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eu입니다.
오른쪽 링크는 성인글 버전입니다) https://znfnxh2.postype.com/post/679120/
※약물이 관계됩니다. 미리 주의의 말씀 올려요.
※사담에 본 영화 관련 잡담 있습니다. 혹시 꺼리시는 분 계실까 이것도 말씀 드려요.
아이가 성인이 된 후로 드물어지기는 했지만 가끔씩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옷시중을 든다. 갑옷 같은 근육이 두텁게 덮인 몸이 그리는 선에 맞추어 깔끔하게 떨어지는 검은 턱시도 정장이 세련됐다. 알프레드는 마무리로 옷깃을 정돈하면서 브루스로부터 한 발짝 떨어졌다. 제 앞에 있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매무새를 살펴본 브루스는 알프레드를 향하며 마지막 점검을 했다.
“어때요?”
“겉보기만큼은 훌륭하십니다.”
아직도 피가 살짝 거즈에 배어 나오는 옆구리 상처를 떠올리며 집사는 뚱하게 말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것으로도 만족했는지 가볍게 웃음을 지을 뿐이다. 안면몰수라고 할 만큼 이런 식의 뻔뻔한 주인의 작태를 볼 때면 알프레드는 조그마한 손을 방긋거리며 제게로 아장아장 걸어오던 작고 작은 아기가 생각이나 인생이 무상해졌다. 자신은 도대체 이 도련님에게 무엇을 잘못 먹여 키웠단 말인가. 그러는 한편 알프레드는 쓴 소리를 하지만서도 역시 그 바람 불면 산산이 허공에 흩어질 신기루와도 같던 소년이 이런 듬직한 존재감을 가지고 제 두 다리로 굳건하게 땅을 디디고 서서 사람들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닌다는 사실에 가끔씩은 꿈인가 의심이 들만큼 기뻤다. 비록 본인 스스로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도 모르고 매번 부숴오고 깨먹고 너덜너덜한 넝마 꼴을 만들어 오기는 하지만 알프레드에게 성인이 된 브루스의 모습은 일상적인 일인 만큼 소중했다. 결코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어쨌든 브루스 웨인은 정말 근사하게 자라지 않았는가.
말끔하게 차려입은 브루스가 스스로 운전석에 올라 별장을 빠져나가 고담 시내로 향하는 것을 알프레드는 한참 바라보았다. 새로운 시장의 취임식이니만큼 행사장에는 매스컴으로 포화돼있을 테고 내일 조간에는 또 오랜만이 방탕아 브루스 웨인에 대한 기사가 장식될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누군가 하나, 둘 정도는 옆구리에 끼고 돌아올지도 모르고. 알프레드는 걸음을 돌려 지하에 이어진 동굴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브루스 웨인이 활동하는 시간은 배트맨이 쉬는 시간이지만 알프레드는 이런 시간에도 망가진 무기의 수리, 아머의 개량과 신소재 개발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브루스 웨인의 집사란 매우 바쁜 직업이었다.
사랑을 하고 있다. 시점은 명확하지 않아 알프레드는 수많은 사랑의 이름들 중에서 자신의 이 감정은 무엇을 앞머리에 붙여야 정확한지 알지 못했다. 브루스가 혼자서는 땅 위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던 때에 발성이 온전하지 못해 “아뿌, 아뿌!”하며 무의미한 탄성 같은 외침을 이름으로 대신하여 제일 처음 부른 이가 저만치서 지켜보기만 하던 알프레드였던 때일지도 모르고, 고용인들이 전부 퇴직을 하고 텅 비어버린 저택의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서 제 어깨위로 내려앉는 그림자를 지탱하던 소년의 뒷모습이 금세 무너져버릴까 두려웠던 때일지도 모르고, 십여 년간 집을 떠났다 돌아왔다는 청년이 악을 처단하겠답시고 까만 망토를 두르며 순진한 희망에 차서 밤을 쏘다니기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결정했을 때일지도 모르고, 상실과 허무가 지층을 이루어 숨을 옥죄듯 짓눌렀을 때 그 속에서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남자가 자꾸만 나는 갈증에 소금물을 들이키는 모습이 누군가와 참 닮았다고 생각했던 때일지도 모르겠다. 제 자신의 과거보다도 선명한 브루스의 행적을 알프레드는 하나하나 장면마다 쉽게 떠올렸지만 역시 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프레드는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알프레드는 제 감정을 정의하는데 특별한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답이 무엇이 되던 간에 어차피 결론은 하나밖에 나올 수 없었고 자신의 도련님에게는 그의 제정신이 되어줄 집사가 필요했다. 그거면 알프레드에게는 다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이렇게도 간단하다 싶을 만큼 알프레드가 자신의 감정을 뒤로 미뤄놓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젊은 시절 이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군인으로 복무하며 전쟁에 참여했던 알프레드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선으로 그어진 환상인가에 대해 알았다. 누군가의 죽음, 혹은 어느 집단이 입은 재앙이 훈장이 되고 급여가 되는 전쟁 통에서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은 명분과 원칙이었다. 그 미세한 금을 마지노선으로 두고 범죄자와 영웅이 나뉘어졌다. 어떤 이는 술에 취해 오늘도 몇 마리를 사냥했네 따위로 시시덕거렸고 또 어떤 이는 밤이면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독한 위스키와 더불어 수면제를 다량으로 씹어 삼켰다가 박동이 정지할 뻔했다. 그러한 아비규환 속에서 알프레드는 회의하기보다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를 굳게 믿는 것을 택했다. 본래 소중한 것이란 바짝 마른 사막에서 제 땀방울로 굳혀 쌓아올린 모래성과도 같은 것이다. 그게 바람에 무너지지 않도록 돌보는 것도 역시 개인의 몫이었다. 거창한 듯 말하고 있지만 결국 알프레드는 자신에 대해, 인간에 대해 긍정하고 싶었기 때문에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목숨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알프레드의 감정은 스스로에게 욕망을 안기기 전에 우선 의무감을 지웠다. 세상의 온갖 소식들이 흘러가는 모니터들 앞에 앉아서 어깨를 떨어트리며 지친 한숨을 내쉬면서 때로는 분에 차 주먹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범죄자들을 쥐어 패다가 그마저도 속이 풀리지 않아 샌드백을 두드리며 피를 묻히는 자기파괴와도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는 브루스를 바라보면 알프레드가 취해야할 태도란 분명했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되 그의 곁에 오래도록 붙어있던 이가 알프레드여서 그런지 아니면 본성자체가 그런 건지는 몰라도 불행하게도 브루스 역시 고집이 세서 알프레드의 직언은 금방 브루스의 외면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번 행사에서 브루스 웨인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고담 출신의 가수와 ‘지나치게 긴’ 키스를 나누어 화제가 되었다. 취임식 연설을 위한 연단 위에서 한 팔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시장의 모습이 맨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면 귀퉁이에 당시 상황이 생생히 포착된 사진이 실려 있었다. 가수의 진한 키스를 받으며, 또 그에 순순히 응하며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브루스의 얼굴은 어떻게 보면 순진한 듯도 보이고 또 다르게 보면 유명인사의 의례적인 내숭으로도 보였다. 알프레드는 이번 브루스의 상대로 같이 기사에 오른 인물에 대해서 꼼꼼히 따져보았다. 상대는 신원도 명확했고 애정관계로 달리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도 아니었으며 어떤 뒤끝을 남기는 인물도 아니어서 브루스의 고정된 배우자가 아니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알프레드가 생각하기로 스캔들의 상대로서 그렇게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 다만 이걸 굳이 알프레드가 볼 수 있는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려놓고 자신은 태평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무기 밀수입에 대한 정보를 태블릿으로 훑고 있는 브루스의 심경이 나이가 든 알프레드에게는 조금 따라가기 버거웠을 뿐이다.
“질리지도 않나 봐요. 브루스 웨인이 누구랑 키스했네, 잤네... 뻔한 레퍼토리인데도 기사로 나오네요.”
“운동선수 기록과 같은 거니까요. 매번 메트로폴리스에게 깨지는 풋볼 선수단보다야 흥미롭지요. 하지만 웨인 주인님도 예전 같진 않으시군요. 중요도가 많이 떨어졌는걸요.”
“용케 1면에 있기는 하지만요.”
“고담 식의 의리겠지요.”
흥, 브루스는 코로 웃으면서 다시 커피를 마신다. 잘생기고 돈 많은 싱글 브루스 웨인의 키스에 대해 떠들면서 고담의 플레이보이가 아직 건재하다는 이야기 따위를 하고 있는 기사를 내리깐 눈으로 훑어본 알프레드도 심드렁하게 시선을 돌린다. 내일은 무기매매 카르텔을 들쑤셔놓은 배트맨이 1면에 뜰 차례인가?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맞이하던 모습부터 시작해서 재산의 운용방식,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와 그의 공백기 행적으로 추정되는 로맨스와 추문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진 가십들, 가끔가다 그래도 들리는 ‘웨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선행, 기득권 웨인의 뒷모습이라며 제기되는 의혹들, 다시 가십... 세상은 자신들이 원하는 온갖 관점으로 브루스 웨인에 대해 조목조목 서술했다. 모든 이야기들이 분명 사실을 기반으로 했지만 알프레드가 살펴보기로 어느 것도 진실에는 가깝지 않은 공허한 관심이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브루스가 스스로 그런 것들을 부추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브루스 웨인은 말하자면 소비의 객체였다. 박애주의를 표방하는 철모르고 헤픈 고담의 황태자로서는 물론 어둠이 짙게 낀 고담의 밤을 누비며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드는 배트맨으로서도 브루스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방법으로 고담이라는 이름의 도시에 의해 소비된다. 사생활이 부풀려지고 또 온갖 현란하고 자극적인 단어들로 점철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캔들의 제왕과 두려움을 조장함과 동시에 사회 내에서 의견을 양극단으로 가르는 분쟁을 초래하는 자경단은 신문의 판매부수와 클릭수를 높이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소재여서 지칠 줄도 모르고 새치 혀 위를 오르내리지만 정작 진짜 브루스 웨인이 누구인가는 그러한 이야기들 속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알프레드가 보기에는 호감 가는 마스크를 한 브루스 웨인도, 분노에 차서 징벌을 일삼는 배트맨도 어느 쪽도 브루스라는 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껍데기요 찌꺼기에 불과했지만 브루스는 투명한 얼굴로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하고 대꾸할 뿐이었다.
“알프레드.”
호출 벨이 울려 받으니 약간 숨을 시근대며 브루스가 집사를 부른다. 한사코 자신은 주인과 같이 유리별장 안에서 머물지 않겠다고 못을 박고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겉보기는 허름하지만 내부로 보자면 작은 방공호에 맞먹는 설비를 갖춘 트레일러에서 알프레드는 머물고 있다. 알프레드가 트레일러로 돌아간 이후에 브루스가 집사를 부르는 일은 정말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외에는(이럴 때는 브루스가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삑삑, 하는 경고음 정도로 소식이 전해온다.) 없는 탓에 알프레드는
“곧 가겠습니다.”
하고 어떤 요청이 들리기 전에 먼저 짧게 답을 했다. 브루스가 가볍게 웃었던 것 같다.
어두운 숲길을 걸어 물안개가 짙게 깔린 유리별장 안으로 들어선 뒤 알프레드는 우선 눈에 들어오는 브루스 웨인의 침실 광경을 파악했다. 목가에 찢겨진 상처가 난 브루스가 지혈을 하면서 색색 끊어지는 숨을 내쉬고 있었고 침대 끝에는 알프레드의 머릿속에는 이름도 얼굴도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너부러져 있었다. 싸늘하게 눈을 굴려 침대 옆을 보면 술잔 두 개와 술병이 있고 그들 뒤로 하얀 가루가 담긴 작은 유리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브루스가 너무 심한 부상으로 잠이 안 올 때면 스스로 처치할 수 있도록 협탁에 보관하고 있던 진정제와 수면제를 적정 비율로 섞은 약액이 들어 있는 주사가 하나 내용물이 빈 채 바깥으로 꺼내져있었다. 알프레드는 우선 이름 모를 인물의 상태 파악을 위해 맥을 짚고 동공을 확인했다.
“목숨에는 문제없어요.”
“용건은 시체처리가 아니란 말씀이시군요.”
그거 참 안심입니다. 잔뜩 가시가 돋아난 말투로 알프레드가 대꾸하자 브루스는 건조하게 웃었다. 알프레드는 믿을만한 운전기사에게 연락을 넣어 아무개를 적당히 평범한 사양의 호텔에 체크인 해줄 것을 부탁하며 그에 필요한 비용과 함께 팁을 듬뿍 얹어주었다. 유리별장으로 왔을 때는 어떤 상태였는지 모르지만 지금 여러 약물과 몸의 자율신경계의 혼돈으로 인해 운이 좋으면 호텔방에서 눈을 뜬 그는 이번 밤의 일들이 전부 꿈이거나 환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억이 애매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수도 있겠고. 고담에서는 밤을 틈타 행동하는 이에게 의식적으로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이었고 알프레드에게는(정확히는 웨인에게는) 정보의 유통을 조절할 수 있는 돈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고양이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새에 바구니에서 나오는 법이라 알프레드는 이번에는 또 어떤 가십이 화두로 올라올지 기대마저 들어 비죽 입꼬리를 비틀었다. 알프레드는 다시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욕실에서 씻고 나온 브루스는 얇은 가운을 두른 채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샤워나 술 때문만이 아닌 열기에 더웠는지 브루스는 이불을 덮지 않고 감기라도 든 사람처럼 밭은 숨을 식식 내뱉고 있었다.
“숨이 짧으십니다.”
시트 위에 뺨을 비비며 할딱할딱 호흡하는 브루스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알프레드는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마주친 동공이 전등을 켜서 밝은 실내에서도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고 알프레드가 쯧, 작게 혀를 찼다.
“가장을 하시건 놀이를 하시건, 절대 정신을 놓는 일은 하지 마시라 제가 말씀드렸을 텐데요?”
“난 얼마 마시지 않았어요.”
브루스가 희미하게 손가락을 뻗어 두 개의 술잔 중에서도 술이 얼마 동이 나지 않은 잔을 가리키며 그것이 자랑인양 말했다. 알프레드가 손끝을 시선으로 따르다 허,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몇몇 독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약물에 꽤 내성을 지니고 있는 브루스가 이렇게 몸이 열에 달아 있을 정도라면 상대는 못해도 정신이 반쯤 날아갔을 테다.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목에 붙여놓은 거즈를 살짝 떼어 확인하며 거기서 피가 더는 새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안심하면서 다시 잘 상처 위를 덮었다. 조금만 잘못됐어도 금방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위치에 그나마 가벼운 상처였다. 첫눈에 브루스의 상처를 인지한 순간부터 어림잡았던 소견이었지만 다시금 철저히 확인하고 나니 보다 나았다.
“새로운 약이 돈다잖아요. 단서는 잡아두면 좋잖아요?”
“그래서 브루스 웨인 몸팔이를 하신 겁니까?”
“저들한테 돈 많고 나사 하나 빠진 도련님만큼 맛있는 먹이가 어디 있겠어요.”
“평소에는 말려도 곧잘 박쥐 가죽을 뒤집어쓰시더니 무슨 바람이시죠?”
“당신 말대로 브루스 웨인을 활용해본 건데 그래도 나는 혼이 나는 건가요?”
알프레드의 딱딱한 말에도 브루스는 소곤소곤한 목소리로 꼬박꼬박 대꾸했다. 알프레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이 모든 것을 단순히 브루스가 보통에 하던 수사의 일부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주인의 말을 도통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순히 새로 돌기 시작하는 약과 그 뒤의 진상을 밝히고 싶었다면 분명 이런 리스크가 커다란 미끼수사 외에도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테고 그걸 이 머리 좋은 아이가 모를 리 없었다. 일곱 살 이후로 크고 작은 거짓말들을 하기 시작한 아이는 약고 영민했지만 알프레드에게는 한없이 어리게만 보였다.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 둘 중에 꼭 하나를 꼽아보자면 브루스를 그래도 덜 폭력적인 곳으로, 덜 반사회적인 곳으로 소속시키는 것은 브루스 웨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브루스의 행동은 그 웨인의 보호막마저도 위협하고 있었다. 명예 따위야 어찌돼도 좋았고 대단한 위인이 되시라 충고하지도 않지만 브루스가 불필요한 사회의 손가락질까지 제 스스로 나서서 자초하는 것을 알프레드는 도무지 곱게 볼 수 없었다. 뚝뚝 끊어지는 숨을 뱉는 브루스를 보면서 알프레드는 혹시라도 약이 생각보다 세지 않아 아무개가 브루스를 물어뜯거나 하지 않았다면, 아니 자신이 상처 입히려는 부위가 치명상이 될지 아닐지를 구별할 머리쯤은 가지고 있어서 나름 삼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알프레드가 이를 씹어 물며 이야기했다.
“두 달 전에 두 분을 끼고 오시더군요. 그건 뭐 나름 흔한 일이니 그렇다 칩시다. 한 달 전에는 취미가 험악하기로 소문난 분을 데리고 오셨지요? 한동안 주인님 셔츠에 피가 묻지 않은 적이 없었고요. 또 보름 전에는 섹스와 금품을 노리는 좀도둑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커프스단추까지 가져갔었지요. 그러다 이번에는 약쟁이입니까? 웨인 주인님. 철이 드실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나이가 들어 사고가 노쇠한 겁니까? 아니면 달리 다른 의도가 있으신 겁니까?”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건 꽤 귀엽지 않나요? 전혀 의미 없는 것도 그럴싸해 보이니까요. 이번 일은... 약물 건은 배트맨이 시정할 거예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건 당신도 익숙하잖아요.”
“수단... 지금 당신 몸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박애주의 브루스 웨인이잖아요. 몸을 원한다면 줘버리면 그만 아닌가요? 이미 배트맨인 내가 더 잃을 게 뭐죠?”
알프레드가 손으로 브루스의 가슴을 내리누르며 침대 안에 커다란 몸을 조금 잠기게 하면서 그의 코앞에서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그럼 브루스 웨인, 진짜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됩니까?”
“글쎄요.”
숨이 조각조각 나는 중에도 특유의 나른함을 잃지 않은 브루스가 자신과 바짝 가까워진 알프레드에게 마주 손을 뻗으며 그의 조끼 안으로 잘 정돈되어 있던 넥타이를 손가락에 걸어 빼냈다. 스륵, 천과 손이 마찰하면서 매끄러운 소리가 났다. 넥타이의 끝까지 주욱 쓰다듬은 브루스의 손끝에서 톡 천이 떨어졌다.
“그게 중요한가요.”
지나치게 투명한 눈동자와 굳게 빗장을 잠근 듯 단단한 눈동자가 공중에서 얽혔다. 안경너머에서 브루스는 아주 미세하게 집사의 눈이 조금 다른 빛을 띠는 것을 보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다. 다만 가슴이 따끔해서 몰래 얇은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눈을 꾹 감으면서 훅 하고 한숨을 쉬었다. 열이 식지 않은 몸을 달래 잠이라도 들기 위해 진정제와 술이 있는 쪽으로 향해 몸을 일으키려했다. 하지만 웬일로 알프레드가 계속해서 브루스의 가슴을 짚은 채 그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알―”
의아함을 담고 집사를 부르려 입을 여는 차에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끄집어낸 자신의 넥타이를 목에서 풀어냈다. 꼼꼼히 채워둔 셔츠의 맨 위 단추를 끄른 알프레드는 사나운 얼굴로 브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브루스가 동그랗게 눈을 뜨자 그 위로 알프레드의 넥타이가 둘러져 시야가 가려지고 말았다. 브루스의 머리 뒤로 넥타이의 매듭을 묶기 위해 더 바짝 브루스와 가까워진 집사에게서는 청결하고 메마른 냄새가 난다. 한밤의 넓은 사막과도 같은 차갑지만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은 광활한 냄새였다. 브루스는 저도 모르게 계속 숨을 들이키며 이미 검게 가려진 시야를 한 번 더 굳게 닫았다.
허리춤에 묶었던 끈이 소리 없이 풀리며 열이 오른 몸이 훤히 드러났다. 브루스의 살보다 약간 미지근해서 서늘하게 느껴지는 촉감이 알프레드의 손끝이 닿았던 가슴을 시작으로 상반신을 차근히 짚어 내려갔다. 소리도 마찰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희미한 입맞춤이었지만 남아있는 약기운 때문에도, 그리고 가려진 시각 때문에도 예민해진 브루스의 신경에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궤도가 그려졌다. 알프레드의 움직임은 애욕을 담은 적나라한 애무보다도 오히려 상처 입은 동료를 대신 핥아주는 짐승의 치유행위에 가까웠다. 태아 적에 어머니의 태내와 이어져있었던 증거인 배꼽 부근에서 알프레드는 조금 오래 머물며 살짝 혀를 내어 이 아이가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증거가 되어주는 그곳을 브루스의 감각 속에서 도드라지게 했다. 단단한 하복부로 입맞춤이 내려온 알프레드는 자극에 숨김없이 반응하는 아래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알프레드가 이동하는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제 호흡을 다잡아가던 브루스는 여기서는 살짝 숨을 튕기며 어금니를 꾹 물고 만다.
“아아!”
꼭 비명처럼 마지막 신음이 터지며 브루스가 몸을 딱 굳혔다. 앞은 구강으로, 뒤는 손가락으로 자극 받은 브루스는 알프레드의 손끝이 내벽 어느 지점에 닿았을 때 정을 토해냈다. 입안에 비릿한 액이 차고 알프레드는 천천히 제 입안에 들어있는 것을 빼내며 늘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에 입에 고인 액체를 뱉어냈다. 반듯하게 다림질 된 손수건 위에 정이 희멀겋게 고이자 알프레드는 그것을 잘 접어 쓰레기통으로 버렸다. 거칠게 숨을 삼키고 뱉고를 반복하는 브루스의 가슴이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알프레드는 잠시 그런 브루스의 상태를 샅샅이 살폈다. 상처에서는 피가 터져 나오지 않았고, 쾌감으로 인해 벅찬 숨을 뜨겁게 몰아쉬고 있기는 했지만 점점 진정되고 있었다. 과호흡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혈색도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다.
브루스가 몸 상태가 괜찮다는 것을 점검한 알프레드는 욕실로 가서 작은 타월을 적시어 가지고 왔다.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눈 위로 묶었던 넥타이의 매듭은 브루스가 바즈락바즈락 움직인 탓에 헐렁해져서 거의 풀려버린 상태였지만 브루스는 그것을 치워내지 않고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제 호흡을 정돈하고 있었다. 알프레드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조금 오므라든 긴 다리를 다시 벌려서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몸에 묻은 체액과 젤 따위의 것들을 꼼꼼히 닦아냈다. 만족할 만큼 브루스의 몸 곳곳이 말끔해지자 알프레드는 풀어헤쳐진 가운의 앞섬을 잘 정리하고 허리끈을 동여맸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눈가를 덮고 있는 주름이 지고 눈물이 묻어난 넥타이를 거두어들였다. 부드러운 천이 조심스럽게 제 눈꺼풀 위를 스쳐 지나자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담갈색 눈동자가 가물가물 모습을 드러냈다. 알프레드는 그것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시트를 잘 정돈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빨랫감을 모으며 알프레드는 부산하게 방의 여기저기를 오갔다. 그 모습을 눈으로 좇던 브루스가 이제 어느 정도 정리정돈이 끝이 났는지 방을 나서려는 듯 걸음을 돌리는 알프레드의 등 뒤에 대고 속닥이듯 말을 걸었다.
“자고 가요.”
머리가 큰 뒤로 제 주인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드물게도 귀여운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고개도 완전히 돌리지 않은 채 곁눈으로 답했다.
“어리광은 이쯤으로 하세요.”
매몰차다고도 할 법한 집사의 말에도 브루스는 피식피식 웃었다. 그리고 웬일인지 얌전히 이불 속을 파고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한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알프레드는 제가 수거한 문제의 약병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침실의 불을 껐다. 알프레드는 미련 없이 유리별장을 뒤로 했다.
정말, 정말 작은 주먹이었다. 알프레드는 제게 뻗어진 같은 사람의 손이지만 너무나도 여려서 도통 그렇게 보이지 않는 통통하고 조그마한 손과 그 끝에 분홍빛 앙증맞은 손톱을 확인하며 몇 번이고 제 눈에 그 모습을 되새겼다. 웨인의 이름을 달고 태어난 아이에게 그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겠냐고, 자기 몸 돌보기도 버거운 세상에서 부잣집 도련님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 따위 이곳 성직자도 하지 않겠다고 비웃을지는 모르겠지만 알프레드는 제가 조심스럽게 뻗은 손가락 하나를 반사적으로 꼭 잡는 아기를 보는 순간 이 아이의 주먹에 이 세상 온갖 좋은 것들이 한가득 쥐어졌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돈이나 명예, 그런 것들도 좋지만 그보다 그를 티 없이 웃게 할 행복을, 무섭고 무심하기마저 한 이 세상을 그래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자잘한 기쁨들이 어여쁜 점들로 가득차서 한 폭의 점묘화와도 같은 삶을 가질 수 있기를 알프레드는 바라고 또 바랐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아이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이다.
트레일러에 있는 좁다란 샤워부스에 들어간 알프레드는 전등 하나 키지 않은 채 새까만 어둠 속에서 찬물을 맞으며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자신은 안 된다. 알프레드 페니워스로는 안 됐다. 브루스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제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망의 총합보다도 알프레드는 브루스를 사랑했지만 이건 브루스를 안전하게 만들지 못한다. 알프레드는 어디까지나 브루스 웨인의 집사였고, 후견인이며, 그의 최후까지도 함께할 공범이었고 그런 알프레드의 사랑은 오히려 브루스가 마음 놓고 제 고집대로 세상의 온갖 위험과 욕망들 속으로 뛰어들도록 부추기는 촉매에 불과했다. 바꿔 말하면 알프레드가 옆에 없다면 브루스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배트맨이 될 수도, 가짜 연기를 펼칠 수도 없다는 얘기였다. 그만큼 알프레드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처럼 브루스의 모든 미친 짓을 전적으로 뒷받침해줄 수는 없다고 감히 단언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알프레드는 아주 오래전에 브루스가 자경활동에 대해서 말을 꺼냈을 때, 지금보다 한참 젊었던 그에게 사표를 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브루스는 고집쟁이였고 그런 브루스의 옆에서 알프레드는 제 존재를 지워내지 못했다. 집사가, 알프레드가 도대체 어떻게 브루스를 위험 속에 혼자 둘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였다. 그렇게 브루스의 모든 것을 같이 짊어진 대신에 알프레드는 자신처럼 범죄자로서도 거대한 연극의 단원으로서도 브루스가 가장 커다란 상처를 입은 시절의 기억을 생생하게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관계자로서도 모든 형태의 브루스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는 온전한 브루스 웨인 그 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고 그 한 사람의 자격으로만이 성립이 가능한 관계를 브루스가 언젠가는 가지기를 바랐다. 브루스의 입에서 제 자신에 대해 상관없다는 식의 말은 나오지 않도록 해줄 누군가를.
하지만 보라, 제 가엾은 주인의 곁에 있는 건 브루스의 모든 불합리를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공범자뿐이었다. 이 지독한 도시 안에서 그가 제 과거의 상흔과 함께 버렸어야할 집사만이 그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배제하고 의무를 위해 살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알프레드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지금에 이르렀다. 인간이란 존재가 이렇게 얄팍하다는 것을 오래전에 이미 깨달았는데도 세월이 무상하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모든 것은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끊을 수 있는가? 언제, 어떤 식의 일을 해서, 무슨 위험에 처할지 모르는 브루스를 혼자 둘 수 있는가?
“브,”
문득 터져 나올 뻔한 이름을 꾸욱 사리문다. 알프레드는 사위가 분간이 가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눈을 감았다. 물웅덩이 속에 폭 퍼져버린 눈동자가 발갛게 알프레드를 보고 있었다. 세찬 물줄기가 알프레드를 벌하듯 얼음가시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글의 시점은 처음 생각하기로 울새의 사후 그리고 맨옵스 이전으로 잡았습니다만 울새와 만나기 전 + 배트맨으로서 5년이상 정도 활동했을 때(울새와 만나기 직전 쯤?)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말이 될까요? 원하시는 방향으로 보아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아직도 철알피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왕 믿어지지 않는 거 저는 정말로 철알피의 입에서 "My Bruce"라는 대사가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제가 없는 걸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장작을 패고 유리별장에 들어온 알프레드가 브루스를 찾으면서 "마스터 웨인?" 했다가 대답이 없자 "미스터 웨인~"하고 장난치듯 부르는 걸 보면서 이 둘은 영화에서 본 이상으로 꽁냥꽁냥한 사이가 틀림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뭔가 주변에서는 진짜 사이 좋은 건가? 지금 싸우는 건가? 이 긴장감은 뭐지? 했는데 당사자들은 그게 애정행각이고 알콩달콩 사는 거고 그런...<
-도서관 행사에서 브루스를 서포트하면서 술을 마시면서 궁시렁 거리던 알프레드가 영화 뒤에서 브루스가 슈퍼맨을 죽이지 않고 마사를 구하러 가게 되자 "마스터 웨인"하고 부를 때 저는 묘하게 그 목소리가 즐거운 것 같다고 필터링을 해서 들었습니다. 자기가 필터링 해놓고서 "집사님 안도하셔꾸나!!"하면서 막...ㅇ<-< 뒤에 브루스가 당신은 나한테 과분해요 하는 건 미안해요를 돌려 말한 게 아닐까하고요. ...아 정말, 철알피와 사과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dc, 흥하세요 dc.
-원래 2월 중순 쯤에 알피뱃 떡 장면... 정확히는 애프터 장면으로 생각했던 건,
"결혼 얘기는 이제 그만 두는 게 낫지 않아요?"
브루스는 뽀송뽀송해진 알몸으로 침대 위를 굴러다니고 알프레드는 어느새 말끔한 옷차림을 갖춘 상태. 옷단장을 하는 알프레드를 보다가 브루스가 한들한들 묻자 알프레드는
"지금 살을 맞댄 걸로 혼동하시는 겁니까? 고담 플레이보이가 다 죽었군요."
하고 쌀쌀맞게 말함.
"내가 착각한다는 거예요?"
"네."
브루스의 물음에 단호하게 대꾸하는 알프레드. 브루스는 흐응, 하고 나른하게 코를 울리면서 잠시 입을 다물고, 알프레드는 흐트러져있는 브루스의 앞머리를 보고 습관대로 정돈해주려고 손을 뻗음. 브루스는 그 손을 잡아서 끝을 살짝 깨묾.
"별로 상관없어요."
눈꼬리를 구부려 웃으며 브루스는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알프레드에게
"그래도 키스해줄 거죠?"
이러고, 알프레드는 한숨을 한 번 내쉬며 제 도련님의 입술에 닿는다.
뭐 이런 거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이건 온데간데가 없네요. 여튼 잉야 끝나고 브루스를 혼자 두고 나갈 수 있는(물론 뒷정리는 완벽하게 끝내고) 알프레드 멋진 거 같아요!(아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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