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버지. 저는—
서늘한 온도를 띤 햇볕에 브루스는 눈을 떴다. 열리는 눈꺼풀 사이로 스며든 빛줄기에 머릿속에 자리하던 자신의 목소리는 형체가 허물어졌다. 아버지, 꿈속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었나? 얼른 그 기억의 끝을 잡아보려 했지만 흐르는 바람을 움켜쥐듯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기억의 빈 공간만큼 가벼워진 머리에는 그저 새로운 하루의 광경만이 또렷했다.
채 데워지지 못한 아침 공기가 코끝을 스쳐 지났다. 막 일어난 몸은 가벼운 추위를 느낄 테지만 브루스를 감싸듯 둘러진 단단한 팔 덕분에 브루스는 안전한 온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브루스는 슬쩍 옆을 돌아 잠 속에 빠져있는 클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리적으로 크립토니안인 그에게 이런 행동은 큰 의미가 없을 테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잠이 들었고 그에 착실하게 임하고 있었다. 가끔은 그런 클락이 정말로 인간의 종인 자신보다도 더 인간답다고 생각했다.
클락과 나란히 아침을 맞이하는 건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락보다 먼저 브루스가 눈을 뜨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기억 속에서 클락과의 아침은 클락이 미안한 얼굴로 브루스를 조심스럽게 깨우거나 아니면 지쳐 잠든 브루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출근 인사를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운 아침이었다. 브루스는 긴 숨을 뱉었다. 고요한 아침이 그 호흡을 따라 빠르게 브루스의 온몸을 순환했다. 몸의 근육들은 긴장이 풀린 듯 흐물흐물했다. 쿵, 쿵하고 심장이 느긋하게 박동했다. 브루스는 그것을 다그치듯 얼른 밤에 클락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야만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브루스는 중력을 따라 흘러내린 클락의 앞머리를 검지로 톡톡 건들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했어."
클락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브루스를 대신해 조사를 다녀온 클락은 브루스의 부탁에 따라 밤사이에 얻은 정보들을 착실히 녹음해왔다. 케이트와 클락의 대화를 몇 번인가 반복해 듣던 브루스는 흠하며 구간 재생이 끝난 녹음기를 끄고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있는 브루스 앞에서 클락이 좌우로 왔다갔다 걸어 다녔다. 브루스는 부산한 클락의 움직임을 멈추기 위해 그의 손을 잡고 살짝 끌어당겼다. 클락이 브루스 옆에 앉았다. 브루스를 바라보는 클락의 얼굴은 한쪽 눈썹이 찌푸려져 있었다. 브루스는 손을 들어 그 인상 쓴 눈썹을 쓸었다. 클락이 자신에게 뻗어진 브루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네 기억이나 인지를 왜곡할 수 있었을까?"
"글쎄."
브루스는 흐지부지하게 답했다. 클락은 잡은 브루스의 손바닥 위 손금들을 엄지로 따라 그렸다. 그 금들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미신이 떠올랐다. 하지만 클락이 알 수 있는 것은 브루스의 과거가 남긴 굳은살과 몇몇 흉 자국이었다.
"자네에게 어떤 이상이 생긴 것도 아닌데..."
그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클락은 브루스의 손을 소중히 쥐어보는 것으로 뒷말을 대신했다. 브루스는 이미 상처투성이인 몸에 흉이 몇 개 더 난다고 달라질 것 없다는 듯 자신을 다뤘지만 클락에게는 그 흔적, 흔적이 지나치게 새로웠다. 그 상처들은 브루스의 행적을 그렸다. 브루스는 그들이 남긴 통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클락은 그런 그를 대신해서 상처 하나하나를 차례로 기억했다.
브루스는 클락의 움직임을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클락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안락했다. 브루스가 건조하게 말했다.
"인간이란 때때로 기이한 법이니까."
클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잡은 브루스의 손을 천천히 잡아끌었다. 브루스는 순순히 클락에게 가까워졌다. 브루스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면서 클락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슈퍼맨으로서 보통 친절하고 상냥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클락은 실은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그가 취약한 부분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인간이든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지만 클락이 가지는 그의 이미지 탓일까 브루스에게는 그런 그의 성미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그에게는 이번 일에 마법과 같은 힘이 관여한다는 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래도 별 큰 탈 없이 문제의 원인이라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배트맨으로서 기대도 해보지 못한 행운이라 생각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그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필요했다. 이런 당연한 도입조차도 배트맨에게는 간혹 이리저리 뒤틀리고 꼬이기 십상이었다.
한참 클락의 앞머리를 가지고 장난치면서 생각에 잠겼던 브루스는 자신의 방에 걸린 액자를 보았다. 과하지 않은 우아한 문양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액자틀 안에는 아직도 새하얀 백지만이 들어있었다. 그 안에도 분명 부모님의 얼굴이 들어있을 것이다. 브루스는 두 남녀의 모습을 그려보려 했다. 하지만 기억은 새하얬고 이미지는 흩어졌다. 저택 여기저기와 브루스의 머릿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여백만이 그들의 존재가 브루스에게 어떠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는 반면에 침대에는 브루스와 그의 연인이 날것처럼 선명했다. 클락은 여전히 꿋꿋하게 잠 속에 있었다. 슈퍼맨이더라도 아니더라도 클락은 언제나 이렇듯 또렷하게 브루스의 옆에 있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만을 가슴에 담을 수 없었다. 클락이 끊임없이 브루스에게 내미는 온갖 따뜻한 감정들은 비틀리지도 꼬이지도 않고 똑바르게 브루스를 향해왔다.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소중해서 결국은 클락이 내민 손을 잡았으면서도 브루스는 그에 마음을 완전히 묻을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됐다. 비겁한 방식의 사랑이었지만 수단이야 어떻든 결론이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텅 빈 액자가 마음 한 구석으로 침잠하는 가운데 브루스는 몸을 살짝 일으켜 클락의 어깨를 깨물었다.
"자는 척 말고 일어나."
"...언제부터 알았어?"
클락이 푸스스 웃으며 눈을 떴다. 브루스는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며 클락의 코를 꾹 집었다.
"눈동자 움직이는 거 다 보여."
"투시보다 자네 관찰력이 더 무서워..."
클락이 몸을 일으키며 물 흐르듯 브루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브루스가 클락의 몸을 가볍게 밀어냈다.
"출근 준비나 하시지. 기자양반."
"회장님께서도 너무 농땡이 부리시다간 요즘 같은 때에 회사 말아먹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클락은 브루스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부볐다. 굳이 뛰어난 청각 때문이 아니더라도 브루스의 맥과 숨 쉬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와 기분이 좋았다.
클락은 아주 속된 바람하나가 떠올랐다. 크립토니안이건 맨 오브 스틸이건 간에 결국 브루스 웨인 앞에서 클락 켄트는 한 명의 평범한 남자였다. 클락은 브루스의 과장된 한숨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브루스는 클락을 밀어내지 않았다.
"아, 그렇지. 오늘밤에도 여기 올게."
"왜."
왜냐니, 브루스의 딱딱한 말에 클락은 살짝 볼을 부풀렸다. 그러나 클락이 무어라 말을 붙이기전 브루스가 더 빨랐다.
"또 슈퍼맨으로 활개를 치려고? 미안하지만 사양하지."
기어이 한소리를 하고 마는 브루스였다. 브루스의 등에 맞닿은 클락의 몸이 살짝 굳었지만 곧 그는 헤실헤실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안 그럴게. 그러니까...응? 자네 조사해야할 것도 있잖아."
눈썹을 치켜세우며 흐응 하고 코를 울리는 브루스를 더 꼭 끌어안으며 클락이 구슬렸다.
"자네가 문제를 해결할 때 까지만 이라도 도와주게 해줘."
브루스는 휴 하고 숨만 뱉고는 자신을 끌어안은 클락의 팔을 두드렸다. 알았으니 이제 놓아달라는 뜻이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긍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요구는 알아듣지 못한 척 무시하고 브루스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맞춤을 남기기 시작했다. 브루스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클락..."
"응?"
겨우 이름 하나 발음한 브루스는 클락의 능청스런 얼굴을 보았다. 두 쌍의 파란 눈이 잠시 서로를 마주했다. 결국 두 손을 든 건 드물게도 브루스였다.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듯 브루스와 얼마간 시간을 보낸 뒤 클락은 웨인 저택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데일리 플래닛으로 출근했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클락은 브루스가 건네준 자료를 바탕으로 본래 준비하고 있던 군무기와 관련된 기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브루스가 답례로 클락에게 준 자료들은 클락이 전부터 기사로 준비해왔던 주제를 뒷받침해주었다. 메트로폴리스와 고담이라는 거리 차이에도 불구하고 브루스가 슈퍼맨이 아닌 기자로서의 자신의 행보를 이렇게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브루스에게 멀어지면서 클락의 뇌리에 있던 어지러움도 사라졌다. 오늘 아침 클락이 잠을 깬 이유는 비단 눈 뜬 브루스의 움직임을 느껴서만은 아니었다. 브루스의 손끝이 클락의 머리카락에 닿을 때 휘청하고 어두운 시야가 흔들렸다. 정도가 어제보다도 조금 더해진 것 같았다. 클락은 이제 이 현기증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았다.
평범하게 연인들이 보낼 법한 아침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고, 그 한사람으로 빈 시간이 채워지는 따뜻한 광경이었다. 클락은 언제고 그러한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말로 하기 아까울 정도로 사랑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원래 브루스는 어땠을까. 브루스는 그동안 그런 여백에서 무엇을 느꼈던 걸까? 클락은 이리저리 자료와 화면을 오가던 눈동자와 타자를 치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가지런한 자판 위에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남자의 손이 잠잠히 얹어져 있었다.
브루스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클락은 끈질기게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는 결국 클락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배트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관계는 애초에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지금 클락은 조금 기가 죽었다. 클락은 브루스에게 어떻게든 행복을 쥐어주고 싶었지만 브루스는 그것을 쉬이 받아들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 속에서 브루스를 보고 있자면 새삼 브루스에게 그의 일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질투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슈퍼맨이 배트맨의 신경이 그의 일에 쏠려있었다고 질투를 한다니... 읽고 버려지는 가십지에도 오르지 못할 일이었다. 오늘 아침 클락이 브루스에게 괜히 더 매달린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 파란 눈동자 안에 그를 소중히 하는 자신만이 가득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한편으로 클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확히는 크립토니안인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브루스의 본업이 무엇이고, 클락의 다른 얼굴이 무엇이고 간에 클락은 지금 브루스에게서 더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담은, 브루스가 속한 그의 도시는 여타의 도시들보다 어두웠다. 슈퍼맨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시커먼 소용돌이가 그곳에는 있었다. 브루스는 그에 주저 없이 뛰어들었고 클락은 그것을 다 잘 될 거라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했다. 브루스의 상처 하나하나가 클락에게는 선명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클락은, 클락 켄트는... 아니, 칼엘은.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지? 언제까지고 그가 말 속에 갇힌 채로 둘 수는 없었다. 그것만이 사실이었다. 클락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바쁘게 자판을 두드렸다. 그만 주변에 아랑곳없이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서 키보드 위로 클락의 손가락들이 잔상처럼 이리저리 오고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손은 느려지고, 일반보다는 빠른 정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즉 클락으로서는 정신을 빼놓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케이트는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이제 그 말은 받아든 브루스의 몫이라고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차분한 얼굴로 오히려 마법과 같은 부류의 문제라면 그 자체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타자를 치던 클락은 저도 모르게 성대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땅 꺼지겠어, 스몰빌.”
조금 수그린 자세로 기사를 작성하던 클락의 뒤에서 당돌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손에는 두툼한 자료파일과 다른 한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는 그녀는 이 데일리 플래닛에서 손꼽히게 잘나가는 기자, 로이스 레인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꽤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안경을 고쳐 쓰는 클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락이 어색하게 웃었다.
“페리랑 이야기 잘 했어?”
“늘 그렇지 뭐. 어쨌든 우리 신문에는 좋은 기사가 나올 테니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자신감 넘치는 대사를 읊는 로이스를 보며 클락은 그녀가 가진 일에 대한 프라이드를 느꼈다. 저널리즘이란 본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유용한 소식통이 되기도 했지만 대중을 현혹시키는 무기로도 활용되었다. 그런 세상 속에서 페리 편집장을 대두로 운영되고 있는 데일리 플래닛은 분명 좋은 기사들을 창출하는 신문사였다. 클락 역시도 그런 회사의 분위기가 좋아 이 신문사에 몸을 담고 있었고 그에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사주에게 봉급쟁이라 빈축을 사기는 했지만 브루스 역시도 데일리 플래닛 발의 기사를 좋게 평가한다는 것쯤 클락도 잘 알고 있었다.
로이스의 말에 클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더 나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무슨 일 있어? 웬 한숨이야?”
“아...”
클락이 뒷목을 긁으며 난처하게 웃었다.
“좀...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클락은 애매하게 답했다. 타이핑하고 있는 기사는 별다른 장애물 없이 진척 중이었다. 관련 자료도 충분했고 이제 마무리만 끝나면 내일 조간에 실을 수 있을 것이다. 로이스는 힐끔 글자들로 빼곡하게 찬 모니터를 본 후 흐음 하고 그렇다고 받아들인 건지 의심스러워하는 건지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머리와 가슴이 언제나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어. 세상은 그렇게 딱 나누어떨어지는 게 아니잖아? 다만 더 나은 선택을 해야겠지.”
로이스의 말에 클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지금 작성 중인 기사문서 파일 위에 적힌 ‘무기와 평화, 공존’이라는 키워드를 확인하고 다급하게 그래, 그렇지 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클락은 주저하듯 입을 몇 번 벙긋하다가 물었다.
“바라는 건 단순하고 명료하지 않아? 근데 왜 복잡해질까?”
“그게 사는 거니까.”
로이스는 별스럽지 않게 답했다. 클락이 김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중 클락의 귀에 소란이 하나 포착되었다. 위치는 메트로폴리스의 스타 연구소였다. 클락은 재빨리 기사의 마무리 멘트를 덧붙여 쓰고 저장버튼을 누른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 좀 비울게.”
갑자기 일어선 클락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로이스에게 변명하듯 이야기하며 클락은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빠르게 사라진 클락의 뒷모습을 보며 로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비록 맨눈으로 고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브루스가 마냥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브루스 웨인 자체가 그렇게 성실한 임원의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은 알프레드와 루시우스의 도움을 바탕으로 저택 안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고담 시에 필요한 시설이나 돈으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배트맨으로 밤거리를 종횡무진하지 않아도 책상 위에서 웨인의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평범해보였다.
브루스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클락이 녹음해온 케이트와의 대화를 틀었다. 지금 브루스는 두 가지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하나는 브루스가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시 배트맨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저와 토미, 제 아들은— 녹음기가 돌아갔다.
아이의 엄마는 말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케이트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그녀가 방법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면. 그녀는 한 아이의 엄마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이곳이 고담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런 시나리오는 순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이내 생각을 그쳤다. 설령 그 가정이 맞다 해도 그건 브루스 자신 역시도 바라지 않을 방법일 것이다.
삶이란 간혹 아이의 무구함도 독이 될 수 있었다. 브루스는 그런 유의 아이러니에 익숙했다. 어쩌면 지금 브루스가 이렇게 차분할 수 있는 까닭은 그런 탓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누군가가 고담을 폭파시키고 싶다거나 배트맨을 시구렁창에 빠뜨리고 싶다거나 하는 이유에서 나온 일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브루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브루스는 최대한 문제의 원인인 아이의 말에 집중했다. 원인이 마법과 같은 힘이라면 그 해결법은 그 속에 명시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건 쪽에서 그걸 풀 수 없다면 걸린 쪽에서 말이 걸어둔 조건을 배제하면 된다. 아이의 말은 ‘먹으면 행복해져요.’, ‘먹으면, 정말 행복해질 거예요.’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일의 전제는 머핀을 먹는다는 행위일까? 어쩌면 머핀을 통해 섭취한 영양소들이 체내에서 완전히 소모가 되고 이산화탄소와 물 분자 등으로 바뀌어 빠짐없이 배출되면 그때는 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작은 머핀을 먹은 지 벌써 하루 이상이 지났다. 아님 아직 몇 분자 정도는 남아서 브루스의 몸속에서 대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몸의 구조물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식사를 거르고 한동안 체육관에 박혀 있으면 될까? 너무 유물론적 접근이라 생각이 드는 한편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결론이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 새 점심시간이었다. 한참을 돌리던 녹음기는 이제 잠시 정지버튼을 눌러두었다. 실제 모습은 볼 수 없을 지라도 고담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알기 위해 브루스는 TV를 켜고 뉴스를 틀었다. 뉴스가 되어 나오는 이야기들은 브루스가 그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정보에 비하면 얄팍했지만 못해도 도시의 분위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뉴스를 보고 있자니 문득 브루스는 클락이 생각났다. 근래 국제 정세가 뒤숭숭한 만큼 미국 내에서는 안보와 평화가 끊임없이 이슈화 되고 있었다. 더구나 클락의 도시에는 유력한 화약고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신문기자인 클락이 그 이야기를 쫓고 있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기자로서도 클락은 늘 사회 현상에 관심을 가졌고 말로써, 언어로써 그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이 건넨 자료가 그에 도움이 되었을까? 브루스는 가벼운 비눗방울마냥 퐁퐁 떠오르는 마음을 내리 누르듯 깊이 숨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지금의 자신은 좀... 어딘가 들떠있는 것 같았다. 이래선 안 돼. 뒤에 어째서라는 물음이 들려왔지만 브루스는 생각을 접었다.
뉴스에서는 새로 시행될 정책에 대한 이야기나 증시의 움직임, 웨인 테크의 행보 정도가 흘러나왔다. 그밖에 큰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운이 좋게 평화롭거나, 아니면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나쁜 일이 숨을 죽이고 있거나. 브루스는 그 뉴스들을 흘려보내듯 들으며 개발과 상용화에 착수한 조커의 약물 백신과 관련된 서류를 집었다.
그러다 브루스는 시야 한 끝에 화면 아래 빠르게 지나가는 글자를 보았다. 고담 옆에 있는 다른 큰 도시인 메트로폴리스와 관련된 뉴스로 스타 연구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해서 집중해보니 흐릿하게 지나간 글자들 속에 슈퍼맨이라는 단어가 끼어있었다. 브루스는 목을 뻣뻣하게 굳힌 채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자막으로 흘러간 속보는 이미 지나가고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슈퍼맨. 그 단어를 제외하고 그게 어떤 맥락에서 있었던 말인지 브루스는 알지 못했다. 분명, 보았을 텐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똑.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렸지만 브루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식사가 준비 되었... 브루스 도련님?”
TV를 바라보며 굳어있던 브루스의 얼굴이 아무 표정 없이 알프레드를 향했다. 그리고 곧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브루스는 자신이 식사를 거르기로 마음먹었다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루가 멀다고 이렇게 꾸준히 고담을 드나드는 일은 드물었다. 그건 클락 자신의 일 때문에도 있었지만 대게는 브루스가 그것을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 그를 찾아가는 이유는 브루스가 안고 있는 문제로 인해 생긴 그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서였지만, 그래도 클락은 브루스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게 좋았다. 어떤 때는 한 달 만에 본 얼굴이라는 것이 건물이 부서지고 도로가 갈라지는 아수라장 한가운데에서 그저 눈 한 번 마주치는 일이었던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이번 방문에 사적인 마음이 아주 섞여있지 않다고도 할 수 없었다.
클락은 브루스가 있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어디 복장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몸을 한 번 훑어보았다. 오늘 낮, 스타 연구소에 침입한 무장 괴한들에 대한 소식을 귀에 접하고 슈퍼맨은 바삐 움직였다. 온갖 연구들이 자유롭게 행해지는 연구소인 만큼 스타 연구소는 별별 무리들이 와서 소동을 벌이고 가곤 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스 거점인 스타 연구소는 위치가 그런 만큼 슈퍼맨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 연구소 어딘가에는 슈퍼맨에게 치명적인 크립토나이트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클락은 더 신속하게 소동을 정리해야했다. 그나마 클락이 고담에 있을 때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슈퍼맨은 잘 포박한 괴한들과 붙잡혔던 연구원들을 경찰과 의료진들이 도착한 밖으로 인도했다. 남은 뒷수습을 하던 중 귀에 이상한 노이즈가 포착되어 스캔해보니 공격 받았던 연구실 환기구에 폭탄이 설치된 것을 발견했다. 이번 범행은 단순한 연구소 내의 기술을 훔치기 위한 것이 아닌 관련 자료의 제거와 연구진들에 대한 공격 역시도 포함된 모양이었다. 왜 해가 버젓이 뜬 시간대에 공격이 이루어졌는지 깨달은 클락에게는 설치된 것이 어떤 유의 폭탄인가를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클락은 빠르게 폭탄을 손에 쥐었다.
슈퍼맨의 몸을 방패삼아 다행히 폭발은 연구실 한 귀퉁이를 약간 박살 낸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자칫하면 더 큰 재산피해와 함께 사상자가 날 뻔했다. 설령 자원해서 위험에 뛰어든다고 해도 슈퍼맨이 지는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 히어로의 일에는 실수가 쉽게 통용되지 않았다. 빛나는 이름에는 항성만큼의 질량이 따랐고 히어로란 그런 존재였다. 클락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 일을 브루스가 안다면 어떤 말을 할지 떠올렸다.
슈퍼맨도 여느 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에 노출되는 일은 늘 있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배트맨인 브루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클락은 자신이 어떤 사고에 휘말릴 때마다 그 자리에 브루스가 있으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물론 배트맨은 사고에 휘말리기 전에 행동을 취하겠지만 만약 어떨까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결론은 언제나 그렇게 희망적이지 못했다.
지금의 브루스는 그의 과거로부터도, 그의 도시로부터도 동떨어져 그의 저택 안에서 안전했다. 그것이 오래갈 일이 아님을 알지만 클락이 지금 브루스를 보고 있자면, 상처가 늘어난 브루스의 몸을 볼 때마다 이따금 떠오르는 가정이 되살아났다. 클락 켄트가 아닌, 슈퍼맨도 아닌, 칼엘이라면. 칼엘이라면 어떻게든 그 부서지기 쉬운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이것은 지구에 떨어진 크립톤 행성 출신 남자의 오만함이었다.
커다란 유리 너머로 멀찌감치 서 벽난로 위를 바라보고 있는 브루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은 지금 부모님 초상화로 향해있었다. 비록 그의 눈에는 텅 빈 백지 뿐일 테지만 그는 그 공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락은 스스럼없이 살짝 열린 유리문을 마저 열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클락의 움직임을 따라 건물 밖의 공기가 응접실 안으로 몰려왔다. 잘 정돈된 커튼이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에 브루스가 뒤를 돌았다.
“브루―”
“무슨 바람이...”
브루스가 클락을 지나쳐 클락이 열고 들어온 유리문을 향했다. 그의 시린 푸른 눈이 클락을 꿰뚫고 지난 듯 투명했다. 클락이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브루스의 어깨도 움찔 떨려왔다. 유리 위로 걸친 그의 손이 굳어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발코니의 유리문을 닫으며 아주 천천히 브루스가 클락이 서있는 곳을 보았다.
“클...락?”
마치 근시가 있는 사람처럼 브루스는 이마를 찌푸린 채 클락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력이라면 그렇게 초점을 모으려 애쓰지 않더라도 클락의 모습이 충분히 보이고도 남을 터였다. 더구나 이정도 거리라면 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이 말에 얽히기 전의 그라면 말이다. 클락은 다시금 찾아온 현기증에 오한이 들었다.
“브루스...”
클락이 브루스의 이름을 말했다. 브루스는 그것을 제대로 들은 모양인지 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 그의 손도 그것을 맞잡았다.
슈퍼맨은 많은 선량한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했고 그들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작 그의 연인에게 걱정 없는 미소하나 쥐어주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고 그 허상을 보고 있었다. 슈퍼맨을 그의 눈에 담지 못하고 지나친 브루스를 보고 비로소 깨달았다. 칼엘의 오만함이 그 투명한 시선 속에 해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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