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다. 서늘하게 식은 공기가 조용히 침대 위에 앉았다. 클락은 습관대로 오전 일곱 시에 말갛게 눈을 떴다. 클락의 옆에는 단정하게 눈을 감은 브루스가 있다. 어스레함 속에서도 똑 떨어지는 그의 얼굴은 언제고 보기만 해도 포스스 웃음이 나와서 클락은 미소를 깨물며 깊은 잠에 빠진 브루스의 뺨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차갑다. 클락은 서둘러 브루스의 목 위까지 꼼꼼하게 폭신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브루스는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평상시에 체온이 그렇게 높지 않은 브루스는 그 탓일까 유독 아침을 힘들어했다. 사실 더 확실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밤이면 밤마다 빼곡하게 차서 빠질 줄 모르는 그의 자경 활동 스케줄에 있었지만 브루스는 그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창문에서 내리쬐는 볕을 피해 시트 속에 몸을 말아 넣으며 브루스가 클락에게 아이처럼 칭얼거리던 것이 아직도 선하다. 그나마 그 때는 브루스가 제대로 의식을 차린 축에 속했다. 클락이 브루스의 옆에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된지는 벌써 꽤 많은 시간들이 모여서 반짝반짝 예쁜 모래성을 쌓고 있다. 그 성의 벽돌 하나하나를 이루는 나날들을 클락은 전부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출근을 위해 부산스러워진 클락의 움직임에 브루스가 투정을 부리던 날도, 의도 한 건지 제 매력을 주체하지 못한 건지 야살스런 눈초리로 배웅인사를 해주던 날도, 그저 피곤에 깊이 잠겨서 클락이 안겨준 이불을 꼭 끌어안고 잠에 빠져있던 날도 전부. 그 날들을 구성하는 모든 초 하나하나 전부를.
오늘의 브루스는 깊이 잠이 든 브루스다. 클락이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면도를 하고 출근 준비를 끝낼 때까지도 브루스는 조용했다. 그 모습을 보며 클락은 아침을 거르기로 마음먹는다. 브루스가 함께하지 않는 식사는 클락에게 별 의미도, 소용도 없으니까. 클락은 잠에 빠진 브루스의 식은 뺨 위에 입을 맞추었다.
“다녀올게.”
밀어를 속닥이듯 클락이 인사했다. 가벼운 바람이 뒤에 남았다. 그 움직임에 브루스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조용히 나풀거렸다.
그와의 집에서 떨어진 위치에 있는 도시는 소음과 온도로 넘쳐난다. 이따금 교차로에서 신경질적인 경적이 들리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인다. 어느 새 해는 찬란하게 저쯤에서 노랗게도 빛난다. 제 생명을 태우며 도시를 따뜻하게 데우는 빛이 사방에 밝다. 그리고 클락은 그 햇살을 머금으며 파랗게 살아있다.
클락이 이 거대한 퍼즐과도 같은 세상 어느 매쯤에 있는 자신의 위치에 몸을 끼워 넣으면 몇몇은 클락의 등을 두드리며 말없이 격려해주었고, 몇몇은 한숨 뒤로 눈물을 감추었으며, 또 몇몇은 화를 내기도 한다. 세상은 이렇게 알록달록한 색깔들로 이뤄져있다. 그렇다면 브루스는, 클락이 태평하게 생각했다, 브루스는 어떤 색일까? 클락은 아주 손쉽게 검은색을 떠올렸다. 채도 없이 명도의 차이로만 이루어진 배색들. 그들이 주조하는 세상의 단순함과 단호함이 곧아서 마치 직선과도 같았다. 무수하게 많은 점들, 얼룩들이 들어 차있는 직선이었다. 클락은 그것들의 이름이 아픔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기억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것도 안다. 또 브루스는 파란색과도 잘 어울린다. 클락은 숨겨둔 보석을 찾듯 그의 검은 가죽 뒤에서 그것들을 보았다. 차갑고 냉철하게 빛이 나는 지혜와 모든 것을 유유히 감싸고 침묵하는 우주가 뒤섞인 그의 눈동자의 색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클락 자신이 그의 빅 블루가 아니던가. 클락은 자신이 욕심을 부리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브루스가 그 욕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준 이상 클락이 그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빨간색은 어떨까. 예전에 장미를 안고 있던 브루스처럼... 아니, 클락은 이번에는 부정한다. 그에게 너무 많은 원색을 줄 수는 없다. 안 그래도 브루스는 자신의 유니폼을 보고 몇 차례인가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그런 브루스에게 클락이 파란색과 빨간색을 매치시켰다는 사실을 그가 알면 썩 유쾌해하지 않을 테다. 그에게 붉은 색은 필요하지 않다. 절대, 절대로, 다시는.
브루스와 떨어져있는 클락의 시간은 바쁘지만 느리게 흘러간다. 클락은 틈틈이 귀를 기울여 그가 혹시라도 남겼을 아주 작은 흔적들, 포옥하니 조용하게 내쉬는 숨소리나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근섬유의 활주, 두근두근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그의 박동 전부를 듣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브루스는 비밀스런 사람이었고, 자신의 프라이버시에 민감한 사람이다. 비록 그 자신은 필요할 때면 남의 개인정보 따위 마치 해부학 교실에서 표본을 관찰하는 과학자라도 되는 듯 쉬이 갈라보고는 했지만. 클락은 브루스의 성미가 참아줄 수 있을 만큼은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볼 줄 아는 남자였고, 제 박쥐가 자신의 곁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된 연인이었다. 보고 싶어, B. 아주 많이. 벌써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온 지가 며칠, 몇 달, 몇 년은 지나버린 것만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입술에 접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멈출 수 있을까. 그의 입술에 닿았을 때 제 입술에 돌아오는 것들을 마주하고도...
클락은 보고 있는 매체 모두에서 빠르게 업데이트 되는 국내 신문사들의 모든 정보들을 눈으로 훑으며 바쁘게 다음 소식을 구상해나갔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있는 소식은 이미 낡아버린 것들이다. 저스티스 리그의 의견표명이라던가. 고담의 범죄야 말할 것도 없고. 조롱하는 사람, 추종하는 사람, 그리고 모방하는 사람들. 슈퍼맨이 어쨌더라는 따위의 이야기. 주식의 변동. 사회의 움직임. 누군가의 장례식. 변화하기에 변하지 않는 것들과 변하지 않기에 변해버린 것들. 이 모두가 낡았고 퀴퀴하다. 클락은 먼지 냄새가 나는 그것들을 무심히 듣고 보았다. 그러다 잠깐씩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하늘을 난다. 브루스와 떨어져 있을 때도 눈알이 쪼개질듯 파란 하늘에 있자면 마치 그의 눈동자 속에 빠진 것만 같다. 이 너른 하늘이 이제 클락의 다른 쉼터가 되고 있었다. 브루스, 구름 위에서 숨을 한가득 마시며 공기보다도 투명한 그의 이름을 생각했다. 하지만 클락은 꿋꿋하게 브루스를 찾지 않는다.
방의 온도는 여전히 차갑다. 클락은 온도계를 확인하며 수은주가 기준보다 높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손에 들고 온 분홍빛의 앙증맞은 장미는 벌써 얼어서 그 꽃잎이 조금 상했다. 어느 날인가 비에 흠뻑 젖어 브루스에게 엉망이 된 꽃다발을 주었을 때 그 초라해져버린 선물을 브루스가 주저 없이 예쁘게 웃으며 제 품에 안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도 이런 분홍 장미나, 아님 나는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해바라기 같은 것을 주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클락은 차마 그 때 브루스가 붉은 장미에 물들어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브루스.”
대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클락은 괜히 그를 불러보았다. 그의 이름이 어느 샌가 클락의 인사말이 되고, 약속이 되었으며, 기도가 되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밤이 찾아오는 줄도 모르고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브루스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살짝 움직인 것을 빼면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심지어 이불에 잡힌 주름 하나마저도 클락이 남기고 온 그대로였다. 클락은 그에 절망하기보다도 빙긋 웃으며 브루스 옆에 있는 화병의 꽃을 새로 갈았다. 슈퍼맨의 요새 안에서는 지나치게 건강한 심장 하나만이 처음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떨리고 있다. 그 소리는 마치 행복한 콧노래처럼도 들리다 이윽고는 목구멍을 긁어내리는 울음처럼도 들렸다. 클락은 흔들림 없는 손길로 브루스의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쓸어 넘겼다. 클락은 브루스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는 소리의 부재를 듣지 않는다. 브루스는 비밀스러운 사람이니까, 그는 꽤 바보처럼 수줍음을 타니까. 클락의 섬세한 귀에 저만치서 떨어지는 가냘픈 눈 한 송이가 사박, 이 땅을 밟은 소리가 들린다.
“칭찬해줘, 브루스.”
클락의 손이 한참 동안 브루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그의 귓불을 조물조물 주무른 다음, 상아처럼 매끈한 그의 목덜미를 지나 딱딱하게 굳은 그의 손끝을 잡는다. 클락이 쪽쪽 진주처럼 변해버린 손톱 위에 뽀뽀하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나, 모든 것을 들어도 브루스는 듣지 않았어.”
브루스, 그거 싫어했잖아. 클락이 아이처럼 웃었다. 브루스의 가슴께에 이마를 대어도 어떤 규칙적인 진동도 전해오지 않는다.
“슈퍼맨.”
클락은 저를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는 파란 울새를 담담히 마주보았다. 도미노 너머에서 볼 수 있는 저 날카로운 시선은 한 때 배트맨에게서 볼 수 있던 것과 참 많이 닮아있다. 와치타워까지 득달같이 좇아온 나이트윙이 무엇을 위해 이러는 가를 클락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딕은 클락에게 화를 내는 이들 중 하나다.
“그를 돌려줘요.”
역시나. 클락이 예상했던 요구가 이를 악문 분노와 그 속에 짙게 깔린 슬픔으로 덩어리져서 클락에게 도달했다. 자네의 아이들이 이렇게 자네를 사랑하고 있어 브루스. 클락은 그런 딕을 향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뻔한 요구에 돌려줄 답 역시도 마찬가지로 뻔하게 한 가지 밖에는 없었다. 클락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슈퍼맨, 아니 클락! 언제까지 브루스를 그렇게—”
“땅 속이나, 불 속... 그런 거랑 얼음 속이 그렇게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해.”
“얼음 속이라니! 그건 당신의 요새예요!”
“이름이 문제면 지금부터라도 거길 피라미드라고 부를까?”
“클락!”
“나는 문지지라던가... 아! 혹시 순장이라고 들어봤니?”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는 딕에게 클락이 웃으면서 이야기 했다. 딕은 입술을 짓씹었다.
“클락, 제발. 브루스를 보내줘요. 당신도 지금 이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그가 지금 당신 이러는 꼴을 보고 좋아할 거 같아? 슈퍼맨이 자기 시체를 옆에 두고 사는 그런 걸 바랄 거 같으냐고!”
식식. 화가 멎지 않아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딕이 하는 얘기이니만큼 그것이 브루스 본인의 의사와 꽤 가까운 이야기인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브루스가 아니다. 묵묵히 딕의 외침을 듣던 클락이 차분하게 말했다. 클락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그를... 되살리지 않을 수 있어?”
분에 차있던 숨이 한 순간에 그 흔적을 감춘다. “무슨...” 딕이 괴롭게 말을 흘리지만 그 끝이 분명하지 못하게 흩어진다. 클락은 계속해서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돌아와서 자신이 배트맨이라고 하지 않을 거라 약속할 수 있어?”
클락은 그가 어떤 둥지를 틀고 있는 지도 아플 정도로 잘 알고 있고, 그의 둥지가 어떤 도시에 있는지도 지독하게 숙지하고 있다. 딕의 주먹 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자네보다 거짓말을 못하는 거 같아. 아님, 브루스 자네 일이라 그런 걸까.
“브루스는 쉴 거고, 난 그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클락이 밝게 웃었다. 제 사랑을 남에게 떠벌리는 청년처럼 달콤하게.
“난 브루스의 마지막을 지킬 거야. 그가 드디어... 내 곁에 왔으니까.”
“미안해 브루스... 자네 아이와 싸웠어. 딕 있잖아... 그 애는 정말 자네를 좋아해.”
식은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추면 다디단 한숨 대신에 싸늘한 냉기가 클락의 입술에 닿았다. 그에 잠깐 목까지 무언가가 차오르지만 이제 클락은 그것을 능숙하게 삼켜낼 수 있다. 브루스의 피부 위에 바짝 코를 가까이 해도 그의 몸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다소 가시지 않은 약품의 냄새는 남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생전의 브루스보다 지금의 브루스가 훨씬 삶에 가까운 냄새가 났다. 클락은 그렇다고 믿었다.
“잘 자, 브루스.”
밤새 결코 흐트러지지 않을 이불을 브루스에게 꼼꼼히 덮어주며 클락이 몇 번째인지 모를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박쥐가 하늘을 날지 않는 몇 번째인가의 밤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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