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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뱃

[숲뱃] 당신은 여기에 있다 저스티스 리그 애니 hereafter 편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날조와 캐붕은 제 전공이자 특기예요. 눈 아픈 섬광이 망막을 지르고 들어왔을 때 남자는 말릴 새도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라 어떤 감정이 제 이름을 밝히기 전에 기다란 사고의 공백이 찾아들었다. 빛과 함께 남자를 포함한 사물이 송두리째 사라진 공간에서 남자의 붉은 망토 끝자락만이 간신히 남아 속없이 팔랑이며 땅 위로 떨어졌다. 텅 빈 관은 그 안에 많은 이들의 상실과 슬픔을 대신 채우고 사라진 남자를 기리며 안장되었다. 온 세계가 비통에 잠긴 슈퍼맨의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배트맨은 공식적으로 그의 추모식에도, 이어지는 행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림자 너머로 그 광경을 짤막하게 바라본 뒤 미련 없이 돌아선 것이 전부였다. 시신.. 더보기
[숲뱃] 떠돌이 별 1 행성의 대기를 그으며 별똥별이 떨어진다. 대륙들 중 밤이 찾아온 면에 착륙한 우주선을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렇게 남자는 조용히 지구를 찾아온다. 그리고 처음부터 없었던 양 사라질 것이다. 오랜 시간 남자가 살아온 곳에서 점잖은 코트와 흔해빠진 양복, 촌스러운 안경 뒤에 잘 다듬어진 육신을 감춘 남자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세상은 남자에게 멋대로 죽음을 부여했고 그것이 그나마 영예로운 길이었다 평가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원색의 독재자만이 낙인처럼 남았고 남자는 저를 부를 이름을 잃었다. 소중한 장난감을 다루듯 남자의 손아래서 완벽을 꿈꾸던 세계가 자유를 찾고 제 색깔로 형형색색 빛이 났다. 남자는 그것을 퍽 순순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짧은 고개 인사로 남자를 잊은 세계에 작별을 고한.. 더보기
[숲뱃] 롱할로윈 (1/6) 어둑한 숲은 강물의 냄새가 짙게 밴 안개로 덮여있다. 풀벌레들조차 제 울음소리를 삼가는 숲은 달이 나오지 않은 밤의 장막 속에서 적막하다. 클락이 마른 잎과 떨어진 나뭇가지를 파스락파스락 밟을 때마다 걸음걸음이 유독 도드라졌다. 클락이 강을 건너 고담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저문 지 한참은 지난 때였다. 클락은 머릿속에서 길을 떠올리며 도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나루터에 있는 단 하나뿐인 여인숙의 입구 앞 의자에 삐딱하니 앉아있는 용병과 입씨름을 하던 주인이 클락을 불러 세웠다. 들어와 보라는 그의 손짓에 따라 클락은 길도 확인할 겸 여인숙으로 들어섰다. 잠시 바닥에 짐을 내려놓은 클락은 제 주머니 안에 구겨져 있던 지도를 꾸물꾸물 펴고 어둑하게 밝힌 실내 촛불 아래서 그것을 짚으며 주인에게 제가.. 더보기
10/01 숲뱃전력 '여장' 클락의 머릿속에는 위시리스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스몰빌 출신의 클락이 삼십 몇 년간을 살면서 마음에 담아온 판타지들로 구성된 리스트로써 지금 시점에서는(그리고 앞으로도) 전부 브루스에 관한 사항들이었다. 굳이 리스트를 모두 달성해야만 한다하는 의무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목록 하나하나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 클락에게는 꽤 유효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되어주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그가 귀엽거나 예쁘거나 멋지거나 섹시하거나... 하여튼 모름지기 사람은 좋은 것을 보거나 그와 함께 있으면 별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을 겪더라도 깊이 심호흡을 할 여유를 가지고 어떻게 견뎌보며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더구나 자기 일에 관해서는 보통 막무가내인 브루스가 묘하게 섹스 판타지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한 점.. 더보기
[숲뱃] 다크나이트를 위한 머핀(수정+재업) "먹으면 행복해져요!" 어둑한 골목에서 아이가 밝게 말했다.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배트맨에게로 아이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그 손에는 아이의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머핀이 들려있었다. 배트맨은 아무 말 없이 아이의 손끝을 바라만 보았다. 여느 때처럼 패트롤을 돌던 중, 브루스는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가의 주택단지 골목 벽에 노란빛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작고 동그란 빛 한가운데에는 매직으로 칠해 중간 중간 빛이 스미어 나오는 박쥐 모양이 들어 있었다. 요즘에 와서는 이런 형태의 배트시그널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브루스는 그 소박한 신호를 따라 이동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불빛의 끝에서 만난 것이 바로 지금 눈앞에 서있는 아이였다. 아이는 제가 배트맨.. 더보기
[숲뱃] 보고 싶은 당신, 오늘도 잘 자요 아침이다. 서늘하게 식은 공기가 조용히 침대 위에 앉았다. 클락은 습관대로 오전 일곱 시에 말갛게 눈을 떴다. 클락의 옆에는 단정하게 눈을 감은 브루스가 있다. 어스레함 속에서도 똑 떨어지는 그의 얼굴은 언제고 보기만 해도 포스스 웃음이 나와서 클락은 미소를 깨물며 깊은 잠에 빠진 브루스의 뺨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차갑다. 클락은 서둘러 브루스의 목 위까지 꼼꼼하게 폭신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브루스는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평상시에 체온이 그렇게 높지 않은 브루스는 그 탓일까 유독 아침을 힘들어했다. 사실 더 확실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밤이면 밤마다 빼곡하게 차서 빠질 줄 모르는 그의 자경 활동 스케줄에 있었지만 브루스는 그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창문에서 내리쬐는 볕을 피해 시트 속에 몸을 말아 .. 더보기
[숲뱃] 완벽한 세계 씬 부분은 잘라낸 글입니다. 혹시 궁금하시면 http://znfnxh2.postype.com/post/281291/ 로 들어가시면 돼요. 하늘은 맑다. 어김없이 신선한 미풍이 동쪽에서부터 불어온다. 눈부신 하늘을 우러르며 브루스는 옥수수들이 촘촘히 자라난 들판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브루스를 감싸고 1초씩, 1초씩 느긋하게 기울어가는 세상은 싱그러워서 스읍 하고 숨을 마시면 허파가 파랗게 물들 것만 같았다. 탄력 있는 식물의 잎사귀를 조심히 손바닥에 담아보았다. 근처에 설치된 스프링클러에서 포르르 물줄기가 뿜어졌다. 나란하게 자리한 식물의 잎맥을 따라 물방울이 도르르 굴러서 브루스의 손목을 타고 내려갔다. 브루스가 이 조용한 농장에 머물게 된지 두 달하고 며칠이 되어가고 있다. 처음 브루스가 보았을 적에는.. 더보기
[숲뱃] 취(醉)하다 쏴아아, 김 서린 물줄기가 잘 뻗은 등선을 따라 피부 위의 자잘한 요철을 훑고 지났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 아래 선 브루스는 잠시 멍한 머리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몸 위를 굴러가는 물방울의 사소한 마찰에마저 살가죽 아래서 예민하게 피어오르는 간지러움에 눈을 떴다. 찡그린 눈매로 내려다 본 몸에는 흡입에 의한 울혈과 가벼운 잇자국이 몸 위에 선로를 남기듯 자리했다. 유독 괴롭힘을 당한 유륜 주위가 따끔거려서 브루스는 차마 그 지리한 통증을 어찌해보지도 못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중에도 제 뒤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산뜻하며 또 말끔하다는 점을 상기하니 마음이 참 그랬다. 정도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매너가 있는 건지, 혈기가 앞서는지. 브루스는 까닭도 모르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더보기
05/05 숲뱃전력 '어린이' “브루스!” 하고 외치며 커다란 보자기를 망토처럼 둘러맨 클락이 의기양양하게 브루스 앞에 섰다. 클락이 저에게 잠시 있어보라 한 동안 나무에 등을 기대고 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던 브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끝없이 푸르른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바람이 클락이 두른 천과 그의 머리카락을 하늘하늘 스쳐 지났다. 브루스가 스몰빌에 도착한 아침때서부터 클락은 무어엔가 들떠서는 얼굴을 발갛게 빛내고 있었다. 파란 바다가 안에서 반짝반짝 생기가 도는 클락의 눈동자를 보던 브루스는 읽던 책의 표지를 덮어 나무 밑동에 두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제 엉덩이에 붙은 마른 풀과 흙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브루스의 주변을 왔다갔다 서성이던 클락은 브루스가 성에 찰 만큼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낮은 언덕을 성급.. 더보기
04/02 숲뱃전력 '결박' 한 층, 한 층 계단을 오르는 클락의 발걸음은 조심스럽다.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굳어진 움직임이었다. 다만 오늘은 살짝 그 걸음걸이가 늘어지듯 무거웠다. 클락은 침까지 튀기며 켄트를 부르짖던 편집장의 걸걸한 음성을 떠올리며 드물게 인상을 썼다. 푸욱 하고 한숨이 절로 났다. 그래도 이제 몇 걸음 더 가면 집이다. 클락은 반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클락이 딛고 선 계단의 수는 점점 많아졌지만 위를 향할수록 오히려 클락의 발걸음은 보다 가뿐해졌다. 집은 좋다. 집은 아늑하다. 집은 쉼터이고 안식처이다. 그리고 집에는. 잘각 잘각. 서둘러 꺼낸 열쇠로 현관문을 열면 아침에 클락이 기억하기로-이것은 꽤나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꺼두었을 형광등이 환했다. 새하얀 빛을 얼굴에 한가득 받으며 피곤으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