 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클락은 혼자 변명했다.
머릿속에 다시 브루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클락은 상황이 좋지 않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아늑했다. 클락은 고개를 저었다. 잘 웃는 브루스도 그렇고, 부탁을 하는 브루스나, 배웅을 해주는 브루스, 먼저 입을 맞추는 브루스까지 오늘 하루는 온통 익숙하지 못한 그 뿐이었다. 클락이 브루스 옆에서 간간히 느낀 현기증은 아마 그 탓일지도 모른다. 클락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들뜬 생각을 접었다.
브루스는 불과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일의 원인이 머핀 때문일 거라 추측했다. 듣는 클락과 마찬가지로 얘기를 꺼내는 브루스 역시 그 가정에 의문을 가지는 듯 했지만 단서는 그 뿐이었다. 소거법으로 생각했을 때 남은 변수란 머핀뿐이라고 브루스는 이야기 했다.
어느 정도 이동하다 도시 한 구석에 위치한 값싼 집세의 건물 촌에 다다랐다. 클락은 거리 한 모퉁이에서 브루스가 이야기했던 빵집 간판을 보았다. 운 좋게도 가게 앞에는 막 셔터 문을 내리는 여자와 작은 아이가 보였다. 클락은 이제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갈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아이가 배트맨의 모습을 발견했다.
“배트맨!”
아이는 밝게 웃으며 작은 손을 붕붕 흔들었다. 클락은 반사적으로 웃으며 그에 답하고 말았다. 굳이 브루스가 보여준 고담 시민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자료가 아니더라도 저렇게 친근하게 배트맨을 대하는 것 보니 아이는 브루스가 말한 그 아이가 확실했다.
아이의 외침에 문단속을 확인하던 아이의 엄마도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도 배트맨의 모습에 무서워하기보다 안심한 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런 모자의 반응에 클락은 왠지 뿌듯해져서 더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배트맨! 어때요? 행복해졌어요?”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소리치듯 물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너무 달게 느껴진 탓일까? 클락의 머리가 다시 살짝 어지러워졌다. 배트맨의 모습으로 웃기까지 했는데 슈퍼맨처럼 다정하게 말대답을 해주었다간 후에 브루스에게 한소리를 들을 것만 같아 클락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 제스처를 확인한 아이는 더 크게 웃었다.
너무나도 평범한 아이였다. 아이도 아이의 엄마도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거나 위협을 받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바이탈사인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어떤 약물의 징후나 그 밖의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길에 오는 동안 브루스가 언급했던 갱단의 횡포 같은 것도 없었다. 이 근방에서 어떤 빌런의 움직임도 보지 못했다.
브루스는 머핀을 싸던 베이킹컵에서 얻어낸 샘플에서도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이야기 했다. 지금 브루스가 어딘지 유한 태도인 것도 있지만 그런 객관적인 증거가 별 다른 실마리를 쥐어주지 못했기에 아마 그 명탐정도 아이를 용의선상에 두는 것을 주저했을 것이다. 머핀과 브루스의 일은 그저 일이 겹친 우연일 뿐 어떤 인과관계는 없는 듯했다.
클락은 실마리를 잃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배트맨에게 우호적인 두 모자가 혐의점이 없는 것 같아 안심했다. 브루스는 좀 더 이런 순수한 호의와 세상의 미덕에 감화될 필요가 있었다. 고뇌와 절망에 빠진 브루스는 늘 자신을 상처 입혔으니까. 더구나 그럴 때 브루스는 클락은 물론 그 누구도 손에 닿지 못할 곳으로 마음을 틀어박으니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서는 더 애가 탔다.
클락은 다른 어떤 약물이나 브루스 그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사고가 있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어제 배트맨을 목격한 것이 확실한 아이에게 어젯밤 어떤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질문할 생각으로 클락은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 때 여자가 아이에게 물었다.
“토미. 그게 무슨 말이니?”
엄마의 물음에 아이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소곤소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있지 엄마. 내가 배트맨에게 먹으면 행복해지는 머핀을 선물했어.”
그리고 흡 하고 급히 삼키는 숨소리. 클락은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한 그녀의 고동소리를 들었다. 클락은 이동을 멈추었다. 클락은 그녀와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의 엄마는 바로 고개를 돌리며 아이의 손을 잡고 밝지 않은 가로등이 켜진 골목을 허둥지둥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모자를 클락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이렇게 까지 단서가 나오지 않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아직은 조사의 방향을 바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레슬리 톰킨스가 부자의 저택에 왕진을 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파크로의 주민이자 사회봉사자로서 고담의 가장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느라 부자들의 전화 한통에 발걸음을 옮기기에는 너무나 바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브루스 웨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브루스가 어른이 된 후로 그를 만나기 위해 레슬리가 웨인 저택으로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둘은 주로 크라임 앨리에 있는 웨인부부의 사고가 일어난 지점이나 그녀의 클리닉 등 고담 시 어딘가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하지만 오늘은 브루스의 요청으로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집사가 모는 차를 타고 오랜만이 찾아온 웨인 저택은 여전히 웅장했고 어딘가 쓸쓸했다.
고담의 양심이라고도 불리던 토마스 웨인과 마사 웨인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레슬리는 그들의 아들을 온 마음으로 보살펴왔다. 마음에 상처 입은 아이는 날카롭고 자신의 안쪽으로 응집되어가고 있었다. 레슬리는 그 선량한 부부의 아들이 고담의 어둠에 짓눌려 날개가 꺾이는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고, 끈질기게 아이의 눈에 빛이 돌아오길 기원하며 아이를 마주했다. 비록 결과적으로 그 세월이 성공적이었다고 답할 수는 없었지만, 그 어리던 아이가 어느새 훤칠한 성인이 된 것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간단한 진찰 기구들을 가방 안에 잘 정돈하며 레슬리가 말했다.
“전공이 아니라 단언은 못하겠다만...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구나.”
브루스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반듯하게 앉은 채였다. 그 모습이 마치 엄마 손에 떨어져 제 혼자 의사 앞에 앉은 여덟 살 난 어린 아이 같았다.
“네가 원한다면 믿을 만한 상담가라도...”
“아니요, 레슬리. 괜찮습니다.”
“그 고집은 여전하구나. 그래도 그만큼 네가 건강하다는 뜻이겠지.”
레슬리가 한숨처럼 이야기하자 브루스가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평소 어떻게든 무뚝뚝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던 그와는 다른 꽤 솔직한 얼굴이었다. 레슬리는 브루스의 어깨를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어느 새 돌아갈 채비를 마친 레슬리를 보며 브루스가 서둘러 일어났다.
“여기서 머물다 아침에 돌아가셔도 되는데...”
“마음은 고맙지만 내 상황이 여의치 못하구나.”
미안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하는 레슬리에게 브루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고담에서 선한 사람들 모두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쯤 브루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선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브루스 역시도 선량한 이들을 위해 늘 바쁜 나날을 보내왔었다.
“알프레드가 바래다드릴 거예요. 원래는 제가 가야하는 건데...”
“얘는. 이상은 없다지만 넌 환자란다. 어디 쏘다니다 페니워스 씨 속 썩일 생각일랑 마렴.”
“너무 새삼스러운 말인 거 같아요.”
브루스가 새초롬하게 대꾸하자 레슬리는 손을 뻗어 브루스의 이마에 아프지 않은 알밤을 먹였다. 브루스는 마치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었다. 이 얼굴은 지금보다 한참 어리던 브루스에게서도 본 기억이 없는 얼굴이었다. 레슬리는 벽난로 위에 걸린 부부의 초상화를 보았다. 어쩐지 착잡한 심정이었다.
아주 오랜만이 찾아온 저택에서 만난 브루스는 레슬리의 기억 속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고 평온해보였다. 처음 그 얼굴을 보았을 때 왕진 차 저택에 들렀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레슬리는 내심 기뻤다. 하지만 곧 그 평온의 원인이 그가 자신의 부모님과 그가 속한 세상의 일부를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쁨은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부모님을 잃은 후 처음으로 가장 안정적인 상태에 있는 브루스는 지금 토막나버린 세상 속에 있었다.
“브루스.”
현관으로 나가는 길에 레슬리가 뒤를 돌아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맑은 파란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과거의 웨인부부가 소중히 여겼고, 레슬리가 그토록 바라던 눈동자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레슬리는 지금 그 눈동자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아, 우리네 삶이여. 레슬리는 쓰게 웃었다.
“얘야, 난 네가 행복하길 언제나 바라왔단다...”
행복. 레슬리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브루스가 몸을 굳혔다. 그런데 하고 운을 떼려던 레슬리는 그런 브루스의 반응에 말을 멈추었다. 브루스가 행복이나 그와 유사한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불안하게 눈만 깜빡이는 브루스의 모습이 마치 숨겨둔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보였다. 행복은 그런 식의 죄책감이 따라붙을 필요가 없는 단어일 텐데도.
레슬리는 브루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아니, 말을 이었다기보다 말을 돌렸다.
“...항상... 몸 조심히 지내렴. 뭔가 알게 되면 다시 연락하마.”
알프레드가 준비한 차에 오르는 레슬리를 배웅한 뒤 브루스는 생각에 잠겼다. 어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중에서도 그리고 브루스 그 자신의 신체에서도 별 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정신적인 문제라 하기엔 요 근래에 배트맨을 특별히 괴롭힌 사건도 없었다. 그렇다면... 브루스는 남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브루스를 대신해서 배트맨으로 나간 클락이 해줄 것이다.
저택 벽에는 빈 액자들이 많이 걸려있었다. 종종 어린 브루스가 혼자 무어가 그렇게 좋은지 웃고 있는 썰렁한 사진도 있었다. 물론 이들은 빈 액자도, 단독 사진도 아니었다. 브루스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잘려나간 기억들이 그 여백에는 자리하고 있다.
이 무엇 하나 브루스가 스스로 배제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없었다. 그저 하룻밤 새에 그것들이 뚝 하니 떨어져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절단 나버린 세상 속에서 브루스는 생애 두 번째로 평온을 맞이했다. 바로 말하자면 지금의 브루스에게 있어서는 생애 처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것을 생각으로도 언어로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의무처럼 죄책감이 찾아든 탓이었다.
브루스는 차분히 계단을 밟으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여니 배웅 했을 때는 배트맨의 모습으로 나갔을 클락이 슈퍼맨이 되어 브루스의 눈앞에 있었다. 슈퍼맨으로 고담을 활보하는 건 자제하라니까... 하고 핀잔 소리가 떠올랐지만 굳이 지금 말로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카울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는 배트맨과 다르게 슈퍼맨은 맨 얼굴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사는 것도 그처럼 분명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컨대 행복하다는 것을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클락.”
브루스가 주저 없이 웃었다. 삶이 클락의 얼굴 하나로 이렇게나 가슴이 따뜻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브루스는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삼켰다. 빈 액자가 조용히 브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트맨 앞에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뒤로 누군가가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어쩌면 단순한 기우였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케이트는 꺼림직 해도 그 짐작이 마음에 들었다. 케이트는 자신의 마음속에 찾아든 불안이 그저 자신이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살아온 탓이라고 여겼다.
“잘 자렴, 토미. 좋은 꿈꾸고.”
“안녕히 주무세요.”
케이트는 톰의 졸음 묻은 눈이 감기는 것을 지켜본 뒤 침대 옆 스탠드의 불을 껐다. 아이는 금세 곯아떨어졌는지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났다. 케이트는 미소 지으며 조용히 방을 나가려 했다.
그때, 콩콩 하고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케이트는 바람에 무어라도 날아들었나 싶어 창문을 바라보다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케이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창 밖에는 가슴에 S자가 쓰인 푸른 유니폼을 입고 펄럭이는 붉은 망토를 두른 슈퍼맨이 있었다. 그는 팔자 모양으로 눈썹을 구부리며 잠이 든 톰을 손짓으로 가리키고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고담에서는 볼 일이 전무하다시피 한 슈퍼맨이 이렇게 눈앞에 있자 케이트는 머릿속에서 다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케이트는 그냥 그를 무시하고 경찰에 신고나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고담 시민으로서는 가장 당연하게 떠올릴 법한 행동이었다. 저 코스츔의 알맹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진짜라 하더라도 케이트에게 저 메트로폴리스의 슈퍼맨이 가져다 줄 좋은 소식 따위는 없었다.
다만 케이트는 정말로 미안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웃어 보이는 슈퍼맨의 모습에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슈퍼맨은 케이트에게 안심하라는 듯 양손을 위아래로 두 번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한 번 가리킨 뒤 그 손가락으로 집의 현관 쪽을 가리켰다. 케이트는 말없이 그를 지켜보다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톰의 방을 나왔다.
케이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맞는다면 일언반구도 없이 도망만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케이트는 그저 일이 너무 복잡하지는 않기만 바랐다. 물론 말로 하지는 않았다.
모자의 집을 찾아가기 전 클락은 배트맨에서 슈퍼맨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고담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신속하게 범죄자들을 소탕하기에 배트맨의 유니폼은 제격이었지만, 무어엔가 잔뜩 겁을 먹은 시민에게 다가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엔 브루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눈에는 요란하더라도 차라리 슈퍼맨으로서 접근하는 편이 나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현관문을 열면서도 꼼꼼하게 체인을 걸어둔 채였다. 비좁은 문틈 사이로 의구심이 가득한 눈초리가 조심스럽게 슈퍼맨을 바라보았다. 클락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 밝게 웃으며 정중히 말했다.
“늦은 밤에 미안합니다, 부인.”
“...무슨 일이죠?”
여자가 경계하듯 물었다.
“제... 친구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엔, 부인께서 그에 대해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 같아요.”
클락의 말에 여자의 동공이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빙고. 클락의 머릿속에서 벨이 울렸다. 클락의 말에 여자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잘각잘각 체인을 푸는 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문이 열렸다. 클락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조심스레 집안으로 발을 디뎠다. 일단 집 안에서 어떤 이상한 낌새가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금 머리가 어지러웠을 뿐.
여자는 불편한 기색으로 클락에게 좁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소파를 권했다. 그녀는 거실 바로 옆에 붙은 부엌에 있던 식탁의자를 빼냈다. 여자의 심장이 불안하게 떨리는 것을 들으며 클락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클락은 계속 미소를 유지한 채 이야기 했다.
“우선 부인께서 이렇게 도움을 주시고자 하는데 감사드립니다.”
“케이트예요.”
“예, 케이트 씨.”
어두운 거실 조명 아래 초조한 케이트의 얼굴이 보였다. 클락은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서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입술 한 귀퉁이를 깨물던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친구...라면 배트맨을 말하나요? 그에게 뭔가...”
클락이 눈을 크게 깜박였다. 케이트의 입에서 성대한 한숨이 쏟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머핀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거였는데...”
이어진 케이트의 말에 클락이 눈을 빛냈다. 클락은 자신의 말이 추궁하듯 들리지 않길 빌며 말했다.
“짐작하시는 게 있으신 듯한데... 솔직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
케이트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클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며 한 자리를 걸어 다녔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요란하게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똑딱똑딱 초침 소리를 하나하나 귀담으며 클락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간신히 케이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저와 토미, 제 아들은 말을 부릴 줄 알아요.”
클락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기 위해 우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케이트가 말을 이었다.
“말을 잘한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법이에요. 말에 바라는 것을 담고 이야기하면 이루어지는 거죠.”
마법, 이라는 단어에서 클락은 몸을 굳혔다. 역시나 하는 생각과 하필이면 하는 탄식이 같이 나왔다. 이 지구상의 온갖 물리력과 생화학적 위협에 강한 크립토니안의 신체를 가진 클락이었지만 마법과 같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했다. 크립토나이트야 납이라도 이용해서 막아볼 방도가 있었지만 마법은 그럴 수조차 없었다. 그런 까다로운 대상이 브루스의 문제에 끼어들자 클락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클락은 얌전히 다시 고개를 끄덕여 케이트에게 말을 종용했다.
“문제는 이게 듣기엔 그럴싸해보여도 굉장히 까다롭다는 거예요. 원숭이 손 얘기 아시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 말씀이시죠? 그리고 결말이...”
“네. 저희가 부리는 말은 그 원숭이 손이랑 비슷해요. 무언가를 바랄 때는 항상 신중해야하죠.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뚝딱하고 실현시켜주는 것도 아니고요.”
클락을 보며 이야기하던 케이트가 다시 거실을 왔다갔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이 아니면 보통은 엉뚱한 일이 일어나요. 아니면 얘기치 않게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고요. 이를 테면 ‘행복’이 그래요.”
클락은 부모님에 대한 일체를 잊고 고담을 보지 못하게 된 브루스를 떠올렸다. 확실히 행복이란 이름 아래 일어날 일 치고는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클락은 납득하고 있었다. 브루스에게 있어 부모님과 고담은 배트맨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그들이 배제된 배트맨은 그의 천성적인 의무감 같은 게 남아있을지언정 절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망토 두른 십자군이 더 이상 그 자신을 채찍질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저는 이제 이걸 어떻게 조절하는지 알지만 토미는 아직 어려서... 마음이 앞서서 저도 모르게 말을 사용할 때가 있어요. 늘 조심하라고 얘기는 하지만...”
한참 방을 왔다 갔다 하던 케이트는 이제 빼놓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무릎위에 양손을 깍지 낀 채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등을 쓸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심장소리와 함께 튀어 올랐다.
클락은 지금 이 상황이 어쩐지 익숙했다.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가슴이 뛰고,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사실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는 무언가라는 것은 그리 편리한 일도, 낭만적인 일도 아니었다. 클락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걸 풀 수는 없나요?”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어요. 그 몫은 이제 받아들인 사람 거예요...”
케이트는 말을 끝낸 뒤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그녀는 초조하게 자신의 손을 뜯고 있었다. 클락은 아무 말 없이 그런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저... 우리 토미는...”
“아이는 절대 나쁘지 않아요.”
아이는 그저 정말 순수하게 배트맨의 행복을 빌었을 뿐일 터다. 클락이 단호하게 말했다. 실은 아이에게 보다 과거의 자신에게 그리고 지금의 자신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냥 운이 안 좋았을 뿐이에요. 걱정 마세요, 케이트 씨. 그 친구, 더한 것도 겪어왔는걸요.”
클락이 경쾌하게 이야기했다. 그에 케이트는 고개를 숙인 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케이트를 바라보다 클락도 이유 없이 따라 고개를 같이 끄덕이고 말았다.
현관을 나서는 슈퍼맨에게 안절부절 못하던 케이트가 겨우 말했다.
“...저 염치없지만... 배트맨에게 꼭 전해주겠어요?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요.”
슈퍼맨은 상냥한 미소로 답을 대신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케이트의 얼굴에 그제야 편안한 기색이 돌았다. 서서히 안정되는 그녀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클락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케이트와 헤어진 후 미처 돌지 못한 고담 시내를 마저 빠르게 점검한 뒤 클락은 웨인 저택으로 향했다. 밤바람을 맞으며 클락은 생각에 잠겼다. 클락이 알아낸 것은 브루스의 문제에 대한 원인뿐이었다. 그리고 클락이 간간히 느낀 어지러움의 원인도 덤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법에 취약한 슈퍼맨의 신체라면 그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행복. 클락은 그 단어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분명 그것은 클락이 브루스의 연인으로서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브루스의 손에 쥐어주고 싶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브루스는 어떻지?
클락은 웨인 저택을 떠나는 고급 승용차를 지켜본 뒤 건물주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도 시간이니 그는 아마 방으로 올라올 것이다. 침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지만 발소리 하나가 클락의 예상대로 가까워져 왔다. 클락은 브루스에게 우선 다녀왔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브루스가 좀 더 빨랐다.
“클락.”
그리고 그 앞에서 브루스가 웃고 있었다. 클락은 다시 찾아온 현기증이 마법의 탓인지 아니면 브루스의 얼굴에 자리한 저 완벽한 호선 탓인지 알 수 없었다. 클락은 잠시 되돌려줄 인사도 삼키고 그런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 조차 방정맞은 가슴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네, 아버지. 저는—
서늘한 온도를 띤 햇볕에 브루스는 눈을 떴다. 열리는 눈꺼풀 사이로 스며든 빛줄기에 머릿속에 자리하던 자신의 목소리는 형체가 허물어졌다. 아버지, 꿈속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었나? 얼른 그 기억의 끝을 잡아보려 했지만 흐르는 바람을 움켜쥐듯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기억의 빈 공간만큼 가벼워진 머리에는 그저 새로운 하루의 광경만이 또렷했다.
채 데워지지 못한 아침 공기가 코끝을 스쳐 지났다. 막 일어난 몸은 가벼운 추위를 느낄 테지만 브루스를 감싸듯 둘러진 단단한 팔 덕분에 브루스는 안전한 온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브루스는 슬쩍 옆을 돌아 잠 속에 빠져있는 클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리적으로 크립토니안인 그에게 이런 행동은 큰 의미가 없을 테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잠이 들었고 그에 착실하게 임하고 있었다. 가끔은 그런 클락이 정말로 인간의 종인 자신보다도 더 인간답다고 생각했다.
클락과 나란히 아침을 맞이하는 건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락보다 먼저 브루스가 눈을 뜨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기억 속에서 클락과의 아침은 클락이 미안한 얼굴로 브루스를 조심스럽게 깨우거나 아니면 지쳐 잠든 브루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출근 인사를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운 아침이었다. 브루스는 긴 숨을 뱉었다. 고요한 아침이 그 호흡을 따라 빠르게 브루스의 온몸을 순환했다. 몸의 근육들은 긴장이 풀린 듯 흐물흐물했다. 쿵, 쿵하고 심장이 느긋하게 박동했다. 브루스는 그것을 다그치듯 얼른 밤에 클락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야만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브루스는 중력을 따라 흘러내린 클락의 앞머리를 검지로 톡톡 건들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했어."
클락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브루스를 대신해 조사를 다녀온 클락은 브루스의 부탁에 따라 밤사이에 얻은 정보들을 착실히 녹음해왔다. 케이트와 클락의 대화를 몇 번인가 반복해 듣던 브루스는 흠하며 구간 재생이 끝난 녹음기를 끄고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있는 브루스 앞에서 클락이 좌우로 왔다갔다 걸어 다녔다. 브루스는 부산한 클락의 움직임을 멈추기 위해 그의 손을 잡고 살짝 끌어당겼다. 클락이 브루스 옆에 앉았다. 브루스를 바라보는 클락의 얼굴은 한쪽 눈썹이 찌푸려져 있었다. 브루스는 손을 들어 그 인상 쓴 눈썹을 쓸었다. 클락이 자신에게 뻗어진 브루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네 기억이나 인지를 왜곡할 수 있었을까?"
"글쎄."
브루스는 흐지부지하게 답했다. 클락은 잡은 브루스의 손바닥 위 손금들을 엄지로 따라 그렸다. 그 금들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미신이 떠올랐다. 하지만 클락이 알 수 있는 것은 브루스의 과거가 남긴 굳은살과 몇몇 흉 자국이었다.
"자네에게 어떤 이상이 생긴 것도 아닌데..."
그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클락은 브루스의 손을 소중히 쥐어보는 것으로 뒷말을 대신했다. 브루스는 이미 상처투성이인 몸에 흉이 몇 개 더 난다고 달라질 것 없다는 듯 자신을 다뤘지만 클락에게는 그 흔적, 흔적이 지나치게 새로웠다. 그 상처들은 브루스의 행적을 그렸다. 브루스는 그들이 남긴 통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클락은 그런 그를 대신해서 상처 하나하나를 차례로 기억했다.
브루스는 클락의 움직임을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클락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안락했다. 브루스가 건조하게 말했다.
"인간이란 때때로 기이한 법이니까."
클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잡은 브루스의 손을 천천히 잡아끌었다. 브루스는 순순히 클락에게 가까워졌다. 브루스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면서 클락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슈퍼맨으로서 보통 친절하고 상냥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클락은 실은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그가 취약한 부분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인간이든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지만 클락이 가지는 그의 이미지 탓일까 브루스에게는 그런 그의 성미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그에게는 이번 일에 마법과 같은 힘이 관여한다는 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래도 별 큰 탈 없이 문제의 원인이라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배트맨으로서 기대도 해보지 못한 행운이라 생각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그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필요했다. 이런 당연한 도입조차도 배트맨에게는 간혹 이리저리 뒤틀리고 꼬이기 십상이었다.
한참 클락의 앞머리를 가지고 장난치면서 생각에 잠겼던 브루스는 자신의 방에 걸린 액자를 보았다. 과하지 않은 우아한 문양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액자틀 안에는 아직도 새하얀 백지만이 들어있었다. 그 안에도 분명 부모님의 얼굴이 들어있을 것이다. 브루스는 두 남녀의 모습을 그려보려 했다. 하지만 기억은 새하얬고 이미지는 흩어졌다. 저택 여기저기와 브루스의 머릿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여백만이 그들의 존재가 브루스에게 어떠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는 반면에 침대에는 브루스와 그의 연인이 날것처럼 선명했다. 클락은 여전히 꿋꿋하게 잠 속에 있었다. 슈퍼맨이더라도 아니더라도 클락은 언제나 이렇듯 또렷하게 브루스의 옆에 있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만을 가슴에 담을 수 없었다. 클락이 끊임없이 브루스에게 내미는 온갖 따뜻한 감정들은 비틀리지도 꼬이지도 않고 똑바르게 브루스를 향해왔다.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소중해서 결국은 클락이 내민 손을 잡았으면서도 브루스는 그에 마음을 완전히 묻을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됐다. 비겁한 방식의 사랑이었지만 수단이야 어떻든 결론이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텅 빈 액자가 마음 한 구석으로 침잠하는 가운데 브루스는 몸을 살짝 일으켜 클락의 어깨를 깨물었다.
"자는 척 말고 일어나."
"...언제부터 알았어?"
클락이 푸스스 웃으며 눈을 떴다. 브루스는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며 클락의 코를 꾹 집었다.
"눈동자 움직이는 거 다 보여."
"투시보다 자네 관찰력이 더 무서워..."
클락이 몸을 일으키며 물 흐르듯 브루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브루스가 클락의 몸을 가볍게 밀어냈다.
"출근 준비나 하시지. 기자양반."
"회장님께서도 너무 농땡이 부리시다간 요즘 같은 때에 회사 말아먹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클락은 브루스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부볐다. 굳이 뛰어난 청각 때문이 아니더라도 브루스의 맥과 숨 쉬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와 기분이 좋았다.
클락은 아주 속된 바람하나가 떠올랐다. 크립토니안이건 맨 오브 스틸이건 간에 결국 브루스 웨인 앞에서 클락 켄트는 한 명의 평범한 남자였다. 클락은 브루스의 과장된 한숨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브루스는 클락을 밀어내지 않았다.
"아, 그렇지. 오늘밤에도 여기 올게."
"왜."
왜냐니, 브루스의 딱딱한 말에 클락은 살짝 볼을 부풀렸다. 그러나 클락이 무어라 말을 붙이기전 브루스가 더 빨랐다.
"또 슈퍼맨으로 활개를 치려고? 사양하지."
기어이 한소리를 하고 마는 브루스였다. 브루스의 등에 맞닿은 클락의 몸이 살짝 굳었지만 곧 그는 헤실헤실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안 그럴게. 그러니까...응? 자네 조사해야할 것도 있잖아."
눈썹을 치켜세우며 흐응 하고 코를 울리는 브루스를 더 꼭 끌어안으며 클락이 구슬렸다.
"자네가 문제를 해결할 때 까지만 이라도 도와주게 해줘."
브루스는 휴 하고 숨만 뱉고는 자신을 끌어안은 클락의 팔을 두드렸다. 알았으니 이제 놓아달라는 뜻이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긍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요구는 알아듣지 못한 척 무시하고 브루스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맞춤을 남기기 시작했다. 브루스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클락..."
"응?"
겨우 이름 하나 발음한 브루스는 클락의 능청스런 얼굴을 보았다. 두 쌍의 파란 눈이 잠시 서로를 마주했다. 결국 두 손을 든 건 드물게도 브루스였다.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듯 브루스와 얼마간 시간을 보낸 뒤 클락은 웨인 저택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데일리 플래닛으로 출근했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클락은 브루스가 건네준 자료를 바탕으로 본래 준비하고 있던 군무기와 관련된 기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브루스가 답례로 클락에게 준 자료들은 클락이 전부터 기사로 준비해왔던 주제를 뒷받침해주었다. 메트로폴리스와 고담이라는 거리 차이에도 불구하고 브루스가 슈퍼맨이 아닌 기자로서의 자신의 행보를 이렇게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브루스에게 멀어지면서 클락의 뇌리에 있던 어지러움도 사라졌다. 오늘 아침 클락이 잠을 깬 이유는 비단 눈 뜬 브루스의 움직임을 느껴서만은 아니었다. 브루스의 손끝이 클락의 머리카락에 닿을 때 휘청하고 어두운 시야가 흔들렸다. 정도가 어제보다도 조금 더해진 것 같았다. 클락은 이제 이 현기증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았다.
평범하게 연인들이 보낼 법한 아침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고, 그 한 사람으로 빈 시간이 채워지는 따뜻한 광경이었다. 클락은 언제고 그러한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말로 하기 아까울 정도로 사랑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원래 브루스는 어땠을까. 브루스는 그동안 그런 여백에서 무엇을 느꼈던 걸까? 클락은 이리저리 자료와 화면을 오가던 눈동자와 타자를 치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가지런한 자판 위에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남자의 손이 잠잠히 얹어져 있었다.
브루스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클락은 끈질기게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는 결국 클락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배트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관계는 애초에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지금 클락은 조금 기가 죽었다. 클락은 브루스에게 어떻게든 행복을 쥐어주고 싶었지만 브루스는 그것을 쉬이 받아들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 속에서 브루스를 보고 있자면 새삼 브루스에게 그의 일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질투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슈퍼맨이 배트맨의 신경이 그의 일에 쏠려있었다고 질투를 한다니... 읽고 버려지는 가십지에도 오르지 못할 일이었다. 오늘 아침 클락이 브루스에게 괜히 더 매달린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 파란 눈동자 안에 그를 소중히 하는 자신만이 가득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한편으로 클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확히는 크립토니안인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브루스의 본업이 무엇이고, 클락의 다른 얼굴이 무엇이고 간에 클락은 지금 브루스에게서 더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담은, 브루스가 속한 그의 도시는 여타의 도시들보다 어두웠다. 슈퍼맨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시커먼 소용돌이가 그곳에는 있었다. 브루스는 그에 주저 없이 뛰어들었고 클락은 그것을 다 잘 될 거라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했다. 브루스의 상처 하나하나가 클락에게는 선명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클락은, 클락 켄트는... 아니, 칼엘은.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지? 언제까지고 그가 말 속에 갇힌 채로 둘 수는 없었다. 그것만이 사실이었다. 클락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바쁘게 자판을 두드렸다. 그만 주변에 아랑곳없이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서 키보드 위로 클락의 손가락들이 잔상처럼 이리저리 오고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손은 느려지고, 일반보다는 빠른 정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즉 클락으로서는 정신을 빼놓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케이트는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이제 그 말은 받아든 브루스의 몫이라고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차분한 얼굴로 오히려 마법과 같은 부류의 문제라면 그 자체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타자를 치던 클락은 저도 모르게 성대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땅 꺼지겠어, 스몰빌.”
조금 수그린 자세로 기사를 작성하던 클락의 뒤에서 당돌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손에는 두툼한 자료파일과 다른 한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는 그녀는 이 데일리 플래닛에서 손꼽히게 잘나가는 기자, 로이스 레인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꽤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안경을 고쳐 쓰는 클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락이 어색하게 웃었다.
“페리랑 이야기 잘 했어?”
“늘 그렇지 뭐. 어쨌든 우리 신문에는 좋은 기사가 나올 테니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자신감 넘치는 대사를 읊는 로이스를 보며 클락은 그녀가 가진 일에 대한 프라이드를 느꼈다. 저널리즘이란 본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유용한 소식통이 되기도 했지만 대중을 현혹시키는 무기로도 활용되었다. 그런 세상 속에서 페리 편집장을 대두로 운영되고 있는 데일리 플래닛은 분명 좋은 기사들을 창출하는 신문사였다. 클락 역시도 그런 회사의 분위기가 좋아 이 신문사에 몸을 담고 있었고 그에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사주에게 봉급쟁이라 빈축을 사기는 했지만 브루스 역시도 데일리 플래닛 발의 기사를 좋게 평가한다는 것쯤 클락도 잘 알고 있었다.
로이스의 말에 클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더 나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무슨 일 있어? 웬 한숨이야?”
“아...”
클락이 뒷목을 긁으며 난처하게 웃었다.
“좀...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클락은 애매하게 답했다. 타이핑하고 있는 기사는 별다른 장애물 없이 진척 중이었다. 관련 자료도 충분했고 이제 마무리만 끝나면 내일 조간에 실을 수 있을 것이다. 로이스는 힐끔 글자들로 빼곡하게 찬 모니터를 본 후 흐음 하고 그렇다고 받아들인 건지 의심스러워하는 건지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머리와 가슴이 언제나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어. 세상은 그렇게 딱 나누어떨어지는 게 아니잖아? 다만 더 나은 선택을 해야겠지.”
로이스의 말에 클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지금 작성 중인 기사문서 파일 위에 적힌 ‘무기와 평화, 공존’이라는 키워드를 확인하고 다급하게 그래, 그렇지 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클락은 주저하듯 입을 몇 번 벙긋하다가 물었다.
“바라는 건 단순하고 명료하지 않아? 근데 왜 복잡해질까?”
“그게 사는 거니까.”
로이스는 별스럽지 않게 답했다. 클락이 김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중 클락의 귀에 소란이 하나 포착되었다. 위치는 메트로폴리스의 스타 연구소였다. 클락은 재빨리 기사의 멘트를 덧붙여 쓰고 저장버튼을 누른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 좀 비울게.”
갑자기 일어선 클락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로이스에게 변명하듯 이야기하며 클락은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허둥지둥 사라지는 클락의 뒷모습을 보며 로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이다.
비록 맨눈으로 고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브루스가 마냥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브루스 웨인 자체가 그렇게 성실한 임원의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은 알프레드와 루시우스의 도움을 바탕으로 저택 안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고담 시에 필요한 시설이나 돈으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배트맨으로 밤거리를 종횡무진하지 않아도 책상 위에서 웨인의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평범해보였다.
브루스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클락이 녹음해온 케이트와의 대화를 틀었다. 지금 브루스는 두 가지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하나는 브루스가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시 배트맨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저와 토미, 제 아들은— 녹음기가 돌아갔다.
아이의 엄마는 말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케이트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그녀가 방법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면. 그녀는 한 아이의 부모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이곳이 고담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런 시나리오는 순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이내 생각을 그쳤다. 설령 그 가정이 맞다 해도 그건 브루스 자신 역시도 바라지 않을 방법일 것이다.
삶이란 간혹 아이의 무구함도 독이 될 수 있었다. 브루스는 그런 유의 아이러니에 익숙했다. 어쩌면 지금 브루스가 이렇게 차분할 수 있는 까닭은 그런 탓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누군가가 고담을 폭파시키고 싶다거나 배트맨을 시구렁창에 빠뜨리고 싶다거나 하는 이유에서 나온 일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브루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브루스는 최대한 문제의 원인인 아이의 말에 집중했다. 원인이 마법과 같은 힘이라면 그 해결법은 그 속에 명시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건 쪽에서 그걸 풀 수 없다면 걸린 쪽에서 말이 걸어둔 조건을 배제하면 된다. 아이의 말은 ‘먹으면 행복해져요.’, ‘먹으면, 정말 행복해질 거예요.’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일의 전제는 머핀을 먹는다는 행위일까? 어쩌면 머핀을 통해 섭취한 영양소들이 체내에서 완전히 소모가 되고 이산화탄소와 물 분자 등으로 바뀌어 빠짐없이 배출되면 그때는 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작은 머핀을 먹은 지 벌써 하루 이상이 지났다. 아님 아직 몇 분자 정도는 남아서 브루스의 몸속에서 대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몸의 구조물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식사를 거르고 한동안 체육관에 박혀 있으면 될까? 너무 유물론적 접근이라 생각이 드는 한편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결론이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 새 점심시간이었다. 한참을 돌리던 녹음기는 이제 잠시 정지버튼을 눌러두었다. 실제 모습은 볼 수 없을 지라도 고담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알기 위해 브루스는 TV를 켜고 뉴스를 틀었다. 뉴스가 되어 나오는 이야기들은 브루스가 그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정보에 비하면 얄팍했지만 못해도 도시의 분위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뉴스를 보고 있자니 문득 브루스는 클락이 생각났다. 근래 국제 정세가 뒤숭숭한 만큼 미국 내에서는 안보와 평화가 끊임없이 이슈화 되고 있었다. 더구나 클락의 도시에는 유력한 화약고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신문기자인 클락이 그 이야기를 좇고 있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기자로서도 클락은 늘 사회 현상에 관심을 가졌고 말로써, 언어로써 그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이 건넨 자료가 그에 도움이 되었을까? 브루스는 가벼운 비눗방울마냥 퐁퐁 떠오르는 마음을 내리 누르듯 깊이 숨을 들이켰다. 이래선 안 돼. 브루스 일부러 시선에 날을 세웠다.
뉴스에서는 새로 시행될 정책에 대한 이야기나 증시의 움직임, 웨인 테크의 행보 정도가 흘러나왔다. 그밖에 큰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운이 좋게 평화롭거나, 아니면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나쁜 일이 숨을 죽이고 있거나. 브루스는 그 뉴스들을 흘려보내듯 들으며 개발과 상용화에 착수한 조커의 약물 백신과 관련된 서류를 집었다. 그러다 브루스는 시야 한 끝에 화면 아래 빠르게 지나가는 글자를 보았다. 고담 옆에 있는 다른 큰 도시인 메트로폴리스와 관련된 뉴스로 스타 연구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해서 집중해보니 흐릿하게 지나간 글자들 속에 슈퍼맨이라는 단어가 끼어있었다. 브루스는 목을 뻣뻣하게 굳힌 채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자막으로 흘러간 속보는 이미 지나가고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슈퍼맨. 그 단어를 제외하고 그게 어떤 맥락에서 있었던 말인지 브루스는 알지 못했다. 분명, 보았을 텐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똑.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렸지만 브루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식사가 준비 되었... 브루스 도련님?”
TV를 바라보며 굳어있던 브루스의 얼굴이 아무 표정 없이 알프레드를 향했다. 그리고 곧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브루스는 자신이 식사를 거르기로 마음먹었다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루가 멀다고 이렇게 꾸준히 고담을 드나드는 일은 드물었다. 그건 클락 자신의 일 때문에도 있었지만 대게는 브루스가 그것을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 그를 찾아가는 이유는 브루스가 안고 있는 문제로 인해 생긴 그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서였지만, 그래도 클락은 브루스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게 좋았다. 어떤 때는 한 달 만에 본 얼굴이라는 것이 건물이 부서지고 도로가 갈라지는 아수라장 한가운데에서 그저 눈 한 번 마주치는 걸로 전부였던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이번 방문에 사적인 마음이 아주 섞여있지 않다고도 할 수 없었다.
클락은 브루스가 있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어디 복장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몸을 한 번 훑어보았다. 오늘 낮, 스타 연구소에 침입한 무장 괴한들에 대한 소식을 귀에 접하고 슈퍼맨은 바삐 움직였다. 온갖 연구들이 자유롭게 행해지는 연구소인 만큼 스타 연구소는 별별 무리들이 와서 소동을 벌이고 가곤 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스 거점인 스타 연구소는 위치가 그런 만큼 슈퍼맨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 연구소 어딘가에는 슈퍼맨에게 치명적인 크립토나이트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클락은 더 신속하게 소동을 정리해야했다. 그나마 클락이 고담에 있을 때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슈퍼맨은 잘 포박한 괴한들과 붙잡혔던 연구원들을 경찰과 의료진들이 도착한 밖으로 인도했다. 남은 뒷수습을 하던 중 귀에 이상한 노이즈가 포착되어 스캔해보니 공격 받았던 연구실 환기구에 폭탄이 설치된 것을 발견했다. 이번 범행은 단순한 연구소 내의 기술을 훔치기 위한 것이 아닌 관련 자료의 제거와 연구진들에 대한 공격 역시도 포함된 모양이었다. 왜 해가 버젓이 뜬 시간대에 공격이 이루어졌는지 깨달은 클락에게는 설치된 것이 어떤 유의 폭탄인가를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클락은 빠르게 폭탄을 손에 쥐었다.
슈퍼맨의 몸을 방패삼아 다행히 폭발은 연구실 한 귀퉁이를 약간 박살 낸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자칫하면 더 큰 재산피해와 함께 사상자가 날 뻔했다. 설령 자원해서 위험에 뛰어든다고 해도 슈퍼맨이 지는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 히어로의 일에는 실수가 쉽게 통용되지 않았다. 빛나는 이름에는 항성만큼의 질량이 따랐고 히어로란 그런 존재였다. 클락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 일을 브루스가 안다면 어떤 말을 할지 떠올렸다.
슈퍼맨도 여느 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에 노출되는 일은 늘 있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배트맨인 브루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클락은 자신이 어떤 사고에 휘말릴 때마다 그 자리에 브루스가 있으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물론 배트맨은 사고에 휘말리기 전에 행동을 취하겠지만 만약 어떨까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결론은 언제나 그렇게 희망적이지 못했다. 지금의 브루스는 그의 과거로부터도, 그의 도시로부터도 동떨어져 그의 저택 안에서 안전했다. 그것이 오래갈 일이 아님을 알지만 클락이 지금 브루스를 보고 있자면, 상처가 늘어난 브루스의 몸을 볼 때마다 이따금 떠오르는 가정이 되살아났다. 클락 켄트가 아닌, 슈퍼맨도 아닌, 칼엘이라면. 칼엘이라면 어떻게든 그 부서지기 쉬운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이것은 지구에 떨어진 크립톤 행성 출신 남자의 오만함이었다.
커다란 유리 너머로 멀찌감치 서 벽난로 위를 바라보고 있는 브루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은 지금 부모님 초상화로 향해있었다. 비록 그의 눈에는 텅 빈 백지 뿐일 테지만 그는 그 공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락은 스스럼없이 살짝 열린 유리문을 마저 열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클락의 움직임을 따라 건물 밖의 공기가 응접실 안으로 몰려왔다. 잘 정돈된 커튼이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에 브루스가 뒤를 돌았다.
“브루―”
“무슨 바람이...”
브루스가 클락을 지나쳐 클락이 열고 들어온 유리문을 향했다. 그의 시린 푸른 눈이 클락을 꿰뚫고 지난 듯 투명했다. 클락이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브루스의 어깨도 움찔 떨려왔다. 유리 위로 걸친 그의 손이 굳어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발코니의 유리문을 닫으며 아주 천천히 브루스가 클락이 서있는 곳을 보았다.
“클...락?”
마치 근시가 있는 사람처럼 브루스는 이마를 찌푸린 채 클락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력이라면 그렇게 초점을 모으려 애쓰지 않더라도 클락의 모습이 충분히 보이고도 남을 터였다. 더구나 이정도 거리라면 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이 말에 얽히기 전의 그라면 말이다. 클락은 다시금 찾아온 현기증에 오한이 들었다.
“브루스.”
클락이 브루스의 이름을 말했다. 브루스는 그것을 제대로 들은 모양인지 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 그의 손도 그것을 맞잡았다.
슈퍼맨은 많은 선량한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했고 그들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작 그의 연인에게 걱정 없는 미소하나 쥐어주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었고 그 허상을 보고 있었다. 슈퍼맨을 그의 눈에 담지 못하고 지나친 브루스를 보고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을 통제하고 그를 안전하게 만들기에 슈퍼맨은 어차피 너무나도 작은 존재였다. 칼엘의 오만함이 그 투명한 시선 속에 해부되었다.
클락은 브루스 대신 시계바늘을 돌려 동굴로 향하는 입구를 열었다. 브루스는 그것을 쳐다도 보지 않고 먼저 케이브를 향해 내려갔다. 브루스의 뒷모습이 동굴의 어둠 속으로 점점 잠기는 것을 클락은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켠 후 그 그림자를 따라갔다.
브루스는 손짓으로 클락에게 배트맨 복장을 가리켰고 클락도 별 말 없이 그의 지시에 따라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는 동안 브루스는 작업대 앞에서 달그락하는 작은 소음을 내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클락은 배트맨의 카울을 손에 쥐어보았다. 박쥐를 본 뜬 그 가면에는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클락은 그 주름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려보았다. 하, 하고 짧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 클락의 앞으로 어느 새 브루스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의아한 듯 브루스는 무표정한 가운데 한쪽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클락은 그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웃음기 서린 클락의 눈가를 바라보며 브루스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는 금방 서늘한 얼굴을 만들었다. 시린 눈동자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익숙한 벽이었다. 브루스는 클락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브루스가 클락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기기가 들려있었다.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
브루스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어 보니 그것은 통신기였다. 잠시 통신기를 살펴본 클락이 고개를 들었다. 브루스는 건조한 시선으로 클락의 얼굴을 한 번 본 뒤 빠른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커다란 모니터가 자리한 그의 책상 앞으로 향했다. 검은색 화면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얗게 떠올랐다. 고담 곳곳을 그려낸 지도가 화면에 표시되고 있었다. 그 한 구석에 붉은 점 하나가 깜빡였다. 클락은 그게 자신임을 알았다.
“제3자를 통해 고담의 관리가 가능한지 알고 싶어.”
클락은 왜 그런걸 알고 싶으냐고 묻지 않았다. 너무나 뻔한 질문이었다. 당연하게도 브루스는 언제까지고 배트맨일 생각인 것이다. 언제까지고. 클락은 고개를 끄덕이며 브루스가 준 통신기를 귀에 꼽고 카울을 뒤집어썼다. 브루스가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발견하면 보고하도록. 얼빠진 실수는 하지 마. 맨 오브 스틸도 목숨은 하나니까.”
“난...”
늘 그렇듯 걱정을 사납게 입에 담는 브루스에게 클락은 자신이 지금 배트맨으로 변장한 채 이 자리에 있다 이야기하려하다 말을 멈추었다. 어느 쪽이든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클락은 대신에 다시 웃어보였다. 브루스의 이마가 더욱 찌푸려졌다.
“브루스.”
클락이 브루스를 불렀다. 그보다 손을 뻗어 브루스의 미간에 진 주름을 쓸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손길을 단칼에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하겠지. 이런 식으로 브루스를 부를 때면 클락은 그가 할 수 있는 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별 볼일 없는 남자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한편 참 평범해보였다.
“오늘로 자네에게 이 무게를 건네받는 건 마지막이겠지?”
클락이 양팔을 가볍게 들었다. 브루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루,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늘 아침에 보았던 브루스가 마치 신기루 같았다. 클락은 생각을 정정했다. 그것은 신기루였다.
클락은 브루스에게 걸린 말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자신은 마법에 있어서 취약했고 휩쓸리기도 쉬웠으니 말이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고 그러면서 실현가능성도 높은 클락의 바람이 불현듯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슈퍼맨이 그 동안, 꽤나 예전부터 겁을 먹고 있었다고 하면 브루스는 어떤 얼굴을 할까? 그의 도시의 어둠이, 그의 슬픔이 마지막에는 클락의 곁에서 브루스를 앗아갈 것만 같았다. 그 초조함이 클락에게 한 가지 꾀를 속삭였다.
촉발원인이 무엇이고 간에 그 바람은 줄곧 클락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클락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애초에 100% 완전무결한 안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 아무리 크립토니안인 칼엘에게라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면 그 스스로가 변수가 될지도 모르고 더구나 지키고 싶은 대상이 자신의 의지를 지니고 마음을 지닌 지성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저 가끔씩 자신보다 한참은 연약하고 판자만큼 불안한 세상은 클락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클락이 바라는 것은 안전한 새장 속의 그가 아니었다. 브루스는 곧잘 배트맨인 그 자신과 브루스 웨인을 완전히 별개로 취급했지만 클락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느 쪽도 클락에게는 소중한 브루스였다. 브루스는 언제나 최고였지만, 클락은 브루스가 더 나아지기를 바랐다. 히어로로서 모든 것을 짊어지면서도 그것에 꺾이지 않고,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에 얽매이지 않으며, 배트맨이지만 브루스 웨인이고, 그리고 행복한 그를 원했다. 클락의 욕심은 이렇게나 컸다. 그도 그럴게 클락에게는 이름이 세 개나 있었으니까.
클락은 브루스의 짐을 덜 수도 없앨 수도 없었다. 그것이 브루스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루스의 곁에 있는 것, 그 사실만은 온전히 클락의 것이었다.
“난 자네가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거야.”
배트맨의 카울 아래로 슈퍼맨의 미소가 드러났다. 브루스는 그것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브루스. 자네 자신을 포기하지 마.”
클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브루스는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끝내 브루스에게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클락이 그 뒷모습을 눈에 담은 후 자리를 떠났다.
미드 타운에 도착했어. 철로 아래서 기타 연주로 자장가 부르는 사람이 있더라.
클락의 보고에 브루스는 으흠 하고 심드렁한 대꾸를 보냈다. 고담 지도 위에 떠오른 클락의 위치와 클락의 보고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까부터 클락은 마치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이야기해주듯 보고하고 있었다. 지금 클락이 서정적인 밤거리 연주의 무대가 되는 듯 설명한 그곳은 약 일주일 전 마약을 사이에 두고 딜러와 그의 고객이 싸움을 벌이다 결국 딜러가 시멘트 기둥에 머리를 박고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클락은 쓸데없는 보고만 늘여놓고 있었다. 브루스는 그런 클락에게 필요한 이야기만 하라고 다그쳤지만 얼마 후 그것을 포기해버렸다. 멍청한 클락. 덕분에 오늘 밤에는 장비의 성능만 줄창 시험해보게 생겼다.
브루스는 지금 이것이 클락의 배려임을 알았다. 브루스는 클락이 마치 자신을 섬세한 무언가처럼 다루려 들 때면 화가 났다. 클락은 오만하다. 브루스는 종종 시골 출신의 순박한 기자의 파란 눈동자에서 저 창공에 떠 지구를 내려다보는 전능한 이방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브루스는 새삼 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 건...
“요 하루 사이, 도련님 그 성미가 어디 갔나 했습니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브루스의 등 뒤로 조용히 집사가 다가왔다. 브루스가 슬쩍 보니 쟁반 위에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담아 온 알프레드가 언제나처럼 바른 자세로 서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장착한 통신기의 송신모드를 껐다.
퍼지는 차의 향에서 부드러운 초콜릿 냄새가 났다.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신경이 곤두서있을 때면 내오는 블렌딩이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옆에다 쟁반을 내려놓았다.
“...브루스 도련님께선 언제나 너무 완벽하려 하십니다.”
“배트맨은 그래야하니까요.”
브루스는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얕은 한숨이 들렸다.
“배트맨 이야기가 아닙니다. 브루스 웨인, 바로 도련님의 이야기예요.”
알프레드는 어딘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브루스는 반 박자 늦게 그에 답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무채색의 딱딱한 말이었다. 알프레드의 이마에 주름이 침중해졌지만 브루스는 화면을 바라보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집사는 무겁게 이야기 했다.
“그렇게 계속 자책하실 생각이세요?”
브루스가 휙 하니 고개를 돌려 알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자신의 곁에 있어온 나이든 집사의 얼굴을 따라 브루스의 얼굴도 아프게 찌푸려졌다.
“문제가 생겼으면 바로 잡는 것이 도리 아닌가요?”
“저는 이 상황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브루스 도련님.”
박쥐 의상으로 밤마다 지저분한 도시 이곳저곳을 누비는 브루스였지만 그런 도련님에게도 이런 말이나 마법 같은 해프닝 말고도 행복의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도련님은 번번이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재단하려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배트맨이 브루스의 행복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행복하려 했다는 사실을 단죄할 것이다. 알프레드는 그것이 두려웠다.
“행복이 액자 속 그림 같은 게 아니란 것을 아시잖습니까.”
“알프레드...”
브루스가 땅을 긁듯 한숨을 내쉬었다.
미트타운, 서쪽 지구야. 다정한 노부부가 늦은 시간에 귀가했어. 두 분 다 별 탈 없었어. 클락이 보고 한 곳은 소매치기와 강도가 빈발하는 지역이었다. 클락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노부부의 귀갓길을 보살핀 모양이었다.
알프레드가 조급하게 다음 말을 꺼냈다.
“도련님 일이니 도련님께서는 금방 원래의 일로 돌아가시겠죠. 하지만 그게 곧 당신이 행복하지 말아야한다는 게 아니에요. 브루스... 당신이 바란 그건 죄가 아니란 말입니다.”
브루스는 마른세수를 했다. 자신의 손바닥이 한 번 쓸고 지난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가워져있었다. 브루스는 서늘한 눈매로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지금 난센스에 할애할 시간 없어요. 차는 고마워요.”
브루스의 등에 긴 그림자가 있었다. 그 어둠을 바라보며 알프레드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신이시여, 그래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닌 거겠지요. 사람의 행복은 마지막에는 결국 본인의 손에 달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행복에는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그 자신이 보지 못하는 길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기 위해서, 그가 혼자 어둠 속에 잠겨 죽지 않도록. 모니터의 빛을 받은 브루스의 눈동자 표면이 빛났다.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알프레드는 언제나 슬픔과 분노에 차 있는 작은아이가 생각났다. 아이는 너무나도 준비 없이, 갑작스레 커다란 상실을 겪었다. 그 예정에 없는 불행은 아이를 강박증 속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남겨진 아픔은 알프레드의 죄였다. 그 누구도, 브루스조차도 그것을 짊어지우지 않았지만 알프레드는 묵묵히 그 무게를 자청했다. 언젠가, 언젠가는. 마치 주문처럼 알프레드는 지치지도 않고 그 말을 속으로 읊으며 걸음을 돌렸다. 하루를 끝내기에 아직 브루스 웨인의 집사는 할 일이 많았다.
멀어지는 집사의 발소리를 들으며 브루스는 책상 위에서 양손을 몇 번 쥐락펴락 해보았다. 브루스는 옆에 알프레드가 두고 간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혀진 향이었지만 충분히 깊은 맛이 났다. 브루스는 힘겹게 숨을 뱉었다. 그 무게와 다르게 달콤한 공기가 그 숨을 따라 퍼졌다. 차 한 잔에서 마저 자신의 집사가 자신을 얼마나 염려하는 지 훤히 보였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그에 답할 수 없었다. 브루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스트시티 파크를 지났어, 곧 동쪽 항구에—
어째서 사람은 마음 한 쪽을 느슨하게 하는 순간 이다지도 물러지는 걸까. 브루스는 클락의 위치를 나타내는 점을 노려보았다. 평소 슈퍼맨이 메트로폴리스, 지구에서 보이는 이동속도를 감안했을 때 점이 움직이는 속도는 턱없이 느렸다. 그마저도 브루스가 배트모빌을 통해 이동하는 속도와 맞먹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것 역시도 클락의 배려였다. 다시 브루스는 화가 났다.
슈퍼맨은 아마도 현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히어로일 것이다. 그는 어떤 두려움도 없이 맨 얼굴을 드러낸 히어로이기도 했다. 그런데다 그의 능력은 그의 친구들과 국가에는 물론 적에게까지 약점마저 훤히 알려져 있었다.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슈퍼맨의 약점을 물으면 금방 크립토나이트라는 답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제아무리 슈퍼맨일지라도 세상은 기회만 된다면 언제라도 클락을 브루스의 옆에서 거둬갈 수 있었다. 마치...
마치. 브루스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브루스는 어째서 자신이 클락과의 교제를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기억해냈다. 뒤따라 빈 액자가 떠오른다. 그 속에, 분명 브루스가 더할 수 없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보이지 않는 저 도시는 브루스가 짊어진 맹세였다.
잠깐, 선생님. 그러다가 바다에 빠지겠어요.
클락이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항구 쪽에 있는 공터에서 술주정뱅이가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퍽하고 타격음이 들렸다. 클락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주정뱅이가 몸부림을 치다 통신기가 장착된 쪽을 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클락은 지금 주정뱅이의 손을 걱정하고 있겠지. 브루스는 차게 웃었다.
지금, 버려— 선착장, B, 자네 괜찮—
지직지직 소리가 났다. 설마 그 타격으로 통신기가 고장 난 걸까? 내구성이 형편없군. 그러고 보니 계속 송신모드를 끈 채였다. 브루스는 클락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하는 붉은 점을 지켜보며 송신모드를 켰다. 브루스의 시선이 자신은 깨닫지 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B— 지직, 하고. 결국 잡음 속에 클락의 통신이 잠잠해졌다. 어두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니터링을 통해 서포터를 할 수 있으려면 통신기의 수용범위를 좀 더 넓게 잡아야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만큼 반감되는 음질의 해상도도 높일 필요가 있다. 브루스는 침착하게 수정해야할 사항에 대해 나열했다. 하지만 얼마 없어 클락의 위치를 표시하던 붉은 점마저 가시자 브루스의 푸른 눈이 홉 하니 뜨였다.
기기의 문제다. 지금의 클락은 슈퍼맨이 아니라 배트맨이다. 그 카울 아래 클락은 어느 정도는 안전할 것이다. 아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것은 브루스의 몫이었다. 브루스는 자기 자신을 우선으로 두고 싶은 게 아니었다. 친애하는 집사의 바람도, 소중한 연인의 부탁도 끊임없이 듣지 못하고, 새기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세상은. 세상은 소중한 것들을 품고만 있기에는 어두운 곳이었다. 네, 아버지. 저는.
브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클락은 귀에 장착한 통신기를 꺼내 보았다. 술에 취한 남자가 실수로 친 부위보다 클락의 귀에 걸쳤던 부분이 더 손상되어 있었다. 내부 단자의 회로가 기어이 끊어진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심드렁한 대꾸조차 없는 브루스와의 통신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끊어지게 되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지금 브루스가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가 괜한 걱정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는 브루스다. 분명 앞뒤 맥락 속에서 클락과의 통신 두절이 별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걱정이라. 문득 클락은 브루스와 자신이 굉장히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사이인 만큼 서로를 걱정하는 것이 별스러운 일은 아닐 텐데도 새삼스레 다가왔다. 클락은 행복이란 말에 따라 부모님에 대해 잊고 고담을 볼 수 없게 됐던 브루스를 떠올렸다. 브루스는 끝에 가서 클락을, 아니 슈퍼맨을 보지 못할 뻔도 했다. 그리고 자신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쉬운 길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라고 자주 세간에서는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보다도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절대적으로 바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분명 브루스 역시도.
클락은 선착장 끝에서 소음을 포착했다. 불빛 하나 없었는데 어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부랑자 몇이 밤을 보내기 위해 무리를 이루었나 생각했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시꺼멓게 이게 뭐야. 다른 데서 거래하면 덧나?”
“다른 쪽은 죄다 덩치들이 쥐고 있다고.”
어제만 해도 이곳은 그저 개발이 중단된 오래되고 구석진 항구였다. 하지만 하룻밤 새 이곳은 밀수입 통로가 된 모양이었다. 브루스에게 이걸 보고해야 할 텐데... 아니, 보고는 일이 해결된 다음이라도 늦지 않을지도. 지금 이 항구의 위치는 브루스가 이야기 했던 케이트와 아들이 살고 있는 거리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신생 갱단이 바로 이들일지도 모른다.
살펴본 결과 머무는 인원은 서른 명 남짓이었다. 커다란 식자재 트럭 한 대가 조용히 지켜서 있었다. 인원들은 하나 같이 건장했고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좋아, 클락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면 양호하다. 전부 평범한 사람들로 이뤄진 집단이라 그들을 다치지 않게 하는 데는 애를 먹겠지만 클락에게는 충분히 제압 가능한 상대들이었다.
총알도, 폭력도 클락은 무섭지 않았다. 어둠 속에 숨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배트맨의 망토는 능숙하게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불하나 밝히지 않고 선박에서 짐을 내리는 일행들은 자신들의 행적을 남기지 않는데 급급한 나머지 이 고담의 어둠 속에 누가 있는 지를 채 생각하지 못하는 듯 했다. ...브루스가 차라리 어둠 속에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하지만 그것은 그뿐이다. 클락은 브루스에 대해서 더 이상 조급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제는 참 이상한 하루였다. 클락이 웃었다. 브루스도 이 일을 가볍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정말이지, 사람은 바라는 것에 끝이 없었다.
클락은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현장에 난입했다.
“뭐? 뭐야?!”
“배트맨?!”
검은 바람이 무리를 한 번 헤집었다. 비명소리 중에는 영어가 아닌 포르투갈어도 섞여 있었다. 일단은 3명. 배트맨의 유틸리티 벨트에서 꺼낸 밧줄로 3명을 빠르게 포박한 후 클락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탄환 세례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 자리에 섰다. 히트비전으로 총을 녹여버리면 될 일이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쓸 수 없었다. 총알 몇 발인가가 심장이 자리한 가슴 부분을 두드리고 찌그러져 땅 아래에 떨어졌다.
거래를 하던 선박은 어느새 배의 시동을 걸고 남쪽을 향해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위해 개조된 모양인지 겉보기에 평범한 어선치고 출항 준비가 빨랐다. 몇 인원은 이 와중에도 미처 싣지 못한 짐들을 챙기고 있었다.
“박쥐 저거 뭐야?! 왜 안 뒈져!!”
“머리를 노려!”
“이봐, 보스에게 연락했어?”
“저 새끼들 지들만 튀려는 거 아니지?”
욕설과 총성이 난무했다. 지금 남아 있는 인원들은 제일 말단 쪽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운반책 역할을 맡은 쪽을 먼저. 머릿속에 카운트가 돌아갔다. 클락이 무리들 앞으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그런 클락의 눈앞에 검은 잔상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클락에게 총구를 겨두고 있던 사내 하나가 나자빠졌다. 클락의 가슴이 철렁하니 내려앉았다. 살벌한 타격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 클락과 꼭 같은 복장을 한 브루스였다. 아니, 배트맨이었다. 홀연한 뒷모습이 너무나 익숙했다.
이 와중에 떠오른 말이 어째서나 왜가 아닌 벌써 라는 것이 희극이자 비극이었다.
“박쥐새끼가 둘이라고?!”
“쏴! 쏘라고!”
클락은 브루스의 등 뒤로 총을 갈기려는 무리들을 재빠르게 잡았다. 그것을 배트맨이 힐끔 쳐다보고 빠르게 출발하는 트럭을 쫓아 나가버렸다. 브루스의 입가가, 살짝 웃고 있던 것도 같았다. 클락은 브루스가 말없이 남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항한 선박으로 향했다.
클락과 연락 두절이 어떤 사건과 관련 없다는 것을 브루스는 머리로 이해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지금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 슈퍼맨마저도 시야에서 지워버릴 뻔하지 않았는가. 브루스는 배트윙을 오토파일럿으로 설정한 뒤 계기판에 나타나는 좌표를 꼼꼼히 살피며 지금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아직 직접 볼 수 없었지만 고담의 지리쯤이야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훤했다. 고담에 있어서 항로는 아주 중요한 길이었다. 이 도시에는 엄연히 말해 버려진 선착장은 없었다. 여러 밀수입이 그런 항로들을 통해 자행되었다. 브루스는 힐끔 배트윙의 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도시는 안개에 잠겨 있다. 다시 계기판을 보았다. 이제 막 비행기는 미드타운 중간쯤에 있었다. 클락의 마지막 위치에서 유추한 바로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 만약 클락이 브루스가 예상한 위치에 있다면 어떤 문제와 마주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가 다음 패트롤 지점으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불과 하루를 사이에 두고 착용한 케블러와 망토가 기이하게 무거웠다. 브루스는 혀를 찼다.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다. 정신 차려, 배트맨. 하루 만에 불러보는 자신이 어쩐지 낯설었다. 브루스가 자신에게서 차선책을 제거하고 남들이 보기에는 강박증이다 평할 정도로 고집을 부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 줄 알았다. 다 잊을 수도 있었다. 부모님이 그것을 바라지 않을 거라며 자신에게서 짐을 덜 수도 있었다. 말 한 마디가 쉽게 브루스의 모든 짐을 털어냈던 것처럼 말이다.
브루스가 아주 오랫동안 미뤄온 소소한 기쁨과 안정이 그 빈자리를 폭신하게 덮었다. 하지만 그렇게 잊고 외면해서 뭘 어쩔 생각이지? 브루스는 하마터면 슈퍼맨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가 브루스의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건 연애노름 따위나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다. 클락이 슈퍼맨인 만큼 자신이 배트맨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브루스는 클락의 손을 잡았다. 클락은 브루스에게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라 했지만 클락의 말은 잘못되었다. 지금 상태야말로 브루스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포기한 상태였으니까. 어쩌면. 어쩌면 클락과의 관계는 꽤 공평한 거래일지도 모른다. 클락은 결코 브루스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브루스가 배트맨인 만큼 클락 역시도 슈퍼맨일 테니까. 클락은 브루스의 행복을 위해 슈퍼맨이 아닐 수 없을 테고, 브루스는 배트맨을 위해 행복할 수 없었다. 실은 행복이 무언지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할뿐.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조사해보기로 했던, 그리고 오늘 클락에게 부탁하려 생각했던 목록 일체를 파기했다. 마법사를 탐문할 필요도, 동양의 언령과 관련된 서적을 뒤질 필요도, 원숭이 손에 대해 조사할 필요도, 아이의 말을 단어 하나하나의 정의를 따져 나열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언어란 발하는 사람의 생각 한 자락을 간신히 담아내는 수단에 불과했고 그 마저도 왜곡이 되어 전달된다. 그 탓에 브루스는 특히나 추상적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행복’은. 브루스는 자기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 무구한 단어가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올 지 뻔히 알았다. 말하자면 불가능 했다. 하지만 아이는, 배트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던 아이는 어떻게든 행복을 쥐어주고자 말을 했을 테고 그 결과 배트맨은 배트맨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때에 브루스는 클락의 웃는 얼굴을 다시 떠올리고 만다.
선택적 인지란 인간의 일상에서 종종 관찰되는 일이었다. 요컨대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며,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한다. 브루스는 자신이 클락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인간이란 때때로 기이한 법이다. 신체에 어떤 이상도 발견 되지 않고, 브루스의 인지나 떠올리는 기억이 간섭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브루스는 지금 말하자면 최면에 걸린 상태였다. 어쩌면 레슬리의 말이 맞았다. 브루스에게는 그의 관점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줄 상담가가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결국 문제의 화살표는 브루스에게로 되돌아온다.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망각과 외면이 자행되었다. 푸는 법은 간단했다. 최면에 걸리지 않으면 된다. 브루스는 숨을 들이켰다. 곧 목적지로한 선착장 근방으로 다다른다. 브루스는 기수를 낮추었다. 아직도 안개 속에 도시가 잠겨있다. 부옇게 모습을 감춘 도시는 마치 시커먼 바다와 같았다.
지금 브루스에게 필요한 것은 집중이었다. 강렬한 이미지는 이런 때에 유효한 법이다. 박쥐. 브루스는 박쥐를 떠올렸다. 어느 날에 인가 굴에 빠졌을 때 새까만 어둠 속에서 외부인의 침입에 잠을 깬 그 존재들이 어린 브루스의 살을 긁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되려 했다. 아니, 그가 되어야만 한다. 네, 아버지 저는—
—저는, 박쥐가 되어야겠어요. 브루스는 배트윙 문을 열었다. 멀리서 총탄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들린다. 도시의 소리가. 지금 위치는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건설이 중단된 철골 구조물이 있는 공사장이었다. 그래플 건을 들어 그 구조물이 있을 방향을 향해 발사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와이어를 타고 손끝에 전해졌다. 배트맨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던졌다.
공중을 가르면서 안개에 잠겼던 도시가 먼지를 털어내듯 그 우울한 형상을 드러냈다. 차가운 공기가 카울아래 드러난 뺨을 스쳐 지났다. 그 매서운 바람 속에서 느껴진 것은 기이하게도 살아있다는 실감이었다. 힐끔 본 결과 선착장 끝에서 클락이 몇몇 무리와 대치중이었다. 얼빠진 헛걸음은 아니겠군. 현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서늘하게 드러난 철골 한 끝에 발을 붙이면서 배트맨이 생각했다.
클락은 무리들이 겨누는 총알을 피하는 리액션 없이 맞고 서있었다. 클락의 정체를 생각하면 납득 가는 일이었지만 브루스는 클락이 좀 더 조심하길 바랐다. 연약한 살가죽 아래 인간이 품고 있는 것은 위험한 것이었다. 클락은 브루스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텐데도 그것을 항상 잊는 듯 했다. ...뭐, 그래도 상관없겠지. 왜냐면 그에게는 배트맨이 있으니까.
브루스가 난장판으로 뛰어들었다. 퍽하고 배트맨의 발이 클락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덩치를 차 날렸다.
“박쥐새끼가 둘이라고?!”
“쏴! 쏘라고!”
배트맨에게 총질을 해대는 갱단도, 장비와 능력을 무기로 서슴없이 그 한복판에 뛰어드는 자신도 이제 전부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브루스는 자신의 등 뒤에 있던 남자 몇이 누군가의 손에 제압된 것을 알았다. 브루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배트맨은 저만치 출발하기 시작한 트럭을 쫓았다. 출항한 선박은 슈퍼맨이 맡아줄 것이다.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각, 도시는 잠들어있었다. 중간에 소란스런 경찰 사이렌 소리가 났지만 이 도시는 그런 소란쯤에는 익숙해져있었다. 어둠이 깔린 주택가로 두 인영이 들어섰다. 둘은 무려 슈퍼맨과 배트맨이었다. 나란히 걸음을 옮기는 두 히어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슈퍼맨이었다.
“결국 무기 밀매로 말단들만 잡혀갔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테면 가라지. 숨통만 붙여놓고 제 발로 기어 나오게 할 테니까.”
딱딱한 어조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지금 브루스의 머릿속은 도망간 갱단 보스의 행적을 치열하게 추적하고 있을 터였다. 제 도시를 어지럽히는 이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 사냥꾼의 눈빛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클락은 꼭 짧은 휴가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클락이 가벼운 어조로 농을 건넸다.
“내일이면 배트맨이 둘이라는 기사라도 뜨는 거 아니야?”
줄줄이 사탕마냥 꿰여서 고담 경찰에게 잡혀가는 무리들은 히스테릭하게 이 미친 도시에 저 미친놈이 둘씩이나 있다며 발악을 했다. 도망치는 선박의 신원과 그 본거지를 확인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한 후 돌아온 슈퍼맨은 먼발치 위의 하늘에서 그 소란을 들었다. 그들의 말에 화가 났지만 그것을 집단 광란쯤으로 치부하는 경찰들의 태도에 조금 기분이 풀렸다.
흥, 하고 시니컬한 코웃음이 들렸다.
“이제... 다 원래대로 돌아온 거야?”
클락이 잠잠한 배트맨의 옆얼굴을 보며 물었다. 브루스는 답이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분명한 긍정이었다. 클락이 브루스의 손을 잡아 세웠다. 인상 쓴 배트맨의 얼굴이 정면에 다가왔다.
“브루스.”
“그, 이름.”
무거운 목소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지금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가라앉은 목소리가 엄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배트맨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 클락의 손에서 벗어난 배트맨은 목적지인 케이트와 톰의 집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집 우편함 앞에서 잠시 멈춰 섰던 배트맨은 곧 홀연히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그들의 집에서 멀어졌다. 마치 다신 볼 일이 없길 바라는 듯 쌀쌀 맞았다. 우편함에는 엽서 한 장이 꽂혀 있었다. 그것을 짧게 바라본 클락은 브루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 소리라도 적고 온 거야?”
클락이 과장되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앞으로 댁 아들이 말로 문제를 일으키면 그땐 배트맨이 그 뒤를 좇을 거라고 써 놓았지.”
여전히 농담과 진담이 구분되지 않는 투였다. 배트맨은 자신의 벨트 한 쪽에서 그래플 건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정신이 든 김에 이대로 본업에 복귀할 샘인 모양이었다. 적당한 타깃을 찾아 와이어를 고정시키려던 배트맨을 슈퍼맨이 안아 들어서 공중에 떠올랐다.
“이봐.”
화가 억눌린 목소리였다. 바보 브루스. 안고 있으면 언제나 안심하면서. 배트윙을 언제까지 항구 한 구석에 방치해둘 수는 없으니 그를 안은 채 웨인저택으로 갈 수는 없었다. 배트윙에 오토파일럿이 설정돼있는 것은 알지만 슈퍼맨이 옆에 있을 때면 브루스는 결코 그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지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클락은 그냥 이 상황에 만족하기로 했다. 세상 어느 누가 가시 돋친 상태의 배트맨을 안아 올릴 수 있겠는가.
“브루스.”
“그러니까 지금은 그 이름—”
“아니, 브루스. 내 말 들어줘.”
클락이 고집스레 미간을 좁힌 배트맨의 눈매를 들여다보았다. 공중에 떠있는 탓에 클락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불만스러운지 브루스의 입술이 살짝 삐죽하고 나와 있었다.
“어제 자네든, 그 전이든, 지금이든 다 자네야. 그 모두 브루스 웨인 자네라고.”
“난 그러고 싶은 게 아니야.”
“알아.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자네가 바란 것에 자책하지 말란 거야.”
클락의 말에 브루스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클락이 그런 브루스를 어느 높은 빌딩 옥상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브루스는 발이 단단한 고정면에 닿았음에도 곧바로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브루스는 클락을 보고 있었다.
“으... 길게 말을 잘 못 만들겠어. 그러니까, 이렇게 해.”
클락이 표정 없이 자신을 보는 브루스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지금부터 자네에게 마법을 걸 거야.”
브루스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려진 것을 카울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그에 클락이 더 크게 미소 지었다. 머리와 가슴, 결국 말의 차이지 둘 모두 근원은 그 사람이 내린 결정이었다. 클락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택했고 다시금 자신의 욕심을 꺼내보였다.
“자넨 꼭 행복해질 거야.”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그러나?”
꽤 진지한 물음이었다. 클락이 브루스의 양손을 꼭 마주 잡았다.
“‘우리’라고 안 될 이유가 없잖아.”
“...”
“브루스, 우리라고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하 하고 무거운 한숨이 도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숨이 채 끝나기 전 브루스가 무겁게 말했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평행선을 달릴 거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겠지?”
“그래도 자네, 지금 나한테 우리 관계를 끝내자 거나 하는 소리는 한마디도 안하잖아.”
클락이 잡은 브루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난 그거면 충분해.”
“거짓말을 하는군.”
“뭐, 좀 더 바라는 게 있긴 하지만. 브루스, 나도 비밀이란 걸 가질 수 있잖아?”
“자네가?”
브루스가 건물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다시 배트맨으로서 고담 한복판으로 이동할 모양이었다. 이번에 클락은 그런 브루스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따가...”
클락을 보지 않은 채 브루스가 말했다.
“이따 부모님 묘지에 갈 거야.”
“같이 갈게.”
브루스가 뒷말을 잇기 전에 클락이 말을 뺏었다. 브루스가 짧게 클락을 돌아보았다. 역시 그의 입가가 웃고 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배트맨은 고담을 향해 발을 뗀다. 언제나의 광경이었다. 클락은 브루스가 남긴 ‘고맙소.’ 단 한단어가 들어있는 박쥐가 그려진 엽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엽서를 받아볼 여자와 그녀의 아이를 생각해본다. 아이의 엄마는 크게 안심하겠지. 아이는 기뻐할 것이다. 그 걸로도 충분히 희망적이지 않을까.
박쥐가 도시로 날아가는 광경을 보며 클락은 세 가지의 이름을 걸고 그의 행복을 바란다. 늘 그렇듯, 온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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