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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의 시작은 낡은 성경을 품에 안은 신부다. 두 개의 관에 잇따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느릿한 걸음을 밟았다. 열이 향하는 발끝에는 젊은 부부가 영면에 들 석재로 지어진 가족묘의 입구가 있다. 웨인저택 앞으로 펼쳐진 들판 구석으로 길을 닦아둔 듯 정돈된 풀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사당같이 생긴 이 건물은 웨인의 주인들이 대대로 제 삶의 마침표를 묻어두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웨인부부가 나란히 그런 조상들의 곁에 묻히는 일이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부부의 나이를 생각하면 한참 이르기는 했다. 열의 선두에서 보조를 맞추어 걷는 집사를 곁에 두고 멀거니 제 앞에 있는 신부의 검은 등만을 바라보며 파리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웨인의 새로운 가주는 나이가 지나치게 어렸다.
행렬은 마치 묘 안으로 흘러들어갈듯 막힘없이 나아간다. 입을 굳게 다물고 묵묵히 걷는 사람부터 모자 아래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사람, 이후의 일들로 머릿속이 가득 찬 사람, 어떤 생각도 없는 사람까지 온갖 군상들로 이루어진 열이지만 흐린 하늘 아래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묘의 정문을 목표로 잡은 그들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아이의 마른 뺨을 가족묘지 뒤에 펼쳐진 숲에서 불어온 창백한 바람이 훅하니 스치며 지났다. 무덤을 건너온 탓일까 묘하게 돌가루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파스락, 파스락 짐승의 날갯짓처럼 숲의 나무들이 나뭇잎을 흔들며 고요한 소음을 냈다.
특별히 초점을 잡지 않은 시선이 까맣게 번지듯이 퍼졌다. 이제 저 앞에 까만 문을 열면, 까만 관에 누워있는 부모님을 까만 굴 같은 곳에 넣을 것이다. 문득 쿵쿵하고 아이의 작은 흉강에서 심장이 불현듯 생경하게 튀어 올랐다. 제 고동에 놀란 아이는 흠칫 몸을 굳히다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받치듯이 감싼 집사의 손을 반사적으로 털어냈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밟으면서도 이상하게 뻣뻣하게 느껴지던 다리가 열을 벗어나면서 마치 발작처럼 저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브루스가 자신이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지한 것은 귀 너머로 바람처럼 희미하게 집사의 부름이 들렸을 때였다. 그래도 브루스는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브루스!"
작은 손으로 자신을 밀어낸 아이의 어린 등은 점점 알프레드의 시야에서 작아져갔다. 그 뒤로 알프레드는 급하게 도련님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오세요, 다 괜찮습니다 따위의 말을 덧붙여서 외쳐보았지만 이미 브루스는 숲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찰칵찰칵, 열 사이에 숨어 있던 카메라맨이 극적인 비극의 순간을 잡아내듯 플래시를 터뜨렸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사박사박 브루스가 밟고 지나가는 풀들의 소음에 더 귀를 기울이느라 행렬 속의 웅성거림은 자신의 의식에서 멀리로 미뤄 놓았다.
사실 작은 몸을 붙잡아 세우는 것쯤이야 큰일은 아니다. 힘껏 뿌리치고 간다 해보아야 요 근래 밥도 거의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어린아이의 움직임이었다. 다만 그 밤 이후로 말문도 표정도 닫아버린 브루스가 옹골진 힘으로 자신을 밀어내고 생생히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바투에서 느낀 알프레드는 그것을 참아 잡아 세울 수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저렇게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다가 결국에는 굳고 굳었던 아이가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린 뒤 산산이 깨어낼 때 조금은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란 작은 심장이 그 김에 속내를 털어내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알프레드가 정말로 브루스의 뒤를 좇아가기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간격을 둔 다음의 일이었다.
그리고 알프레드는 훗날에 바로 그 순간부터 브루스를 박쥐와 만나게 한 원죄가 자신에게 지워졌노라고 회고하게 된다.
무작정 나무를 헤치며 달려 나갔던 브루스가 발견된 곳은 어느 정도 숲의 깊은 곳에 위치한 땅굴 속에서였다. 브루스의 등장에 놀랐는지 굴에서 파드득 날갯짓을 하며 새까맣게 날아 하늘로 퍼져가는 박쥐들을 발견한 알프레드는 굴 안에서 쓰러져있는 브루스를 찾아냈다. 어린아이는 몸이 무른 대신에 그만큼 유연한 건지 기절한 채로 발견되기는 했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다. 지저분해진 옷을 갈아입히고 흙먼지가 묻은 얼굴을 닦아주면서 살핀 결과 아무래도 울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파상풍 주사를 맞고 생채기를 치료하는 중에도 그리고 그 뒤로도 브루스는 제 침대에 누워서 계속 기절한 채 그대로 잠에 들어있었다. 손등에 링거바늘을 꼽고 링거액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질 때 아이의 얇은 눈꺼풀이 살짝 떨렸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아이치고는 혈색이 희미한 뺨을 손끝으로 조심히 쓸어보면서 알프레드는 내일부터는 어떻게든 꼬박꼬박 브루스의 끼니를 챙겨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침에는 한동안 제대로 된 고형물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위가 놀라지 않게 따듯한 스프정도가 좋을 것 같다. 알프레드는 이미 단정한 이불을 강박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더 반듯하게 브루스의 몸 위로 잘 덮어 주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고 어둑한 밤이 찾아왔을 무렵에 브루스가 가물가물 정신을 차렸다. 낮은 수면등 불빛에 아이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빛이 났다.
"브루스?"
알프레드가 소곤소곤 아이의 이름을 부르니 조용히 깜빡이던 브루스의 눈이 동자를 굴리며 잠깐 알프레드를 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브루스의 시선은 창문 너머를 향했다. 달이 떠도 구름이 끼어 우중충하게 흐린 밤하늘을 얼마쯤 바라본 뒤에 브루스는 도로 눈을 감았다. 다시 잠에 들려는 모양이었다. 알프레드는 물을 따라주려고 손에 잡았던 컵을 내려놓으며 수면등의 밝기를 조금 더 어둡게 바꾸었다. 브루스의 왼쪽 손등에는 동그란 지혈밴드가 링거를 맞느라 생긴 작은 멍을 가리고 있다.
브루스가 정신이 든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알프레드는 더 기다릴 무언가도 지켜보아야할 어떤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바라듯 다시 눈을 감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당연하지만 자기로 마음을 먹은 브루스는 잠을 잔다. 적어도 겉으로만은 그랬다. 눈썹하나 찡그리지 않고 창백한 얼굴로 그저 눈과 입을 닫은 채 무표정하게.
다음날 아침 스프와 꿀을 넣은 우유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니 브루스는 이미 일어나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짚은 알프레드는 아침 인사를 삼키며 조용히 브루스의 앞으로 그가 먹을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 여전히 멀리 시선을 주고 있던 브루스가 은은하게 올라오는 스프 냄새에 신경이 닿았는지 하얀 도자기 그릇에 차려진 김이 나는 스프를 한 번, 그리고 알프레드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다 드시지 않으셔도 좋으니 안 드시겠다는 말씀은 마십시오."
알프레드가 엄하게 말했다. 얼마 뒤 머뭇머뭇 어색하게 은빛 스푼을 손에 쥔 브루스는 몇 번 제 손안에서만 식기의 대를 굴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알프레드를 보았다. 그래도 숟가락을 손에 쥘 정도까지는 왔으니 조금은 더 단호하게 도련님을 대하기로 마음먹으며 알프레드는 그를 마주보았다. 막 알프레드가 말을 하려는 참이었다. 물기가 없어 버석한 브루스의 입술이 그보다 먼저 건조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엄마, 아빠가 계신 곳에 가볼래요."
하고자 했던 말을 속으로 되돌리며 알프레드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어느 정도 후에야 브루스의 시선 끝이 가족묘를 향했던 것을 기억한 알프레드가 "네."하고 짧게 답하며
"우선 식사부터 하신 다음에요."
고집스럽게 덧붙였다. 브루스는 그때야 느리게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묘지 안에는 채 가시지 않은 향의 연기와 국화의 냄새가 떠돌고 있다. 벌써 잎 끝이 조금 시들기 시작한 헌화를 거두어내며 브루스는 부모님의 무덤 앞에 안개꽃다발을 하나씩 꽂아놓았다. 새로 새긴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글자 모서리가 날이 서있는 묘비에서 아이는 숫자의 시작과 끝을 자꾸만 셈해보았다. 아이에게는 평생이 지나도 어른으로 남아있을 부모님의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한참 어린 브루스에게도 이상하기만 했다. 장례식 때 누군가가(아마도 알프레드가) 브루스를 대신해 헌화했던 국화꽃의 탄력 있는 대를 손끝으로 휘어 보면서 브루스는 부모님의 무덤과 그 앞에 서있는 자기 자신을 마치 제3의 누군가가 된 듯한 기분으로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이러면 이제 모든 것이 끝인가. 기다란 행렬, 얼핏 추모의 말들을 몇 마디 들었던 것도 같고, 누군가는 울었던 것도 같다. 브루스는 비명을 질렀었다, 숲으로 달려 나갔다, 찰나로 살아있던 아빠는 마지막 숨으로 엄마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굴에 빠졌고, 진주알들이 바닥위에 부딪혀 어지럽게 토닥토닥 튀어 오른다, 박쥐가, 새까만 박쥐가... 뒤죽박죽 기억이 엉망으로 휘감겨서 브루스에게 요 며칠간의 나날은 브루스의 살아온 날들을 다 더한 것보다도 훨씬 길게만 느껴져서 꽃을 바치고 더는 자신이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이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이제 이렇게 발걸음을 돌리면 되는 걸까. 그래도 내일은 오고, 모레도 오고, 글피도 브루스에게는 아마 찾아올 것이다. 부모님의 나이는 턱없이 숫자가 작고, 꽃은 시들고, 브루스가 그 꽃을 갈고, 인사할 사람도 인사하는 사람도 없는 이 방문은 브루스에게 일상이 되어갈 것이다. 브루스가 발끝을 돌리며 한 발짝 뒤에 서있는 알프레드에게로 향했다. 브루스가 별스럽지 않게 이야기했다.
"이제 가요."
알프레드는 잠시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본다. 무덤 안에 드리운 잿빛 그림자가 아이의 얼굴에 물을 들여 브루스는 이상하게 견고한 표정을 짓는다. 알프레드는 뜸을 들이다가 결국 한숨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울지 않는다.
고용인을 또 한 사람 해고했다. 창문 너머로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가는 택시 한 대를 지켜보면서 알프레드는 소리 없이 한숨을 지었다. 주인 부부의 장례를 끝낸 참이라 저택 안에는 정리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사람 손이 하나라도 더 아쉬운 시기였지만 알프레드는 더는 지금까지처럼 저택을 꾸려나갈 수는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집의 새로운 주인이 된 아이는 전에는 곧잘 저택 여기저기를 오가면서 구석구석에 숨어들어 불시에 제 부모나 알프레드를 놀래며 깔깔 웃고는 했었지만 지금은 성묘를 나갈 때나 필요한 용무를 보는 게 아니면 거의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주인이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돌보지 않는 집은 금방 무법지대가 되었다. 웨인저택에는 전당포 등으로 가지고 가면 제법 큰 값으로 쳐줄 물건들이 많았고 평소 저택을 돌아보는 이들에게는 그것들이 어디에 있고, 언제 어떤 식으로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지 쯤 쉽게 알 수 있었다. 귀중품들이라지만 물건 하나하나에 바코드를 달거나 목록을 작성하여 관리하는 것도 아니어서 중요한 문서 같은 것이 아닌 이상 도난 신고를 하거나 절도죄를 묻기에도 녹록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분명 변명거리 한두 개쯤은 있을 테다. 새로운 주인은 코흘리개 어린애이고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에서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위기에 대해 연일 큰 소동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고 있다. 마사와 토마스가 살아 있을 적에야 처우도 괜찮고 급료도 안정적인 직장이었다지만 지금은 언제 ‘미안합니다, 돈이 없네요.’하고 자신을 내쫓을지 모를 곳이다.(부자가 하는 돈 없다는 우는 소리를 어떻게 믿겠는가! 그들이 이야기하는 없다가 0이라는 숫자를 가리키지 않는 것쯤 이 도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망하기 전에 그간 수고비용을 제 스스로 챙기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남은 것은 작은 어린애와 그를 돌보는 집사인데 그 둘이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나 필요로 하겠는가, 어차피 그들에게는 잘해야 장식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 그에 크게 마음을 두지도 않을 텐데 차고 넘치는 것을 덜어준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라고 말이다.
알프레드는 요 근래 집안일을 차후로 미뤄놓았던 자신의 행동에 날카롭게 혀를 찼다. 이제 막 재산 등에 대한 권리문제나 임원들 사이를 떠들썩하게 했던 에이스 케미컬과의 합병 이야기가 잠잠하게 된 참이었다. 브루스도 몇 번인가 법원과 정장을 빠듯하게 차려입은 어른들로만 가득 찬 건물로 발을 옮겨야 했었다. 본래는 몇 가지 굵직한 사항이 정돈되고 나면 브루스를 짧은 기간 동안만이라도 고담을 벗어난 곳에 데려갈 생각이었고 실제로 브루스에게 그러한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늘 우중충한 하늘에, 하루에도 몇 번씩 어린 주인이 무슨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된 것처럼 찾아드는 손님들도 그렇고, 텔레비전이라도 틀었다하면 쏟아지는 이야기들은 도무지 지금 브루스의 정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하늘이 파랗게 끝없이 이어지는 캔자스 같은 시골에 요양을 간다면 조금이나마 마음도 갤지 모른다. 무엇보다 고담 특유의 이 질척한 공기에서 브루스가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고개를 저어 알프레드의 제안을 거절했고 알프레드도 금방 자신의 생각을 거두어 들였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에게 아이가 처해있는 현실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법률문제든 웨인 엔터프라이즈든 아직 충분한 나이도, 자격도 갖추지 못한 브루스로서는 대리인을 세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일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편안함을 위해 브루스가 언제까지고 무방비한 상태일 필요는 없었다. 브루스가 웨인의 이름으로 상속 받은 자본은 정말 거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재산, 재물이 아니라 하나의 야수와도 같았다. 이정도로 몸을 부풀리고 있는 자본은 그저 소유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브루스처럼 나이를 이유로 그것을 다루는 데에 일정 부분 제약이 걸린 경우라면 더더욱 이 커다란 야수는 브루스를 짓씹어 삼킬 수도 있는 맹독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시장경제 아래 돌아가고 있는 이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그 야수를 잘만 다룰 수 있다면 브루스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든든한 방패이자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생전 토마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해주었던 몇몇 임원들과 루시우스 같은 인물과 회사를 꾸려가면서 알프레드의 그런 생각은 더 명료해졌다.
브루스는 또래 아이들이 알아야할 것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에 대해서 보고 들었다. 잘 차려입은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지라도 중요한 회의에는 참석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세세하게 알지는 못해도 중요한 맥락이나 염두에 두어야할 사안들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보고를 들었다. 그 사고 이후 브루스는 멍한 얼굴로 유리창 너머로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곳을 바라보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적어도 이런 ‘웨인’의 일과 관련될 때만큼은 눈동자에 기이하게 빛이 돌았다. 알프레드는 그런 브루스를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한편 아이답지 않은 총명함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고는 했다. 동시에 정말 이기적이게도 그때마다 아이가 바로 여기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면서 안도하고 말았다.
이렇게 브루스는 어떻게든 브루스 웨인으로서 있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정작 집사인 자신이 저택을 황량하게 만들고도 아무런 손도 쓰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직무유기였다. 단순히 은 식기 몇 점, 액자 몇 장, 촛대 몇 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훗날에 이런 불온한 손길이 브루스에게 미치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의 불상사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불안의 싹은 미리 뽑아버리는 편이 나았다.
"저택을 관리하는 인원을 조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물건 몇 개 쯤 없어져도 상관없어요."
브루스는 방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답했다.
"물건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 저택에는 도련님께서 믿으실 수 있는 사람들로만 남겨두고 싶습니다."
알프레드의 말에 브루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희뿌연 바깥 볕에 창백하게 빛나는 얼굴 위에서 담갈색 눈동자가 감흥 없이 덤덤하게 알프레드를 보았다.
"그럼 알프레드만 있으면 되겠네요."
그리고 금방 브루스는 고개를 다시 묘지가 있는 쪽으로 돌려버렸다. 브루스를 지키는 일과 이 넓은 저택을 전부 돌보는 일을 양립시키는 건 아무리 알프레드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인원수의 하한이라도 정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알프레드는 현재 저택의 상황과 자신의 감독 가능 범위를 생각하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하지만 알프레드가 계산의 답을 이야기하기 전에 브루스가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냥 이 집은 이제 필요 없을 거 같아요."
"네?"
"여기는 부모님 집이잖아요."
나한테는 너무 커요. 유리창에 어렴풋이 유령처럼 서려 있는 브루스의 얼굴에서 얇은 입술이 흐릿하게 달싹이고 있었다.
"전에 아빠가 만든 별장... 나 거기에서 살래요."
잠시 침묵이 찾아든다. 집주인은 이미 마음을 정해버렸다. 그렇다면 알프레드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게 몇 개 되지 않았다. 집사는 허리를 숙여 "알겠습니다."하고 답했다.
이사 준비는 마치 처음부터 정해두었던 일인 양 빠르게 진행되었다. 보존하는 것은 심혈을 기울여야 하지만 처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저택의 사정을 통보한 뒤 얼마쯤 기간을 두고 고용인들의 퇴직이 이루어졌다. 퇴직금도 넉넉하게 챙겨서 만약이라도 뒤탈이 없도록 알프레드는 꼼꼼하게 이를 관리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리를 비움과 동시에 저택 안에 있는 물건들도 하나둘 사라져갔다. 저택을 장식하던 대부분의 것들을 박물관 등에 기증하거나 몇 개는 경매로 넘기기도 하면서 알프레드는 브루스를 글라스 하우스로 옮길 준비를 했다. 웨인매너 끝자락에 있는 호숫가에 위치한 유리로 지어진 별장은 토마스가 준비하던 곳으로 브루스는 외관으로 예정된 별장의 모형을 여기저기 살펴보며 "인형 집 같아요."하고 신기하다는 듯 이야기했었다. 건물 자체는 완성 되었지만 아직 누군가가 머물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은 터라 저택 내의 처분과 더불어 유리별장의 마감공사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사 날이 다가올수록 하루하루 웨인저택은 비어갔고 점점 공백이 늘어가면서 저택은 집보다도 폐허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아직 방범 시스템들은 작동하는 상태라 외부에서 누군가가 침입한다면 바로 경보가 울릴 것이다. 그럼에도 알프레드는 곧잘 브루스의 방을 중심으로 저택 이곳저곳을 순찰했다. 그러는 중 웨인부부의 방 문이 조그맣게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있는 것은 브루스였다. 아까 전에 작은 발소리가 브루스의 방으로부터 빠져나와 어딘가로 점점점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곳으로 들어갔던 모양이다.
응접실이나 거실 등에 걸린 물건들은 거의 처분했지만 부부의 방에 있는 것들은 아직 몇 개 정리하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있는 상태였다. 브루스는 마사의 화장대 앞에 서서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다. 브루스는 종종 외출 준비를 하는 마사에게 “귀걸이 이게 예뻐요.”, “이거 하고 나가시면 안 돼요?”하고 참견을 하고는 했다. 브루스는 센스가 꽤 괜찮은 편이라서 마사도 웃으며 아들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고는 했다. 어쩌면 그 저녁에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었으니 브루스가 골라 준 액세서리를 마사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 브루스는 피 묻은 진주알을 함부로 힘도 담지 못하는 손으로 어설프게 담고만 있었다.
살짝 열려있는 문을 닫아주기 위해 알프레드가 손을 뻗었을 때였다. 드물게 눈이 밝은 달에서 쏟아진 빛이 한가득 들어오는 창문 너머에서 갑자기 어지러운 그림자가 오고가며 껙껙 울어댔다. 무슨 일로 날아들었는지 제법 몸집이 커다란 박쥐가 한 마리 유리창에 아슬아슬 스치며 소란을 부렸다. 짐승의 발톱이 간간히 유리에 부딪쳐 타각타각 뒷골이 서늘한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놀라 창문 쪽을 향해 몸을 돌린 브루스는 그만 손에 들고 있던 마사의 목걸이를 놓치고 말았다.
“아.”
짧게 외치며 브루스는 다시 주먹을 쥐어 쏟아져 내리는 목걸이의 알알을 잡으려 했지만 손에는 재빠르게 힘이 들어가지 못했고 그사이 보석은 이미 바닥에 차르르 부딪혀서 부정형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 위로 형체가 계속 뒤틀리는 그림자가 겹쳤다. 그저 그 뿐인 아주 별 것 아닌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못이 박힌 듯 그 장면을 굳어서 그저 보고만 있었다. 낮게 깔린 그림자 속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는 아스라이 제 존재를 알리고 있다. 한참 아무 행동도 없이 있던 브루스가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하더니 색색 조금 센 호흡을 뱉었다. 아이가 트라우마로 과호흡을 일으킬까 싶어서 알프레드는 급하게 브루스에게로 다가갔지만 아이는 단단하게 얼어만 있을 뿐이었다. 저무는 낙엽 같은 눈동자에 비친 마사의 목걸이가 각막 깊이에서 칼날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브루스는 그래도 울지 않았다. 소리도 지르지 않는다. 그저 본다. 보고 새기고 그렇게 함께 기억과 굳어갈 뿐이다.
알프레드는 한쪽 무릎을 땅에 꿇고 앉으면서 충분히 낮아진 시선으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핏기가 가신 얼굴을 바라보며 알프레드는 조용히 “브루스.”하고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답은 없었다. 알프레드는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조심히 건져 허공에서 멈춰버린 브루스의 하얀 손 안에 담아주었다.
"괜찮습니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대신 동글게 말아 주면서 알프레드는 브루스를 향해 다시 또박또박 선명하게 말했다.
"정말, 전부 다 괜찮습니다."
브루스는 계속 답을 하지 않는다. 그저 숨소리만이 시근시근 들려오다 후에는 그마저 잠잠해진다. 브루스의 손에 작게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알프레드의 손을 빠져나간 브루스는 주먹에 가득 쥔 엄마의 목걸이를 제자리에 조심스럽게 돌려놓았다. 한참 뒤에 서랍을 정리한 브루스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혼잣말처럼 물었다.
"여긴 그냥 둬도 돼요?"
"네."
알프레드가 단단하게 대답하고 브루스는 천천히 돌아 그를 마주보았다. 달빛이 부딪혀서 아이의 표정은 그림자 뒤로 섞여 들었다.
깊은 밤, 곧 새벽이 다가올 시커먼 시간에 유리벽 너머에서 꾸물거리는 물안개는 마치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낮은 조명만 밝혀 놓은 실내에서 알프레드는 조용히 잔을 기울인다. 테이블 위에는 이날을 위해 마련한 술과 아직 술을 채워 넣지 않은 다른 잔이 한 잔, 그리고 얼음이 준비되어 있다. 얼핏 물이 길을 열며 그 사이로 거대한 짐승이 굴러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이제 곧 다른 잔의 주인이 이곳으로 돌아온다. 무덤에 헌화한 꽃냄새가 채 마르지 않은 몸으로 도시 시궁창을 들쑤시고 다녔던 배트맨이.
"기다렸다 같이 마시면 덧나요?"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완전히 말리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카락 끝에 동그랗게 이슬처럼 물이 맺혀 있는 브루스가 잔을 입에 대며 앉아 있는 알프레드를 보고는 툴툴 거리며 들어왔다.
"잔을 준비해드리는 것까지가 제 일의 전부입니다, 웨인 주인님.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진 마시길."
브루스는 짧게 입을 삐죽 내민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박쥐가 도시의 어둠에 녹아들 때쯤부터 알프레드는 브루스를 부를 때면 그의 이름보다도 꼬박꼬박 웨인을 빌어 그를 칭하게 되었다. 그게 무슨 의미를 담고 뱉어지는 건지 도통 이 머리 좋은 도련님이 알아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아쉽지만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가끔 실수인 양 이름을 입에 담을 때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주인의 얼굴을 보는 게 나름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버렸다.
몇 년 전쯤만 하더라도 입안에 타오르듯 달라붙는 액체의 감촉에 크게 표하지는 않았지만 미세하게 찡그려든 눈썹은 감추지 못하던 도련님은 이제 알프레드의 빈 잔을 채워주면서 제 스스로 본인 취향에 맞게 술을 따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알프레드는 감사의 인사를 대신해 브루스의 잔에 가볍게 제 잔을 부딪쳤다. 오늘은, 아니 지금 시간으로 보자면 어제는 부부의 기일이었다. 알프레드가 필요한 때 이외에 술을 마시는 브루스를 유하게 봐주는 날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이다. 배트맨이 음주운전을 할 수는 없으니 시간상으로는 날을 넘기게 되지만 기일의 밤과 다음날의 새벽 사이에서 알프레드는 배트맨에서 돌아온 브루스와 같이 술을 마신다. 호박빛 액체가 브루스의 입술 사이를 타고 들어가 조용히 목울대를 지나가는 것을 보며 알프레드는 자신의 잔을 입에 가져간다. 별 다른 대화도 없이 둘의 대작은 싱겁게도 그게 전부다. 브루스는 새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검게 펼쳐진 세상 위에 브루스가 보게 되는 것은 그의 눈에 박힌 잔상들이다. 브루스의 소란스러운 어둠 속에서는 진주알이 떨어지고 꽃이 바쳐지며 박쥐가 날아오른다. 알프레드는 다시 술을 한 모금 입에 담는다. 그러다 무심하게 실없는 말을 걸어본다.
"울지 않으십니까?"
"매년 그 소리네요?"
조금 우스웠는지 눈 끝이 희미하게 구부러진 얼굴로 브루스가 알프레드를 마주 보며 되물었다. 알프레드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 말았다.
"당신한테 내가 우는 건 새삼스럽지도 않잖아요."
먼 과거의 이야기인지 극히 최근에의 이야기인지 알프레드의 반응을 살피듯 브루스가 애매하게 말했지만 집사는 그저 가벼운 코웃음만 픽하니 친 뒤 자신의 잔을 전부 비웠다. 얼마쯤 알프레드가 다른 사담을 꺼내는 건 아닐까 기다리듯 지켜보던 브루스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저 역시 남은 술을 마신다.
딱히 새삼스러운 것이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당연하기 때문에 그토록 기다렸다. 아니, 기다리고 있다. 더는 울지 않게 된 브루스를 바라보면서 알프레드가 느낀 것은 일종의 상실감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알프레드는 앞날이 어떻게 될지 어느 정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예감을 예방할 만큼 충분히 현명하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브루스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감정이 풍부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한순간에 밀랍처럼 굳어졌다. 토해내지 못한 눈물은 어디로 가는 걸까, 눈물이 아이를 커다랗게 만든 걸까? 박쥐는 제가 삭힌 눈물을 먹고 크는가? 이건 얼마쯤은 맞는 가설인 것 같다. 박쥐굴에 빠진 어린 브루스는 제가 뱉어내지 못한 눈물의 호수에 빠져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상한 고담의 배트맨이 되었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제법 영국인다운 동화를 빗대어 보며 알프레드는 건조한 웃음을 삼킨다.
잔이 비자 자동적으로 제 잔을 채우려고 브루스는 술병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알프레드가 자신의 잔과 더불어 브루스의 잔과 아직 액체가 남아 있는 술병을 치웠다. 허공에서 손이 멈춘 브루스가 뚱한 얼굴로 알프레드를 바라보지만 알프레드는 별 거리낌 없이 그 모난 시선을 마주본다. 그래도 어떻게 이런 심통머리만큼은 남아서 가끔 도련님은 이런 귀여운 얼굴을 한다. 알프레드는 가볍게 웃었다.
"어쩌다 이렇게 안 귀여워지셨습니까."
타박하는 말치고는 평소 집사의 말투에 비해서는 아주 누그러진 톤이었다. 한손에 쟁반을 든 알프레드는 남은 빈손으로 아주 짧게 물방울에 엉킨 브루스의 머리카락을 그의 가르마에 맞추어 설핏 정돈하고는 떨어졌다. 동그랗게 눈을 뜬 브루스가 이내 무언가 걱정이 드는지 눈썹을 찡그리며 조금 주저하듯 물었다.
"...설마 취했어요?"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보는 브루스의 얼굴에 알프레드는 다시 안경 너머에서 표정을 정돈하며 짤막하게
"글쎄요."
하고 대꾸한 뒤 자리를 뒤로 했다. 브루스는 분명 눈만 껌뻑이며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일 뿐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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