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의 머릿속에는 위시리스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스몰빌 출신의 클락이 삼십 몇 년간을 살면서 마음에 담아온 판타지들로 구성된 리스트로써 지금 시점에서는(그리고 앞으로도) 전부 브루스에 관한 사항들이었다. 굳이 리스트를 모두 달성해야만 한다하는 의무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목록 하나하나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 클락에게는 꽤 유효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되어주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그가 귀엽거나 예쁘거나 멋지거나 섹시하거나... 하여튼 모름지기 사람은 좋은 것을 보거나 그와 함께 있으면 별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을 겪더라도 깊이 심호흡을 할 여유를 가지고 어떻게 견뎌보며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더구나 자기 일에 관해서는 보통 막무가내인 브루스가 묘하게 섹스 판타지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한 점도 있어서 클락은 종종 브루스에게 그런 식으로 뜬금없는 요구사항을 밝힘으로써 심통을 부렸다.
약 한 달 전. 리그 일을 하던 중 배트맨은 결국 슈퍼맨을 기다리지 않고 저 혼자서 중력장이 형성되는 소용돌이로 뛰어들어 그 내부에 리버스 볼텍스를 만들어 블랙홀의 형성을 저지할 수소탄을 던져 넣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그 바람에 브루스는 두 에너지의 상쇄 시 발생된 돌풍으로 날아든 철골에 어깨를 맞곤 그만 폭발에 휘말릴 뻔했다. 다행히 그러기 전에 클락이 브루스를 데리고 몇 마일 쯤 벗어난 덕분에 리그 내 히어로의 인명피해 역시도 발생하지 않았다. 클락은 그때 상황이 한시가 급했던 것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게 곧 브루스가 큰일을 겪을 뻔했던 일이 수용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클락은 한동안 브루스가 왼쪽 팔을 쓰는 작업을 삼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속으로 불안과 불만을 삭였다.
그러던 중 클락은 발견했다. 자료검색 중 곧 다가올 할로윈을 맞이하여 온갖 의상들을 판매하는 사이트의 광고배너가 인터넷 화면 측면부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걸 입어줘.”
클락이 준비한 미니드레스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몸통 부분은 스윗하트식으로 된 코르셋과 같은 형태였고 그 아래로 여러 겹의 시폰이 마치 풍성한 꽃잎처럼 짧은 치마를 이루고 있는 하얀 드레스였다. 브루스는 내심 클락은 섹시한 계열이 취향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깜찍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드레스의 디자인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스몰빌의 취향은 의외로 범위가 넓다, 고 브루스는 머릿속에 명제 하나를 저장했다. 브루스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차분하게 클락이 선보이는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동자만 굴려 진지하다 못해 엄숙한 클락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람이 기대감이 지나치다보면 오히려 비장해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겪으며 일단 브루스는 클락이 제가 바라는 바를 명확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주었다.
“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 이루라고 했었지?”
“셀프로.”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브루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받치던 손을 풀고 브루스는 가볍게 팔을 벌려 클락을 마주보았다. ‘원하는 대로(I'm all yours)’ 브루스는 그렇게 답하고 있었다.
스리피스의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브루스 웨인을 탈의한다는 건 어딘가 굉장히 선택받은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재킷부터 시작해서 벨트며 바지, 조끼... 차근차근 하나씩 그가 걸친 옷들을 벗겨내면 브루스는 제가 먼저 움직여주지는 않았지만 클락의 손길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브루스의 양말마저 벗겨낸 클락은 이제 마지막으로 브루스의 속옷에 손을 뻗었다.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드로즈의 밴드 안으로 들어오자 아주 살짝 그의 복근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따로 준비한 게 있거든.”
클락이 친절하게 설명하며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드레스와 함께 구매한 것들이 들어있을 상자였다. 클락의 손끝을 따라 하얀 상자를 힐끔 쳐다본 브루스는 클락처럼 투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무어를 납득한 건지 얌전히 허리를 들어 올려 제 마지막 남은 실오라기를 클락이 벗겨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브루스는 클락의 아파트에 있는 값싼 소파 위에서 알몸이 되었다. 클락은 잠깐 자신의 모든 행동을 멈추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감상했다. 그리고 시선은 그대로 고정한 채로 상자를 손에 잡고 뚜껑을 열었다.
브루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클락이 상자에서 꺼낸 것은 정교한 레이스로 구성된 팬티였다. 참으로 철저하다고 해야 할지, 성실하다고 해야 할지. 브루스는 제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속옷 레이스가 피부를 간질이는 감각을 고집스럽게 지켜보았다. 클락은 제가 입힌 속옷이 어디 말려 올라간 곳이나 레이스 문양이 찌그러진 부분이 없도록 보기 좋게 정돈했다. 브루스의 치골 부위에는 앙증맞은 리본이 위치했다. 그리고 이어서 클락은 브루스에게 드레스를 입혔다. 머리 위에서부터 통하게 한 드레스가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제 위치를 찾아갔다. 치마 옷감이 바스락 거릴 때면 브루스의 달달한 체향이 퐁퐁 피어났다.
“뒤돌아줘.”
클락이 브루스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브루스는 느긋하게 소파 위에서 빙글 돌아앉았다. 등받이 위에 팔을 괴고 있으면 클락이 뒤의 치마 끝을 잘 펴내고 등 쪽에 달린 지퍼로 손을 뻗어왔다. 지이이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나고 그를 따라 브루스의 피부 위를 빠듯하게 옷감이 조여 왔다. 비교적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흉부가 브루스의 가슴 근육을 그러모았다. 그러다가 브루스의 견갑골 조금 아래쯤에서 지퍼 소리가 멈추었다.
“역시 끝까지는 못 올리겠네.”
브루스, 가슴 크니까. 이상하게 어딘가 기쁜 듯한 말투였다. 이쯤에서 한 번 정도는 힐난하듯 바라봐줄까 싶어 뒤를 돌아보려했지만 클락이 브루스의 드러난 등위에 키스하기 시작하자 이번은 참아주기로 했다. 춥춥 가벼운 소리를 내며 등과 뒷목, 어깨를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던 입맞춤이 왼쪽 어깨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한 달 전쯤 부상을 당했던 부위였다. 아직 생생한 흉터위에 따뜻한 입술이 닿아오자 통증에 대비하는 몸이 민감하게 떨려왔다. 브루스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모르게 뒤로 살짝 젖혀진 브루스의 목에 클락이 실크로 된 폭이 좁은 끈을 가져다 댔다. 사락사락 귀가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하얀 끈이 리본을 만들며 브루스의 등에 길게 늘어졌다. 끈을 따라 손을 내리던 클락이 자연스럽게 브루스의 허리춤으로 움직여 옷 위에서 브루스의 피부를 쓸었다. 브루스는 몸을 돌려 클락과 마주했다.
더 남았나? 어딘가 초조해진 눈빛이 클락에게 그럼에도 담담한 양 깜빡이며 물었다. 브루스는 마치 아무렇지 않은 척 다리를 꼬았다. 클락이 그런 브루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발을 소중하게 잡았다. 발바닥 오목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자 브루스가 의식적으로 호흡을 늦췄다. 클락은 상자에서 하얀 실크 스타킹을 꺼냈다. 발볼을 감싸고 복사뼈를 지나 종아리를 야금야금 감싸 올라가던 손이 별스럽지 않게 브루스의 오금을 주물렀다. 스타킹은 근육이 단단하게 붙은 브루스의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이번에도 스타킹의 끝에 손가락을 넣어 반듯하게 정돈한 클락이 브루스의 다른 다리에 손을 뻗었다. 그 모양새를 보던 브루스가 실수를 가장한 듯 별스럽지 않게 엄지발가락을 까딱이며 클락의 중심 앞을 쓰다듬을 듯 움직였다. 안경 너머에서 클락은 웃으면서 다른 쪽 다리에도 스타킹을 마저 신기며 브루스의 다리사이에 제 몸을 밀어 넣었다.
“브루스, 이거 봐봐.”
그 자세로 클락은 상자 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가터벨트를 꺼냈다. 하얀 끈 끝에 있는 금속 클립은 슈퍼맨의 S자 마크를 그리고 있었다. 슈퍼맨의 상징이 있는 가터벨트라니, 그럼 승부벨트 쯤 되는 건가? 그거 참 꼭 필요한 상품이로군. 브루스는 성대하게 눈을 굴렸다.
“보고 브루스가 꼭 해줬으면 했어.”
“그게 본론이었군.”
“아니, 지금 이거 전부가 목적이야.”
클락이 눈을 반짝였다. 맞닿은 피부로 두근두근 뛰는 심장박동이 평범한 인간인 브루스에게마저 희미하게 전달되어왔다. 클락은 브루스가 입은 치마를 들추고 브루스의 골반 부분에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도록 버클이 달린 형식의 가터벨트를 감았다. 그 움직임을 돕느라 브루스가 허리를 들어 올려서 둘의 모습이 마치 교접하는 자세가 되었다. 치마 속에서 클락은 손의 감각만으로 브루스의 허벅지를 더듬어 가터의 클립과 스타킹의 끝부분을 연결했다. 잠시 허리를 들고 있던 탓에 다시 소파 위로 몸을 내릴 때 조금 불편한 자세가 되어서 브루스가 클락의 몸 아래서 작게 바즈락대자 클락이 제 몸으로 브루스를 깊이 누르며 소곤거렸다.
“가만.”
브루스의 의도가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지만 저를 콕콕 쏘아보는 브루스의 눈은 언제고 즐거운 법이었다. 가터벨트로 스타킹을 전부 고정시킨 클락은 사과를 하듯 브루스의 엉덩이를 받쳐 다시 제대로 소파 위에 앉혀주었다. 클락이 아주 조금 몸을 뒤로 물렸고 곧장 브루스는 클락의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두 입술이 마주했다. 살짝씩 각도를 틀면서 둘은 서로의 입안 곳곳에 닿았다. 그러다 클락의 안경이 방해가 돼서 또 잠깐은 거리를 벌린다. 묻어난 타액 탓에 브루스의 옅은 입술이 촉촉하게 부풀었다.
숨을 고르듯 브루스의 옆에 손을 받친 채 잠시 그대로 있는 클락에게 브루스가 발끝으로 그의 배꼽에서 가슴까지 죽 따라 그린 다음 무릎으로 클락의 턱을 받쳐 올렸다. 클락의 귀에 브루스의 허벅지 옆을 팽팽하게 가로지르는 가터벨트의 미세한 긴장이 들렸다.
“예쁘다.”
클락이 영 엉뚱할 정도로 순박하게 중얼거렸다. 잠깐 브루스가 제 아랫입술을 씹으며 웃었다. 브루스는 제 목을 감싼 끈을 풀어내 클락의 뒷목에 두르며 그를 잡아끌었다. 성급함이 그대로 묻어나서 꽤 강한 힘이었지만 클락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하중이었다. 가볍게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클락의 몸 아래 흐트러지며 브루스의 허벅지 위를 타고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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