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EU
집사는 신중하게 손끝에 힘을 실었다.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목은 쉽사리 기도가 좁아지지 않아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알프레드는 힘줄이 튀어나온 제 손등을 보다 눈동자를 굴려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브루스는 그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얀 이가 싱그럽지만 공기의 드나듦은 멈춰있다. 두근두근. 손가락 아래서 따듯한 맥이 깊숙이 흐른다.
브루스는 아직 종을 놓지 않은 채 침대 위로 고요하게 주먹 쥔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슬슬 손이 아픕니다만." 그런 투덜거림을 덧붙이며 퉁명하게 불안을 토로했던 적도 있었더랬다. 알프레드는 그저 기다린다. 손끝에 고인 힘마저 풀어버리고 죽음 직전에서 주인은 종을 울리며 자신의 집사를 부를 것이다. 그나마 브루스를 이렇게 눈앞에 두고, 손끝으로 그 맥을(알프레드 자신이 옥죄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바투 느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싶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얼굴 위로 바짝 고개를 숙였다. 호흡이 드나들지 않는 평온이 손 마디마디를 따듯하게,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브루스의 체온이 마른 향기가 되어 코끝에 닿는다. 꼭 장식을 위해 곱게 말려 둔 꽃과 같다고 생각한다.
물을 가르고 그 아래에 난 길을 타고 돌아올 배트모빌을 기다리며 알프레드는 서성였다. 굳이 좌우로 발을 움직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출입구로 이어지는 기다란 일직선을 바라보고 있자면 금방이라도 현실이 될 예감을 외면하며 빙 에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쯤, 그르릉, 거친 숨을 몰아쉬는 듯한 엔진 소리가 들려오고 저 끝에서 나타난 점이 빠르게 선명한 형체로 부풀어 알프레드의 앞에 다다랐다.
배트모빌의 지붕 위로 무언가가 추락했었는지 움푹 찌그러진 흔적이 있었다. 한쪽 헤드라이트는 깨져서 불이 나가있었고 물에도 희석되지 못한 매캐한 화약 냄새가 차체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묻어났다. 알프레드 앞에서 멈춰선 배트모빌의 문이 열리며 운전석이 드러났지만 차 주인이 올라탄 후로도 배트모빌에 어떤 공격이 가해졌었는지 문의 연결부에 변형이 일어나 사람을 빼낼 수 있을 만큼 활짝 열리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준비해둔 공구로 자신이 손수 재질에서부터 디자인까지 구상하고 제작을 지휘했던 배트모빌의 문짝을 뜯어냈다. 그리고 그 아래 좁은 차내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색색 숨만 내뱉는 배트맨이 있었다. 아마 사건 현장에서 배트케이브로 돌아오기까지는 주행모드를 오토드라이브로 설정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이렇게 너부러져서 오기 전 안전벨트를 착용할 정신머리는 남아있었다는 점을 알프레드는 위안으로 삼았다.
카울의 왼쪽부분은 눈에서 볼까지 찢겨져나가 너덜거리고 있었고 그 밑에 흘러내린 피가 굳은 채로 말라붙어있었다. 배트맨의 의상은 검은색 계열이라 분명 상처가 잘 두드러지지 않을 텐데 조금만 눈을 굴려보아도 브루스의 몸 곳곳에 터지고, 찢겨지고, 뜯어져나간 상처들을 짚어낼 수 있었다. 알프레드는 만신창이의 브루스를 살펴보며 결코 시신을 고담 어느 길바닥에 내버려두지 않고 영원한 비밀로써 회수하려는 브루스의 의지에 칭찬을 보내야할지, 피떡이 되어 의식이 모호한 꼴이나 되려고 그 몇 년을 자신의 곁을 떠나 영문도 모르는 곳을 쏘다니며 보냈던 거냐고 힐난해야할 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대신에 알프레드는 조심스럽게 엉망이 되어버린 카울을 벗겨낸 후 간단한 도구들로 브루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작은 전등 빛에 착실히 반응하는 동공과 신음에 가깝지만 제 생존을 고하는 짤막한 목소리를 확인하며 알프레드는 참고 참았던 숨을 몰아 토해냈다.
"늙은이에게 장비 수리만 맡기시기엔 성에 차시지 않으셨나요?"
결국 모난 소리를 하며 알프레드는 끌고 온 간이침대 위로 브루스를 꺼내 눕혔다. 정신이 선명하지 않은 중 브루스가 퉁퉁 부은 얼굴로 희미하게 웃자 알프레드는 서둘러 시선을 비틀었다. 그런 몰골로 웃는다고 고와보일 줄 아시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꾹 내리누르며 알프레드는 치료실로 향했다.
알프레드는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전문의에게 브루스를 보내기 전 그의 상처를 급한 대로 봉합하고 그럭저럭 납득 갈만한 상태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군에서 의학 지식을 몸에 지니게 된 알프레드의 손길은 맵지만 급할 때 무엇보다도 확실한 처방이 된다. 알프레드의 치료를 거쳐 흉으로 남은 자국들을 짚어 살피면서 브루스는 토 하나 달지 않았다. 곧잘 쓴소리를 하면서도 알프레드는 자신의 손이 거쳐 가지 않은 흔적들에 대해서보다야 너그럽게 그 모양새를 바라보았다.
새로 생긴 상처, 다시 터져버린 상처, 내출혈, 골절과 금... 사위는 어둡고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브루스를 밝힌 전등만이 선명한 치료실에서 알프레드는 슬쩍 몇 번씩 브루스의 맥을 확인한다. 딱히 의식해서 하는 일이라기보다 무의식중의 습관에 가까웠다. 기계에서 삑삑 소리로 치환되어 들리는 생명의 신호보다도 손끝에서 작게 떨려오는 진동이 알프레드에게는 훨씬 믿음이 갔다. 콩콩. 지문을 따라 번져 들어오는 고동을 가늠한 뒤 알프레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상처들을 끼워 맞춘다. 다시 돌아왔다는 데에 감사해야할 자리일까, 다시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데에 절망해야할 자리일까. 찾아드는 의문을 알프레드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끈질기게 외면한다. 콩, 콩. 그저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이 작은 박동이었다.
처음 웨인 저택에 들어온 날. 아이는 제 부모의 뒤에 몸을 숨기고 빠끔히 눈만 빼내어 저를 호기심 반 불안 반이 섞인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토마스와 마사는 새 식구를 소개하면서 수줍음 많은 아들을 다독였지만 무표정하게 저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알프레드가 브루스에게는 못내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알프레드는 저를 무서워하는 작은 아이를 어를 만큼 사근사근한 성격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힘없는 아이에게 낯선 이에 대한 이만큼의 경계심은 있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아이의 불편함을 달래주지 않았다. 어쩌다 아버지의 지인이란 인연으로 만나 보디가드로서 고용되었지만 실상 알프레드가 하는 일은 상시 일이 바쁜 부부를 대신해서 저택을 돌보고 혼자 남은 브루스를 보살피는 집사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고담이라는 도시는 미국 내 여타의 도시들과 비교했을 때 분명 치안이 녹록한 곳이 아니었지만 군인으로서 전쟁터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온 알프레드에게는 잘 합의된 소꿉장난을 하듯 아늑한 직장이었다. 고용주인 웨인부부는 그들이 지닌 부와 영향력을 옳은 일에 사용할 줄 아는 현명한 이들이었고 둘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아이는 천진하고 귀여웠다. 그야말로 그림과 같은 가족이었고 긴긴 혼란 끝에 자리하게 된 지금을 알프레드가 마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알프레드가 늘상 미소 지으며 생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본디 감정 표현에는 인색한 편이었고, 하루아침에 웃는 상으로 바뀌기에는 이미 알프레드의 안면이 어느 정도 무뚝뚝한 모양새로 틀을 갖춘 면도 있었기 때문에 그걸 들어 알프레드가 이 생활을 만족하지 않는다고는 결코 할 수 없었다. 다만 브루스는 어딘가 뚱해 보이는 알프레드의 얼굴이 어지간히도 서먹서먹했던 모양인지 알프레드와 단 둘이 있을 때면 필요 이상으로 쭈뼛쭈뼛해지며 그의 주변을 서성였다. 부모의 숨김없는 애정을 담뿍 받고 자란 아이인 만큼 이제 막 들어온 낯선 이가 줄곧 무표정하게 있는 것을 보자니 아이에게는 무서울 수도 있었겠지 싶었다. 제 손가락을 뜯기도 하고, 발가락을 마주 모으며 꼼질거리기도 하고,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며 알프레드의 눈치를 살피는 브루스는 어쩌다 알프레드의 안경너머로 눈이 마주치면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휙 소리가 날 듯 시선을 돌렸다. 꼭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는 토끼 같아서 귀엽기는 했지만 도통 이 요란한 염탐이 끝을 보이지 않자 한편으로 조금은 심술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알프레드는 불퉁하니 지적했다.
"바르게 서십시오. 도련님은 안 그래도 작으신데 더 조그맣게 보이지 않습니까."
처음 브루스는 저에게 말을 건 알프레드가 신기했는지 눈만 껌뻑였다. 그러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프레드가 한 말의 내용을 파악하고는 삽시간에 입이 한방이나 튀어나왔다. 그간 숫기 없는 모습만 실컷 봐왔던 터라 의외로 옹골지게 모가 나선 저를 쏘아보는 게 퍽 신선했다. 잔뜩 볼을 부풀린 도련님은 알프레드에게 뭐라 한마디라도 꼭 토를 달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보다 먼저 시장을 만나기 위해 외출했던 마사의 귀가가 더 빨라 아이의 심통은 잠깐 발을 멈추었다.
그 다음부터였다. 브루스는 유달리 꼿꼿한 자세로 책상에 앉아있고는 했다. 복도를 걸을 때는 마치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이라도 된 것 마냥 뻣뻣하게 걸어 다녔고 작은 등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쭉 펴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보통 안전보다 위험을 우선 사항으로 두고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그런 브루스를 바로 눈치 채지 못했지만 자꾸만 따끔따끔한 시선이 향해오자 조금 늦게 브루스가 하는 양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알프레드는 아마 제 지적에 반발해서 과하게 자세를 펴고 있는 브루스를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하루, 이틀... 한 며칠 계속. 언제까지 계속 되는 걸까, 답지 않은 호기심을 담고 알프레드는 조용히 브루스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기어이 브루스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 눈이 마주칠 때 브루스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가는 목을 더 바로 세웠다. 조금만 더 있으면 까치발이라도 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브루스는 제 작은 키를 곧게 폈다. 그 광경을 잠시, 계속, 한동안 지켜보다가, 하하하. 알프레드는 크게 웃고 말았다. 거의 배를 잡을 듯 웃는 알프레드의 모습에 브루스의 등에서 힘이 쏙 빠져나가며 의아한지 당혹스러운지 아이는 아몬드 같은 눈을 둥글게 떴다.
"알프레드?"
주저주저 아이가 알프레드를 부르며 작은 손으로 알프레드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실례합니다, 하고 겨우 양해를 구한 뒤로도 또 한참을 웃은 알프레드는 영문을 몰라 깜빡이는 아이의 눈을 본다. 그 모습에 다시 긴 호선이 입가에 물려지고 알프레드는 조심히 아이의 머리카락 위로 손을 가져다댔다. 브루스는 순하게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서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면 알프레드는 정말 새삼스럽게 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아이가 얼마나 작고 여린 존재인지 실감이 났다. 그리고 눈이 부시게 따뜻했다.
브루스는 민들레처럼 반짝반짝 소란스럽다.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웨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제는 알프레드에게 익숙해진 브루스가 이따금 손을 뻗어 알프레드를 제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살짝 부유감이 드는 것이 조금 꿈과 같은 느낌도 든다.
"알프레드도 저기 있었어요?"
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브루스가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서있는 알프레드에게 물었다. 눈썹이 걱정스럽게 휘어진 아이를 지켜보다 알프레드는 말 그대로 '저기'에는 없었기 때문에 "아니요."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방송에서 펑! 펑! 화약이 터지면서 사막의 먼지와 매캐한 연기가 엉켜 구름으로 피어나는 장면이 지나갔다. 잠시 그것을 보던 브루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알프레드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야..."
알프레드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다. 숨쉬고, 움직이고,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워해야하는 일이었고 이 생각에는 어떤 의심이 싹터서는 안됐다. 못내 자기합리화가 두려운 공범들은 두어서넛씩 모여 독한 술잔과 값싼 담배를 나누면서 고해를 하듯 서로의 목숨을 긍정하곤 했다.
웨인저택에서 근무한지 얼마쯤이 되어가자 탄약 냄새가 짙게 끼었던 피부에는 과자와 코코아의 냄새가 덧씌워졌다. 브루스는 아무런 의심 없이 선선하게 웃으며 그런 알프레드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누군가의 목숨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의미하는 세계가 있는 것을 빙 둘러 표현한 허구의 세상에서 밖에 듣지 못했다. 그리고 행복하게 자라날 아이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알프레드는 생각했다. 온실씩은 아니더라도 민들레는 녹빛이 푸르른 들판에서 해밝은 법이었다.
그러다가 웨인부부가 골목길에서 목숨을 잃었다.
알프레드가 옛날 전우의 미국행으로 인해 짧은 휴가를 받았을 때의 일이었다. 늘 자신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 가끔씩은 쉬기도 하라며 토마스와 마사는 웃으면서 알프레드를 배웅해주었고, 브루스는 서운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도 짐짓 의젓한 척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랬는데.
소식을 듣고 당장에 돌아온 알프레드는 우선 브루스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알프레드는 과거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고자했다. 비록 브루스는 자신의 눈앞에 부모의 죽음을 두어야했지만 그래도 알프레드는 멍한 얼굴로라도 제 앞에 브루스가 존재한다는 것에 더 무게를 실었다. 아이는 숨을 쉬고, 움직이고, 알프레드의 부름에 둔하지만 반응한다. 이건 전혀 절망할 일이 아니었다. 이건, 브루스가 살아있다는 건 아이는 괜찮을 것이고, 괜찮도록 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명. 알프레드는 몇 번이고 같은 다짐을 반복했다. 상실을 알고 있으되 그것이 어느 정도 체화 되어버린 알프레드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죽은 부부가 아니라 살아있는 브루스였으니까. ...어쩌면 알프레드는 평온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던 길들을 걸어왔는지도 몰랐다.
두 사람 분의 온기를 잃은 저택은 적막하고 어두웠다. 알프레드는 한동안은 일부러 저택 내의 조명을 더욱 밝게 켜두었지만 환한 불빛에 오히려 깊은 그림자가 도드라져 얼마 못가 그만두었다. 입관 중 숲으로 내달리다 박쥐 굴에 빠졌던 아이는 그곳에서 남은 생기를 몽땅 잃은 듯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귀가 얼얼해지는 침묵은 알프레드에게 불편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발상지가 브루스라는 점이 알프레드를 불안하게 했다.
금방이고 까르르 웃던 브루스는 말없이 어느 매를 바라보며 마치 밀랍인형처럼 굳어있었다. 홀로 시간 속에 박제된 듯한 그 모습이 순식간에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가슴이 선득했지만 알프레드는 자꾸 모르는 척 희망을 가졌다. 브루스는 아직 한참 어렸고, 그에게 시간은 많았다. 분명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브루스!"
알프레드가 사색이 돼서 물이 가득 차 흘러넘치는 욕조 안에 빠진 브루스를 건져냈다. 복도를 지나가는 중 뜬금없이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에 와봤더니 브루스가 옷을 입은 채 욕조 물 안에 잠겨있었다. 다급하게 브루스를 안아 올리는 알프레드의 옷이 죄 젖고 말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있었던 거지? 자신은 얼마나 늦은 거지? 알프레드의 등골에 오한이 내달렸다. 하지만 알프레드의 걱정과 다르게 브루스는 기침 몇 번을 한 게 전부로 딱히 물을 먹지도 않은 듯 금방 물에 푹 젖은 눈을 떴다. 속눈썹에 엉겨 붙어 흘러드는 물방울에 눈이 쓰렸는지 아이는 바로 초점을 잡지는 못하고 부옇게 시선을 헤맸다. 그 모습을 보고 알프레드가 참지 못하고 딱딱한 어조로 추궁하듯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숨을 고르던 아이는 알프레드에게서 눈을 돌리며 얇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쉴 새 없이 물을 쏟아내는 수도꼭지를 잠그니 톡, 톡...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요란했다. 알프레드는 끈질기게 브루스가 답하는 것을 기다렸다. 한참 뒤 브루스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화."
"네?"
"국화 냄새가 나질 않아서..."
아리송한 말에 알프레드는 브루스에게 설명을 요구하듯 침묵했다. 브루스는 고개를 들어 작은 손으로 알프레드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계속... 국화 냄새가 났었는데 사라졌어요. 내 손에서 계속 났었단 말이야. 근데 점점 아무 것도 없어서... 코는 냄새를 적응하면 맡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숨을 참았다가 쉬면 다시 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냥은 안돼서, 물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오면... 될 줄 알았는데..."
그리고 아이의 눈이 물에 불어났다. 눈물은 떨어뜨리지 않은 채 아이는 절박하게 알프레드를 붙잡았던 손을 들어 그 양손바닥 안에 제 얼굴을 묻었다.
"...이젠 정말 없어."
어려서나 지금이나 브루스는 고집이 세다. 브루스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자신의 손에서 국화 냄새를 다시 맡을 수 있게 되기까지 시행착오들을 거쳤다. 알프레드는 그를 의사와 상담을 받게 하고, 직접 하루 종일 감시를 해보기도 하고, 달래도 보고, 엄하게 타이르기도 해보았지만 그 어느 방법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무언가를 하다가 실수로 큰일이 나는 게 더 무서워져서 차라리 그의 자해(브루스는 이런 알프레드의 표현을 겉으로라도 부정할 테지만 알프레드는 그 외에 더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에 동참해버렸다. 브루스의 고집에 아마 그 스스로의 뇌도 자신처럼 체념한 게 분명하다고 국화 냄새가 난다며 제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던 어린 브루스를 보며 알프레드는 한숨을 삼켰다.
배트맨이 다시 동굴로 돌아오는 것을 멀찍이 지켜보고 있을 때면 알프레드의 뇌리에는 얄궂게도 숨소리를 죽이고 묘지로 향하는 영구차가 떠올랐다. 그 안에서 저보다 한참 어린 주인이 피범벅이 되었든, 뼈를 부러뜨렸든, 의식이 몽롱하든 간에 살아서 돌아오는 것을 볼 때면 마치 하루를 유예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마음 놓고 안도조차 할 수 없었다. 심하게 다치고 돌아온 브루스를 볼 때면 알프레드는 금방 "늙은이에게 장례를 맡기시려는 건 아니시겠죠?"하고 을러댔지만 한편으로는 제 주인의 시신을 자신의 손으로 거둔 다음 그의 모든 것을 흔적 없이 무너뜨릴 날이 언제일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브루스는 알프레드의 습관 같은 물음에 빈말조차 없이 텅 빈 웃음만 그릴 뿐이었다. 그저 그날은 오늘이 아니고, 내일이 아니고, 모레가 아니기를 바랄 뿐. 결국 오고 말 그 어느 날에 알프레드는 "어째서"보다도 "결국"이라고 체념할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손 아래에는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체온이 있다. 그의 의도에 반하는 폭력은 결코 가해지지 않을 환경에서 평온하게 누워있는 브루스의 모습을 보자면 어째 조금 서글퍼진다. 이제야 겨우 아물어가는 상처들이 의복너머에 있지만 그도 잠시 뿐, 결국 다시 새로운 상처가 생기고, 오래된 상처들은 다시 피를 뱉어낼 것이다. 알프레드가 자신의 손에 안온하게 목을 드리우고 누운 브루스를 볼 때면 불편함과 평온함이 교차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터만 을씨년스럽게 남은 웨인저택을 하릴 없이 거닐 때와도 같다.
아직 종은 울리지 않는가. 힐끗 다시 손을 바라보아도 주인은 집사를 찾지 않는다. 박쥐가 기어이 브루스에게로 날아들었던 그 밤. 그때 역시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었다. 소독약도, 거즈도, 실도, 바늘도. 제 주인을 자기 스스로보다도 더 소중히 돌볼 집사는 은색 쟁반 위에 그 모든 것들을 담아둔 채 우두커니 어둠 속에서 주인의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종이 울렸을 때, 알프레드가 본 것은 실컷 두들겨 맞고 돌아와선 환부에서 열이 나 정신을 잃고 쓰러진 브루스였다. 알프레드는 그렇게 언제고 기다렸다. 웨인부부가 죽은 후로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후견인이었으므로 법적으로 알프레드에게는 브루스에게 이런 자학적인 일은 그만두라고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보다 쉽게 행복으로 나아갈 방법을 제시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어쩌면 몇 번 뒤를 돌아볼 때면 뒷목이 결리듯 찔려오는 기억 속 장면 그 순간순간들에서 알프레드가 브루스보다 더 고집을 부렸더라면, 세상이 곧 브루스에게 어두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갈가리 찢어낼 것임을 보다 그가 여렸을 적에 몇 번이고 설득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알프레드는 진실을 주저하지 않을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고, 브루스 웨인을 온 마음을 다해 돌보고 있었으므로. 다만, 결국 이렇게 된 데에는 비단 브루스의 고집뿐만이 아니라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선택을 지켜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 길로 들어가는 브루스에게서 알프레드는 자신은 다 해내지 못한 삶의 증명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브루스가 어떤 식으로든 마침표를 찍고 어느 결말에건 간에 만족을 했을 때 거기서 알프레드의 불합리도 끝을 내릴 터였다.
그럼에도 상처 입은 아이를 볼 때마다 가슴에 차가운 돌이 얹어지고, 몇 번이고 자신의 아집을 저주하고 싶어지는 것은 알프레드가 여전히 민들레처럼 웃고 있던 브루스를 기억에서 지우지 못한 탓으로... 어쩌면, 하고 알프레드는 자신의 마음 속 판도라 상자 깊이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떠올린다. 어쩌면 죽음은 최악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알프레드는 공단 상자에 담아둔 잘 말린꽃을 떠올린다. 바짝 건조되어 위태롭지만 고급스런 상자 안에 잠들어 있을 그는 분명 아름답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생눈으로 브루스를 볼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일지를 모른다. 감히 가늠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기다림을 보상받지 못한 집사는 모든 것을 천연덕스럽게 내보인 유리 별장과 그 아래 깊은 곳에 묻어둔 동굴만을 유품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날려 없애버릴 것이다. 알프레드에게 남는 것은 잿더미 밖에 없을 수도 있다. 꽤 가능성 높은 미래로써. 알프레드는 마음만 먹는다면 세상 누구보다도 교활하게, 지독하게 제 주인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딸랑'
귀 시린 종소리가 고막을 청명하게 두드리며 알프레드의 상념을 깬다. 알프레드는 손에서 바로 힘을 뺐다. 현실로 건져 올려진 브루스는 헉, 하고 급하게 숨을 삼키면서 가슴을 한 번 크게 부풀렸다. 물에서 다급히 나왔던 그때처럼 브루스는 한참 시선을 부유하다 저를 지켜보는 알프레드를 기준으로 초점을 바로 잡는다. 그리고 역시 조금 웃어 보이는 것이다.
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얄팍한 미소가 뭐라고. 알프레드는 결국은 답이 하나로 수렴될 것으로 예정되었던 온갖 물음들이 다시 상자 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다. 한참 들숨을 쉬던 브루스가 하, 하고 천천히 첫 숨을 뱉었다. 그가 숨을 쉰다. 그렇다면, 자신은 뭘 더 바랄 수 있을까. 어린 브루스가 알프레드의 존재에 대해 다행이라고 했던 것이, 제 소중한 주인에게 해당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 있네요."
제가 들이킨 숨 속에서 있지도 않을 국화의 잔향을 기어이 찾아낸 브루스가 까끌하게 말했다. 알프레드의 눈을 보며 초점을 잡았으나 브루스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쯤 알프레드는 알고 있다. 그의 공기에는 국화가 심어져있다. 브루스가 웨인부부의 관에 집어넣었던 국화는 그의 손끝을 타고 올라 혈관 속에 박혀서 그를 집어 삼켰고 브루스 웨인은 그날의 장례식에 바쳐진 헌화 그 자체가 되었다.
두근두근. 급하게 새로운 공기를 순환하기 위해 아이의 박동이 조금 급하게 북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알프레드는 그 고동이 완전히 안정을 찾기 전에 작게 벌어진 호선 위에 입을 맞추었다. 마른 입술 너머가 아직은 삶으로 생생하다.
종이 울리고, 주인이 집사를 찾을 때 알프레드는 다시 삶을 돌려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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