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티스 리그 애니 hereafter 편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날조와 캐붕은 제 전공이자 특기예요.
눈 아픈 섬광이 망막을 지르고 들어왔을 때 남자는 말릴 새도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라 어떤 감정이 제 이름을 밝히기 전에 기다란 사고의 공백이 찾아들었다. 빛과 함께 남자를 포함한 사물이 송두리째 사라진 공간에서 남자의 붉은 망토 끝자락만이 간신히 남아 속없이 팔랑이며 땅 위로 떨어졌다. 텅 빈 관은 그 안에 많은 이들의 상실과 슬픔을 대신 채우고 사라진 남자를 기리며 안장되었다. 온 세계가 비통에 잠긴 슈퍼맨의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배트맨은 공식적으로 그의 추모식에도, 이어지는 행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림자 너머로 그 광경을 짤막하게 바라본 뒤 미련 없이 돌아선 것이 전부였다.
시신조차 없는 죽음에는 떠나보낼 이가 없었다. 보낸 이가 없는 데 도대체 무엇을 이유로 슬퍼해야하는지 브루스는 납득하지 않았다. 대신에 브루스는 남자가 사라지고 난 뒤에 남은 잔해들을 거두어 자신의 동굴로 가지고 들어왔다. 섬광이 스치고 지나간 단면은 몇 번을 검사해보아도 지나치게 깔끔해서 빛 속에서 사라진 사물들이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흔적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토이맨이 발포한 광선은 그야말로 존재를 말소해버렸다. 설령 핵폭발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 뒤에는 낙진이라도 남는 법인데 이 사건에는 그조차도 없었다. 섬광이 터져나갔던 대기 중에 떠다니는 물질들을 분석해보고 광선과 매우 근접한 위치에 있었던 브루스 자신을 검사해보아도 별 다른 흔적이 없었다. 소실은 명백하지만 어느 증거들도 그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100%의 답을 내지는 못했다. 브루스는 슈퍼맨의 실종이 정말 그의 증발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다른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지 남은 증거를 바탕으로는 확고하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브루스는 슈퍼맨의 죽음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여전히 동일한 결과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컴퓨터 화면을 날카롭게 살피던 브루스는 주저 없이 재검사를 시작했다. 모니터에 떠올랐던 문구들은 이미 브루스의 머릿속에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와 박혔지만 브루스가 찾고자하는 답변은 아니었다. 얄궂게도 브루스가 가장 원하지 않는 결말조차 분석결과는 말하고 있지 않았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눈은 벌겋게 핏줄이 서있었고 눈 밑 피부가 칙칙한 색을 띠었다. 슈퍼맨의 죽음은 마치 이 세계가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 하던 무언가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을 의미하듯 많은 이들에게서 생기를 앗아갔고 그 와중에 몇몇 빌런들은 제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인양 굴었다. 브루스는 언제나처럼 고담을 돌보면서 슈퍼맨의 공백으로 동요하는 세상을 어떻게든 진정시켰고 그와 동시에 슈퍼맨을 수색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패트롤을 마치고 돌아온 지 벌써 5시간이 지나있었지만 브루스는 잠을 청하지 않은 채 계속 같은 결과를 도출하는 분석을 반복하고 있었다. 브루스는 남은 증거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이 소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한참 분석에 몰입해있는 브루스의 등 뒤로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다가왔다. 조용조용한 걸음걸이와 따라서 들어오는 캐모마일의 향긋한 냄새가 기척의 주인이 알프레드임을 알려주었다. 브루스의 코끝에 희미하게 허브 차 특유의 포근한 향이 닿았을 때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명백한 집사의 의도가 보여 브루스는 인상을 쓰며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곧 주말입니다, 도련님.”
브루스와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발을 멈춘 알프레드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여전히 커다란 모니터만을 고집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메트로폴리스에 다녀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성묘라도 하라는 건가요?”
브루스가 날카롭게 눈을 치뜨고 이야기했다. 잔뜩 가시를 세우고 저를 돌아보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예정에 없이 집을 오래 비우게 되면 돌아온 뒤 손이 많이 가게 되는 법이랍니다. 브루스 도련님께서 클락님을 대신해 그분의 아파트를 돌봐주심이 어떻습니까. 도련님도 환기 정도는 시키실 수 있으시잖아요.”
한껏 날선 눈으로 알프레드를 보던 브루스는 알프레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고개를 숙이며 제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알프레드는 부드럽게 미소 지은 뒤 자신이 가져온 찻주전자 안에 든 적당한 온도의 캐모마일을 잔에 조심히 담아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브루스에게 내밀었다.
“열쇠, 가지시고 있으시죠?”
알프레드가 차분히 물었다. 한참 알프레드가 내미는 찻잔을 보던 브루스는 아무 답도 하지 않은 채 다만 그 잔을 받아들였다.
찰칵, 열쇠로 잠긴 문을 여는 소리가 울렸다. 브루스가 클락에게 그의 아파트 열쇠를 받은 지는 한참 되었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 브루스가 메트로폴리스에서 클락을 사적으로 만날 때면 브루스가 머물게 된 호텔을 이용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아주 가끔씩 클락이 브루스를 이끌고 자기 아파트로 들어오거나 더 드물게는 마치 슈퍼맨에게 그만 창문을 이용해 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브루스도 클락 아파트의 베란다를 이용해 불법 침입 하는 경우가 전부였다.
공기의 흐름이 멈춰있는 아파트 안은 귀가 아릴 정도로 적막하다. 클락의 방이 있는 층으로 올라오기 전 1층의 우편함에서 클락에게로 온 몇몇 우편물들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브루스는 그것들을 그대로 두고 올라왔다. 현재 이 집의 주인인 클락 켄트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휴가를 받은 상태로 되어있다. 데일리 플래닛에 클락의 휴가계를 내고 원활하게 결재가 되도록 손을 쓴 것은 사주인 브루스였다. 슈퍼맨이 실종한 다음날 스몰빌에 있는 클락의 고향집으로 브루스가 찾아갔다. 아들의 비보를 접하고 일에 나가지 않은 채 그저 집에서 홀로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침통하게 골몰하는 마사에게 간 브루스는 그 앞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는 마사의 얼굴은 브루스가 기억하기보다도 훨씬 나이 들고 지쳐보였다. 잠시 브루스는 그런 마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만 숙인 채 있었다. 겨우 브루스가 얼굴을 들어 그녀에게 클락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서 괴롭게 이야기했다. 클락이 살아있을 수도 있는, 어쩌면 편집증적인 브루스만의 주장일지도 모를 희박한 확률에 대해서. 목에 가시가 박힌 듯 아프게 토해지는 브루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가 말미에 가서는 다시 고개를 숙여버린 브루스의 어깨를 달래듯 토닥이며 차분한 어조로 마사가 입을 열었다.
“브루스, 네 말은... 우리 클락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거니?”
“네.”
마사가 주먹을 꽉 쥐어서 하얗게 된 브루스의 손을 건져 자신의 무릎 위에 놓고 토닥토닥 손가락으로 두드려주었다. 브루스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속살거리듯 답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이어지고 마사가 길게 숨을 골랐다. 느리게 그녀는 말을 이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클락이 직장도, 신분도 잃으면 분명 곤란하겠구나. 그렇지?”
“―네.”
브루스는 희망이라 이름 붙인 기대가 얼마나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만약 브루스 혼자서 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브루스는 결코 슈퍼맨의 소식에 분명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슴이 무너졌을 마사에게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죽음이 확정되지 않은 클락을 위해 브루스는 클락 켄트를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남겨놓아야 했다. 브루스는 자신이 어떤 끔찍한 짓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뇌리에 새기기 위해 마른입을 열어 짧게라도 꼬박꼬박 소리를 내어 마사에게 대답했다. 올려다본 마사의 눈동자는 브루스가 알고 있는 어느 눈이 보이는 따스함과 꼭 닮아있어서 목이 막혔다.
“그래... 그럼 클락은 잠깐 휴가를 간 걸로 해두자꾸나. 브루스, 네가 도와줄 수 있겠니?”
네. 브루스가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답을 한 뒤 마사의 무릎 위에 가볍게 이마를 댔다. 마사는 한참 동안 천천히, 천천히 브루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부엌이 바로 보이는 테이블에는 커피머신이 있고 그 안에는 내린 커피가 식은 채 남아 있었다. 그 앞에 머그컵이 한 잔 있다. 약간의 커피가 들어있는 머그컵 안쪽에 딱 지금 남은 양의 두 배정도의 높이에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만큼의 커피는 마른 공기 중으로 날아간 모양이었다. 먼지 몇 개가 그 안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면 이제 3시간 후면 유통기한이 끝나버릴 우유가 한 팩 들어있었다. 베란다의 창문은 걸쇠가 걸리지 않아 언제라도 출입이 가능하게 되어있었다. 브루스는 그 문을 열어 방 안으로 신선한 공기를 끌어들였다. 출근 전 클락이 거쳤을 동선을 거꾸로 짚어가듯 브루스는 그다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도, 샤워부스도 말끔하게 물기가 날아가 내부는 바짝 건조되어있었다. 수건걸이에 수건을 걸다가 제대로 걸쳐놓지 않았는지 마른 바닥 위에 떨어져있었다. 검은 몸체의 칫솔 하나는 벽에 설치된 칫솔꽂이에 잘 걸려있었지만 파란색 하나는 사용 후 급한 대로 물 컵 안에 꽂아둔 채였다. 작은 손거울이 세면대 앞에 있었다. 클락이 면도를 할 때 사용하는 거울이었다. 출력을 조절한 히트비전을 거울로 반사시켜 면도를 하는 클락은 비록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전동면도기를 하나 가지고 있다. 이건 혹시라도 클락의 집에 머물게 될 브루스를 위한 것으로 클락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세면도구들보다 비싼 축에 속하는 면도크림과 함께 서랍장 안에 정돈되어있었다. 물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본 브루스는 마지막으로 클락의 침실로 향했다.
발소리도 죽인 가운데, 브루스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고 그 사이에 끼이이 하고 조용히 침실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낮의 햇빛이 들어찬 침실은 밝고 또 고요했다. 브루스와 잠을 자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클락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불을 정돈해서 브루스에게 잘 덮어준 뒤 떠났기 때문에 일어났을 때 모양 그대로 어지럽게 젖혀진 이불은 다소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아마 이 날의 클락은 꽤나 서둘러서 출근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아침부터 슈퍼맨 쪽의 일이 바빴던 걸지도 모른다. 클락의 방 안에 남아있는 흔적들 모든 것이 집주인의 행보를 이야기하듯 생생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후의 부재를 증명하듯 바로 그 모습 그대로 굳어있는 채였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것 외에 브루스는 이 집 안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있었다. 지금 이 공간의 멈춰버린 시간은 이 집주인이 직접 움직여야한다고 브루스는 고집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텅 빈 침대를 한참 보던 브루스는 결국 고집을 꺾고 그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앉아보았다. 머뭇머뭇 손을 뻗어 시트를 매만져보면 볕이 잘 드는 방인데도 불구하고 싸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클락 켄트의 영역으로 이름 붙은 공간이 이렇게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서늘할 수 있는지 브루스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한참 침대시트만 쓰다듬다가 브루스는 조용히 그 위에 몸을 웅크려 누웠다. 침구에 보다 가까워지자 차게 식어있지만 분명 클락의 냄새가 났다.
눈을 감으면 브루스는 케이브에서 계속 분석했던 결과들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매번 같은 결과들, 진전이 없는 수색이 좌르르 머릿속에 펼쳐졌다. 현재 브루스가 손에 카드로 가지고 있는 것은 클락이 죽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그 사실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달리 어떤 결론에 다다랄 수 있을까. 브루스는 살아있고, 슈퍼맨은 망토 끝자락만 남긴 채 사라졌다. 브루스는 슈퍼맨이 죽는 날에는 분명 배트맨 역시도 그 옆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브루스가 그렇게 무력했을 때, 부상으로 쓰러져 있는 동료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발이 묶였을 때 슈퍼맨이 그 대신이라도 되듯 사라지는 일 따위는 브루스의 시나리오에 없었다. 지금 브루스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마치 바로 오늘 아침에 나선 듯 클락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공간에서 브루스는 지금 이 광경이 클락 켄트가 남긴 마지막 스냅사진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시커멓게 생각이 찾아드는 중에도 브루스를 감싸듯 공중에 부유하는 클락의 냄새가 졸음을 몰고 왔다. 요간에는 눈을 감으면 계속 회상과 생각이 교차해서 잠은커녕 잠시 눈을 붙이는 것도 어려웠는데 클락이 브루스의 감각에 닿아오자 둔한 피로가 제 존재를 알리며 몰려들었다. 이쯤이면 조건반사 수준이었다. 브루스가 픽,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짧지만 깊은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무른 것을 어르듯 브루스의 뺨에 닿아오는 남자의 손길은 상냥하기 짝이 없었다. 클락은 죄 없이 웃고 있었다. 브루스는 당연하게 행복했고,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수염을 부숭하게 기르고 꼭 야인이라도 된 듯한 형상으로 자신의 시간대로 돌아온 클락은 말하자니 긴 사연이 있었다며 멋쩍게 웃고 있었다. 저스티스 리그 인원들과 소회를 나누는 것도 잠시.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여느 때처럼,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서운 얼굴을 한 배트맨은 만일이 있으니 고독의 요새에서 검사라도 한 번 해보는 게 어떠냐고 물음을 가장한 주장을 했다. 반달 새비지 외에는 그간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인물을 만나지 못했던 점도 있었고, 한참 황량한 폐허만을 헤매다가 저를 반겨주는 이들로 북적이는 곳으로 돌아온 클락은 보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몸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답해보았지만 배트맨의 날카로운 시선은 다른 여지를 남겨두고 있지 않았고, 다이애나도 클락의 등을 떠밀며 눈짓으로 브루스의 요구를 들을 것을 종용했으므로 클락은 북극으로 향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좋은 점은 검사를 제안한 브루스가 스스로 직접 클락과 동행해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한 마디 제대로 된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클락은 아주 막연하게 브루스는 자신에게 화가 났고,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브루스의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클락이 요새의 문을 열자 브루스는 마치 자신의 동굴에 온 것 마냥 내부를 거닐었고 장비들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브루스는 손짓만으로 클락에게 할 일들을 지시했고 클락은 그것을 순순히 따랐다. 긴 침묵 속에서 브루스가 시키는 대로 검사를 받는 중 클락은 계속 그간 있었던 일들을 종알종알 이야기했다. 물론 브루스는 역시나 별 반응을 돌려주지 않았다.
“달리 이상은 없군.”
“내 말이 맞지?”
브루스가 겨우 입을 연 것은 2시간에 걸친 검진이 끝난 뒤였다. 검사 결과가 뜬 패널을 꼼꼼히 살피며 이야기하는 브루스에게 클락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브루스는 그런 클락을 바라보지 않고 들고 있던 패널을 클락에게 떠넘기듯 안긴 뒤 등을 보이며 성큼성큼 바깥문으로 향하는 복도로 걸음을 돌렸다. 클락이 받아든 패널을 대충 어딘가로 던져두고 브루스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가며 외쳤다.
“잠깐, 브루스! 데려다줄게.”
“필요 없어.”
브루스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살짝 고개만 틀어 클락을 바라보는 배트맨의 눈이 렌즈너머였지만 서슬 퍼렜다. 차갑게 브루스가 말을 이었다.
“그럴 정신 있으면 수염 깎고 자네 어머님께 가.”
그리고 브루스는 말릴 새도 없이 빠르게 요새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클락은 쓰린 얼굴로 고담 방향으로 기수를 돌린 배트윙을 한참 지켜보다 브루스의 조언대로 면도를 하고 말끔하게 단장한 뒤 스몰빌로 향해갔다.
클락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메트로폴리스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향집 문 앞에서 뒷목을 긁으며 배시시 웃는 클락의 얼굴을 보며 크게 눈을 뜬 마사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숨죽였던 눈물을 토해냈다. 클락은 한참동안 그녀를 달래며 자신의 무사 무탈을 이야기했다. 오랜만이 엄마와 아들이 오붓한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뒤에야 엄마의 얼굴이 한시름 던 듯 밝게 개인 것을 볼 수 있었고 클락은 그때 비로소 마사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떠나는 클락에게 마사가 물었다.
“참. 브루스는 괜찮니? 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 응, 괜찮아요.”
클락이 눈썹을 찌푸리며 못미덥게 대답하자 마사가 자못 엄한 얼굴로 말했다.
“돌아왔으면 브루스와도 제대로 이야기하렴.”
알겠지? 클락에게 건네 오는 마사의 눈빛이 재차 다짐을 받아내고 있었다. 클락은 그저 난처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엄마는 브루스에게 제대로 이야기하라고 했지만 클락이 보기에 브루스는 도통 클락과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 가시 돋친 분위기를 브루스가 두르기 시작하면 클락이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런 때 브루스를 계속 밀어붙이다간 크립토나이트도 손에 쥐지 않은 채 브루스가 맨주먹을 클락에게 휘두르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저 브루스가 주먹질을 하고 클락이 맞고 하는 정도의 일이라면 그것도 괜찮았지만 문제는 그 정도로 머리에 열이 뻗쳤을 때의 브루스는 제 손이 다치는 건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달려든다는 점이었다. 물론 언제까지 이런 어중간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겠지만 우선 브루스가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어느 정도는 정리할 시간을 주는 편이 좋을 거라고 클락은 생각했다. ...실은 브루스가 클락을 대하는 기세가 워낙 흉흉해서 조금은 겁이 나서도 그랬다.
집으로 돌아온 클락은 오랜만이 켜보는 형광등 불빛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래도 클락이 한동안 비웠던 집치고는 공기가 그렇게 탁하지 않았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뱉으면 익숙한 풍경과 냄새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정말 집이었다. 새삼스럽게 자신의 방안을 둘러보면 모든 것은 클락이 남기고온 그대로였다. 변화라고는 마시다만 커피가 다 말라서 컵 안에 자국만 남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클락은 우선 커피머신에 있는 주전자에 남은 커피를 싱크대 개수구에 비우고 그 주전자와 머그컵을 틀어놓은 수돗물 아래 담가두었다. 냉장고 안을 살피고 그 중 거의 대부분의 식료품을 버리며 이번 주말에 장을 보고 올 계획을 짰다. 그릇을 씻어 잘 정리해두고 클락은 잠잘 준비를 하기 위해 침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집이 자신이 나섰을 때와는 다른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침대시트가 클락이 출근했을 적과는 다른 형태로 주름이 잡혀있었다. 그리고 베개의 위치도 머리맡이 아니라 클락이 정리해두는 것보다 아래쪽에 있었다. 혹시 마사가 이곳에 왔다갔었던 거라면 스몰빌에 갔을 때 클락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했을 테고 집안은 보다 정리가 된 상태일 것이다. 클락이 알기로 이렇게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서 동시에 클락의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는 인물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한동안 꽁꽁 갇혀있었을 공기가 포근하게 클락을 맞이할 수 있는 이유도 그 인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클락은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바로 바깥을 향해 날아갔다. 목적지는 고담, 그 도시 외곽에 위치한 웨인저택이었다.
패트롤을 끝내고 씻은 뒤 브루스는 가운을 걸치고 무거운 걸음을 끌며 침실로 향했다. 요 며칠간 브루스의 머릿속에 들어찼던 문제 하나가 해결되고 나자 긴장이 풀렸는지 피로가 더 선명했다. 커다란 문을 열고 어둑한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인기척 하나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안녕.”
침대에 걸터앉은 클락이 브루스를 보며 밝게 인사했다. 브루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저물어가는 달빛에 간신히 형상을 드러낸 남자의 존재를 보았다. 하지만 곧 브루스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은 듯 냉랭한 얼굴로 빙 둘러 침대로 다가가선 클락을 등진 채 누웠다. 굳게 등을 보이는 브루스를 클락은 계속 바라보았다. 얼마쯤 뒷모습을 보이는 브루스를 지켜보다가 클락이 조심스럽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단단히 자세를 굳힌 브루스를 팔로 끌어안았다.
“내 방이 추워.”
클락이 장난스럽게 칭얼거렸다. 하지만 브루스는 더 고집스럽게 몸을 웅크릴 뿐 다른 반응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모습이 꼭 저를 지키기 위해 몸을 작게 말고 있는 아이 같아 보여서 클락은 오히려 더 힘을 주어 브루스를 꼬옥하니 안았다.
“미안해.”
브루스의 뒷목에 이마를 묻으며 클락이 속삭였다.
“다신 그렇게 없어지지 않을게.”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말지 그러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뚝뚝한 말이었지만 브루스가 반응을 돌려줬다는 것만으로 클락은 크게 안도했다. 하지만 브루스가 하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클락은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슈퍼맨은 자신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고 그 행동에 다소의 무모함이 들어갈지라도 앞으로도 아마 크게 개선하지는 못할 테다. 한편 브루스도 클락에게 무어라 토를 달아봐야 소용없는 일임을 알고 있다. 위험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할 때, 가장 무력할 때, 원치 않을 때 찾아드는 법이었고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클락이 보일 행동은 그의 성향을 보았을 때 충분히 브루스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브루스는 화가 났다. 충분히 이해 범위에 있는 일이었는데도 브루스는 클락의 행동을 막지 못했고, 애초에 클락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처신할 수 없었다.
브루스가 후 하고 길게 무거운 숨을 뱉었다. 흉강이 크게 부푼 다음 세차게 응어리 진 것들을 밀어내듯 가라앉았다. 마치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쉬는 듯했다. 클락이 보다 더 팔에 힘을 실어 브루스를 품에 담았다. 다소 힘 조절을 하지 않아 조금 아플 정도였지만 브루스는 그에 트집 잡지 않았다. 꿈결처럼 부드럽기만 한 것보다 차라리 숨이 막힐 듯 아려오는 편이 훨씬 현실감이 있어 안심이 들었다.
“클락 켄트를 지켜줘서 고마워.”
브루스의 목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며 클락이 말했다. 브루스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브루스를 끌어안고 있는 클락의 팔위에 조심스럽게 단정하고 끝이 야무진 손이 닿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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