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은 브루스 대신 시계바늘을 돌려 동굴로 향하는 입구를 열었다. 브루스는 그것을 쳐다도 보지 않고 먼저 케이브를 향해 내려갔다. 브루스의 뒷모습이 동굴의 어둠 속으로 점점 잠기는 것을 클락은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켠 후 그 그림자를 따라갔다.
브루스는 손짓으로 클락에게 배트맨 복장을 가리켰고 클락도 별 말 없이 그의 지시에 따라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는 동안 브루스는 작업대 앞에서 달그락하는 작은 소음을 내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클락은 배트맨의 카울을 손에 쥐어보았다. 박쥐를 본 뜬 그 가면에는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클락은 그 주름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려보았다. 하, 하고 짧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 클락의 앞으로 어느 새 브루스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의아한 듯 브루스는 무표정한 가운데 한쪽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클락은 그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웃음기 서린 클락의 눈가를 바라보며 브루스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는 금방 서늘한 얼굴을 만들었다. 시린 눈동자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익숙한 벽이었다. 브루스는 클락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브루스가 클락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기기가 들려있었다.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
브루스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어 보니 그것은 통신기였다. 잠시 통신기를 살펴본 클락이 고개를 들었다. 브루스는 건조한 시선으로 클락의 얼굴을 한 번 본 뒤 빠른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커다란 모니터가 자리한 그의 책상 앞으로 향했다. 검은색 화면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얗게 떠올랐다. 고담 곳곳을 그려낸 지도가 화면에 표시되고 있었다. 그 한 구석에 붉은 점 하나가 깜빡였다. 클락은 그게 자신임을 알았다.
“제3자를 통해 고담의 관리가 가능한지 알고 싶어.”
클락은 왜 그런걸 알고 싶으냐고 묻지 않았다. 너무나 뻔한 질문이었다. 당연하게도 브루스는 언제까지고 배트맨일 생각인 것이다. 언제까지고. 클락은 고개를 끄덕이며 브루스가 준 통신기를 귀에 꼽고 카울을 뒤집어썼다. 브루스가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발견하면 보고하도록. 얼빠진 실수는 하지 마. 맨 오브 스틸도 목숨은 하나니까.”
“난...”
늘 그렇듯 걱정을 사납게 입에 담는 브루스에게 클락은 자신이 지금 배트맨으로 변장한 채 이 자리에 있다 이야기하려하다 말을 멈추었다. 어느 쪽이든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클락은 대신에 다시 웃어보였다. 브루스의 이마가 더욱 찌푸려졌다.
“브루스.”
클락이 브루스를 불렀다. 그보다 손을 뻗어 브루스의 미간에 진 주름을 쓸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손길을 단칼에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하겠지. 이런 식으로 브루스를 부를 때면 클락은 그가 할 수 있는 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별 볼일 없는 남자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한편 참 평범해보였다.
“오늘로 자네에게 이 무게를 건네받는 건 마지막이겠지?”
클락이 양팔을 가볍게 들었다. 브루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루,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늘 아침에 보았던 브루스가 마치 신기루 같았다. 클락은 생각을 정정했다. 그것은 신기루였다.
클락은 브루스에게 걸린 말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고 그러면서 실현가능성도 높은 클락의 바람이 불현듯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슈퍼맨이 그 동안, 꽤나 예전부터 겁을 먹고 있었다고 하면 브루스는 어떤 얼굴을 할까? 그의 도시의 어둠이, 그의 슬픔이 마지막에는 클락의 곁에서 브루스를 앗아갈 것만 같았다. 그 초조함이 클락에게 한 가지 꾀를 속삭였다.
촉발원인이 무엇이고 간에 그 바람은 줄곧 클락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클락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애초에 100% 완전무결한 안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 아무리 크립토니안인 칼엘에게라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지키고 싶은 대상이 자신의 의지를 지니고 마음을 지닌 지성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가끔 자신보다 한참은 연약하고 판자만큼 불안한 세상은 클락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클락이 바라는 것은 안전한 새장 속의 그가 아니었다. 브루스는 곧잘 배트맨인 그 자신과 브루스 웨인을 완전히 별개로 취급했지만 클락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느 쪽도 클락에게는 소중한 브루스였다. 브루스는 언제나 최고였지만, 클락은 브루스가 더 나아지기를 바랐다. 히어로로서 모든 것을 짊어지면서도 그것에 꺾이지 않고,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에 얽매이지 않으며, 배트맨이지만 브루스 웨인이고, 그리고 행복한 그를 원했다. 클락의 욕심은 이렇게나 컸다. 그도 그럴게 클락에게는 이름이 세 개나 있었으니까.
클락은 브루스의 짐을 덜 수도 없앨 수도 없었다. 그것이 브루스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루스의 곁에 있는 것, 그 사실만은 온전히 클락의 것이었다.
“난 자네가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거야.”
배트맨의 카울 아래로 슈퍼맨의 미소가 드러났다. 브루스는 그것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브루스. 자네 자신을 포기하지 마.”
클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브루스는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끝내 브루스에게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클락이 그 뒷모습을 눈에 담은 후 자리를 떠났다.
미드 타운에 도착했어. 철로 아래서 기타 연주로 자장가 부르는 사람이 있더라.
클락의 보고에 브루스는 으흠 하고 심드렁한 대꾸를 보냈다. 고담 지도 위에 떠오른 클락의 위치와 클락의 보고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까부터 클락은 마치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이야기해주듯 보고하고 있었다. 지금 클락이 서정적인 밤거리 연주의 무대가 되는 듯 설명한 그곳은 약 일주일 전 마약을 사이에 두고 딜러와 그의 고객이 싸움을 벌이다 결국 딜러가 시멘트 기둥에 머리를 박고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클락은 쓸데없는 보고만 늘여놓고 있었다. 브루스는 그런 클락에게 필요한 이야기만 하라고 다그쳤지만 얼마 후 그것을 포기해버렸다. 멍청한 클락. 덕분에 오늘 밤에는 장비의 성능만 줄창 시험해보게 생겼다.
브루스는 지금 이것이 클락의 배려임을 알았다. 브루스는 클락이 마치 자신을 섬세한 무언가처럼 다루려 들 때면 화가 났다. 클락은 오만하다. 브루스는 종종 시골 출신의 순박한 기자의 파란 눈동자에서 저 창공에 떠 지구를 내려다보는 전능한 이방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브루스는 새삼 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 건...
“요 하루 사이, 도련님 그 성미가 어디 갔나 했습니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브루스의 등 뒤로 조용히 집사가 다가왔다. 브루스가 슬쩍 보니 쟁반 위에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담아 온 알프레드가 언제나처럼 바른 자세로 서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장착한 통신기의 송신모드를 껐다.
퍼지는 차의 향에서 부드러운 초콜릿 냄새가 났다.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신경이 곤두서있을 때면 끓여오는 블렌딩이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옆에다 쟁반을 내려놓았다.
“...브루스 도련님께선 언제나 너무 완벽하려 하십니다.”
“배트맨은 그래야하니까요.”
브루스는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얕은 한숨이 들렸다.
“배트맨 이야기가 아닙니다. 브루스 웨인, 바로 도련님의 이야기예요.”
알프레드는 어딘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브루스는 반 박자 늦게 그에 답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무채색의 딱딱한 말이었다. 알프레드의 이마에 주름이 침중해졌지만 브루스는 화면을 바라보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집사는 무겁게 이야기 했다.
“그렇게 계속 외면하실 생각이세요?”
브루스가 휙 하니 고개를 돌려 알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자신의 곁에 있어온 나이든 집사의 얼굴을 따라 브루스의 얼굴도 아프게 찌푸려졌다.
“이게, 내가 의도한 게 아닌 걸 알잖아요.”
“저는 이 상황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브루스 도련님.”
모니터의 빛을 받은 브루스의 눈동자 표면이 빛났다.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알프레드는 슬픔과 분노에 차 있는 작은아이가 생각났다. 아이는 너무나도 준비 없이, 갑작스레 커다란 상실을 겪었다. 그 예정에 없는 불행은 아이를 강박증 속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남겨진 아픔은 알프레드의 죄였다. 그 누구도, 브루스조차도 그것을 짊어지우지 않았지만 알프레드는 묵묵히 그 무게를 자청했다.
박쥐 의상으로 밤마다 지저분한 도시 이곳저곳을 누비는 브루스였지만 그런 도련님에게도 행복의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도련님은 번번이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재단하려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배트맨이 브루스의 행복을 용서하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그것이 두려웠다.
“행복이 액자 속 그림 같은 게 아니란 것을 아시잖습니까.”
“알프레드...”
브루스가 땅을 긁듯 한숨을 내쉬었다.
미트타운, 서쪽 지구야. 다정한 노부부가 늦은 시간에 귀가했어. 두 분 다 별 탈 없었어. 클락이 보고 한 곳은 소매치기와 강도가 빈발하는 지역이었다. 클락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노부부의 귀갓길을 보살핀 모양이었다.
알프레드가 조급하게 다음 말을 꺼냈다.
“도련님 일이니, 도련님께서는 금방 원래의 도련님이 되시겠지요. 하지만 브루스, 당신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요. 말이건 마법이건 없이 말입니다.”
브루스는 마른세수를 했다. 자신의 손바닥이 한 번 쓸고 지난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가워져있었다. 브루스는 서늘한 눈매로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지금 넌센스에 할애할 시간 없어요. 차는 고마워요.”
브루스의 등에 긴 그림자가 있었다. 그 어둠을 바라보며 알프레드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신이시여, 그래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닌 거겠지요. 사람의 행복은 마지막에는 결국 본인의 손에 달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행복에는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그 자신이 보지 못하는 길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기 위해서. 언젠가, 언젠가는. 마치 주문처럼 알프레드는 지치지도 않고 그 말을 속으로 읊으며 걸음을 돌렸다. 하루를 끝내기에 아직 브루스 웨인의 집사는 할 일이 많았다.
멀어지는 집사의 발소리를 들으며 브루스는 책상 위에서 양손을 몇 번 쥐락펴락 해보았다. 브루스는 옆에 알프레드가 두고 간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혀진 향이었지만 충분히 깊은 맛이 났다. 브루스는 힘겹게 숨을 뱉었다. 그 무게와 다르게 달콤한 공기가 그 숨을 따라 퍼졌다. 차 한 잔에서 마저 자신의 집사가 자신을 얼마나 염려하는 지 훤히 보였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그에 답할 수 없었다. 브루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스트시티 파크를 지났어, 곧 동쪽 항구에—
어째서 사람은 마음 한 쪽을 느슨하게 하는 순간 이다지도 물러지는 걸까. 브루스는 클락의 위치를 나타내는 점을 노려보았다. 평소 슈퍼맨이 메트로폴리스, 지구에서 보이는 이동속도를 감안했을 때 점이 움직이는 속도는 턱없이 느렸다. 그마저도 브루스가 배트모빌을 통해 이동하는 속도와 맞먹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것 역시도 클락의 배려였다. 다시 브루스는 화가 났다.
슈퍼맨은 아마도 현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히어로일 것이다. 그는 어떤 두려움도 없이 맨 얼굴을 드러낸 히어로이기도 했다. 그런데다 그의 능력은 그의 친구들과 국가에는 물론 적에게까지 약점마저 훤히 알려져 있었다.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슈퍼맨의 약점을 물으면 금방 크립토나이트라는 답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제아무리 슈퍼맨일지라도 세상은 기회만 된다면 언제라도 클락을 브루스의 옆에서 거둬갈 수 있었다. 마치...
마치. 브루스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브루스는 빈 액자를 떠올렸다. 그 속에, 분명 브루스가 더할 수 없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보이지 않는 저 도시는 브루스가 짊어진 맹세였다.
잠깐, 선생님. 그러다가 바다에 빠지겠어요.
클락이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항구 쪽에 있는 공터에서 술주정뱅이가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퍽하고 타격음이 들렸다. 클락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주정뱅이가 몸부림을 치다 통신기가 장착된 쪽을 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클락은 지금 주정뱅이의 손을 걱정하고 있겠지. 브루스는 차게 웃었다.
지금, 버려— 선착장, B, 자네 괜찮—
지직지직 소리가 났다. 설마 그 타격으로 통신기가 고장 난 걸까? 내구성이 형편없군. 그러고 보니 계속 송신모드를 끈 채였다. 브루스는 클락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하는 붉은 점을 지켜보며 송신모드를 켰다. 브루스의 시선이 자신은 깨닫지 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B— 지직, 하고. 결국 잡음 속에 클락의 통신이 잠잠해졌다. 어두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니터링을 통해 서포터를 할 수 있으려면 통신기의 수용범위를 좀 더 넓게 잡아야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만큼 반감되는 음질의 해상도도 높일 필요가 있다. 브루스는 침착하게 수정해야할 사항에 대해 나열했다. 하지만 얼마 없어 클락의 위치를 표시하던 붉은 점마저 가시자 브루스의 푸른 눈이 홉 하니 뜨였다.
기기의 문제다. 지금의 클락은 슈퍼맨이 아니라 배트맨이다. 그 카울 아래 클락은 어느 정도는 안전할 것이다. 아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것은 브루스의 몫이었다. 브루스는 자기 자신을 우선으로 두고 싶은 게 아니었다. 친애하는 집사의 바람도, 소중한 연인의 부탁도 끊임없이 듣지 못하고, 새기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세상은. 세상은 소중한 것들을 품고만 있기에는 어두운 곳이었다. 네, 아버지. 저는.
브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클락은 귀에 장착한 통신기를 꺼내 보았다. 술에 취한 남자가 실수로 친 부위보다 클락의 귀에 걸쳤던 부분이 더 손상되어 있었다. 내부 단자의 회로가 기어이 끊어진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심드렁한 대꾸조차 없는 브루스와의 통신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끊어지게 되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지금 브루스가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가 괜한 걱정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는 브루스다. 분명 앞뒤 맥락 속에서 클락과의 통신 두절이 별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걱정이라. 문득 클락은 브루스와 자신이 굉장히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사이인 만큼 서로를 걱정하는 것이 별스러운 일은 아닐 텐데도 새삼스레 다가왔다. 클락은 행복이란 말에 따라 부모님에 대해 잊고 고담을 볼 수 없게 됐던 브루스를 떠올렸다. 브루스는 끝에 가서 클락을, 아니 슈퍼맨을 보지 못할 뻔도 했다. 그리고 자신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쉬운 길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라고 자주 세간에서는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보다도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절대적으로 바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분명 브루스 역시도.
클락은 선착장 끝에서 소음을 포착했다. 불빛 하나 없었는데 어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부랑자 몇이 밤을 보내기 위해 무리를 이루었나 생각했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시꺼멓게 이게 뭐야. 다른 데서 거래하면 덧나?”
“다른 쪽은 죄다 덩치들이 쥐고 있다고.”
어제만 해도 이곳은 그저 개발이 중단된 오래되고 구석진 항구였다. 하지만 하룻밤 새 이곳은 밀수입 통로가 된 모양이었다. 브루스에게 이걸 보고해야 할 텐데... 아니, 보고는 일이 해결된 다음이라도 늦지 않을지도. 지금 이 항구의 위치는 브루스가 이야기 했던 케이트와 아들이 살고 있는 거리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신생 갱단이 바로 이들일지도 모른다.
살펴본 결과 머무는 인원은 서른 명 남짓이었다. 커다란 식자재 트럭 한 대가 조용히 지켜서 있었다. 인원들은 하나 같이 건장했고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좋아, 클락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면 양호하다. 전부 평범한 사람들로 이뤄진 집단이라 그들을 다치지 않게 하는 데는 애를 먹겠지만 클락에게는 충분히 제압 가능한 상대들이었다.
총알도, 폭력도 클락은 무섭지 않았다. 어둠 속에 숨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배트맨의 망토는 능숙하게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불하나 밝히지 않고 선박에서 짐을 내리는 일행들은 자신들의 행적을 남기지 않는데 급급한 나머지 이 고담의 어둠 속에 누가 있는 지를 채 생각하지 못하는 듯 했다. ...브루스가 차라리 어둠 속에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하지만 그것은 그것뿐이다. 클락은 브루스에 대해서 더 이상 조급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제는 참 이상한 하루였다. 클락이 웃었다. 브루스도 이 일을 가볍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정말이지, 사람은 바라는 것에 끝이 없었다.
클락은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현장에 난입했다.
“뭐? 뭐야?!”
“배트맨?!”
검은 바람이 무리를 한 번 헤집었다. 비명소리 중에는 영어가 아닌 포르투갈어도 섞여 있었다. 일단은 3명. 브루스의 유틸리티 벨트에서 꺼낸 밧줄로 3명을 빠르게 포박한 후 클락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탄환 세례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 자리에 섰다. 히트비전으로 총을 녹여버리면 될 일이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쓸 수 없었다. 총알 몇 발인가가 심장이 자리한 가슴 부분을 두드리고 찌그러져 땅 아래에 떨어졌다.
거래를 하던 선박은 어느새 배의 시동을 걸고 남쪽을 향해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위해 개조된 모양인지 겉보기에 평범한 어선치고 출항 준비가 빨랐다. 몇 인원은 이 와중에도 미처 싣지 못한 짐들을 챙기고 있었다.
“박쥐 저거 뭐야?! 왜 안 뒈져!!”
“머리를 노려!”
“이봐, 보스에게 연락했어?”
“저 새끼들 지들만 튀려는 거 아니지?”
욕설과 총성이 난무했다. 지금 남아 있는 인원들은 제일 말단 쪽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운반책 역할을 맡은 쪽을 먼저. 머릿속에 카운트가 돌아갔다. 클락이 무리들 앞으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그런 클락의 눈앞에 검은 잔상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클락에게 총구를 겨두고 있던 사내 하나가 나자빠졌다. 클락의 가슴이 철렁하니 내려앉았다. 살벌한 타격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 클락과 꼭 같은 복장을 한 브루스였다. 아니, 배트맨이었다. 홀연한 뒷모습이 너무나 익숙했다.
이 와중에 떠오른 말이 어째서나 왜가 아닌 벌써 라는 것이 희극이자 비극이었다.
“박쥐새끼가 둘이라고?!”
“쏴! 쏘라고!”
클락은 브루스의 등 뒤로 총을 갈기려는 무리들을 재빠르게 잡았다. 그것을 배트맨이 힐끔 쳐다보고 빠르게 출발하는 트럭을 쫓아 나가버렸다. 브루스의 입가가, 살짝 웃고 있던 것도 같았다. 클락은 브루스가 말없이 남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항한 선박으로 향했다.
브루스는 배트윙을 오토파일럿으로 설정한 뒤 계기판에 나타나는 좌표를 꼼꼼히 살피며 지금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아직 직접 볼 수 없었지만 고담의 지리쯤이야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훤했다. 고담에 있어서 항로는 아주 중요한 길이었다. 이 도시에는 엄연히 말해 버려진 선착장은 없었다. 여러 밀수입이 항로를 통해 자행되었다. 클락과 연락 두절이 어떤 사건과 관련 없다는 것을 브루스는 머리로 이해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지금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 슈퍼맨마저도 시야에서 지워버릴 뻔 했다.
브루스는 힐끔 배트윙의 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도시는 안개에 잠겨 있다. 다시 계기판을 보았다. 이제 막 비행기는 미드타운 중간쯤에 있었다. 클락의 마지막 위치에서 유추한 바로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 불과 하루를 사이에 두고 착용한 케블러와 망토가 기이하게 무거웠다. 브루스는 혀를 찼다.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다. 정신 차려, 배트맨. 하루 만에 불러보는 자신이 어쩐지 낯설었다. 브루스가 자신에게서 차선책을 제거하고 남들이 보기에는 강박증이다 평할 정도로 고집을 부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 줄 알았다. 다 잊을 수도 있었다. 부모님이 그것을 바라지 않을 거라며 자신에게서 짐을 덜 수도 있었다. 말 한 마디가 쉽게 브루스의 모든 짐을 털어냈던 것처럼 말이다.
브루스가 아주 오랫동안 미뤄온 소소한 기쁨과 안정이 그 빈자리를 폭신하게 덮었다. 하지만 그렇게 잊고 외면해서 뭘 어쩔 생각이지? 브루스는 하마터면 슈퍼맨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가 브루스의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클락은 브루스에게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라 했지만 클락의 말은 잘못되었다. 지금 상태야말로 브루스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포기한 상태였으니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조사해보기로 했던, 그리고 오늘 클락에게 부탁하려 생각했던 목록 일체를 파기했다. 마법사를 탐문할 필요도, 동양의 언령과 관련된 서적을 뒤질 필요도, 원숭이 손에 대해 조사할 필요도, 아이의 말을 단어 하나하나의 정의를 따져 나열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언어란 발하는 사람의 생각 한 자락을 간신히 담아내는 수단에 불과했고 그 마저도 왜곡이 되어 전달된다. 그 탓에 브루스는 특히나 추상적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행복’은. 브루스는 자기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 무구한 단어가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올 지 뻔히 알았다. 말하자면 불가능 했다. 하지만 아이는, 배트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던 아이는 어떻게든 행복을 쥐어주고자 말을 했을 테고 그 결과 배트맨은 배트맨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때에 브루스는 클락의 웃는 얼굴을 다시 떠올리고 만다.
어쩌면. 어쩌면 클락과의 관계는 꽤 평등한 거래일지도 모른다. 클락은 결코 브루스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브루스가 배트맨인 만큼 클락 역시도 슈퍼맨일 테니까. 클락은 브루스의 행복을 위해 슈퍼맨이 아닐 수 없을 테고, 브루스는 배트맨을 위해 행복할 수 없었다. 아니, 이제 행복이 무언지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선택적 인지란 인간의 일상에서 종종 관찰되는 일이었다. 요컨대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며,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한다. 브루스는 자신이 클락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인간이란 때때로 기이한 법이다. 신체에 어떤 이상도 발견 되지 않고, 브루스의 인지나 떠올리는 기억이 간섭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브루스는 지금 말하자면 최면에 걸린 상태였다. 어쩌면 레슬리의 말이 맞았다. 브루스에게는 그의 관점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줄 상담가가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문제의 화살표는 브루스에게로 되돌아온다.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망각과 외면이 자행되었다. 푸는 법은 간단했다. 최면에 걸리지 않으면 된다. 브루스는 숨을 들이켰다. 곧 목적지로한 선착장 근방으로 다다른다. 브루스는 기수를 낮추었다. 아직, 안개 속에 도시가 잠겨있다. 안개 속에 잠겨있는 도시는 마치 시커먼 바다와 같았다.
지금 브루스에게 필요한 것은 집중이었다. 강렬한 이미지는 이런 때에 유효한 법이다. 박쥐. 브루스는 박쥐를 떠올렸다. 어느 날에 인가 굴에 빠졌을 때 새까만 어둠 속에서 외부인의 침입에 잠을 깬 그 존재들이 어린 브루스의 살을 긁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되려 했다. 아니, 그가 되어야만 한다. 네, 아버지 저는—
—저는, 박쥐가 되어야겠어요. 브루스는 배트윙 문을 열었다. 멀리서 총탄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들린다. 도시의 소리가. 지금 위치는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건설이 중단된 철골 구조물이 있는 공사장이었다. 그래플 건을 들어 그 구조물이 있을 방향을 향해 발사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와이어를 타고 손끝에 전해졌다. 배트맨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던졌다.
공중을 가르면서 안개에 잠겼던 도시가 먼지를 털어내듯 그 우울한 형상을 드러냈다. 차가운 공기가 카울아래 드러난 뺨을 스쳐 지났다. 그 매서운 바람 속에서 느껴진 것은 기이하게도 살아있다는 실감이었다. 힐끔 본 결과 선착장 끝에서 클락이 몇몇 무리와 대치중이었다. 얼빠진 헛걸음은 아니겠군. 현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서늘하게 드러난 철골 한 끝에 발을 붙이면서 배트맨이 생각했다.
클락은 무리들이 겨누는 총알을 피하는 리액션 없이 맞고 서있었다. 클락의 정체를 생각하면 납득 가는 일이었지만 브루스는 클락이 좀 더 조심하길 바랐다. 연약한 살가죽 아래 인간이 품고 있는 것은 위험한 것이었다. 클락은 브루스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텐데도 그것을 항상 잊는 듯 했다. ...뭐, 그래도 상관없겠지. 왜냐면 배트맨이 이 자리에 있으니까.
브루스가 난장판으로 뛰어들었다. 퍽하고 배트맨의 발이 클락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덩치를 차 날렸다.
“박쥐새끼가 둘이라고?!”
“쏴! 쏘라고!”
배트맨에게 총질을 해대는 갱단도, 장비와 능력을 무기로 서슴없이 그 한복판에 뛰어드는 자신도 이제 전부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브루스는 자신의 등 뒤에 있던 남자 몇이 누군가의 손에 제압된 것을 알았다. 브루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배트맨은 저만치 출발하기 시작한 트럭을 쫓았다. 출항한 선박은 슈퍼맨이 맡아줄 것이다.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각, 도시는 잠들어있었다. 중간에 소란스런 경찰 사이렌 소리가 났지만 이 도시는 그런 소란쯤에는 익숙해져있었다. 어둠이 깔린 주택가로 두 인영이 들어섰다. 둘은 무려 슈퍼맨과 배트맨이었다. 나란히 걸음을 옮기는 두 히어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슈퍼맨이었다.
“결국 무기 밀매로 말단들만 잡혀갔네.”
“조무래기 갱단에게는 그 정도도 충분한 타격일 테지. 더 날뛰려 들면 완전히 손봐주면 돼. 그땐 숨거나 도망도 못갈 테니까.”
딱딱한 어조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지금 브루스의 머릿속은 도망간 갱단 보스의 행적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을 터였다. 클락은 꼭 짧은 휴가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클락이 가벼운 어조로 농을 건넸다.
“내일이면, 배트맨이 둘이라는 기사라도 뜨는 거 아니야?”
줄줄이 사탕마냥 꿰여서 고담 경찰에게 잡혀가는 무리들은 히스테릭하게 이 미친 도시에 저 미친놈이 둘씩이나 있다며 발악을 했다. 도망치는 선박의 신원과 그 본거지를 확인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한 후 돌아온 슈퍼맨은 먼발치 위의 하늘에서 그 소란을 들었다. 그들의 말에 화가 났지만 그것을 집단 광란쯤으로 치부하는 경찰들의 태도에 조금 기분이 풀렸다.
흥, 하고 시니컬한 코웃음이 들렸다.
“이제... 다 원래대로 돌아온 거야?”
클락이 잠잠한 배트맨의 옆얼굴을 보며 물었다. 브루스는 답이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분명한 긍정이었다. 클락이 브루스의 손을 잡아 세웠다. 인상 쓴 배트맨의 얼굴이 정면에 다가왔다.
“브루스.”
“그, 이름.”
무거운 목소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지금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가라앉은 목소리가 엄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배트맨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 클락의 손에서 벗어난 배트맨은 목적지인 케이트와 톰의 집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집 우편함 앞에서 잠시 멈춰 섰던 배트맨은 곧 홀연히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그들의 집에서 멀어졌다. 마치 다신 볼 일이 없길 바라는 듯 쌀쌀 맞았다. 우편함에는 엽서 한 장이 꽂혀 있었다. 그것을 짧게 바라본 클락은 브루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 소리라도 적고 온 거야?”
클락이 과장되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앞으로 댁 아들이 말로 문제를 일으키면 그땐 배트맨이 그 뒤를 쫓을 거라고 써 놓았지.”
여전히 농담과 진담이 구분되지 않는 투였다. 배트맨은 자신의 벨트 한 쪽에서 그래플 건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정신이 든 김에 이대로 본업에 복귀할 샘인 모양이었다. 적당한 타깃을 찾아 와이어를 고정시키려던 배트맨을 슈퍼맨이 안아 들어서 공중에 떠올랐다.
“이봐.”
화가 억눌린 목소리였다. 바보 브루스. 안고 있으면 언제나 안심하면서. 배트윙을 언제까지 항구 한 구석에 방치해둘 수는 없으니 그를 안은 채 웨인저택으로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클락은 그냥 이 상황에 만족하기로 했다. 세상 어느 누가 가시 돋친 상태의 배트맨을 안아 올릴 수 있겠는가.
“브루스.”
“그러니까 지금은 그 이름—”
“아니, 브루스. 내 말 들어 줘.”
클락이 고집스레 미간을 좁힌 배트맨의 눈매를 들여다보았다. 공중에 떠있는 탓에 클락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불만스러운지 브루스의 입술이 살짝 삐죽하고 나와 있었다.
“어제 자네든, 그 전이든, 지금이든 다 자네야. 그 모두 브루스 웨인 자네라고.”
“난 그러고 싶은 게 아니야.”
“알아.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자네가 바란 것에 자책하지 말란 거야.”
클락의 말에 브루스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클락이 그런 브루스를 어느 높은 빌딩 옥상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브루스는 발이 단단한 고정면에 닿았음에도 곧바로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브루스는 클락을 보고 있었다.
“으... 길게 말을 잘 못 만들겠어. 그러니까, 이렇게 해.”
클락이 표정 없이 자신을 보는 브루스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지금부터 자네에게 마법을 걸 거야.”
브루스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려진 것을 카울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그에 클락이 더 크게 미소 지었다. 머리와 가슴, 결국 말의 차이지 둘 모두 근원은 같았다. 클락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택했고 다시금 자신의 욕심을 꺼내보였다.
“자넨 꼭 행복해질 거야.”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그러나?”
꽤 진지한 물음이었다. 클락이 브루스의 양손을 꼭 마주 잡았다.
“‘우리’라고 안 될 이유가 없잖아.”
“...”
“브루스, 우리라고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하 하고 무거운 한숨이 도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숨이 채 끝나기 전 브루스가 무겁게 말했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평행선을 달릴 거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겠지?”
“그래도 자네, 지금 나한테 우리 관계를 끝내자 거나 하는 소리는 한마디도 안하잖아.”
클락이 잡은 브루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난 그거면 충분해.”
“...거짓말을 하는 군.”
“뭐, 좀 더 바라는 게 있긴 하지만. 브루스, 나도 비밀이란 걸 가질 수 있잖아?”
“자네가?”
브루스가 건물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다시 배트맨으로서 고담 한복판으로 이동할 모양이었다. 이번에 클락은 그런 브루스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따가...”
클락을 보지 않은 채 브루스가 말했다.
“이따 부모님 묘지에 갈 거야.”
“같이 갈게.”
브루스가 뒷말을 잇기 전에 클락이 말을 뺏었다. 브루스가 짧게 클락을 돌아보았다. 역시 그의 입가가 웃고 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배트맨은 고담을 향해 발을 뗀다. 언제나의 광경이었다. 클락은 브루스가 남긴 ‘고맙소’ 단 한단어가 들어있는 박쥐가 그려진 엽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엽서를 받아볼 여자와 그녀의 아이를 생각해본다. 아이의 엄마는 크게 안심하겠지. 아이는 기뻐할 것이다. 그 걸로도 충분히 희망적이지 않을까.
박쥐가 도시로 날아가는 광경을 보며 클락은 세 가지의 이름을 걸고 그의 행복을 바란다. 늘 그렇듯, 온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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