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가 클락에게 부탁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담에서 활동이 불가능한 브루스를 대신해 그가 짐작하는 문제 원인에 대한 단서를 조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러는 겸 덤으로 도시의 패트롤이었다. 브루스의 말에 클락은 눈을 껌뻑였다.
“왜?”
“아, 아니. 진짜? 진짜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보이는 게 없는데 돌아다녀봐야 소용이 없잖아.”
브루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가 한 이야기에는 이상한 점도 불합리한 점도 없었다. 심지어 지극히 평범한 의견이었고 일반적인 대안이었다. 클락은 바로 그 점에 놀라고 있었다. 브루스가 자신의 본업에 대해 보통 사람들처럼 대응하다니! 클락은 오늘 하루 몇 번째인지 모를 놀라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클락은 알프레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도시로 나가보니 웬 안개더미들만 보이더라고 담담히 말하는 브루스를 어떻게 하면 달래서 무리한 활동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비록 브루스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순순히 배트맨의 일을 부탁하는 모습을 보리라곤 정말 꿈에도 보지 못했다. 클락은 브루스의 연인이었지만 고담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제3자로 분류되었다. 그 간극을 섭섭하게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있는 와중에 브루스의 입에서 이런 부탁을 들으니 클락은 놀라다 못해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달력에 있는 오늘 날짜 아래에 세상에서 가장 진기한 날이라는 코멘트라도 달아놔야지 않을까하고 클락은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단 복장은 배트맨으로써 부탁하지. 이 도시에 슈퍼맨이 도사린다는 소문이 돌았다간 뒷감당이 힘들거든.”
이 정도 조건은 양호했다. 클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락의 답에 브루스는 편안한 표정으로 남은 차를 들이켰다. 브루스의 반듯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이 그리는 선이 햇빛에 도드라졌다. 근심이 보이지 않는 브루스의 얼굴에 클락마저 지금 상황을 잊고 실없이 웃어버릴 것만 같았다. 클락은 억지로 표정을 굳히며 브루스가 자신의 차를 다 마실 때 까지 조용히 브루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데일리 플래닛으로 돌아가는 길, 현관까지 배웅을 나온 알프레드에게서 ‘주인님께서 남기신 답례’라며 파일 하나를 건네받았다. 파일 속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가 근 시일에 메트로폴리스에서 보일 행보에 대한 이야기와 최근 렉스 코프에서 국방부에 로비중인 무기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었다. 결국 브루스는 브루스였다. 그에 짐짓 질린 듯 혀를 내두르는 한편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클락은 그 파일 덕에 편집장의 부름을 무시하고 외근을 나간 데에 대한 벌충을 할 수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브루스의 부탁에 따라 클락은 다시 고담을 찾아왔다. 알프레드가 시계바늘을 돌리자 배트케이브로 내려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브루스는 아무 말 없이 알프레드가 맞춘 시계 판을 바라보다가 먼저 성큼성큼 동굴 아래로 내려갔다. 클락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브루스... 혹시 아까 시계도...”
“음.”
클락이 조심스럽게 묻자 브루스는 그저 목만 울렸다. 어렵지 않게 보이는 그의 삶의 공백에 클락은 새삼 그의 부모님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가가 실감났다.
배트케이브에 다다라서 클락은 브루스로부터 장비들을 받고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브루스로부터 패트롤의 배웅을 받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배트맨의 차림을 하고. 반면 원래대로라면 한창 본업을 시작할 시간인 브루스는 편안한 평상복의 차림을 하고 그런 클락 앞에 서 있었다. 조금 뻣뻣한 자세로 서있는 클락에게 브루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
“문제는 아니고... 그냥... 어색해서.”
클락이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아 대답했다. 브루스는 픽하니 웃었다.
“급하다고 히트비전을 쓰거나 하진 말아줬음 싶군.”
“조심할게.”
“지나치게 살갑게 구는 것도 자제하도록.”
“...조심할게.”
살짝 어깨를 웅크리며 클락이 답했다. 그러자 브루스는 그런 클락의 어깨를 잡아 핀 후 카울아래 드러난 클락의 턱에 가볍게 키스했다. 클락의 머릿속이 다시 한 번 가볍게 요동쳤다. 브루스의 입가에 진한 호선이 떠올랐다.
“어디한번 실력 좀 보자고 ‘배트맨’.”
클락은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웨인 씨.”
브루스가 알려준 가게와 아이가 사는 집이 있는 거리를 찾아가면서 클락은 강도와 소매치기, 마약쟁이를 잡았다. 고담의 길거리는 음영이 너무 분명해서 큰길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금세 음산한 광경이 펼쳐졌다.
슈퍼맨과 다르게 카울과 장갑까지 꼼꼼하게 착용한 배트맨의 복장은 보다 세상에 대해 방어적이고 적대적이었다. 클락은 내심 브루스가 매일 밤 지고 있는 무게에 놀라고 있었다. 크립토니안인 자신에게야 얇은 천 한 장이든 든든한 갑주든 별 차이가 없었지만 인간인 브루스에게는 전혀 다르리라는 사실을 클락은 알고 있었다. 최대한 가벼운 소재를 이용하여 활동에 큰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고는 있겠지만, 장비에 일정 수준 이상의 기능을 원하는 한 거기에는 합당한 질량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게 하나하나가 브루스를 지탱해 왔을 것이다. 어쩌면 내몰았거나.
클락은 배트맨을 가장하고 있는 만큼 되도록 비행능력이 아닌 와이어를 이용해서 도시를 오가려고 했지만 아까도 그만 두 거리 정도를 날아서 이동하고 말았다. 하지만 브루스도 도무지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이곤 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클락은 혼자 변명했다.
머릿속에 다시 브루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클락은 상황이 좋지 않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아늑했다. 클락은 고개를 저었다. 잘 웃는 브루스도 그렇고, 부탁을 하는 브루스나, 배웅을 해주는 브루스, 먼저 입을 맞추는 브루스까지 오늘 하루는 온통 익숙하지 못한 그 뿐이었다. 클락이 브루스 옆에서 간간히 느낀 현기증은 아마 그 탓일지도 모른다. 클락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들뜬 생각을 접었다.
브루스는 불과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일의 원인이 머핀 때문일 거라 추측했다. 듣는 클락과 마찬가지로 얘기를 꺼내는 브루스 역시 그 가정에 의문을 가지는 듯 했지만 단서는 그 뿐이었다. 소거법으로 생각했을 때 남은 변수란 머핀뿐이라고 브루스는 이야기 했다.
어느 정도 이동하다 도시 한 구석에 위치한 값싼 집세의 건물 촌에 다다랐다. 클락은 거리 한 모퉁이에서 브루스가 이야기했던 빵집 간판을 보았다. 운 좋게도 가게 앞에는 막 셔터 문을 내리는 여성과 작은 아이가 보였다. 클락은 이제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갈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아이가 배트맨의 모습을 발견했다.
“배트맨!”
아이는 밝게 웃으며 작은 손을 붕붕 흔들었다. 클락은 반사적으로 웃으며 그에 답하고 말았다. 굳이 브루스가 보여준 고담 시민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자료가 아니더라도 저렇게 친근하게 배트맨을 대하는 것 보니 아이는 브루스가 말한 그 아이가 확실했다.
아이의 외침에 문단속을 확인하던 아이의 엄마도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도 배트맨의 모습에 무서워하기보다 안심한 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런 모자의 반응에 클락은 왠지 뿌듯해져서 더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배트맨! 어때요? 행복해졌어요?”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소리치듯 물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너무 달게 느껴진 탓일까? 클락의 머리가 다시 살짝 어지러워졌다. 배트맨의 모습으로 웃기까지 했는데 슈퍼맨처럼 다정하게 말대답을 해주었다간 후에 브루스에게 한소리를 들을 것만 같아 클락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 제스처를 확인한 아이는 더 크게 웃었다.
너무나도 평범한 아이였다. 아이도 아이의 엄마도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거나 위협을 받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바이탈사인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어떤 약물의 징후나 그 밖의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길에 오는 동안 브루스가 언급했던 갱단의 횡포 같은 것도 없었다. 이 근방에서 어떤 빌런의 움직임도 보지 못했다.
브루스는 머핀을 싸던 베이킹컵에서 얻어낸 샘플에서도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이야기 했다. 지금 브루스가 어딘지 유한 태도인 것도 있지만 그런 객관적인 증거가 별 다른 실마리를 쥐어주지 못했기에 아마 그 명탐정도 아이를 용의선상에 두는 것을 주저했을 것이다. 머핀과 브루스의 일은 그저 일이 겹친 우연일 뿐 어떤 인과관계는 없는 듯했다.
클락은 실마리를 잃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배트맨에게 우호적인 두 모자가 혐의점이 없는 것 같아 안심했다. 브루스는 좀 더 이런 순수한 호의와 세상의 미덕에 감화될 필요가 있었다. 고뇌와 절망에 빠진 브루스는 늘 자신을 상처 입혔으니까. 더구나 그럴 때 브루스는 클락은 물론 그 누구도 손에 닿지 못할 곳으로 마음을 틀어박으니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서는 더 애가 탔다.
클락은 다른 어떤 약물이나 브루스 그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사고가 있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어제 배트맨을 목격한 것이 확실한 아이에게 어젯밤 어떤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질문할 생각으로 클락은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 때 여자가 아이에게 물었다.
“토미. 그게 무슨 말이니?”
엄마의 물음에 아이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소곤소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있지 엄마. 내가 배트맨에게 먹으면 행복해지는 머핀을 선물했어.”
그리고 흡 하고 급히 삼키는 숨소리. 클락은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한 그녀의 고동소리를 들었다. 클락은 이동을 멈추었다. 클락은 그녀와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의 엄마는 바로 고개를 돌리며 아이의 손을 잡고 밝지 않은 가로등이 켜진 골목을 허둥지둥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모자를 클락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이렇게 까지 단서가 나오지 않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아직은 조사의 방향을 바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레슬리 톰킨스가 부자의 저택에 왕진을 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파크로의 주민이자 사회봉사자로서 고담의 가장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느라 부자들의 전화 한통에 발걸음을 옮기기에는 너무나 바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브루스 웨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브루스가 어른이 된 후로 그를 만나기 위해 레슬리가 웨인 저택으로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둘은 주로 크라임 앨리에 있는 웨인부부의 사고가 일어난 지점이나 그녀의 클리닉 등 고담 시 어딘가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하지만 오늘은 브루스의 요청으로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집사가 모는 차를 타고 오랜만이 찾아온 웨인 저택은 여전히 웅장했고 어딘가 쓸쓸했다.
고담의 양심이라고도 불리던 토마스 웨인과 마사 웨인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레슬리는 그들의 아들을 온 마음으로 보살펴왔다. 그 선량한 부부의 아들이 고담의 어둠에 짓눌려 날개가 꺾이는 것을 레슬리는 용납할 수 없었다. 마음에 상처 입은 아이는 날카롭고 자신의 안쪽으로 응집되어갔다. 하지만 레슬리는 끈질기게 아이의 눈에 빛이 돌아오길 기원하며 아이를 마주했다. 비록 결과적으로 그 세월이 성공적이었다고 답할 수는 없었지만, 그 어리던 아이가 어느새 훤칠한 성인이 된 것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간단한 진찰 기구들을 가방 안에 잘 정돈하며 레슬리가 말했다.
“전공이 아니라 단언은 못하겠다만...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구나.”
브루스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반듯하게 앉은 채였다. 그 모습이 마치 엄마 손에 떨어져 제 혼자 의사 앞에 앉은 여덟 살 난 어린 아이 같았다.
“네가 원한다면 믿을 만한 상담가라도...”
“아니요, 레슬리. 괜찮습니다.”
“그 고집은 여전하구나. 그래도 그만큼 네가 건강하다는 뜻이겠지.”
레슬리가 한숨처럼 이야기하자 브루스가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평소 어떻게든 무뚝뚝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던 그와는 다른 꽤 솔직한 얼굴이었다. 레슬리는 브루스의 어깨를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어느 새 돌아갈 채비를 마친 레슬리를 보며 브루스가 서둘러 일어났다.
“여기서 머물다 아침에 돌아가셔도 되는데...”
“마음은 고맙지만 내 상황이 여의치 못하구나.”
미안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하는 레슬리에게 브루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고담에서 선한 사람들 모두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쯤 브루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선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브루스 역시도 늘 바쁜 나날을 보내왔었다.
“알프레드가 바래드릴 거예요. 원래는 제가 가야하는 건데...”
“얘는. 이상은 없다지만 넌 환자란다. 어디 쏘다니다 페니워스 씨 속 썩일 생각일랑 마렴.”
“너무 새삼스러운 말인 거 같아요.”
브루스가 대꾸하자 레슬리는 손을 뻗어 브루스의 이마에 가볍게 알밤을 먹였다. 브루스는 마치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었다. 이 얼굴은 지금보다 한참 어리던 브루스에게서도 본 기억이 없는 얼굴이었다. 레슬리는 벽난로 위에 걸린 부부의 초상화를 보았다. 어쩐지 착잡한 심정이었다.
아주 오랜만이 찾아온 저택에서 만난 브루스는 레슬리의 기억 속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고 평온해보였다. 처음 그 얼굴을 보았을 때 왕진 차 저택에 들렀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레슬리는 내심 기뻤다. 하지만 곧 그 평온의 원인이 그가 자신의 부모님과 그가 속한 세상의 일부를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쁨은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부모님을 잃은 후 처음으로 가장 안정적인 상태에 있는 브루스는 지금 토막나버린 세상 속에 있었다.
“브루스.”
현관으로 나가는 길에 레슬리가 뒤를 돌아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맑은 파란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과거의 웨인부부가 소중히 여겼고, 레슬리가 그토록 바라던 눈동자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레슬리는 지금 그 눈동자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아, 우리네 삶이여. 레슬리는 쓰게 웃었다.
“얘야, 난 네가 행복하길 언제나 바라왔단다...”
행복. 레슬리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브루스가 몸을 굳혔다. 그런데 하고 운을 떼려던 레슬리는 그런 브루스의 반응에 말을 멈추었다. 브루스가 행복이나 그와 유사한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불안하게 눈만 깜빡이는 브루스의 모습이 마치 숨겨둔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보였다. 행복은 그런 식의 죄책감이 따라붙을 필요가 없는 단어일 텐데도.
레슬리는 브루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아니, 말을 이었다기보다 말을 돌렸다.
“...일단... 몸 조심히 지내렴. 뭔가 알게 되면 다시 연락하마.”
알프레드가 준비한 차에 오르는 레슬리를 배웅한 뒤 브루스는 생각에 잠겼다. 어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중에서도 그리고 브루스 그 자신의 신체에서도 별 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정신적인 문제라 하기엔 요 근래에 배트맨을 특별히 괴롭힌 사건도 없었다. 그렇다면... 브루스는 남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브루스를 대신해서 배트맨으로 나간 클락이 해줄 것이다.
저택 벽에는 빈 액자들이 많이 걸려있었다. 종종 어린 브루스가 혼자 무어가 그렇게 좋은지 웃고 있는 썰렁한 사진도 있었다. 물론 이들은 빈 액자도, 단독 사진도 아니었다. 브루스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잘려나간 기억들이 그 여백에는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 무엇 하나 브루스가 스스로 배제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없었다. 그저 하룻밤 새에 그것들이 뚝 하니 떨어져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절단 나버린 세상 속에서 브루스는 생애 두 번째로 평온을 맞이했다. 바로 말하자면 지금의 브루스에게 있어서는 생애 처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것을 생각으로도 언어로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의무처럼 죄책감이 찾아든 탓이었다.
브루스는 차분히 계단을 밟으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여니 배웅 했을 때는 배트맨의 모습으로 나갔을 클락이 슈퍼맨이 되어 브루스의 눈앞에 있었다. 슈퍼맨으로 고담을 활보하는 건 자제하라니까... 하고 핀잔 소리가 떠올랐지만 굳이 지금 말로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카울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는 배트맨과 다르게 슈퍼맨은 맨 얼굴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사는 것도 그처럼 분명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컨대 행복하다는 것을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클락.”
브루스가 주저 없이 웃었다. 삶이 클락의 얼굴 하나로 이렇게나 가슴이 따뜻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브루스는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삼켰다. 빈 액자가 조용히 브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트맨 앞에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뒤로 누군가가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어쩌면 단순한 기우였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케이트는 꺼림직 해도 그 짐작이 마음에 들었다.
“잘 자렴, 토미. 좋은 꿈꾸고.”
“안녕히 주무세요.”
케이트는 톰의 졸음 묻은 눈이 감기는 것을 지켜본 뒤 침대 옆 스탠드의 불을 껐다. 아이가 금세 곯아떨어졌는지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났다. 케이트는 미소 지으며 조용히 방을 나가려 했다.
그때, 콩콩 하고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케이트는 바람에 무어라도 날아들었나 싶어 창문을 바라보다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케이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창 밖에는 가슴에 S자가 쓰인 푸른 유니폼을 입고 펄럭이는 붉은 망토를 두른 슈퍼맨이 있었다. 그는 팔자 모양으로 눈썹을 구부리며 잠이 든 톰을 손짓으로 가리키고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고담에서는 볼 일이 전무하다시피 한 슈퍼맨이 이렇게 눈앞에 있자 케이트는 머릿속에서 다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케이트는 그냥 그를 무시하고 경찰에 신고나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고담 시민으로서는 가장 당연하게 떠올릴 법한 행동이었다. 저 코스츔의 알맹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진짜라 하더라도 케이트에게 저 메트로폴리스의 슈퍼맨이 가져다 줄 좋은 소식 따위는 없었다.
다만 케이트는 정말로 미안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웃어 보이는 슈퍼맨의 모습에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슈퍼맨은 케이트에게 안심하라는 듯 양손을 위아래로 두 번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한 번 가리킨 뒤 그 손가락으로 집의 현관 쪽을 가리켰다. 케이트는 말없이 그를 지켜보다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톰의 방을 나왔다.
케이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맞는다면 언제까지고 도망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케이트는 그저 일이 너무 복잡하지는 않기만 바랐다. 물론 말로 하지는 않았다.
모자의 집을 찾아가기 전 클락은 배트맨에서 슈퍼맨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고담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신속하게 범죄자들을 소탕하기에 배트맨의 유니폼은 제격이었지만, 무어엔가 잔뜩 겁을 먹은 시민에게 다가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엔 브루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눈에는 요란하더라도 차라리 슈퍼맨으로서 접근하는 편이 나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현관문을 열면서도 꼼꼼하게 체인을 걸어둔 채였다. 비좁은 문틈 사이로 의구심이 가득한 눈초리가 조심스럽게 슈퍼맨을 바라보았다. 클락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 밝게 웃으며 정중히 말했다.
“늦은 밤에 미안합니다, 부인.”
“...무슨 일이죠?”
여자가 경계하듯 물었다.
“제... 친구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엔, 부인께서 그에 대해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 같아요.”
클락의 말에 여자의 동공이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빙고. 클락의 머릿속에서 벨이 울렸다. 클락의 말에 여자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잘각잘각 체인을 푸는 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문이 열렸다. 클락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조심스레 집안으로 발을 디뎠다. 일단 집 안에서 어떤 이상한 낌새가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금 머리가 어지러웠을 뿐.
여자는 불편한 기색으로 클락에게 좁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소파를 권했다. 그녀는 거실 바로 옆에 붙은 부엌에 있던 식탁의자를 빼냈다. 여자의 심장이 불안하게 떨리는 것을 들으며 클락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클락은 계속 미소를 유지한 채 이야기 했다.
“우선. 부인께서 이렇게 도움을 주시고자 하는데 감사드립니다.”
“케이트에요.”
“예, 케이트 씨.”
어두운 거실 조명 아래 초조한 케이트의 얼굴이 보였다. 클락은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서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입술 한 귀퉁이를 깨물던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친구...라면 배트맨을 말하나요? 그에게 뭔가...”
클락이 눈을 크게 깜박였다. 케이트의 입에서 성대한 한숨이 쏟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머핀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거였는데...”
이어진 케이트의 말에 클락이 눈을 빛냈다. 클락은 자신의 말이 추궁하듯 들리지 않길 빌며 말했다.
“짐작하시는 게 있으신 듯한데... 솔직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
케이트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클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며 한 자리를 걸어 다녔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요란하게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똑딱똑딱 초침 소리를 하나하나 귀담으며 클락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간신히 케이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저와 토미, 제 아들은 말을 부릴 줄 알아요.”
클락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기 위해 우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케이트가 말을 이었다.
“말을 잘한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법이에요. 말에 바라는 것을 담고 이야기하면 이루어지는 거죠.”
마법, 이라는 단어에서 클락은 몸을 굳혔다. 역시나 하는 생각과 하필이면 하는 탄식이 같이 나왔다. 이 지구상의 온갖 물리력과 생화학적 위협에 강한 크립토니안의 신체를 가진 클락이었지만 마법과 같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했다. 크립토나이트야 납이라도 이용해서 막아볼 방도가 있었지만 마법은 그럴 수조차 없었다. 그런 까다로운 대상이 브루스의 문제에 끼어들자 클락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클락은 얌전히 다시 고개를 끄덕여 케이트에게 말을 종용했다.
“문제는 이게 듣기엔 그럴싸해보여도 굉장히 까다롭다는 거예요. 원숭이 손 얘기 아시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 말씀이시죠? 그리고 결말이...”
“네. 저희가 부리는 말은 그 원숭이 손이랑 비슷해요. 무언가를 바랄 때는 항상 신중해야하죠.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뚝딱하고 실현시켜주는 것도 아니고요.”
클락을 보며 이야기하던 케이트가 다시 거실을 왔다갔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이 아니면 보통은 엉뚱한 일이 일어나요. 아니면 얘기치 않게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고요. 이를 테면 ‘행복’이 그래요.”
클락은 부모님에 대한 일체를 잊고 고담을 보지 못하게 된 브루스를 떠올렸다. 확실히 행복이란 이름 아래 일어날 일 치고는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클락은 납득하고 있었다. 브루스에게 있어 부모님과 고담은 배트맨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그들이 배제된 배트맨은 그의 천성적인 의무감 같은 게 남아있을지언정 절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망토 두른 십자군이 더 이상 그 자신을 채찍질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저는 이제 이걸 어떻게 조절하는지 알지만 토미는 아직 어려서... 마음이 앞서서 저도 모르게 말을 사용할 때가 있어요. 늘 조심하라고 얘기는 하지만...”
한참 방을 왔다 갔다 하던 케이트는 이제 빼놓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무릎위에 양손을 깍지 낀 채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등을 쓸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심장소리와 함께 튀어 올랐다.
클락은 지금 이 상황이 어쩐지 익숙했다.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가슴이 뛰고,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사실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는 무언가라는 것은 그리 편리한 일도, 낭만적인 일도 아니었다. 클락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걸 풀 수는 없나요?”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어요. 그 몫은 이제 받아들인 사람 거예요...”
케이트는 말을 끝낸 뒤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그녀는 초조하게 자신의 손을 뜯고 있었다. 클락은 아무 말 없이 그런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저... 우리 토미는...”
“아이는 절대 나쁘지 않아요.”
아이는 그저 정말 순수하게 배트맨의 행복을 빌었을 뿐일 터다. 클락이 단호하게 말했다. 실은 아이에게 보다 과거의 자신에게 그리고 지금의 자신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냥 운이 안 좋았을 뿐이에요. 걱정 마세요, 케이트 씨. 그 친구, 더한 것도 겪어왔는걸요.”
클락이 경쾌하게 이야기했다. 그에 케이트는 고개를 숙인 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케이트를 바라보다 클락도 이유 없이 따라 고개를 같이 끄덕이고 말았다.
현관을 나서는 슈퍼맨에게 안절부절 못하던 케이트가 겨우 말했다.
“...저 염치없지만... 배트맨에게 꼭 전해주겠어요?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요.”
슈퍼맨은 상냥한 미소로 답을 대신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케이트의 얼굴에 그제야 편안한 기색이 돌았다. 서서히 안정되는 그녀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클락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케이트와 헤어진 후 미처 돌지 못한 고담 시내를 마저 점검한 뒤 클락은 웨인 저택으로 향했다. 밤바람을 맞으며 클락은 생각에 잠겼다. 클락이 알아낸 것은 브루스의 문제에 대한 원인뿐이었다. 그리고 클락이 간간히 느낀 어지러움의 원인도 덤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법에 취약한 슈퍼맨의 신체라면 그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행복. 클락은 그 단어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분명 그것은 클락이 브루스의 연인으로서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브루스의 손에 쥐어주고 싶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브루스는 어떻지?
클락은 웨인 저택을 떠나는 고급 승용차를 지켜본 뒤 건물주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도 시간이니 그는 아마 방으로 올라올 것이다. 침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지만 발소리 하나가 클락의 예상대로 가까워져 왔다. 클락은 브루스에게 우선 다녀왔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브루스가 좀 더 빨랐다.
“클락.”
그리고 그 앞에서 브루스가 웃고 있었다. 클락은 다시 찾아온 현기증이 마법의 탓인지 아니면 브루스의 얼굴에 자리한 저 완벽한 호선 탓인지 알 수 없었다. 클락은 잠시 되돌려줄 인사도 삼키고 그런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 조차 방정맞은 가슴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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