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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뱃] 당신은 여기에 있다 저스티스 리그 애니 hereafter 편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날조와 캐붕은 제 전공이자 특기예요. 눈 아픈 섬광이 망막을 지르고 들어왔을 때 남자는 말릴 새도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라 어떤 감정이 제 이름을 밝히기 전에 기다란 사고의 공백이 찾아들었다. 빛과 함께 남자를 포함한 사물이 송두리째 사라진 공간에서 남자의 붉은 망토 끝자락만이 간신히 남아 속없이 팔랑이며 땅 위로 떨어졌다. 텅 빈 관은 그 안에 많은 이들의 상실과 슬픔을 대신 채우고 사라진 남자를 기리며 안장되었다. 온 세계가 비통에 잠긴 슈퍼맨의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배트맨은 공식적으로 그의 추모식에도, 이어지는 행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림자 너머로 그 광경을 짤막하게 바라본 뒤 미련 없이 돌아선 것이 전부였다. 시신.. 더보기
[숲뱃] 떠돌이 별 1 행성의 대기를 그으며 별똥별이 떨어진다. 대륙들 중 밤이 찾아온 면에 착륙한 우주선을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렇게 남자는 조용히 지구를 찾아온다. 그리고 처음부터 없었던 양 사라질 것이다. 오랜 시간 남자가 살아온 곳에서 점잖은 코트와 흔해빠진 양복, 촌스러운 안경 뒤에 잘 다듬어진 육신을 감춘 남자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세상은 남자에게 멋대로 죽음을 부여했고 그것이 그나마 영예로운 길이었다 평가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원색의 독재자만이 낙인처럼 남았고 남자는 저를 부를 이름을 잃었다. 소중한 장난감을 다루듯 남자의 손아래서 완벽을 꿈꾸던 세계가 자유를 찾고 제 색깔로 형형색색 빛이 났다. 남자는 그것을 퍽 순순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짧은 고개 인사로 남자를 잊은 세계에 작별을 고한.. 더보기
[울새뱃, 알피뱃] 브루스 웨인에 관하여 울새가 살아있을 적의 dceu입니다. 울새는 익명으로 처리했습니다. 일단 딕과 슨이를 염두에 두었는데, 슨이에 조금 더 비중을 두었습니다...만 약속된 캐붕입니다. 뼈대가 시원스러운 손이 은빛 포크를 쥐고 능숙하게 파스타 면을 돌돌 감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사소하고 정교한 동작, 작은 근육들이 섬세하게 빚어낼 남자의 아기자기한 행동을 길게 관찰하고 싶었다. 남자를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를 만나고 도련님이란 낯간지럽기 짝이 없는 호칭에 점점 안면이 정착될 무렵에 아이의 세계는 브루스 웨인이란 아름다움의 시작이자 절대적인 기준을 얻게 된다. 후미진 골목에서 공갈을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섬뜩한 날붙이를 꺼내들어 목숨을 위협하는 일 따위야 숱하게 벌어지는 이 도시에서 그것들은 그리 신기할 것 없는 폭.. 더보기
[숲뱃] 떠돌이 별 외전2 떠돌이 별 이후 + 외전1 이전의 이야기 입니다. 브루스는 도서관 열람실 내에 볕이 포근한 자리에 앉아 펜대를 돌리고 있었다. 교양교과 시간에 과제로 받은 ‘레드선 시대가 가능했던 이유’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 중이던 브루스는 한참 도서관의 책상마다 자료 검색을 위해 비치된 컴퓨터의 터치스크린을 훑다가 내리 쬔 햇빛 속에서 떠다니는 먼지들을 하나하나 펜 끝으로 건들었다. 주제 자체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레드선 시대, 여기 지구가 소련을 주축으로 체제를 편성했을 적의 이야기는 크게 든 작게 든 브루스를 싱숭생숭하게 했다. 그건 브루스가 이 먼 역사의 유물이자 상흔과 같은 인물로 인해 어린 시절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 그에게 브루스가 꽤나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거진 8년을 바라보는.. 더보기
[알피뱃] 종이 울리기까지 DCEU 집사는 신중하게 손끝에 힘을 실었다.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목은 쉽사리 기도가 좁아지지 않아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알프레드는 힘줄이 튀어나온 제 손등을 보다 눈동자를 굴려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브루스는 그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얀 이가 싱그럽지만 공기의 드나듦은 멈춰있다. 두근두근. 손가락 아래서 따듯한 맥이 깊숙이 흐른다. 브루스는 아직 종을 놓지 않은 채 침대 위로 고요하게 주먹 쥔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슬슬 손이 아픕니다만." 그런 투덜거림을 덧붙이며 퉁명하게 불안을 토로했던 적도 있었더랬다. 알프레드는 그저 기다린다. 손끝에 고인 힘마저 풀어버리고 죽음 직전에서 주인은 종을 울리며 자신의 집사를 부를 것이다. 그나마 브루스를 이렇게.. 더보기
[딕브루] 눈에 눈이 박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숲은 차가웠다. 한 겹, 한 겹 눈이 아이의 주변을 온통 하얗게 덮었다. 몰아치는 바람이 귀 옆을 지나갔다. 겨울은 씨앗과 같단다. 꽁꽁 싸맨 몸으로도 춥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를 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부모님이 해준 말이었다. 부모님을 삼켜버린 매서운 땅에도 새순이 돋을까? 더 단단한 봄이 찾아올까? 아이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싹이 트는 소리를 상상한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긴 어둠이 남았다. 눈꽃이 소복하게 피어난 마른 가지들 너머에 얼음에서 돋아났다는 성이 있다. 주인보다도 나이가 많고, 그가 눈을 감은 뒤에도 숲의 고목으로써 제자리를 지킬 과묵한 구조물이었다. 살결을 벨 듯한 바람이 사시사철로 성의 주변을 에워싸고 성벽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투명하게 얼어서 조각조각 부서진.. 더보기
사랑과 용기가 없어도 버스의 철봉을 꼭 쥔 채 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삑-, 이번 정류소는-… 누군가 안내방송보다 빠르게 버저를 눌렀다. 힐끔 눈을 들어 어두운 창밖을 보니 정이 내려야하는 곳이다. 정은 가방을 고쳐 메며 뒷문으로 향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걸음걸이는 폭이 좁고 신중해진다. 얼마 후, 덜커덩 소리를 내며 지친 듯 달리던 버스가 멈추고 문을 열어 사람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정은 그 기세에 거의 휩쓸리듯 뱉어져 나온다. 누군가가 정의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다. 버스는 금방 저 만치로 떠나버린다. 눅눅한 밤공기를 마시다 폐가 뜨거워서 어제도, 그제도 내쉬었던 한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땀띠가 나려는 뒷목이 따갑다. 정이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걸었다. 말끔하게 포장된 신기할 것 없는 땅바닥을 보며 걸으면 지구가.. 더보기
Separation anxiety Nell의 동명의 노래에서 시작된 글 민우가 막 자신의 방이 있는 층에 다다랐을 때의 일이었다. 한 방의 현관문이 급히 열리며 소란스런 언성이 터져 나왔다. “—못 참아! 이제 끝내!” “제발, 부탁이야! 가지마!” “지긋지긋하다고! 이거 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쩡하니 뱉어져 나온 실랑이 속에는 섬세한 얼굴을 한 남자와 어여쁜 생김새의 한 여자가 있었다. 둘은 어느 동화 삽화에 그려졌을 듯한 미모였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영 아니었다. 여자는 분으로 얼굴이 새빨개져서 자신을 끈질기게 붙잡으려드는 남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가지마라와 놓아 달라는 싸움이 이어지다 기어코 여자는 남자를 떼어놓았다. 매몰차게 남자에게서 벗어난 여자는 신고 온 구두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한 손에 쥔 채 계단.. 더보기
[숲뱃] 롱할로윈 (1/6) 어둑한 숲은 강물의 냄새가 짙게 밴 안개로 덮여있다. 풀벌레들조차 제 울음소리를 삼가는 숲은 달이 나오지 않은 밤의 장막 속에서 적막하다. 클락이 마른 잎과 떨어진 나뭇가지를 파스락파스락 밟을 때마다 걸음걸음이 유독 도드라졌다. 클락이 강을 건너 고담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저문 지 한참은 지난 때였다. 클락은 머릿속에서 길을 떠올리며 도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나루터에 있는 단 하나뿐인 여인숙의 입구 앞 의자에 삐딱하니 앉아있는 용병과 입씨름을 하던 주인이 클락을 불러 세웠다. 들어와 보라는 그의 손짓에 따라 클락은 길도 확인할 겸 여인숙으로 들어섰다. 잠시 바닥에 짐을 내려놓은 클락은 제 주머니 안에 구겨져 있던 지도를 꾸물꾸물 펴고 어둑하게 밝힌 실내 촛불 아래서 그것을 짚으며 주인에게 제가.. 더보기
[숲뱃] 떠돌이 별 (9/9) 레드선 이후의 숲과 크라임신디케이트가 있는 지구의 어린 브루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둘이 만난다면의 이야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들) 1/9 http://sowhat42.tistory.com/33 2/9 http://sowhat42.tistory.com/39 3/9 http://sowhat42.tistory.com/42 4/9 http://sowhat42.tistory.com/44 5/9 http://sowhat42.tistory.com/49 6/9 http://sowhat42.tistory.com/51 7/9 http://sowhat42.tistory.com/53 8/9 http://sowhat42.tistory.com/55 웡웡, 막 와인 반잔을 비우고 침실로 향하던 로이스는 거실쯤에서 행크가 짖는 소리를.. 더보기