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안경을 닦아도 보고 눈을 비벼보기도 했다. 하지만 책상에 놓인 머그컵 가장자리 위에 재주 좋게 균형을 잡고 앉아 있는 분홍빛의 존재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클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루스?"
클락이 몸을 수그리고 시선을 머그컵의 높이에 맞추어 더듬더듬 이름을 불러보았다.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클락은 거의 코를 박을 듯 그 존재에게 얼굴을 바짝 대었다.
"배트-페어리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자세로 있던 손바닥만 한 크기의 브루... 아니, 배트맨... 아니, 배트-페어리는(배트란 분명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귀여운’을 뜻하는 접두사일 것이라고 클락은 이 순간에 생각한다.) 한 손에 쥐고 있던 끝에 핑크색깔 별이 달린 지팡이로 클락의 코끝을 가볍게 톡 쳤다. 짧고 얼마 되지 않는 접촉에 뾰롱하고 소리가 나면서(정말 소리가 났다, 아기자기한 방울들이 짤그랑 거리는 것 같은 깜찍한 소리가!) 반짝반짝 작은 별빛들이 클락의 눈앞에 탄산방울처럼 튀어 올랐다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클락은 눈을 깜빡이며 살짝 고개를 뒤로 물렸다.
"마법?"
"요정이니까."
배트페어리가 새침하게 답을 하는 동안 그의 등에 있는 날개가 마치 쫑긋거리듯이 팔랑팔랑 몇 번쯤 움직였다. 클락은 책상 끝을 두 손으로 짚고 그 위에 자신의 턱을 올려놓으며 한 눈길에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존재를 조심히 살펴보았다. 요정은 검은 타이즈 위로 허리에 앙증맞은 프릴 치마가 둘러진 분홍색 레오타드를 입고 있었다. 레오타드처럼 딸기크림과 같은 색의 카울을 쓰고 있는 얼굴 아래 드러난 굳게 다물린 입술의 모양새는 배트맨과 거의 다를 게 없었다. 살짝 더 새초롬한 정도?
"난 마법은 조금 무서운데..."
클락은 일부러 눈썹을 팔자로 휘면서 우물거리듯 이야기했다. 흠, 살짝 코를 울린 페어리는 다시 가볍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별 끝에서 무언가 분홍빛을 띠는 비눗방울 같은 것이 두 개, 세 개 쯤 튀어나오더니 어떤 형상을 하며 파닥파닥 날아 클락에게로 다가왔다. 너무 바짝 얼굴 가까이로 와서 아주 잠깐 동안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생김새가 통통한 박쥐였던 것 같다. 클락에게로 날아든 박쥐들은 짧게 클락의 뺨 위로 입맞춤을 하듯 보드랍게 부딪히더니 뿅, 뿅 소리를 내며 별빛가루로 번지어 사라졌다. 클락은 자꾸 빙싯빙싯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한 손을 뻗어 페어리의 턱 끝을 구부린 손가락 끝으로 조심히 쓰다듬어 보았다. 클락의 손톱은 이 작은 존재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일 것 같아 주의를 기울였다. 너무나 작은 턱뼈가 감각에 생경하게 닿았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하고 클락은 금방 손을 거두어들였다. 작아도 너무 작았다. 힘 조절이라면 클락에게 있어서는 숨을 쉬는 것과 같았지만 배트페어리가 워낙 작다보니 도무지 조절 범위를 가늠할 수가 없어 조금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페어리는 클락의 동작 하나하나를 쀼루퉁해 보이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쯤 그러다가 꼰 다리를 풀면서 요정은 가볍게 날갯짓을 하더니 공중에 떠올랐다.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왔지."
"소원?"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페어리. 배트페어리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니 퐁하고 아기자기한 폭발음이 나고 그의 손에 자그마한 서류철이 들렸다. 페어리는 그것을 살피며 조목조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쓴 신문기사로 소송 얘기가 나왔지? 렉스 코프에서 명예훼손이니 기밀 유출이니로 데일리 플래닛에게 으름장을 놓았군. 전에는 또 청문회가 있었고... 분쟁지역에 간 게 원인이군. 아마 평소 노고는 존중하지만 지금 미국의 외교 전략과 맞지 않다며 한소리 했겠지. 거기다 어디 보자... 아, 오랜만이 하는 데이트인데 1분도 안 돼서 헤어졌군. 슈퍼맨 호출이 있었어. 그리고 돌아와 보니 고담에서 오랜만에 대대적인 아캄 탈옥이 발생해서 그 길로 둘은 얼굴을 보지 못했군."
사락사락 종이를 넘기며 배트페어리는 사무적으로 그간 클락과 그의 주변에 있었던 일들을 좌르르 나열하기 시작했다. 뒤에 가서 실수로 부서뜨린 안경의 개수라던가 집에 있는 커피포트가 고장이 나서 아침에 마시는 커피가 신문사의 끔찍한 커피가 돼버린 사실까지(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회사의 커피는 아무리 용을 써도 맛이 나아지지 않았다.) 읊자 클락은 멍하니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클락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배트페어리는 클락의 안경알 너머에서 그의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고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배트페어리니까 다 알 수 있어."
하고 간단하게 말했다.
"대단하네..."
클락이 조금 기운 빠진 얼굴로 웃는다. 새삼 다른 사람 입을 통해서 요 근황을 들으니 어깨에서 힘이 죽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맛없는 커피쯤이야 마실 수도 있는 거고, 소중한 누군가가 죽거나 크게 다치는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며, 소송얘기가 오가고 청문회가 열리고 했다고 해도 늘 있던 실랑이가 조금 도드라졌다 뿐이지 별 큰일도 아니지만 이런 일들이 겹겹이 있는 건 아무리 크립토니안의 신체를 가진 클락이었지만 피곤했다. 어쩌면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피로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거기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브루스와의 데이트도 아주 완벽하게 파투가 나지 않았던가. 클락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배트페어리가 클락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나타난 거잖나."
"응?"
"우리의 켄트를 위해 배트페어리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클락은 계속 눈만 깜빡이다가 멍하게
"정말?"
하고 되물었다. 페어리는 허리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 지금 슈퍼맨 흉내 낸 거야? 클락이 속으로 물었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귀여운 요정님을 삐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클락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브루스가 보고 싶어."
클락이 살며시 검지를 뻗어보니 요정은 그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입술에 키스할 수 있고, 서로 꼭 끌어안을 수 있는 브루스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욕심쟁이로군."
정말 그렇다. 이미 눈앞에 브루스가 있는데 브루스가 보고 싶다니. 하지만 지금의 브루스는 너무너무 작아서 손끝도 대기가 무섭다. 클락은 그저 헤실헤실 웃는다. 앉은 채로 잠깐 클락의 모양새를 지켜보던 배트페어리가 다시 날개를 움직여서 클락의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코끝을 살짝 깨물며 떨어졌다. 아주 작은 이가 피부를 스치는 게 이상하게 생생했다. 자신이 꽤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구나 싶어 눈을 깜빡일 때 톡하고 클락의 이마에 요정의 지팡이가 부딪혔다. 그리고 눈앞에서 하롱하롱 별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브루스는 언제부터 요정이었지?
반짝, 클락은 꿈에서 깨어났다. 클락은 오랫동안 누운 자세로 눈만 끔뻑였다. 자신은 많이 지친 게 틀림없었다. 본래 클락은 꿈을 잘 꾸지 않는다. 그런데 배트-페어리라니, 그것도 이렇게 선명하게... 전에 어느 완구회사에서 나온 한정판매된 특이한 배트맨 피규어를 너무 깊이 마음속에 새긴 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오죽하면 무의식이 이런 장난을 쳤을까 싶었다. 눈앞에 작은 날개를 나풀거리며 오가던 요정이 아직 뇌리에 생생해서 클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주변과 책상 위를 바라보았지만 당연히 분홍빛 요정의 모습은 없었다. 클락은 가벼운 한숨을 쉰다. 그래도 꽤 오랜만에 아침을 유쾌한 기분으로 맞이했다. 그것만으로도 배트페어리의 효과는 분명 충분히 대단했다.
"힘내야지."
클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혼잣말로 스스로를 북돋았다.
렉스 코프의 신 프로젝트에 대한 브리핑을 듣기 위해 클락은 외근을 나왔다. 소송이니 뭐니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회사PR이 있을 때면 꼬박꼬박 데일리 플래닛 귀사하고 초대를 하는 것이 상대가 유쾌하고 불쾌하고를 떠나 참 대단하구나 싶기는 했다. 아마 저번에 나온 의혹을 해명하면서 언론이 보도했던 내용과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발표해서 앙갚음을 할 겸 명예를 회복할 속셈인 듯하다. 루터도 그렇지만 그가 앞에 내세우는 인물들은 정말 하나같이 인간의 입과 언어가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증명하는 증거라도 되는 양 청산유수 같았다. 클락은 브리핑 때 나온 이야기와 자신을 포함한 다른 기자들이 던진 질문에 대답한 내용을 정리해둔 수첩을 훑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이런 걸 보면 이 세상에 공으로 먹고 사는 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말하면 역시 브루스지. 클락이 속으로 덧붙여 본다. 브루스 본인 자체는 그렇게 말수가 많지 않지만 그가 내뱉는 독설이나 웨인으로서 천진한 듯 불쑥 던진 말들은 하나같이 뼈가 단단히 박힌 것들뿐이다. 안 그래도 목소리도 그렇게 좋으면서... 클락은 살짝 볼을 붉히며 오늘은 전화하면 조금 오래 통화할 수 있을까, 전에는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얼마 못가 끊어버렸는데 오늘도 많이 바쁠까 하고 계속 생각을 하며 거리를 걸었다.
“응?”
클락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클락은 고개를 돌려 차양 아래 있는 카페의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클락의 시선이 닿은 곳에 옅은 색이 든 알이 박힌 선글라스를 쓰고 잘 빠진 정장 차림을 한 한 남자가 서늘한 얼굴로 딸기파르페를 먹고 있었다.
“브―”
쉿, 클락이 놀라서 소리로 뱉어내려하자 그런 그를 눈치 챈 남자는 태연하게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워 클락을 진정시켰다. 클락은 주변을 황급하게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는 다시 크림과 슬라이스 된 딸기를 작은 스푼에 떠서 입 안으로 가져갔다.
“안, 안, 안녕하세요.”
조심히 맞은편 의자를 빼서 뻣뻣하게 앉은 클락이 어수룩하게 인사했다. 잠시 무표정하게 클락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브루스가 별안간 화사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여 능청스럽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디보자, 음... 켄, 켐... 켐프? 켐프 씨였나요?”
“켄트입니다.”
클락은 일부러 푸념하는 톤으로 대답했다. 점원이 클락에게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클락은 금방 일어날 생각이었지만 브루스가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려 주문을 종용하듯 하자 “아, 저, 아이스커피요.”하고 주문했다. 이 남자는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랑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같이 차를 마시는 걸까, 클락은 괜히 불퉁한 생각을 해보려고 했지만 자꾸 웃음이 입에 걸리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얼마쯤 파르페를 먹는 브루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점원이 유리잔에 시원한 물방울이 맺힌 커피를 내려놓았다. 짤그랑, 얼음이 서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낸다.
“어째서 여기에... 최근 바쁘시지 않으셨나요?”
“바빴죠, 바빴어요. 애인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걸요.”
브루스가 한숨까지 푹푹 쉬어가며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여유롭게 시럽이 묻은 아이스크림을 떠먹는다. 고담에서야 브루스 웨인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지만 메트로폴리스에서는 그 행동이 보다 자유로웠다.(브루스는 그냥 메트로폴리스 시민들이 사람 얼굴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게 아니냐고도 물었었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슈퍼맨과 클락 켄트를 이렇게까지 못 알아 볼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클락은 그저 애매하게 웃을 뿐이었다.) 물론 기자나 기업가, 슈퍼맨 정도라면 그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할 테지만 그래도 그의 도시가 아닌 이곳에서 브루스는 그야말로 살짝 돈이 많은 평범한 이웃도시 시민이었다. 물론 그의 잘생긴 얼굴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 종종 마음 쀼루퉁해지는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테이크아웃으로 음료를 받아 밖으로 나가던 손님 한 사람이 가는 길에 힐끔 브루스를 보고 얼굴을 붉히며 종종 걸음을 걷는 것을 보면서 클락은 작게 코를 씰룩였다.
“요즘에는 스캔들이 없던 걸로 아는데 언제부터예요?”
클락이 슬쩍 상체를 브루스에게 기울이며 꼭 비밀 이야기라도 건네듯 낮게 물었다. 귓바퀴를 따라 흘러들어온 목소리가 간지럽게 신경을 타고 올랐지만 브루스는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 태연하게
“켄트 씨는 이런 유의 이야기 관심 없지 않나요?”
하고 되묻는다.
“그럴 리가요. ...시간 괜찮으시면 질문 몇 가지 드리고 싶은데요.”
“흠.”
빈 유리잔에 짤그랑 스푼이 부딪치며 투명한 소리를 냈다. 브루스가 클락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프 더 레코드를 요청할 거 같은데 인터뷰에 의미가 있을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클락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브루스가 계산서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자회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에 들어와 단 둘이 있게 된 후로 브루스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오랜만이 주고받은 브루스 웨인의 키스는 변함없이 기분이 좋았다. 진심으로, 더 어떤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 없이 브루스가 해주는 입맞춤은 기분이 좋다. 어르는 것도 같고, 도발하는 것도 같고, 모든 걸 내어주는 것 같다가도 매몰차게 밀어내기도 한다. 자신의 혀로 건들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입 안의 부위에서 생소한 열이 피어오를 때면 브루스의 탐정 기질은 이런 곳에서도 발휘되는가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능숙한 키스를 건네는 브루스에게 클락은 일부러 더 오래 매달리고는 한다. 피차 마찬가지이지만 지기 싫어하는 브루스는 그런 클락에게서 절대 먼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숨이 차올라서 브루스의 서늘한 눈매는 곧 발갛게 달아오른다. 입안에서 브루스의 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클락은 나는 외근 중이다, 나는 외근 중이다 주문을 외며 브루스에게서 떨어졌다. 살포시 상기된 브루스의 얼굴은 딸기파르페보다도 더 달아 보인다. 외근 중이지만 예기치 않게 브루스 웨인을 만났고 겸사겸사 인터뷰를 하기 위해 조용한 곳에 왔을 뿐이다. 클락은 다시 현실을 외어본다. ...뭐 지금 오고가는 말들 중에는 그 어느 내용도 기사로 쓸 수 없을 테지만. 하지만 보라, 캔자스의 팜보이 클락 켄트도 가끔씩은 평범하게 약간의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클락이 브루스의 허리를 바투 안으며 속삭였다.
“메트로폴리스에는 무슨 일이야?”
“렉스 코프에서 파트너십 얘기가 나오길래 거절할 겸, 정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왔지.”
“여긴 내 도시야.”
클락이 불현듯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락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던 브루스가 조금 클락에게서 떨어져서 그의 얼굴을 꼼꼼히 확인하더니 비죽 웃었다.
“인상을 좀 더 굳혀. 목소리도 내리깔고 말이야.”
브루스가 지적하자 클락이 억지로 지었던 우거지상이 흐물흐물 무너져버렸다. 클락은 결국 방글방글 웃으며 브루스의 이마에 콩하니 제 이마를 맞댔다. 아, 그러고 보니 정말 브루스를 만났다. 우연일 뿐이겠지만 절묘한 타이밍이다. 얼마쯤 브루스와 붙어 있자 클락은 저도 모르는 새에 팔에 점점 힘을 담아 브루스를 더더욱 끌어안고 있었다. 한동안은 잠자코 있던 브루스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 한 뒤 “얼마 남지 않았군.”하고 중얼거리며 가볍게 클락의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클락은 그때야 제 팔에 들어간 힘을 알고 조금씩 포옹을 느슨하게 했다. 하지만 빠져나가는 건 브루스가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바로 코앞에 있던 쌉쌀한 화장품 냄새와 그 뒤에 숨어 있던 브루스 본연의 체향이 수 센티까지 그 거리를 벌리며 멀어졌다. 그게 못내 아쉽다.
“돌아가 봐야겠군.”
“그래...”
클락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흐트러졌던 넥타이를 반듯하게 고치면서, 덧붙여 클락의 안경을 바로 잡아주면서 브루스가 흘러가듯 말했다.
“내키면 밤에 오던가.”
“정말?”
“언제는 오지 말래도 오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내가 멋대로 가는 거랑 브루스가 불러서 가는 건 많이 다르다고.”
“쓸데없이 까다롭기는.”
브루스가 피식 웃음을 섞어 타박했다. 그건 아마 자신이 브루스를 닮아가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하고 클락은 생각하면서 따라 웃었다. 클락의 팔 힘에 주름이 진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반듯하게 정돈하는 브루스를 보다가 클락이 뜬금없이 물었다.
“있지, 요정은 있을까?”
몇 번 쯤 브루스는 눈을 깜빡이다가
“수고 많은 슈퍼맨에게 상을 주고 싶어 하는 도련님 정도는 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 클락의 코끝을 살짝 깨물고 떨어졌다.
배트페어리가 만들어낸 비눗방울 박쥐는 레고 저스티스리그에서 나온 그 모양새로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고담 브레이크 아웃에서 배트케이브에 온 숲에게 경계하듯 염탐하듯 파닥파닥 날아들면서 맴맴도는 박쥐가 진짜 너무 귀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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