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새가 살아있을 적의 dceu입니다.
울새는 익명으로 처리했습니다.
일단 딕과 슨이를 염두에 두었는데, 슨이에 조금 더 비중을 두었습니다...만 약속된 캐붕입니다.
뼈대가 시원스러운 손이 은빛 포크를 쥐고 능숙하게 파스타 면을 돌돌 감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사소하고 정교한 동작, 작은 근육들이 섬세하게 빚어낼 남자의 아기자기한 행동을 길게 관찰하고 싶었다.
남자를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를 만나고 도련님이란 낯간지럽기 짝이 없는 호칭에 점점 안면이 정착될 무렵에 아이의 세계는 브루스 웨인이란 아름다움의 시작이자 절대적인 기준을 얻게 된다. 후미진 골목에서 공갈을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섬뜩한 날붙이를 꺼내들어 목숨을 위협하는 일 따위야 숱하게 벌어지는 이 도시에서 그것들은 그리 신기할 것 없는 폭력의 집합이었지만 아이는 뒤로 크게 내뺀 단단한 주먹이 시원스럽게 질러 나가는 모습이 그렇게 호쾌한 호를 그릴 수도 있다는 걸 요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길고 튼튼한 다리가 십분 그 장점을 살려 전투 중 바쁘게 활용되었고 쉬지 않고 연계되는 동작과 동작의 흐름을 춤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아이는 생각했다.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후하고 내쉰 투명한 숨이 미로 화하는 것을 아이는 선명하게 보았다. 피와 땀의 냄새가 뒤섞여 비릿할 공기에 이상한 청량감이 돌아 머릿속을 맑게 했던 것도 어둑한 밤공기를 줄 하나에 의지해 가르면서 무심코 크게 웃음이 나오던 벅참도 이 비루먹은 도시가 가고일상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내려다보자면 아름답게도 보일 수 있다는 것도 모두 남자, 브루스 웨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그의 아름다움은 비단 배트맨으로서 그치지 않는다. 웨인기업의 회장으로서 잘나가는 대부호의 가죽을 뒤집어썼을 때의 그는 그것이 차마 얄팍한 연기라 치부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완벽하다. 물론 그 완벽을 만들어낸 데에는 그의 평생에 일조한 집사의 공도 있겠지만 아이는 그의 커다란 몸이 느긋하게 움직일 때, 줄기가 가는 유리잔을 집어 들거나 누군가와 악수를 나눌 때, 걸친 의복의 끝자락을 손끝으로 정리할 때,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에 눈썹하나 찡그리지 않고 얇은 미소로 대처할 때 그 모든 장면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 속이 간지러웠다. 다른 누군가였다면 그저 재수 털리는 상류층의 거들먹거림으로 보일 한들거리는 모습마저 브루스 웨인의 것이 되면 어엿한 열연이 되고, 잘 짜인 극이 되었다. 많은 이들 앞에서 고담을 치켜세우는 연설을 한 뒤 박수갈채를 받는 브루스의 등 뒤에서 아이는 휘유, 하고 남들은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가느다란 바람 소리를 귀에 담은 브루스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고,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브루스는 정말 잠깐 눈꼬리만으로 웃었다. 의기양양한 듯도 보이고 이쯤이야 하고 여유롭게도 보이는 아주 짧은 곡선이었다. 그리고 그 곡선을 만들어낸 각도가 아이의 가슴을 크게 뛰게 했다.
정말 문득 떠오른 일이었다. 새하얀 접시에 담긴 파스타를 포크에 잘 말아서 제 입으로 가져가 먹는 브루스의 모습이 보고 싶다고 아이는 정말 뜬금없이 생각했다. 어쩌면 지난 저녁에 브루스가 아이를 놔두고 한창 큰손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는 애널리스트와 단 둘이서 식사를 하러 나가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전망 좋기로 소문난 레스토랑에서 도시야경이 훤히 보이는 식당 제일의 자리에 앉아 브루스는 여자와 로제파스타를 먹었다고 했다. 그가 포크를 사용하는 모습 정도야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빈번하게 보았지만 그래도 원치 않게 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벌충이 하고 싶었다.
바라는 게 떠오르면 아이의 행동은 빠르다. 아이는 알프레드에게 부엌을 사용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단순히 식기를 다루는 브루스의 모습이 보고 싶은 걸로 그치지 않고 아이는 왠지 알프레드가 준비해준 음식이 아닌 자신이 직접 요리한 것을 브루스가 먹어줬으면 싶었다. 파스타를 만들겠다는 아이의 말에 집사는 의아했는지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은 필요 없으십니까?”
“괜찮아!”
아이는 미리 찾아 적어둔 레시피를 손에 흔들며 밝게 외쳤다. 요리라고는 식빵에 잼을 발라본 것 정도 밖에는 해보지 못했지만 파스타면 가볍게 해먹을 수도 있는 요리라고 했으니까 아이 혼자서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아이는 신나서 부엌으로 달려 들어갔다.
알프레드나 레스토랑의 요리사들이 하는 플레이팅에 비하면 형편없겠지만 그래도 처음 해본 것 치고는 썩 그럴싸한 접시가 완성되었다. 아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신과 브루스 몫의 접시를 트레이카트에 실었다. 그리고 알프레드는 크게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만 브루스 몫으로 와인을 한 잔 챙겼다. 아이가 테이블 위에 요리를 다 준비해둔 후에야 식당으로 들어온 브루스는 손에 종이뭉치를 들고 있는 채였다. 의자에 앉아서도 한참 서류들을 살펴보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가 언제나처럼 타박을 주었고 브루스는 아직 밥을 먹는 중은 아니었지 않느냐면서 태평하게 대꾸했다. 으흠! 브루스의 반대편에 자리 잡은 아이는 일부러 한 번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아이에게로 브루스와 알프레드가 시선을 주자 조금 멋쩍은 느낌이 들어 아이는 자신이 가지런히 놓아둔 식기를 손끝으로 툭툭 건들었다. 그제야 아이가 차린 상 위에 눈길을 준 브루스가 제 앞에 놓인 파스타 접시와 그 옆에 붉은 와인이 담긴 글라스를 확인하고 피식하니 가볍게 웃었다. 역시나 알프레드는 입가를 살짝 굳게 다물었지만 아이가 준비해온 술 한 잔에 대해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브루스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저 옆에다 갈무리하고 끝에 빛이 동그랗게 맺혀서 반짝이는 포크를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긴 손가락이 가볍게 식기를 쥐고 아이가 머릿속에서 그렸던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돌돌돌, 기다란 파스타면을 포크에 소복이 감았다. 아이는 설렘에 찬 눈으로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정작 자신의 접시에는 제대로 손도 붙이지 못하면서 힐끔힐끔 건너편의 브루스에게만 신경을 쏟은 채로 아이가 떠듬떠듬 물었다.
“어, 어때?”
조용히 파스타를 먹은 후 와인으로 입 안을 살짝 축인 브루스는
“괜찮구나.”
하고 심상하게 답했다. 심심하기 짝이 없는 짤막한 대꾸에 아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하게 피어났다. 포옥 안도의 한숨을 쉰 아이는 그제야 제 몫의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입, 두 입 정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었을 때 아이의 즐거움은 금방 저 멀리 사그라지고 말았다.
“어... 브루스.”
제 접시 위에 담긴 요리와 브루스가 먹는 요리는 분명 같은 요리다. 그것도 아이 본인이 직접 만든 파스타였다. 그렇다면 이건 도저히... 아이는 다시 힐끗힐끗 브루스의 의중을 살피기 시작했다.
“맛... 없지 않아?”
면이 뚝뚝 끊어지듯 덜 삶아진 것도 문제였고, 무엇보다 기름기가 맛없게 도드라졌다. 재료들도 어딘가 서로 각자 따로 놀듯 굴러다니고 있었고 채소가 지나치게 익어서 물컹거렸다. 본래 아이는 미식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지만 이 집으로 온 뒤부터는 그래도 그럭저럭 좋은 것에 대한 안목이 늘고 있는 참이었다. 지금 이 파스타는 도저히 브루스 웨인의 입에서 ‘괜찮다’는 평을 들을 법한 식사가 아니었다. 스멀스멀 자신이 사용한 재료가 아까워지기 시작한 아이는 차라리 알프레드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았을까하고 어깨를 푹 꺼뜨렸다. 아니면 조금이라도 빨리 브루스에게 요리를 내보이고 싶어서 맛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레시피만 의지한 채 요리를 내온 것이 문제일지도 몰랐다.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며 조심히 눈만 들어 브루스의 얼굴을 살폈다. 낮은 조명 아래에 은은하게 드러난 브루스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그렇게 아이가 자신의 실패한 첫 요리에 주눅이 들고 있는 새에 브루스는 또 파스타를 한 입 먹었다. 소리 없이 입안에서 씹은 뒤 도드라진 목울대가 그것을 브루스의 위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을 보았다. 브루스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갸웃, 아주 살짝 브루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마치 정말 어디가 이상한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 뒤로도 브루스는 별말 없이 그저 고즈넉하게 남은 식사를 마저 할 뿐이었다. 어찌나 태연하던지 아이는 순간 혹시 자기가 먹어본 맛이 잘못된 건가 싶기도 했지만 다시 입에 대어본 파스타는 분명 맛이 없었다. 브루스는 마치 행동으로 파스타가 맛이 괜찮다고 표현하는 듯 아이보다 조금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트레이에 자기 몫의 빈 그릇을 담은 브루스는 서류를 집어 들고 먼저 식당을 떠났다. 그러던 중 가는 길에 브루스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 하니 가볍게 짚었다. 그때 잠깐 마주친 브루스의 눈은 분명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는 그 흐릿한 잔상에 다시 마음 한켠을 놓았지만 자신의 접시 위에 아직은 조금 남은 파스타를 보면 그것도 그리 길게 가지는 못했다. 물론 브루스가 와하고 환호성을 지를 법한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곧 죽어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아이는 한숨을 쉬며 식은 뒤에 더 맛이 없어진 파스타의 마지막 남은 한 입을 다 먹었다.
아이에게는 아름다운 것, 혹은 좋은 것의 기준이 된 브루스는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 자체는 그런데 크게 관심이 없었다. 물론 브루스 웨인을 감싸는 것들은 전부 빼어난 것들 밖에 없었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브루스가 미에 둔감한 것이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그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밤을 오가면서 그가 기호에 둔감한 것이 아니라 어찌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독한 실용주의자라 아름다움마저도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닌 필요에 의해 요구한다. 그의 별장에 들어찬 의복, 음식, 가구 모든 것은 알프레드의 손을 거친 것들로 브루스가 직접 둔 것들은 아니었다. 웨인의 재력이 잘 가늠이 되지 않았을 쯤에는 주인의 동의 없이 이런 비싼 것들로 유리 별장을 채워도 되는 건지 의아해서, 그리고 당시에는 소박한 편이던 아이의 소비 단위 탓에도 알프레드에게 물었다. 무기나 방어구, 배트모빌 같은 것에 필요한 재료들이나 웨인이라는 입장으로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외하고도 집사가 꼼꼼히 눈을 세우고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에 대해서. 가뜩이나 알프레드는 배트맨과 로빈은 물론 브루스와 아이의 뒷바라지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집사의 편의를 위해서도 신경 쓰는 게 하나라도 줄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아이의 물음을 들은 집사는 마치 브루스처럼, 순서 상 브루스가 알프레드를 닮은 것이겠지만, 희미하게 웃으면서
“웨인 주인님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자신이 동굴에서 굴러 나온 박쥐인줄 아시니까요.”
이쯤은 상기해두는 편이 좋습니다. 담담하지만 분명 상냥함이 깃든 목소리로 알프레드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알프레드는 아이에게는 어디 꼭 필요한 곳이 아니라면 예절이나 매무새 등에 대해서 유하게 봐주는 편이었지만 브루스에게는 짬만 나면 마치 그가 ‘브루스 웨인’임을 새겨두듯 자꾸만 이것저것을 지적하고는 했다. 자세부터 시작해서 넥타이의 매듭 방법, 면도, 입에 대는 것, 몸에 걸치는 것, 곁에 하는 것... 모든 것에 대해서. 물론 브루스가 그런 알프레드의 말을 잘 듣는가하면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전에 어느 재력가의 저녁 만찬에 초대를 받아 브루스와 함께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소량의 음식을 담은 접시가 순서에 맞추어 연달아 코스로 나오는 만찬이었다. 그 요리를 한 사람은 프랑스의 어느 이름도 어려운 콘테스트에 참가해서 우승을 했던 알아준다는 아무개라고 만찬을 주체한 주인이 겸손을 가장해서 이야기했다. 접시에 담긴 요리들은 하나같이 다 예뻤다. 물론 그때 한참 배가 고팠던 아이에게는 이걸로 배가 차긴 할까 싶은 정도의 감상밖에는 주지 못했지만 여하튼 요리라기 보단 작품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법한 음식들이었다.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은 재료의 조화가 어떻고, 접시에 담긴 모양새가 어떻고를 들며 요리사를, 정확히는 주인을 치켜세웠다. 브루스도 몇 번쯤은 맞장구를 치며 아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중에 본래 목적이었던 어느 정치가의 동태를 살폈다. 아이가 먹기에는 도통 이게 간이 적절한 건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고, 사실 입에 넣는 순간 사라져서 맛의 유무는커녕 배가 부른 지도 통 알 수가 없어 코스가 끝난 뒤 디저트로 쇼콜라 무스를 눈앞에 두고서야 위에 뭐가 차긴 찼다는 것을 알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이는 물었다.
“솔직히 밥 별로였지 않아?”
내심 브루스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주길 바라면서 아이는 어딘가에 부착해둔 도청기에서 나오는 신호를 듣고 있는 브루스를 보았다. 아이의 시선을 받은 브루스는
“글쎄.”
하고 정말 그런 건 눈곱만큼도 신경 써 본적이 없다는 듯한 서늘한 태도로 대꾸했다. 그리고는 바로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챙겨온 PDA로 무언가를 살펴보며 심각한 배트맨의 얼굴로 돌아가 버렸다. 거의 브루스 웨인의 일들은 이런 식이었다. 결국 그의 뇌리에 깊이 남은 것은 배트맨 하나뿐이었고 그 밖의 것들에 대해 브루스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브루스가 기호가 아주 없느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브루스도 이따금 불평을 했다. 그 대상은 거의 100% 알프레드였다. 언제고 맛있는 알프레드의 요리를 행복하게 먹던 아이는 브루스가 살짝 쀼루퉁한 얼굴인 것을 보았다. 얇은 입술이 아주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꽤나 보기 드문 광경이기 때문에 아이는 숨마저 죽이고 브루스를 관찰했다. 그런 브루스에게로 알프레드가 다가갔다.
“제 요리에 불만이라도 있으신지요?”
특유의 영국 억양으로 쌀쌀맞게 집사가 물었다. 아이는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번 먹었던 그 싱숭생숭한 코스 요리에 비하면 알프레드의 요리는 그야말로 세계제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브루스는 불만 서린 표정으로 알프레드를 마주보았다.
“나... 또 살쪘어요? 아님 브루스 웨인 경매 일정이라도 잡힌 거예요?”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춘 브루스가 불퉁하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요리가 간도 담백하고 산뜻한 종류로 바뀌기는 했다. 단백질유도 붉은 고기보단 잘 삶은 닭가슴살과 특히 콩 위주로 되어있었고 어제 밤에 집사가 내오는 간식도 브루스에게는 간단한 샌드위치가 아니라 프로틴 셰이크였다. 아이는 그제야 알프레드가 해온 요리의 질감이 많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웨인 주인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으신가요?”
“...전에 브랜디 때문에 그래요?”
안경 너머로 건너오는 엄격한 시선에 브루스가 조금 풀죽은 얼굴로 물었지만 그 표정이 주인의 의도인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알프레드는 답하지 않고 브루스의 물잔에 물만 채워준 뒤 브루스의 곁을 떠났다. 아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 알프레드는 아이의 컵에도 물을 담으면서 마치 약 올리듯 이야기했다.
“도련님께선 맛있게 드시고 계신데 말이죠.”
“어? 어... 알프레드가 해준 거 맛있잖아...”
“감사합니다.”
아이는 당황해서 브루스의 얼굴을 살폈다, 알프레드를 돌아보았다 하며 자신 없이 이야기했고 알프레드는 드물게 빙긋 웃어주었다. 갑자기 둘의 설전에 휘말려 당황했지만 브루스는 인상을 찡그려 웃고 있는 알프레드를 한 번 쏘아볼 뿐 한숨을 쉬며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식이었다. 브루스는 외부에서 전해져오는 어떤 것에도 그것이 악의를 품거나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어찌돼도 좋은 듯 시큰둥했다. 지식으로써는 일말의 필요성이라도 있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머릿속에 편집증적으로 담아둘지라도 그거에는 어떤 감정이 섞여들지 않았다. 하지만 알프레드에게만은 달랐다. 브루스는 투정을 부릴 줄도 알고, 특별한 선호도 분명히 있었으며, 나름 집착해서 신경 쓰는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그 모든 것이 알프레드가 전해주는 것들에 한해서였다. 물론 브루스의 거의 평생을 돌봐온 집사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또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이가 후추를 뿌려놓은 팬케이크를 군말 없이 먹는 브루스를 보며 볼을 부풀렸다. 알프레드의 요리였다면 향료가 조금 바뀌어도 “이번 거 조금 신 거 같아요.”하고 토를 달았을 텐데.
“맛있어?”
아이가 어딘가 가시 돋친 말투로 물었다. 알프레드가 자리를 비운 터라 식탁 위에서 당당히 아침신문을 보며 능숙하게 포크로 팬케이크를 떠먹던 브루스는 아이를 마주하며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차라리 먹는 것에 장난치지 말라고 호통이라도 들었다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까. 자신의 팬케이크에는 캐러멜 시럽 위로 제대로 시나몬을 뿌려 놓은 아이는 흥흥 성을 내듯 전투적으로 팬케이크를 집어 삼킨 뒤
“학교 갈래!”
하고 분통에 차서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브루스는 조용히 시선으로만 좇다가 다시 저 혼자 어깨를 으쓱한다. 아이도, 그리고 본인도 모를 때 브루스의 입가가 잠깐 웃는다.
“도련님께 한마디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웨인 주인님.”
“뭘요?”
“소금 넣은 커피, 타바스코가 들어간 후르츠 샌드위치, 후추 뿌린 팬케이크. 모르신다고 하시진 않으시겠죠.”
“아.”
브루스가 다 읽은 데일리 플래닛 신문을 접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하룻밤에 천에서 억도 깨지는 데 설마 그걸 낭비라고 하는 건 아니죠?”
“낭비라고 하진 않습니다만, 바람직하다고도 할 수 없죠.”
“괜찮잖아요, 그 정도는... 내가 다 먹고 있고요. 못 먹을 정도로 심하게 장난치지도 않아요.”
“전 또 두 분이 새로운 맛의 세계를 탐험이라도 하시는가까지 생각했습니다만.”
하하하, 브루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어제,”
브루스가 웃음을 갈무리하며 말을 꺼냈다.
“조무래기 한 놈을 거의 묵사발로 만들길래 말렸거든요. 심통이라도 난 거겠죠.”
“오늘 아침식사는 두 분만의 벌칙게임이라도 된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브루스가 알프레드가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이쯤이면 식당을 나왔을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찾아온 알프레드를 어딘가 뚱한 눈으로 바라본 아이가 생각이 나 집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마 자신의 주인은 아이의 의도를 조금 엇잡고 있는 게 아닐까, 알프레드는 거의 확신을 섞어 추측했다. 물론 자신의 감정도 표현하기 녹록지 않은데 타인의 감정을 제3자가 함부로 입에 옮기는 건 더욱 말이 안 되는 얘기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주는 거잖아요.”
달칵, 하고 탁자와 브루스가 내려놓은 머그잔이 가볍게 부딪히며 소리가 났다.
“심통이 났든, 장난이 치고 싶었든 그게 그 애가 나한테 주기로 한 거라면 기꺼이 받을 수 있어요.”
조금 신기하지 않아요? 브루스가 웃음이 고인 눈으로 그렇게 말을 이었다. 집사는 별 감명 없는 눈길로 제 도련님의 얼굴을 보았다. 렌즈 너머에서 전해지는 무뚝뚝한 시선 속에 이미 브루스는 그것에 어떤 질감들이 담겼는지 알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마주했다. 오히려 호선이 짙어진 눈매로 브루스는 알프레드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내가 처음 탔던 맛없는 커피... 전부 마셨잖아요.”
“흠.”
브루스의 말에 알프레드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잔잔히 웃고 있는 브루스의 얼굴은 마치 알프레드에게 자신이 이만큼 자랐다고 자랑하는 듯도 했고, 이제는 집사의 의중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고 선언하는 듯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귀엽고 가엾은 노릇이지만. 알프레드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브루스 웨인을 하나하나 해체해 본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 몸이 그리는 동작들과 그의 감각을 사로잡는 것들, 그 모든 것은 거의 전부 알프레드가 브루스에게 새겨 넣은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정처 없이 어둠 속을 배회하는 야생동물이 아니라 어엿하게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이라고 눈치 챌 수 있을 만큼은. 사람의 기호는 삶과 잇닿아 있다고 알프레드는 생각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여유가 있을 때에 발휘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 마음 한편을 쓴다는 건 그 에너지만큼은 세상과 상관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도 그랬다. 그런 면에서 알프레드는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만이 사랑의 능사가 아닌 점을 알고 있다. 이걸 깨닫기에 ‘아이’는 아직도 어리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손으로 그의 턱 끝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실수인척 얇은 아랫입술에 엄지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이어진 시선 덕에 알프레드는 진흙탕 같은 어둠 속에 빛나는 일말의 순수를 브루스의 눈동자에서 본다.
“지금도 여전히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멉니다만.”
“그래도 나아지고 있잖아요.”
아이가 이곳에 온 뒤로 브루스는 조금은 더 잘 웃는다.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외부에서 들어온 작은 새가 일으킨 간지러운 바람이 그림자 속에 닫힌 동굴을 휘저으며 침전물을 위와 아래로 잘 휘젓는다. 그건 브루스의 평생에 일조해온 알프레드는 결코 할 수 없는 신선한 움직임이었다. 알프레드는 짧지만 섬세하게 브루스의 얼굴을 확인하고 마치 스쳐지나간 듯 손을 거두었다.
“오늘 넥타이,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저번에 사온 회색 줄이 들어간 거요. 그거 괜찮던데요.”
브루스가 곧장 대답한다. 알프레드는 안경 뒤로 숨겨 웃으며 주인의 출근 복장을 챙기기 위해 방을 나섰다.
감정에 있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브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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